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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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 반짜리 방안에 안해가 시집올 때 해온 주석장식의 이층농과 이불장을 놓고 리윤재의 유일한 소유물인 책장과 문갑을 놓고나니 방의 절반이 줄어들어 잠자리가 매우 옹색했다. 웃목에서는 안해가 막냉이 어린 딸을 끼고 곤드라져 자고있고 그옆에는 다 자란 두 딸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있다. 벌써 딸만 셋이다. 둘까지는 못마땅한대로 입을 다물고있던 시어머니가 세번째까지 며느리가 딸을 낳았을 때에는 《이러다간 대가 끊어지겠다.》하고 내놓고 불감을 표시했다. 며느리는 그 말이 야속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산후에 미역국을 먹는것조차 사양했다. 며느리가 이 집에 시집와서 자식 셋을 낳도록 기를 못 펴고 사는것은 시어머니의 드센 성격과도 관련되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아들 하나 낳아주지 못한 죄책감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윤재는 이런데서도 너무도 대범하여 입 한번 떼는 일이 없었다.

처자가 주런이 누워자는 좁은 방 한구석에 그는 담요 하나를 가까스로 펴고 그우에 책을 하나 가득 펼쳐놓고 강의안이나 원고를 쓰는것이였다. 자리가 없으니 책상은 아예 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니 그는 담요우에 웅크리고 앉아서 글을 쓰기마련이였다. 사람의 버릇이란 생활상 요구에 좇아 얼마든지 변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남이 다 자는 깊은 밤에 유독 일하는것도 생활이 빚어내는것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것도 환경의 소산이다.

손바닥만 한 어간마루 건너 웃방에서는 어머니가 초저녁잠을 자다가 깨였는지 장죽대통으로 놋재털이를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 소리에 누이동생 금옥이도 잠이 깨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금옥은 최재현의 첩의 집에서 안잠자기노릇을 하고있는것을 겨우 알아내여 달포전에 집에 데려온것이다. 재가했다면 모르되 의지가지없는 청상과부의 몸으로 남의 집살이를 하는것을 그대로 내버려둘수는 없었던것이다. 친정에 얹혀사는 기박한 처지때문인지 처녀때와는 달리 설음도 류달리 잘 타고 때로는 변덕도 부려 집안의 공기를 흐려놓군 하는데 그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것은 정씨였다.

《입이 얼겅채 구멍만큼 많아도 말할 구멍은 하나도 없겠다. 뭘 잘했다고 이 밤중에 또 청승을 부리는거냐.》

김해댁의 목소리다.

《온 집안이 날 죽일 년이라고 하니 이거야 어디 서러워 살겠수. 그래, 내가 날 위해서 그랬수? 순사가 오라버니를 당장 잡아가겠다기에 겁이 나서 그랬지.》

금옥이 대꾸한다.

《백줴 죄갈 소리 말아. 오래비가 너를 지청구하더냐? 네 오레미는 업고다녀도 시원치 않겠다. 노상 집안에 말썽을 일으키는건 너지 누구냐. 혼자몸이 된 딸을 둔 에미 마음도 좀 알아야지.》

둘이 어성을 높이더니 말소리가 거의 똑똑히 들린다. 모녀가 저녁에 있었던 일을 곱씹는것이다.

리윤재가 신명균과 헤여져서 이른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천만뜻밖에도 대문기둥에 일본일장기가 걸려있었다. 내 집안에 이런 몰지각한짓을 하는 인간이 있다는 배신감과 분노로 그의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그는 일장기를 와락 잡아 뜯어가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안해가 남편의 험악한 기색과 손에 구겨쥐고있는 일장기를 보고 가슴이 철렁해서 부엌에서 나왔다. 리윤재는 덮어놓고 안해를 준렬히 꾸짖었다. 이렇게까지 격노한 남편을 처음 보는 안해는 가슴이 콩알만 해서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서있었다.

《애매한 사람 욕하지 말아. 내가 잘못했다. 아까 청결검사 왔던 순사가 하도 지랄을 하기에 네가 행패나 당할가봐 겁이 나서 내가 저 귀신같은것을 사다 걸었다. 어찌겠니, 세상이 그런걸.》

(설마 어머니가?!…) 하고 리윤재는 의아쩍은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볼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마당 한구석에 있는 장작패던 모탕(나무를 패거나 물건을 바닥에 쌓을 때 밑에 괴는 나무)에 일장기를 던지고 도끼로 탕탕 찍어서 여러 토막을 내여가지고 부엌아궁이에 쓸어넣었다. 그리고는 더러운것에 손이 어지러워지기나 한듯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것이 그 하찮은 사건이였다. 그런데 그 뒤맛은 써서 이 깊은 밤에 어머니와 금옥사이에 또다시 옥신각신이 벌어진것이다.

금옥이 오라비를 위해서 오라비가 싫어하는 일본기발을 사다가 걸었다는것이다. 왜놈의 치하에서는 조선사람의 생활 구석구석에서 이런 일이 빚어지기마련이다. 아까 리윤재가 일장기를 도끼로 찍을 때 두 딸은 방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유리창으로 내다보고있었다. 그 분노의 폭발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겠는가? 학교에서는 그 애들에게 일장기를 《국기》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일본의 사무라이정신과 국가위력의 상징으로 불어넣고있다. 그런 기발을 아버지가 도끼로 찍었으니 학교에서 가르친대로 하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다. 아버지의 하는짓이 옳다면 학교에서 거짓말을 가르친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머리속에서 이런 혼란이 일어났을것이다. 식민지교육과 그것에 반발하는 가정과의 대결은 아이의 동심을 괴롭히고 어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리윤재는 곤히 잠든 두 딸의 천진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들의 어두운 전도를 생각하고 한숨을 쉬였다. 건너방에서는 그사이에 잠든듯 조용하다.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며칠째 써오는 원고를 펼치고 낮에 길을 가며 생각하던 문구를 떠올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시경의 학설에서 가장 특색있는것은 낱말의 분석과 분류 즉 씨가름이라는것, 그리고 그가 후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높은 권위를 얻게 된것은  혼란된 철자법을 바로잡을 기틀을 마련한데 대하여 서술하였다.

주시경의 혁신적인 학설을 이어받은 학자들이 망국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문운동을 다시 일으켜 국문연구와 당급한 철자법의 정리와 통일에 목소리를 합치고 큰 발걸음을 내디디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걸음마다 가시덤불이다. 나라없는 학자들이기때문이다. 철자법의 정리와 통일은 시급을 요하면서도 칼로 란마를 베듯 되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당위성을 누구나 인정하고있는것이 우리의 힘의 첫째요,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잡고 지키는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한 성업이라는것을 일치하게 인식하고있는것이 우리의 힘의 둘째다.

이 힘으로 우리가 넘지 못할 고개는 없을것이다. 일찌기 간 스승 주시경이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 같지 않은 글을 끝맺으려 한다.

《…금일을 당하여 나라의 이름을 보존하기에 중대한 자국언문을 차요시하고 도외시하면 국력도 쇠약할것이요, 국력이 약해지면 그 영향의 소급이 가측지 못할 지경에 이르며 국세의 회복은 기망도 무할지라 국어와 국문을 강구하여 리정하며 장려함이 금일의 급무라 하노라.》

리윤재가 다 쓰고나니 벽시계가 두점을 쳤다. 어딘지 할말을 다하지 못한듯 하여 마음 한구석이 꺼림직하지만 그래도 산고를 치른 뒤의 후련함과 같은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그는 기지개를 켰다.

건너방에서는 깊이 잠든줄 알았는데 방문소리가 들리고 마루에서 발걸음소리가 나더니 문앞에서 어머니의 조용한 말소리가 들렸다.

《좀 자거라. 그러다가 탈이나 나면 어찌겠니.》

아들이 잠 안 자고 일을 하니 어머니도 불안하여 잠을 설친 모양이다. 자식들을 낳아 어느 한 자식에게서도 락을 본 일이 없고 고루고루 가슴을 허비는 고뇌와 슬픔만을 맛보아온 어머니에게는 그 로령에도 자식은 숨이 질 때까지 지고가야 할 짐이였다.

리윤재도 이 불행한 어머니를 늘그막에 기쁘게 해드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마루에 나가 어머니를 부축하고 건너방앞에 가서 방문을 열고 말했다.

《어머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순종임금님의 장례날이 언제냐?》하고 어머니가 뜻밖에 물었다.

《6월 10일이예요.》

《너는 그런데 참네하지 말아. 내게 다짐하냐?》

아마 어머니는 3.1운동때의 일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리윤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이상 더 어머니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네.》

《너는 어릴적부터 이제껏 내 말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다짐을 두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리윤재는 혼자 마루를 한바퀴 돌며 어머니에게 한 다짐을 지킬수 있겠는가 하고 곰곰히 생각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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