(제 17 회)

 

제 5 장

 

3

 

1929년 10월 31일 한글날에 훈민정음 반포 483돐 기념식이 수표동회관(교육협회 회관)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이해의 한글날기념식에는 조선어관계자들뿐아니라 서울과 지방의 각계 인사들도 많이 모였다. 시내 각 사립학교 교장들을 비롯한 교육계인사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의 대표적인 언론인들, 그밖에 문단과 종교계의 대표들이 수많이 참석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조선어연구회 역원들의 부단한 노력이 깃들어있음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 보람으로 한글날을 앞두고 각 신문들이 국문관계의 글을 싣고 철자법통일을 위하여 조선어연구회가 기울인 노력을 소개하고 훈민정음창제의 의의를 대대적으로 소개하여 사회 각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것도 무시할수 없는것이였다.

사이또총독이 3. 1운동후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조선사람들에게 집회를 허가한다고 했지만 크고작은 집회는 일일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회의에는 의례히 제복경찰이 나와서 립회하는것이였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말만 해도 《주의!》하고 왜가리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이것은 자유로운 발언에 대한 제동장치와 같은것이였다.

그날도 종로경찰서의 고등계에서 제복경관이 나와 지정된 경관석에 버티고앉아있었다. 이 신성한 모임에 그 혹같은 존재를 사람들은 아랑곳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은 불쾌감과 구속감이 없을수 없었다.

이 기념식에서 특기할 사실은 각계 인사 108명이 발기인으로 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한것이다. 회장으로는 리우식이 추천되였고 위원으로는 리극로, 리중건, 리윤재, 신명균, 최현배(ㄱ, ㄴ, ㄷ순, 이후에도 같음)가 뽑혔고 실무진은 리극로가 책임지게 되였다.

그날 기념식에서 발표한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의 한 대목은 이렇다.

《…금일 세계적으로 락오된 조선민족의 갱생할 첩로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것이다.…

본디 사전의 직분이 중대하니만큼 이의 편찬사업도 그리 용이하지 못하다. …본회는 인물을 전민족적으로 망라하고 과거선배의 업적을 계승하며 혹은 동인의 사업을 인계도 하여 엄정한 과학적방법으로 언어와 문자를 통일하여서 민족적으로 권위있는 사전을 편성하기로 기약하는바인즉 모름지기 강호(현실을 피하여 시골에 가서 생활하는 곳)의 동지들은 민족적백년대계에 협조함이 있기를 바라는바이다.》

기념식이 파한 후 리윤재와 리극로는 종로를 향하여 수표동 뒤거리를 걸어가고있었다. 류다른 흥분으로 가슴이 설레는 가을밤이였다. 잎이 지는 가로수를 흔드는 소슬바람도, 캄캄한 하늘의 뭇별도 다정하게 속삭이는것 같았다. 남의 땅 같은 거리의 살풍경도 오늘따라 유정해보였다.

근래 실의와 좌절의 고배만을 마셔온 리윤재는 오늘처럼 자기 일의 보람을 느껴본 일은 없었다. 이제는 딛고 일어설 기틀이 생긴것이다. 사전편찬이라는 필생의 대업이 비로소 사회의 각광을 받아 떠오르게 된것이다. 이것만 해도 그의 숙원은 일단 이루어진셈이다. 이제는 이 일을 맡은 사람들의 완강한 의지와 노력만이 요구될뿐이다.

리극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문이 래일 아침 각 신문 조간에 일제히 나갈겁니다. 동시에 사설 또는 특집기사로 대서특필하여 사전편찬에 대한 사회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사회 각계 지명인사 108명이 발기인으로 되였다는것이 어디 간단한 문제입니까. 여느 사회단체의 결성에서는 파벌관계로 이런 일은 도저히 생각도 할수 없습니다.》

《그건 그런데 아직도 내게 근심되는건 역시 재정문제요. 아직 우리에게는 편찬회가 들어앉을 방 한칸도, 종이 한장 살 돈도 없지 않아요.》

《좀 운동해보겠습니다. 이번에 내가 사전편찬회 회장으로 추천한 리우식씨는 나와 같은 고향사람인데 의령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갑부지요. 그자신이 한때 독립운동에도 참가했던 뜻있는 사람이니 사전편찬에 돈을 댈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사전편찬회 회장을 거저 할수야 없지 않습니까.》하고 리극로가 능청스레 웃었다.

《사전편찬실무는 한동안 내가 맡겠으니 리박사는 시급한 그 문제부터 풀어보는게 어떨가요?》

둘은 팔판동으로 오르는 언덕받이를 사전편찬에 착수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사전을 편찬하는 그 오랜 기간, 아니 거의 일생을 이렇게 골목길같은 캄캄한 길을 함께 걸어갔던것이다.

 

조간신문 1면을 훑어보고있던 리윤재에게 《다나까내각 총사직》이란 굵직굵직한 활자로 찍은 표제가 눈에 띄였다. 기사의 간단한 내용을 보더라도 그 리유인즉 일본관동군의 모략에 의한 장작림폭살사건으로 일본정부가 궁지에 빠졌고 더구나 장작림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장학량이 동북3성 보안총사령으로 앉자마자 청천백일기를 내걸고 일본에 대한 로골적인 반항을 시도하여 만주사태가 심히 악화되여 수습할 길이 없어졌다는것과 그해 10월에 뉴욕의 주가가 폭락된것을 계기로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에 휩쓸려 일본경제의 불경기를 타개할 길이 없다는것이였다.

일본정계의 어수선한 꼬락서니가 한눈에 안겨왔다. 그 여파가 식민지조선에 어떻게 미칠것인가 하는것을 리윤재는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경제공황에 허덕이는 일본이 대륙침략과 병참기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리라는것은 불보다도 환했다. 사이또총독과 미즈노정무총감이 20년대부터 날조한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조선쌀생산량이 해마다 늘어나고 일본에 대량 실어가던것이 이제는 일본의 경제불황으로 그것을 제한하게 되여 조선쌀의 과잉으로 쌀값이 나날이 폭락되여 농민이 생계를 유지할수 없게 되였다. 절량농가가 늘어나고 리농현상이 불어나 농촌이 피페해가는 반면에 도시에는 실업자들이 날로 늘어나고있었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풍년기근이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동아일보》에는 이 사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령남에 기근! 쌀밥이 없소, 조밥을 먹어라. 조밥이 없소, 풀뿌리를 먹어라. 풀뿌리도 없소, 그러면 바람을 먹어라… 라고는 못할테지?》

《야마나시총독도 명줄이 다 됐군. 그런 시라소니도 왜놈의 종자라고 이 땅의 왕자로 군림하더니.》 하고 리윤재가 중얼거렸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야마나시는 다나까가 총재로 있는 여당 정우회와 밀접한 선을 가지고있어 이 무능한 예비역 륙군대장을 다나까가 적극 떠밀어 1927년에 조선총독으로 임명되게 했던것이다. 그때 이미 그들 둘사이에는 어떤 밀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야마나시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 미쯔이, 미쯔비시, 스미도모, 노구찌재벌들과 흥정을 벌리고 조선의 공업시설개척이란 미명하에 그들에게 온갖 리권을 주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긁어내여 저도 먹고 다나까에게도 제공했다. 그 돈이 부전강과 장진호의 수력발전시설을 설치하고 흥남질소비료공장을 세우는데 조선로동자의 피로 얼룩진 돈이라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야마나시는 돈을 안해보다도 훈장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배금(돈만을 제일로 알고 돈만을 숭배하는것)장군》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이 행동한것이다.

그러나 다나까내각이 무너지자 야마나시는 존재가치가 없어졌고 재임 2년도 채 못 채우고 총독에서 해임되였다. 그는 귀국하자 조선총독재직시의 의혹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하게 되여 총독이란자의 구린 밑을 드러내놓았다.

야마나시가 치적이 없는 2년동안에 해놓은것이 또 하나 있다. 남의 나라 궁성인 경복궁에 세운 총독부청사뒤에 호화로운 총독관저를 새로 세운것이다. 원래 이곳은 세종조때부터 궁궐의 후원이였던 곳인데 여기에 있는 기존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총독관저를 지었으니 이것이 청와대이다.

야마나시의 후임으로는 사이또가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하세가와의 《무단통치가 3. 1인민봉기로 파국에 이르자 그것을 수습하겠다고 《문화통치》를 들고왔던 사이또가 이번에는 야마나시가 죽을 쑤어놓은 흑막정치를 바로잡는다고 다시 나타난것이다.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는 미나미 지로가 임명되였다.

사이또는 소위 《문화통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피묻은 손에 흰 장갑을 끼고 나타났지만 실은 그처럼 조선사람의 저항을 세게 받은 총독도 없다. 그가 10년전인 1919년 가을에 부임하던 날 남대문역에서 강우규렬사의 폭탄세례부터 받았고 1925년에는 마루야마경무국장과 함께 서북지방을 순시하다가 압록강근처에서 독립단의 기관총사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그가 부임한지 석달만에 3. 1인민봉기를 방불케 하는 광주학생사건이 터진것이다.

무릇 큰 사건이라고 하여 그 발단이 다 큰것은 아니다. 반년동안이나 전국을 진감한 광주학생사건도 발단은 큰것이 아니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라주사이의 렬차안에서 광주녀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이 왜놈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한테서 심한 조롱과 모욕을 당했다. 이것이 동족간의 관계라면 말다툼정도로 끝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녀학생에 대한 왜놈종자의 조롱과 모욕은 민족적멸시에서 나온것이니 조선학생들의 격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억압하는 민족과 짓눌린 민족이 어울릴수는 없는것이다. 교원까지 가담한 광주중학교 왜놈학생들의 광주고보 학생에 대한 집단적폭행, 경찰의 조선학생에 대한 편파적인 탄압, 왜놈어용신문인 《광주일보》의 민족배타적인 여론조성, 이러한것이 사건을 날로 격화시켰다.

농업학교, 사범학교를 비롯한 광주시내 각 학교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광주고보 학생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강력한 반일가두시위를 벌리였다. 격노한 학생들은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고 돌진했다. 이 대중적인 반일시위는 3. 1인민봉기가 있은지 꼭 10년만이였다. 10년동안 짓눌려 죽은듯 하던 조선학생들이 죽지도 않았고 왜놈의 칼부림앞에서 기가 꺾이지도 않았다는것을 당당히 시위했다. 11월 6일까지만 해도 70여명의 학생이 체포되였고 광주고보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렸다.

광주학생들이 지핀 반일투쟁의 불길은 온 나라에 퍼져 전국각지의 194개 학교의 6만여명의 학생들과 각계층의 인민들이 이 투쟁에 참가했다.

광주학생들이 지펴올린 반일투쟁과 그들이 떨친 불요불굴의 기개는 리윤재로 하여금 10년전인 3. 1인민봉기때로 되돌아가게 한듯 했다. 그는 각 학교 교단에 서기만 하면 조선어를 강의하는것이 아니라 30대청년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을 때처럼 민족배타적이고 비인간적인 섬오랑캐들을 규탄하는 격렬한 말을 쏟아놓는것이였다.

그러나 전국에 퍼져가던 광주학생들의 함성이 먼산의 메아리처럼 서서히 꺼져가자 리윤재의 마음은 서글퍼졌다.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 1인민봉기도 왜적의 잔인무도한 칼부림으로 짓눌리우고 지도자로 자처한 사람들의 비겁한 투항으로 응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6. 10만세시위도 통일적인 지도가 없었던것이 가장 큰 결함이였다. 이번 광주학생사건에서도 이 격렬한 투쟁을 전국적인 범위에서 통일적으로 이끌어간 인물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수한 희생만 내고 그저 끝나겠는가!

무릇 모든 투쟁에서는 그것을 시종일관 이끌어갈 지도력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다. 있다해도 파쟁으로 유일한 지도자가 나올수 없다.

리윤재는 이 나라의 어두운 정치현실을 실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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