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5 장

 

1

 

리윤재의 성미가 곧은박이처럼 고지식하다는것은 그의 친지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어떤 때는 우직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자기가 남에게 신의를 지키듯이 남도 의례히 자기에게 신의를 지키리라고 순진하게 믿고있었다. 그래서 신의없는 사람에게서 속는 일이 더러 있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남을 잘 믿는 점에서도 그는 우직하다 할만 했다.

우직한 사람이 아니고는 받아올수 있는 담보도, 주겠다는 사전약속도 없는 조선어사전원고때문에 상해에 갔다올 생각도 못했을것이다. 상해가 하루이틀에 갔다올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또 상해라면 명색뿐이긴 하지만 림시정부가 있는 곳이니 요시찰인물로서 상해에 가는것이 경찰당국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리라는것은 뻔했지만 그는 그런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적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어를 지키기 위하여 그것을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아놓기라도 해야 되겠다는 절박한 시대적요구를 자기뿐아니라 누구나 특히 과거에 광문회에서 사전편찬에 관계했던 김두봉이 절실히 느끼고 조선어연구회의 의도에 동조하리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김두봉은 광문회의 조선어사전원고를 손질하여 자기의 저서로 만들려는 야심을 보였고 그것을 미끼로 자기의 궁한 처지를 타개하려는 의사를 보였다.

리윤재는 김두봉의 사람됨됨이에 실망을 했고 그의 저급한 정신상태에 환멸을 느꼈지만 김두봉이 사전원고완성을 위하여 요구한 생활비 이백원을 구하려고 귀국후 사방을 뛰여다녔다.

호떡 한개 사먹을 오전짜리 백통전 한잎 호주머니에 없어 점심을 건느군 하는 그가 남을 위하여 이백원이란 큰 돈을 구하지 못해 애쓰는것을 보고 신명균이 어이없어 말했다.

《환산, 그건 공연한짓이요. 그런 사람은 하는 일없이 이백원을 먹어치우고는 또 입을 벌릴텐데 환산이 무슨 힘으로 그 아가리를 채워주겠나요. 그리고 그 큰 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요.》

리윤재는 도리여 놀랍다는듯 말했다.

《사람이 신의상 어찌 그럴수야 있겠어요. 우리가 좀 무리를 하더라도 이백원을 구해서 보내주어 그가 안착해서 사전원고를 손질하여 보내주면 조선어사전편찬이 그만큼 촉진될게 아니요.》

《그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요. 상해에까지 찾아간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그가 이백원에 자기의 야심을 버리겠나요.》

《이건 이백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리와 시대적사명에 관한 문제요. 량심있는 지식인이 어떻게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시대적요구를 외면할수 있겠나요. 그 원고를 개인의 저서로 만드는 한이 있어도 사전은 나와야 하오.》

《그래 이를테면 최남선이 지성이 모자라서 자기를 속이고 민족을 배반하고 원쑤의 품에 기여들어갔단 말이요? 지식은 인간을 장성시키는 보약으로도 되지만 약자나 야심가에게는 그것이 무서운 병균으로도 되오.》

리윤재는 자기가 실속없는 말을 한것을 곧 뉘우쳤고 또 이렇게 공담이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신선생, 내 간곡히 부탁합시다. 선생과 중앙인서관의 리중건씨는 자별한 사이가 아니요. 선생이 그분에게 말해서 나에게 이백원만 취하게 해줄수 없겠어요? 뜻있는분이니 우리의 이 딱한 사정을 리해해줄수 있을것 같은데.》

신명균은 생각이 외곬이고 세상을 너무도 모르는 리윤재를 어이없는듯 이윽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리 그가 뜻은 좋아도 인쇄업을 구차하게 경영하는 기업인이요. 그도 기업손실로 <한글>잡지의 인쇄비부담을 더는 할수 없게 되여 우리의 <한글>잡지가 부득이 휴간하지 않을수 없게 되지 않았나요. 조선의 구차한 기업인, 거지같은 잡지발행인의 신세가 이래요.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또 손을 내민단 말이요.》

그래도 리윤재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니, 한번 더 손을 내밀어봅시다. 나는 내 개인문제라면 누구한테 돈 한푼 구걸할 생각이 없지만 사전편찬을 위해서라면 체면도 무릅쓰고 어떤 치욕도 감수할 생각이요. 한번 같이 가보기라도 합시다.》

신명균은 끝내 리윤재의 고집과 진심에 손을 들고말았다. 둘은 안국동의 중앙인서관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낡은 활판인쇄기의 떨거덕거리는 소음이 끊길 사이없는 우중충한 복도를 지나 그전에 한번 와본 일이 있는 방에 들어가니 마침 리중건이 나와서 인쇄주문자와 거래를 하고있었다. 그는 둘을 보고 눈으로 반색을 했으나 주문자와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손님이 구식철자법을 고집하는 까닭을 모르겠군요.》

《전책을 새 철자법으로 찍으면 아낙네들이 어떻게 읽겠어요.》

《정 그렇다면 다른 인쇄소에 가보시오.》하고 리중건이 분연히 일어섰다. 주문자가 나가자 리중건이 신명균앞에 교정지뭉치를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군. <조선문학전집>의 첫 교정지요.》

신명균은 교정지를 펼치더니 노력의 결과가 활자로 찍혀나온것이 무척 반가운듯 희색을 띠고 열중하여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리중건이 리윤재를 돌아보고 말했다.

《리선생은 드문 걸음을 하셨군. 어떻게 오셨는가요?》

리윤재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리윤재는 오늘 우리 말 사전편찬의 절박성과 그 애로를 말하고 그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서 광문회때의 《말모이》원고를 찾으려고 상해에까지 갔다온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김두봉에게 이백원만 보내면 그 원고를 확실히 보내올수 있을가요?》하고 리중건이 한참만에 물었다.

《우리가 약속을 지켰는데도 거기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상해에 다시 가서라도 기어이 찾아오겠습니다.》

신명균이 교정지를 보고있던 눈을 들어 리윤재를 일별했다. 그러나 잠자코 다시 눈을 교정지에 떨구었다. 옹색한 자리에서 말참견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상해에 다시 가겠단 말이지요.》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리중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서서 밖에 나갔다가 이윽고 돌아와서 지전뭉치를 리윤재앞에 놓으며 말했다.

《이왕 드릴바하고는 긴말이 필요없지요. 우리 말 사전편찬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랄뿐입니다.》

리중건의 씨원씨원한 거동에 리윤재가 도리여 놀랐고 신명균도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았다.

리윤재가 책상우에 있는 펜을 들어 차용증을 써서 리중건에게 주니 그는 그것을 피끗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선생이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선생의 재산을 차압하라고 이런걸 줍니까, 원.》하고 그 종이장을 도로 내밀었다.

그제서야 신명균이 무안한듯 낯을 붉히며 말했다.

《그 이백원을 우리 연구회 장부에 빛으로 기장해놓겠습니다.》

《그럼 그 빚에 <한글>잡지 인쇄비의 빚까지 다 합쳐서 가져오시오. 원, 고리타분한 학자님들 같으니!》하고 리중건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런 량심적인 인사들의 물심량면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맨주먹뿐인 조선어연구회는 어느 한가지 일도 해가기 어려웠을것이다. 사실 조선어연구회와 그 후신인 조선어학회가 존속한 전 기간에 민족적량심을 가진 자산가들과 인사들의 뜨거운 지원속에서 모든 사업이 이어졌던것이다.

그리하여 리윤재는 상해의 김두봉에게 이백원을 송금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돈을 받았다는 회답 하나 없었고 《말모이》원고정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기별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에 《동아일보》 특파기자인 그의 동생이 상해에서 귀국할 때 한마디 전달하기를 현재 무엇보다 시급한것은 철자법의 통일이니 이에 국내학자들이 힘써주기를 바란다는 훈시비슷한 소리를 했을뿐이다. 이번에도 사전원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신의에 대한 배신이였다. 웬간해서는 화를 내는 일이 없는 리윤재였지만 김두봉의 너절하고 치사한 사리사욕과 파렴치한 행위에 대하여 그는 치를 떨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원천리행을 했던 그의 신의에 대한 소박한 관념은 물거품인양 사라지고말았다. 인간의 신의에 대한 그의 신조에 크지는 않으나 메꿀수 없는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그는 상해에 다시 가려던 결심을 실행할수도 없었다. 그해 8월 28일에 그는 또다시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였던것이다. 처음에 그는 상해에 갔던 문제로 체포되였는가 해서 다소 불안을 느꼈는데 구류되고보니 자기만이 아니라 사회의 지명인사들이 수많이 잡혀왔던것이다. 이름있는 지식인, 독립운동경력을 가진 사람 등 총독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약 3천명이나 전국적으로 잡아들인 예비검속이였다. 9월 1일은 간또대지진때 조선사람을 무차별학살한 날이고 게다가 총독부가 생겨 소위 정치를 시작한 날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무슨 소요가 일어날가봐 총독부 경무국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벌린 예비검속이였다. 한 보름이면 풀려나갈줄 알았는데 리윤재는 상해에 갔던 문제로 림정과의 관계를 조사받느라고 한달을 더 류치장에 묶여있었다. 그래서 상해에 다시 갈수는 없었고 사전편찬은 거론만 된채 아무런 전진도 없었다. 류치장에 갇혀있을 때나 놓여났을 때나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한 배신감과 사업에서의 좌절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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