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4 장
3
6월에 서울은 초여름의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커다란 슬픔과 분격을 안고 무엇인지 기대하며 불안해하고있었다. 이미 4월부터 어느 하루도 사건이 없이 무사한 날이 없었다. 지난해에 창건된 공산당은 순종의 장례날을 계기로 전국적인 반일시위를 벌릴 준비를 비밀리에 추진시켰고 《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과의 련계도 가지였다. 그러나 《지도위원회》안에서 파벌싸움이 벌어지고 그것을 빌미로 그 조직이 일제에게 알려져 《지도위원회》가 총검거되였다. 그리하여 로동자들과 학생들에 대한 통일적인 조직과 지도는 어렵게 되였지만 서울시내의 각 고보(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들, 성대 예과학생들이 만세시위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하고있었다. 천도교공회당에서 인쇄로동자들과 학생들이 준비한 격문 5만장이 든 궤짝이 경찰에게 적발되여 압수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쇄로동자들과 학생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수만장의 격문이 시내 각 학교와 지방 각지에 은밀히 배포되고있었다. 6월 10일 장례날이 무사치 못하리라는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해졌다.
총독부는 일본륙군성에 5 000명의 병력증파를 요청했고 장례날의 치안유지를 조선주둔군사령관 모리오까대장에게 책임지웠다. 모리오까는 평양련대, 함흥련대, 라남사단에서 2 500명의 병력을 서울에 끌어들이였다. 해군성은 만일에 대비하여 제2함대소속 전함 6척을 파견하여 부산항과 인천항에 정박시켰다.
장례날이 다가올수록 서울시내에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이는듯 했고 도처에서 사람잡이가 시작되였다. 6월 7일에 각 학교 교원들과 학생들이 수다히 검거되였다. 요시찰인물 300여명이 예비검속되였다. 리윤재는 그날 오후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로상에서 검거되여 도경찰부로 련행되였다.
저녁마다 어김없이 집에 돌아오던 리윤재가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아 저녁상을 차려놓은채 뜬눈으로 밤을 밝힌 가족들은 이튿날도 하루종일 영문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못해 온 집안이 초상집처럼 되여버렸다. 어머니 김해댁은 협성학교에도 찾아가보고 생각이 짚이는 곳을 두루 찾아다녀보았으나 아무 보람도 없었다. 애간장을 말리는 사흘이 지났다.
6월 10일 이른아침 식사를 하는둥마는둥한 김해댁은 반닫이를 열고 깊이 건사했던 베옷을 꺼냈다. 령감이 세상떠났을 때 해입은 후 쓸모없이 쑤셔박아두었던것이다. 베옷을 주섬주섬 입고 머리에 베천을 띠는것을 보자 금옥이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어머니, 베옷은 왜 입어요?》
《오늘이 상감님의 장례날이다. 네 오래비가 집에 있었다면 이날을 그냥 보내겠느냐. 나라도 대신 나가봐야지.》
무겁게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비장하게 들렸다.
《어머니, 망곡이야 남정들이나 하는거지 어머니가 그런데 뭣하러 비쳐요. 남이 웃어요.》
《남이 안한다고 내가 해서 안될 법이 어디 있느냐. 나는 왜놈들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골라가며 하겠다.》하고 김해댁은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마당에 있던 며느리 정씨는 방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지라 시어머니를 구태여 만류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 나가시더라도 부디 조심하세요. 왜놈들이 어디 남녀로소를 가린대요. 집안에 우환이 있는데 어머니까지 이러시니…》하고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었다.
《걱정말아. 하지만 애아범이 당할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다 당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김해댁은 허우대 큰 몸을 성난 수닭처럼 꼿꼿이 펴고 활개짓을 하며 대문을 나섰다.
김해댁은 먼길을 걷다나니 돈화문까지 미처 가닿지 못하고 종로 3정목 단성사앞에서 대여를 맞이하게 되였다. 량쪽연도에는 립추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소복한 사람들로 온 거리가 눈이 내린듯 새하얗다.
대여가 돈화문쪽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그것이 엄숙하고 위엄있어 보였으나 사실은 삼엄하다고 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순종의 령구가 일본군의 철통같은 《호위》경계밑에 호송되고 있었기때문이다. 장의행렬의 맨앞에는 일본군 기마대가 량쪽보도를 따라나가며 시민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위압하고있다. 그뒤에 좀 떨어져서 조선주둔군사령부의 의장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며 나아가고 대여 량쪽에는 일본군병정들이 집총을 하고 4~5보의 간격으로 늘어서서 가고있다. 대여의 앞뒤에서는 각각 100명씩의 대여군이 바줄을 어깨에 지고 대여밑에서도 그만 한 인원이 떠받들고있다. 집채만 한 대여의 꼭대기에는 검은 조기가 드리워있고 그밑에는 순종의 사진이 걸려있다. 대여의 뒤에서는 례복차림의 일본고관들과 관리들이 줄줄이 서서 따라간다.
연도의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곡을 하기 시작했다. 곡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김해댁은 곡을 하니 일생에 맺힌 설음이 끓어오르고 그 설음으로 눈물을 뿌리며 목놓아울었다.
대여가 단성사옆의 청료리집 동양루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한 학생이 연도에서 대여앞으로 달려나가며 격문을 뿌리고 웨쳤다.
《만세, 조선독립 만세!》
그 용감한 학생의 뒤를 따라 한무리의 학생들이 역시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소리높이 웨쳤다. 먼저 뛰여나갔던 학생이 왜놈의 병정에게 잡히여 총박죽으로 머리를 맞고 피를 질질 흘리며 끌려가면서도 굴함없이 웨쳤다.
《조선민족이여! 우리의 철천지원쑤는 제국주의 일본이다. 동포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자. 만세,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
조선사람이 어떤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왜적의 야수적본성과 소위 《문화통치》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겨버린 전군중적인 6.10만세시위투쟁은 이렇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해댁은 정신이 펄쩍 들었다.
(우리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왜놈들에게 잡혀 피흘리며 끌려가는데 땅바닥에 엎드려 곡만 하다니!)
이제는 곡하는것이 역겨워졌다. 김해댁은 옆에 엎드린 갓쓴 사나이의 어깨를 잡아 정신없이 흔들며 소리쳤다.
《만세를 불러요. 우리 아이들이 잡혀가는게 보이지 않아요? 자, 만세, 만세!》
《아니 왜 이러슈!》하고 갓쓴 사나이가 눈을 희번뜩거린다.
김해댁은 그깐 갓쟁이는 팽개치고 벌떡 일어서서 목이 터져라고 웨쳤다.
《조선독립 만세, 만세, 만세!》
김해댁은 마치 실성한 사람같았다. 사실 그는 군중의 앞장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피흘리며 잡혀가는 학생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무맥한 갓쟁이들에 대한 분격으로 가슴이 뒤틀리는것 같았다.
대여가 관수교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사태가 확연히 달라졌다. 군중의 가슴에 불이 달린것이다. 학생들과 군중이 뒤섞여 만세를 불렀고 달려드는 왜놈군대와 대혼전이 벌어졌다. 장사동에 이르렀을 때에는 왜놈군경과의 충돌이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김해댁은 목이 콱 쉬였다. 그래도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것이 소리가 되건 안되건 상관없었다.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내면 그만이였다.
만세시위를 이미 진압할수 없게 된 왜놈들은 드디여 발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피를 쏟으며 꼬꾸라졌다.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면서도 만세소리는 꺼지지 않았고 혼잡은 한층 더했다. 김해댁은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 않았다. 악에 받쳤던것이다. 그는 혼잡한 사람들속에 섞여 훈련원까지 갔다.
소요와 혼잡은 훈련원에서 거행된 로제(제사)때에야 비로소 일단 가라앉았다. 대여가 움직일 청량리쪽의 길에는 이미 2중3중으로 경계가 보강되여있었다.
김해댁은 로제를 올리는 동안 잠간 쉬고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만세운동이 이렇게 끝나고마는가 하는 비감도 들었다.
김해댁은 한숨을 쉬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수강 매만진 다음 일어서서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나무때기처럼 꽛꽛했다.
요새 김해댁은 무엇을 해도 꼭 마음 한구석이 비여있는듯 했다. 자식들 근심에 아물줄 모르는 그 마음의 상처가 요즘 더욱 풍 뚫려 생살을 드러내고있는듯 했다. 아들의 실종은 어머니의 마음을 지지리 괴롭혔다. 어디로 갔을가? 왜 소식이 없을가? 이번 만세시위에 관계하다가 경찰에 잡혀간것이나 아닐가? 그렇다면 3. 1운동때와 같은 사태가 또 벌어지는것이 아닌가? 이 각박한 서울바닥에서 의지가지없는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김해댁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김해댁은 지쳐서 수굿하고있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길게 치째진 눈에도, 량귀가 처질사 한 두툼한 입술에도 현실에 도전하는듯 한 빛이 력력히 어리였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는 맥을 놓으면 쓰러지기마련이다. 쓰러지면 쓰러진자가 지는것이고 바보일뿐이다. 사람이 못살 왜놈의 세상에서 살아가는것도 싸움이다. 어떻게 하든 살아가야 한다. 김해댁은 금옥을 데리고 방물장사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다.
김해댁이 후줄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며느리와 금옥은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기라도 한듯 환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김해댁은 목이 콱 잠겨 거의 말도 못하고 자리에 눕고말았다.
리윤재는 6. 10만세운동이 있은 후 얼마 안있어 도경찰부에서 놓여나왔다. 어슬어슬한 저녁 도경찰부 옆문을 나서자 길 건너편에 시커먼 하늘을 떠이고 우뚝 솟은 총독부의 우람한 건물이 우선 그의 눈에 띄였다. 왜적이 조선을 식민지로 거머쥔 후 경복궁안의 2백여칸의 궁궐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일떠세운 이 육중한 건물은 경복궁을 틀어막고 그 앞뜰에 위압하듯 서있다.
보기만 해도 분격이 치미는 이 복마전을 쏘아보던 그는 문득 나라가 해방된 후 저 큰 건물을 폭파하려면 폭약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허황한 생각인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직성이 풀리는것이다.
그는 무거운 다리를 끌다싶이 하며 광화문네거리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류생활로 몸이 쇠약해진데다가 몹시 허기졌던것이다. 불빛밝고 소란한 큰길을 가면서도 그는 무인지경을 가듯 마음이 호젓했다.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애상짙은 류행가가 그의 신경을 빡빡 긁는것 같다. 그러나 워낙 신경이 든든한 그는 애상에 잠기는것이 아니라 자기가 놓인 현실을 똑바로 보는것이다.
그는 자기가 3. 1운동에 관계하여 감옥살이를 한것과 중국에 갔던것으로 하여 왜놈의 권력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한 일생을 요시찰 인물로 살아가야 한다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안전도, 생활의 안정도 담보될수 없다는것을 의미한다. 요시찰인물에 대한 일본관헌과 경찰의 박해는 용의주도하다. 김해와 마산에서도, 오산에서도, 이제는 서울에서도 학무당국은 그에게 교원임명을 거부했다. 그러니 어디 가서도 림시로 시간강의나 하는것이 고작이였다. 먹고살려거든 일본놈앞에 머리를 숙이라는것이다. 친지들도 흔히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남들이 살아가는대로 무난히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리윤재는 아무리 해도 그런 령리한 처세가가 될수 없었다. 왜놈의 하는짓,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그에게 고문처럼 느껴진다. 일본의 력사는 위조로 시작되고 정치는 거짓말로 일관한다. 《만세일계》라는 력사가 그러하고 《황국》이라는 정치체제가 그러하다. 이러한 요술로 백성을 속이고 롱락하자니 기만과 허례허식이 왜놈들의 생존방식으로 되고있다. 왜놈들의 신궁이 그 대표적인것이라 하겠다. 서울 남산에도 왜놈의 귀신을 제사한다는 신궁이라는것을 굉장히 꾸려놓고 2년전에는 진좌제를 요란히 벌리였다. 허례허식으로, 미신으로, 우상숭배로 백성을 길들이려 한다. 《만세일계》의 왜왕이 있는 《황국》이기때문에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왜왕을 위하여 목숨을 《서슴없이》 던지는 《황군》이기때문에 그 위력이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왜왕의 마술로, 세계제일이라는 요술로 백성을 몽매화한다. 이것이 일본의 정치이다. 이 땅을 조선사람의 피로 잠그고도 조선사람을 왜왕의 《적자》라고, 《일시동인》이요, 《내선일체》요 하고 민족을 말살하려 한다. 이것이 왜놈의 식민지정책이다.
그는 시커먼 길에다 대고 침을 탁 뱉았다. 입이 말라서 침이 아니라 퉤소리가 나갔을뿐이다. 그런데 허기가 지나쳐 그런지 그는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다가 갑자기 왈칵 토했다. 토하고보니 그것은 시커먼 피였다. 토혈을 한것이다. 평양감옥에서 나온 후부터 토혈하는 증상이 생겼다. 건강이 좋지 않을 때 흔히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구류살이의 괴로움이 토혈로 나타난것이다. 피를 한사발이나 토하고나니 현훈증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려 땅바닥에 주저앉고말았다. 농부처럼 견딜힘이 많은 몸을 타고난 그는 자기 병에도 등한하여 잘 아는 의원에게 한번 진찰을 받은 후 이렇다 할 치료도 하지 않았다. 토혈할 때에는 먹을 갈아 마시는것이 좋다는 의원의 권고대로 그렇게 하는것이 고작이였다. 학문이외의 모든것에 대한 그의 이런 등한성은 그의 성품과도 관계되지만 보다는 가난한 생활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의지와 인내력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묵묵히 이겨내는데 버릇되였던것이다.
한참후에 그는 가로수밑의 흙을 손으로 긁어모아 피를 대수강 덮고 일어섰다. 머리가 핑 돌아 그는 비칠거리며 가로수에 기대여섰다.
《한잔 잘했군.》하고 행인이 하나 지나가며 시까슬렀다. 남보기에는 꼭 술취한 사람같았다. 실지로 그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칠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입가에도 두루마기앞섶에도 손에도 피칠을 하고 집에 들어서는 남편을 보고 안해는 대경실색을 했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놀랄것 없소. 오다가 토혈을 좀 했을뿐이요.》하고 리윤재가 안해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정씨의 한번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저이가 아무리 괴로와도 그렇다는 말 한번 한 일이 있는가 하는것이 남편에 대한 정씨의 굳어진 생각이였다.
《어머니는 주무시오?》
《어머니는 방물장사하러 떠나시고 시누이는 또 안잠자기자리를 구해서 나갔어요. 당신이 이렇게 돌아오실줄 알았더면 말리기라도 할걸.》하고 안해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였다. 우는 얼굴이 피기 하나 없고 부석부석하다. 그 사이에 또 가정이 흩어졌다. 어지간해서 애로희락을 나타내는 일이 없는 리윤재도 길게 한숨을 쉬지 않을수 없었다.
리윤재는 이튿날 하루를 쉰 후 또다시 협성학교에 나갔고 그의 평범한 생활이 계속되였다.
그러나 세월은 평범하지 않았고 그해와 년말은 특기할만 한 사건들로 세인을 놀라게 했다.
11월 4일(음력 9월 29일) 밤에 조선어연구회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고 잡지사, 신문사가 주최자가 되여 남대문통 식도원에서 언론, 교육, 문화의 각계인사 400여명이 모여 훈민정음반포 8회갑(480주년)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 기념식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첫일이였다. 모임에서는 해마다 이날에 기념식을 가지기로 결정하고 이날을 《가갸날》이라고 이름지었다. (후에 《한글날》이라고 고침.) 이날에 즈음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지들에서는 일제히 기념사설을 싣고 우리 글자의 우월성을 소개하고 한자페지를 주장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이날부터 우리 글자에 대한 어학자들의 연구론문도 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11월 6일 밤에는 중앙그리스도교청년회관에서 성대한 기념강연회도 가지게 되였고 《조선일보》는 그뒤에 《한글란》을 설정하고 조선어연구회의 신철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서울의 기념식을 계기로 각 지방에서도 기념식 혹은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조선어연구회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습회도 열게 되였다.
리윤재는 기념식이 있은 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와서 자고있던 딸들을 한사코 깨워 오는 도중에 사온 깨엿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벙글써 웃었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눈이 올롱해서 바라보던 둘째딸 근화는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듯 부엌에서 상을 챙기고있던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떠들어대였다.
《아버지가 웃는다, 아버지가 웃는다!》
정씨도 무슨 일인가 해서 얼른 상을 차려들고 방에 들어가보니 남편이 막내딸 영애를 천정높이 버쩍 쳐들고 빙글빙글 돌며 웃고있었다. 좀 철이 든 맏딸 순경이는 워낙 어려워하던 아버지의 처음 보는 모습에 어리둥절해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의아쩍게 바라보고있었다.
정씨는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웬일이세요. 래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는게 아니요?》
《오늘이 내 생일이요. 한글의 생일이니 내 생일이지.》
《그래요? 당신에게도 이렇게 기뻐할 날이 있었구려.》
남편의 괴로움과 슬픔을 속속들이 아는 다정다감한 정씨의 웃는 눈가에는 눈물이 함초롬히 고이였다.
그해따라 한해를 장식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세말에 련달아 일어났다.
6. 10만세반일시위투쟁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였던 200여명의 학생들가운데서
그런데 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는 학무국장에게 엄하게 지시했다.
《이번 만세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은 물론 동맹휴학을 꾀한자들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출학시킴으로써 그들의 장래를 매장해야 한다.》
유아사는 야마모도내각때 도꾜경시총감을 하면서 간또대지진때의 조선인대학살을 진두지휘한자인데 의렬단원 김지섭이 왜왕을 향하여 궁성에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도꾜경시총감자리에서 쫓겨난자이다. 조선사람이라면 이를 가는 이놈에 의하여 수백명의 학생들이 출학처분을 받게 되였다.
그후 12월 25일 일본 대정 왜왕이 기관지염으로 죽고 히로히또가 왜왕이 되여 소화년대가 시작된지 사흘만인 12월 28일 대낮에 한사나이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돌입하여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란사하면서 1층과 2층에서 여러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라석주의 동척폭탄투척사건이다.
동척에 던진 라석주렬사의 폭탄은 왜적의 경제침략에 대한 경종이였고 땅과 집을 빼앗기고 멸망으로 굴러떨어져가는 조선농민들의 원한과 저주의 함성이였다.
평범한듯 한 나날의 밑바닥에서는 잠잘줄 모르는 조선사람의 피가 용암처럼 끓고있었다. 조선사람과 왜놈사이에 풀 길 없는 적대적모순으로 가득찬 다난한 한해가 드디여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