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4 장

 

6

 

중국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상해는 지극히 번화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해보이고 8월이니 록음도 우거져 매우 평화스러워보였다. 그러나 그 겉보기의 질서와 평화의 보자기를 한꺼풀 벗겨보면 거기에는 살인, 강도를 비롯한 이 세상에 있을수 있는 온갖 범죄가 도사리고있고 각 나라의 첩보망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고 한다.

19세기 40년대의 아편전쟁이후 상해는 중국에 대한 유미렬강의 침략의 근거지로 되였으며 탐욕과 투기의 목적으로 물밀듯이 쓸어든 서방 《모험가의 락원》으로 되였던것이다.

상해는 팽창할만큼 많은 인구를 끌어안고있으면서도 산업시설은 이렇다 할만 한것이 없으니 완전한 소비도시이다. 그래서 성냥까지 서양에서 사다가 쓰다나니 그것의 이름조차 《양화》라고 부른다는것이다.

상해림시정부는 프랑스조계지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령사관경찰의 마수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림시정부청사에 간판은 여전히 붙어있지만 크지도 않은 집안이 휑뎅그렁했다.

림시정부는 결성초기부터 파쟁에 의한 리합집산을 거듭해왔다. 국무총리로, 그후에는 림시대통령으로 피선될 때부터 말썽이 많던 리승만은 선거받은 후에도 미국에 앉아서 림시대통령의 이름만 팔아먹다가 1920년 12월에야 규탄에 못이겨 상해에 왔지만 곧 국무총리 리동휘와 격렬한 의견대립으로 혼란만 야기시켰다. 리동휘는 리승만의 미국위임통치주장을 반대하고 완전독립을 주장했던것이다. 이때 베이징의 군사통일촉성회(신채호), 만주의 액목현회의(김동삼), 정구단(원세훈) 등이 리승만의 미국위임통치주장을 신랄히 성토하여 성명을 냈다. 그러자 리승만은 이듬해 5월에 미국으로 가버리고말았다. 그후 1925년까지 로백린, 김구, 홍진, 리동녕이 림시정부를 유지해갔고 그해 3월에 림시의정원에서 리승만면직안이 통과되고 같은 날 박은식을 림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은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월보》 등에서 주필을 력임했고 3. 1인민봉기후 을라지보스또크와 만주에 망명하여 애국로인단을 조직했으며 상해에서 《한국공보》 주필을 했다. 국사연구에서 3재의 하나로 일컬으는 력사가로서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독립운동렬사》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저서에서 유교를 신랄히 비판했는데 유교는 국가적견지에서 보면 좀벌레와 같고 백성의 견지에서 보면 집게벌레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기울어진 림정을 바로세울수 없는 그는 탄핵을 받아서 물러나고 같은 해 7월에 림시헌장을 개정하여 림시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치고 남만의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의 독판이였던 리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이때는 이미 먹을알이 없는 국무령을 하자는 사람이 없었고 국무원에 들어가자는 사람도 없었다. 그가 이듬해 2월에 사임하자 량기탁을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가 거절하였으므로 같은 해 7월에는 홍진이 국무령으로 선출되였고 그도 곧 물러나서 12월에 김구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여 빈 집을 지키고있었다.

리윤재는 원래 상해림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상해에 온 이상 들리지 않을수 없었고 떠날 날을 앞두고 국무령 김구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가지 않을수 없었다. 김구는 왜적의 소굴로 다시 돌아가야 할 리윤재를 저녁식사에 청하였다. 그래서 그는 저녁녘에 국무령실을 다시 찾아가게 되였다.

김구는 마침 군인같아 보이는 젊은이와 담화를 하고있었다. 리윤재는 좀 떨어진 장의자에 앉아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김구는 젊은이가 준듯 한 문건을 읽다가 어이없는듯 말했다.

《편지에는 사과한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군. 그렇다면 뭣하러 먼길에 사과차로 자네를 보냈는가. 코대높은 리웅이도 외교를 할줄 아는가.》

심하게 노기를 띤 목소리는 아니였다.

리웅은 정의부의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이였다. 그 당시 길림에서 남만의 정의부, 압록강연안일대의 참의부, 북만의 신민부의 대표들이 모여 3부통합을 위한 회의가 벌어지고있었다. 이것을 지도하려고 상해림시정부 요인이 수원들을 거느리고왔는데 그는 3부통합보다 의연금모금에 급급해하던 나머지 리웅과 크게 충돌했다. 이 대수롭지 않은 개인간의 언쟁이 림정과 정의부사이의 관계문제로 번질수 있었다. 또한 이것이 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3부통합에 지장을 줄수도 있었다. 이 점을 우려한 국민부 외교위원장 최동오가 리웅을 설복하여 사태수습차로 림정에 사람을 하나 파견하게 되였던것이다.

김구는 리웅의 사과따위는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다는듯이 편지를 책상가로 훌 밀어놓으며 젊은이에게 물었다.

《자네는 리웅이밑에서 무슨 일을 보는가?》

젊은이가 앉음새를 바로하고 대답했다.

《저는 리웅사령의 부관을 하고있습니다.》

《관등급은?》

《부령 (중좌)입니다. 》

《그럼 독립군의 밥을 상당히 먹었겠구먼.》

《신흥무관학교를 마치고 홍범도장군휘하에서 봉오동전투부터 참가했습니다.》

《그다음은?》

《청산리전투에서는 중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럼 흑하사변도 겪었겠구먼.》

《예.》하고 젊은이는 단마디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흑하사변을 겪었다는것은 독립군으로서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가 하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흑하사변으로 피에 물든 흑룡강을 다시 건너 젊은이는 흩어진 중대를 수습하고 보충해가지고 왜군의 끈질긴 포위망을 뚫으며 만주의 한끝에서 한끝까지 수천리 장정의 길을 걸었다는것이다.

김구는 의지의 덩어리같은 젊은이의 야무진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독립군으로서 백전로장인셈이군. 독립군의 현황에 대한 자네의 솔직한 소견을 말해보게.》

젊은이는 잠시 주저하는듯 하더니 결심한듯 말했다.

《지금같이 나가다가는 독립군의 전도는 암담할것 같습니다. 통일적인 지휘체계없이 군소독립군들이 제각기 활동하다가는 왜군 대병력에 의해서 언제나 각개격파당할수 있습니다. 2년전에 참의부 최석순중대의 전멸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우리의 절실한 과제는 군사적인 통합입니다. 그런데 독립군은 각파로 갈라지고 일제에 대한 군사적제압과 조국의 광복이라는 대명제를 떠나 파벌의 도구로 화하고있습니다. 저는 정의부에 소속된 후 향방없는 방황을 계속해왔습니다. 림시정부가 군사적통일을 성취한다면 그 권위는 스스로 높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미숙한 사람이 함부로 의견을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머리를 수굿하고 듣고있던 김구가 안경안에서 번쩍이는 눈으로 젊은이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아니야, 자네 말이 옳아. 우리도 그건 알고있지만 안되는게 그거야. 아무튼 솔직한 말을 해주어 고맙네.》

그리고 그는 조끼의 시계주머니에서 아이의 주먹만 한 회중시계를 꺼내여보더니 일어섰다.

《최군, 저녁식사나 한끼 함께 하세. 동포의 집에 부탁해놓았으니 함께 가세.》

그리고 리윤재를 돌아보며 말했다.

《환산, 알고지내시지. 이 군은 최기봉부령이요.》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최기봉은 두손을 쳐들고 앞으로 나섰고 리윤재는 그 손을 꽉 쥐였다.

《선생님!》

《최군!》

리윤재는 눈이 둥그래서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20대의 야들야들 하던 얼굴이 이미 륜곽이 뚜렷한 의지적인 얼굴로 굳어져있었다. 특히 관골에서 입귀로 쭉 뻗은 깊은 주름살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의 간고했던 지난날을 말해주는것 같다.

감격적인 상봉에 김구도 마음이 흐뭇한듯 말했다.

《세상은 넓고도 좁군. 멀리 서로 헤여졌다가도 이렇게 만나다니. 그래 어떻게 되는 사인가?》

《조국에서 공부할 때 저의 은사였습니다.》하고 최기봉이 대답했다.

《그러니 얼마만에 만났는가?》

《3. 1운동때 헤여졌으니 8년만입니다.》

《자, 그럼 그동안의 회포를 풀러 가보세.》

그리하여 그들은 조용한 집을 나서서 번화한 저녁거리를 걸어갔다. 김신부로를 지나가다가 김구는 한 양옥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집에서 1919년 4월에 제1차 의정원회의가 열렸고 림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였네. 그런데 그때의 주요인물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그의 말은 해가 기울어 퇴색해가는 이국의 저녁거리만큼이나 쓸쓸하게 울렸다. 림정의 이름만이라도 지키려고 안깐힘을 쓰고있는 김구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는것이였다.

그들이 찾아간 동포는 장사를 잘하여 끼니걱정을 모르고 살며 림정사람들과 독립운동자들에게 큰 도움은 못 주어도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는데는 린색하지 않은 사람이였다.

셋이 자리를 잡고 앉자 상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야기도 활기를 띠였다.

김구는 젊은 나이에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고 벌써 로련한 티가 나는 최기봉의 얼굴을 애무하듯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최군, 자네가 독립군을 한이래 거의 10년동안 왜놈을 몇두름이나 잡아치웠는가?》

《저의 중대가 북만, 남만, 국경연선에서 잡아죽인 왜적을 두름으로 엮어놓으면 몇두름 잘됩니다.》

김구는 호탕하게 웃다가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장래없는 독립군의 조락이란 말이지. 그게 다 우리의 잘못이야.》

그리고 시름겹게 술잔을 들었다. 리윤재는 원래 술을 안하고 최기봉은 례절상 들지 않으니 김구가 혼자서 잔을 들수밖에 없었다. 독한 술을 두어잔 들더니 그는 얼마간 흥분했다.

《환산은 왜놈이 칼을 벼리고있는 고국으로 떠나야 하지, 최군은 똑똑한 지도자가 없는 독립군에서 향방없는 방황을 해야 하지, 나는 이미 찌그러진 림정의 대들보나 떠받들고있어야 하지, 마치 다리부러진 노루가 한곬에 모인 꼴이군.》

김구의 얼굴에 한순간 떠올랐던 호탕한 웃음은 이미 사라지고 고랑같은 주름살이 가득히 패이였다.

그가 시름겹게 말했다.

《허지만 내가 대들보를 떠받들고있는지, 서까래를 붙들고 매달려있는지 모르지. 지금 림정은 재정난으로 이름을 유지하기도 막연한 형편이요. 정청(림정청사)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군의 월급이 20원미만인데 이것도 댈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서 여러번 송사를 겪었소. 나는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를 하는 동포의 집을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있소. 이거야말로 거지중에서도 상거지신세지. 림정은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로 된것과 한가지요. 이러다간 강냉이가루빵 한개로 끼니를 에울 날도 멀지 않을것 같소.》

《망국민인 조선사람이 어디 있은들 편안할수가 있습니까. 국내에 있는 우리도 사정은 한가지입니다. 조선어연구회라는 학술단체를 뭇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냈지만 돈이 없어 아흡달만에 정간했고 왜적의 민족말살정책이 날로 우심해가는 조건에서 조선어사전이라도 엮어놓자고 시도했지만 역시 돈사정으로 중단되고말았습니다. 이번 저의 상해걸음은 어떻게 하든 사전편찬을 재개해보자는 모대김에 불과합니다.》

《안됐소. 우리 림정의 형편이 이 꼴이니 국내에서 왜적의 탄압을 받으며 조선어를 지키겠다고 안깐힘을 쓰는 학자들의 노력에 다소의 후원도 못해주었구려.》

김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 솥뚜껑만 한 손을 꽉 쥐여 상우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김구가 쓰러지지 않는 한 림정은 꺼꾸러지지 않소. 내가 죽어도 림정의 간판만은 베고 죽겠소. 왜놈의 침략으로 대륙의 정세가 날로 험악해지는데 이건 우리에게 유리하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도 대일전에 참가하겠소. 여보게 최군, 현황에 너무 실망하지 말게. 우리의 지상목표는 조국광복이야. 물고뜯어서라도 이건 성취해야지.》

그리고 그는 주인한테 말해놓았으니 둘이서 오늘 밤 이 집에서 묵으며 회포를 나누라고 이르고 자리를 떴다.

김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여운이 한동안 방안에 감도는듯 둘은 한참동안 묵묵히 앉아있었다. 조락해가는 독립군과 운명을 같이해가는 최기봉의 처지를 생각하는 리윤재의 마음은 저물어가는 저녁하늘처럼 무겁기만 했다.

최기봉이 입을 꾹 다물고있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올해 서른살입니다. 옛말에 서른살이면 제발로 일어설 나이라고 했는데 저는 지금 딛고 일어설 땅도 없고 일어선대야 지향할데도 없습니다. 나라를 찾자고 독립군을 따라다닌 8년간이 이제 와서 보면 하나의 방황이였습니다. 독립군의 지도자들은 파쟁으로 싸움의 방향을 잃었고 휘하독립군은 구심점없이 헤매고있습니다. 지금 만주땅에서 3부가 군웅할거하듯 대립하여 군자금을 걷어들이는데도 지경이 생겼고 각 파간에 서로 승벽내기입니다. 독립군을 먹여살리고 무장을 갖추자면 방대한 군자금이 드는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것이 만주에 이주해온 우리 농민의 빈약한 호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렴주구도 례사로이 하니 어느덧 독립군이 백성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되여가고있습니다. 근본적인 목적에서 떠난 이런 독립군에 대하여 저는 회의의 눈으로 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지금 독립군에는 절박한 군자금문제와 군사적통일문제를 해결할만 한 지도자가 없습니다. 내노라 하는분들이지만 너무도 고루하고 게다가 파쟁에 눈이 어두워져 독립군을 본연의 목적에로 이끌어가지 못하고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낡은 세대의 희생물이 되여 이렇게 목적지향성없이 방황할 바에야 차라리 군복을 벗어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보다 보람있는 일을 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을 의지할데가 없어지니 고향 그리운 생각이 부쩍 더 납니다.》

리윤재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있었다. 이 적라라한 토로에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최기봉이 8년동안 자신의 젊음도 피도 아끼지 않고 쌓아올린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리라고 할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석양길에 들어선 독립군과 운명을 같이하라고 할수도 없다. 그의 번민은 단순한 향수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낡고 부패한것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것이다. 그래서 새로운것에 대한 지향으로 모대기는것이다. 그러나 리윤재는 그에게 새 지향을 똑똑히 말해줄수가 없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리윤재가 비로소 말했다.

《나는 최군에게 귀국하라고 권고할수가 없소. 국내의 형편은 말이 아니요. 사이또의 <문화통치>란 곧 민족동화정책이니 민족정신의 말살이 그네들의 기본목표요. 왜놈들의 이 장단에 일부 지식인이 춤을 추고있소. 그야말로 부패타락의 막바지요. 민족정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왜적의 정신적, 육체적고문을 이겨내야 하오. 조선학자들이 제 나라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것도 범죄시되여 살얼음우를 걷듯 하오. 이런 정황에서 민족의 얼을 지키며 남도 그렇게 가르치는것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요. 우리야 어차피 그 길로 나아가기마련이지만 일단 무장을 들었던 최군이 무엇때문에 그런 십자가를 지겠소.》

《그래서 저도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습니다.》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가는것도 왜경의 감시가 심해서 어려울거요. 그렇지만 만일 결심하고 귀국하겠다면 내 한가지 방도는 대줄수 있소. 서울근교에 화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 주지가 나의 죽마고우요. 김해보통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일이 있고 그후 그는 배재학당에까지 다녔는데 끝내 중이 되고말았소.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도 중이였다더군. 지금은 그 절의 주지를 하고있는데 이름은 정관모이고 불명은 청악이요. 깨끗한 민족주의자이고 지식인이니 잘 이야기하면 리해하고 절에 받아줄거요. 이렇게 경력을 한번 구불리면 왜경의 감시의 눈을 피할수 있고 그후 필요할 때 환속하면 그만이요.》

《선생님,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그러나 될수 있으면 여기서 설자리를 마련해보오. 국내에서의 우리 어문운동도 어렵기 그지없소. 이렇다 할만 한 일도 못하면서 고생만 하지. 다 왜놈의 탄압때문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어사전편찬때문에 상해에 오셨다던데 그 일은 성사가 됐습니까?》

《아니요. 우리가 사전의 어휘수집부터 새로 시작하자니 너무 품과 시간이 많이 걸려 김두봉이 상해에 올 때 가지고온 <말모이> 원고를 찾아가려고 왔던거요. <말모이>란 1910년경에 주시경씨와 몇분이 착수했다가 끝내지 못한 사전원고요. 그런데 김두봉은 그 원고를 자기가 완성하겠으니 내놓지 못하겠다는거요. 그대신 그 일에 전심할수 있도록 생활비로 이백원만 보내달라더군.》

이 말에 최기봉이 도리여 분개했다.

《그 원고 하나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머나먼 길을 오셨는데 제것도 아닌 원고를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 그가 무슨 량심있는 학자입니까. 호구책도 없이 과객노릇이나 하며 림정에서 한자리 얻어볼가 해서 끼웃거리는 그 량반이 어느 하가에 사전을 손질한단 말입니까. 입으로는 애국애족을 부르짖으면서 실지 행동에서는 딴판인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다 한결같겠소.》 하고 대범하게 말하는 리윤재의 어조에도 실망과 노여움이 어려있었다.

《왜놈이 조선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하든 우리 말을 정리하여 사전에 모아라도 둬야 하겠소. 말이 있고서야 민족도 있는것이니 이것은 민족의 생사존망에 관한 문제요. 그런데 우리에겐 사전을 만들 돈도 없고 시간도 모자라오. 그래도 우리는 만난을 무릅쓰고 이 일만은 해놔야 하오.》

최기봉은 제 나라말을 지키려는 리윤재의 뜨거운 마음과 자기희생정신이 가슴에 찡하고 울려왔다.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 리윤재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흔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된다. 학문도 자신의 명리에 복종시키는 야심많은 김두봉과 같은 사람은 흔히 똑똑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인간의 진가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최기봉은 생각했다.

밤이 깊었다. 둘이 자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으나 이윽토록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 우연한 상봉으로 다시 인연을 맺은 그들은 옛정을 되살리고 서로의 전도를 생각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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