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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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앞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리윤재는 명륜동에서 사이길로 꺾어들어 안국동쪽으로 한적한 길을 걸어가고있었다.

4월 하순이니 창경원의 사꾸라(일본국화인 벗꽃)가 활짝 피여 그 일대가 눈이 내린듯 새하얗다. 사이또총독이 궁성 경내에까지 일본의 상징인 사꾸라를 빈틈없이 심게 하고 《10년후엔 내 문화정책이 꽃으로 피리라.》하고 호언장담한 그 꽃이다. 그 사꾸라가 리윤재에게는 시궁창만큼이나 역겨웠다.

조선봉건국가의 마지막《황제》인 순종이 이달에 사망하여 창덕궁 돈화문앞에는 망곡하는 사람들로 련일 사람사태를 이루고있는데 오늘 4월 29일이 왜왕의 난 날인 천장절이라고 집집에 일본의 일장기를 걸게 하고 《가도마쓰》(솔문)까지 세워 온 거리가 《경축일색》이다. 모순에 찬 패륜의 풍경이다.

기미년에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3. 1만세운동이 일어난데서 질겁을 했던 총독부는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순종의 사망에 대해서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것을 꺼려 망곡시간을 30분으로 제한까지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망곡자의 수효는 불어나 30만 장안사람이 다 모일 기세였다. 사람들은 망국의 설음을 이 망곡으로 터뜨렸고 왜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이를 갈며 울었다.

순종은 망국의 상징이였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왜적에게 내정권까지 다 빼앗긴 나라의 허재비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3년후에는 나라의 허울마저 잃어지자 망국의 황제로서 창덕궁에 갇히여 16년, 고독과 원한으로 한생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고종은 헤그밀사사건으로 왜놈에게 미움을 사서 황제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놈들에 의하여 독살되였다. 그의 어머니 명성황후는 을미년사건때 왜놈악당들에게 무참히 참살당했다. 세자인 그의 동생 리은은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왜왕족 나시모도 마사꼬와 강제결혼을 하게 되는 국치를 당했다. 사랑하는 딸인 열네살짜리 덕혜옹주까지 류학이라는 명색으로 일본에 끌어갔다. 그자신도 왜놈이 음식에 타서 먹인 독약의 후과로 자식을 볼수 없게 되였다.

왜놈의 악착함에는 한정이 없었다. 그래도 나라를 대표하는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이렇게까지 불법무도할수 있을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선 수만군중의 망곡은 바로 이 왜적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토하는것이였다. 리윤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미년 그때처럼 이번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예감도 들었다. 소복한 군중이 벌써 망곡으로 왜적에게 저항을 하고있지 않는가.

북촌(청계천 북쪽의 빈민지대)의 야시는 이미 철시되였고 유기전, 지물전, 포목전, 떡전, 설렁탕집도 문을 닫았다. 종로 2정목 우미관(영화관)의 옥상에서 주야로 불어대던 악대도 숨을 죽였다. 정동 리화학당에서는 수백명의 녀학생들이 아침부터 교문밖에 뛰쳐나가 일제히 망곡을 하여 그 일대가 곡성으로 진동했다. 그러자 경무국은 림시휴교령을 발포했다. 이 사태를 반영하여 4월 28일부 《중앙일보》는 《전시에 미만한 분노의 기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바로 이전에 열혈청년 송학선이 창덕궁 금호문앞에서 사이또총독이 탄 승용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사이또는 요행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세놈에게 중상을 입히고 일본국수회 서울지부장이라는놈을 죽게 했다. 그러자 일본국수회 조선본부 회장 와다나베라는자가 회원 10명에게 장총과 칼, 사꾸라몽둥이를 들려가지고 망곡하는 군중을 헤치고 돈화문을 뚫고들어가 궁중에서 행패를 부리는 불법무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여론이 비등하고 공기가 험악해졌다. 왜적에 대한 저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서히 태동하고있었다.

그가 서울에 와서 자리잡은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그동안 리승훈의 주선으로 협성학교의 교원자리를 얻었고 (물론 서울에서도 학무당국에서는 그가 3.1운동에 관계하여 감옥살이한것을 리유로 교원임명을 승인하지 않았다.) 김해의 집과 가산을 처분한 돈으로 팔판동 막바지의 오막살이 한채를 겨우 전세로 얻어 가족들도 이사시켰다. 그러다나니 여름과 가을이 어떻게 오가는지 몰랐고 변변한 차비도 없이 땅땅 어는 한겨울을 기한에 떨며 허둥거렸다. 그의 서울생활은 집고생으로 시작되였고 생활고로 련속되였다.

서울에 온 그에게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마산에서 창신학교 교원을 할 때부터 국문연구에 투신한 그는 그후 국내외에서 여러해동안 《동명》, 《진생》 등 잡지들과 갓 창간된 신문들에 조선어에 관한 연구론문들을 끊임없이 발표하여 신진학자로서의 그의 이름이 어학자들속에서는 적지 않게 알려져있었으나 직접 만나 낯을 익힌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학계에서도 그는 역시 촌사람이였다. 교제성이 없는 그는 사람들과의 면식을 넓힐줄도 몰랐다.

협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조선어를 강의하게 된 그는 또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였다. 그때는 이미 조선어연구회에서 신철자법을 제정했고 그것이 불완전하게나마 민간언론지들에서 쓰이고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강요한 《조선어급 한문독본》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무시되고 서사규범도 없어진 구식철자법으로 찍혀있었다. 이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옳은 인식을 줄수 없었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 말과 글자를 무시하듯 그는 왜놈의 교과서를 무시하고 신철자법을 강의했으며 우리 밀과 글에 담긴 민족의 넋을 학생들의 가슴에 심어주려고 애썼다. 제정된 과정안을 무시한 이런 수업이 또다시 말썽이 되여 오산학교에서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수 있다는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것을 가르칠수는 없었다. 이 모순에 찬 교단생활은 그에게 국문의 연구와 정리, 바른 민족어의 교육과 보급의 절박성을 더 깊이 깨닫게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도 멀고 험난할것이다. 왜놈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조선어는 쇠퇴의 일로를 걷고있었다. 민족이 망하면 그 말도 글자도 쇠퇴한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그는 국어학의 이 어려운 길에서 보수도 명예도 바라지 않았고 더우기 어떤 업적을 이룩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적의 박해와 자기자신의 희생을 각오했을뿐이다. 이 험난한 길은 가지 않을수 없어 가기로 결심한것이고 그것이 그로서 왜적에게 저항할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기때문에 스스로 택한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민족적량심이였고 그의 됨됨이였다.

겨울부터 입어온 무명두루마기에 중국에서 쓰고 온 빛이 날을사 한 진희색휄트중절모자를 쓰고 마치 땅에 주먹질을 하듯 주먹을 꽉 쥔 두팔을 땅을 향해 곧추 뻗고 앞만 바라보며 휘친휘친 걸어가는 리윤재는 지금 이 소란한 넓은 거리를 마치 혼자 걸어가는듯 했다. 그가 지금 골똘히 생각하는것은 생활문제가 아니고 5월에 창간되는 《동광》잡지에 써주기로 한 글의 구상이였다.

그는 생각했다.

…오늘의 국문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개혁운동을 일으킨 1894년 갑오경장으로 소급하지 않을수 없다.

고종 31년(1894년)에 사대보수세력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김홍집을 수위로 하는 혁신정권은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격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의 자주권을 수호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기 위하여 혁신정권앞에 나선 긴박한 과업은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것이였다. 조선봉건국가 500년간의 관제의 개혁, 문벌 반상의 차별의 타파, 귀천을 불문한 인재등용, 과거법페지, 가혹한 죄인련좌법의 페지,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가허용, 공사노비법의 일체 페지 등 혁신적인 개혁은 나라와 민족을 봉건적인 질곡과 조성된 위기에서 구원하려는 애국정신에서 출발한것이였다. 백성들은 이 개혁을 환호로 맞이했고 온 나라에 민족의식이 차넘쳤다.

국문도 갑오경장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가광을 받게 되였다. 1894년에 력사상 처음으로 공문서에 국문이 채용되여 관보를 국한문체로 박게 되고 그 이듬해 2월에는 고종이 교육립국의 조서를 국한문체로 지어서 내려보냈으며 그해 7월에는 학부 편집국에서 소학교교과서를 국한문으로 편찬출판하였다.

한문의 마술에서 깨기 시작한 사람들의 국문에 대한 연구열이 높아가는 가운데 1897년 1월에는 리봉운이 순 국문으로 저술한 첫 문법책인 《국문정리》가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그 과학리론적가치보다도 우리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여 쓰려는 뜨거운 열의로 하여 매우 귀중한것이였다.

이러한 시대적풍조가 젊은 나이의 주시경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배재학당 재학시절에는 학생들속에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순 국문으로 찍은 《독립신문》에서 일할 때는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국문연구의 동지를 규합했으며 상동청년학원에 나가 국문을 가르치고 국문연구소를 꾸리고 지도했으며 밤에는 야학, 일요일에는 일요강습소를 차려 국문을 바로잡고 사랑하도록 가슴마다에 심어주었다. 국문학자로서의 주시경의 명성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것을 바로 가꾸기 위한 피타는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것이다.

세종조때의 정음청, 언문청이 없어진 후로는 처음으로 1907년 7월에 국가사업으로 학부안에 국문연구소가 설립되고 국문을 연구정리하려는 첫 시도가 벌어졌을 때 주시경은 그 위원으로 뽑혀 연구소의 중심인물이 되였다. 《을사5조약》의 날조로 이미 식민지로 전락된 나라에서 국문연구소의 활동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말았지만 연구소에 낸 주시경의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그후의 강습회에서 한 강의내용과 함께 그의 저서 《국어문전음학》(1908년), 《국어문법》(1910년), 《말의 소리》(1914년)에 담겨 국문연구의 과학적인 방법론을 개척하게 되였다.

1910년에 일제의 강도적인 《한일합병》이 날조되자 주시경은 《나라의 성쇠도 언어의 성쇠에 있고 나라의 존망도 언어의 존망에 있다》고 하면서 일제의 살벌한 무단통치하에서도 국문의 정리와 교육에 있는 힘을 다했다. 서울안의 각 학교의 조선어과목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가르치는데 등사판으로 찍은 교재를 푸른 보에 싸서 끼고다니며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강의를 하므로 《주보따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가 창설한 조선어강습소에서는 그의 강의를 받아 수많은 국문학의 인재가 양성되였다.

우리 국문을 한글이라고 지어 부른이도 주시경이였다. 《하나》와 《크다》의 뜻을 포함한 이 한글이라는 말은 그후 널리 씌여 우리 국문의 고유명사로 되였다. 우리 한글을 천시하여 언문이라고도 불렀고 한문의 반절법과 비슷하다고 하여 반절이라고도 부른것은 잘못이라고 밝힌것도 그였다.

이렇게 민중교육에 바친 그의 학문은 곧 국문운동으로 이어졌으니 여기에 그의 학문의 혁신적의의가 있다.

가난한 가문에서 태여나 일생을 가난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그는 과로와 고생이 원인이 되여 1914년 7월 27일 서른어덟이라는 한창나이에 생애를 끝마쳤다. 비록 짧기는 했지만 그의 일생은 사랑하는 우리 말과 글에 바친 헌신의 나날이였으며 혀와 붓으로 민중을 가르쳐 민족의 얼을 일깨운 투쟁의 걸음걸음이였다.

주시경에게서 강의를 받은 국문학자들이 침체한 서재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1921년 12월 3일에 휘문학교의 한 교실에서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최두선 (중앙학교 교장), 리규방(보성학교 교두), 권덕규(휘문학교 교원), 장지영, 리병기, 리상춘, 신명균(보성학교 교원) 등 십오륙명이 모여 국문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실로 우리 나라의 첫 민간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은 국문운동에서 획기적인 사변이였다.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됨으로써 한동안 침체상태에 빠졌던 국문연구가 활기를 띠였으며 특히 철자법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신철자법제정사업이 본격화되였다. 국어학에서의 이와 같은 획기적인 발전은 주시경을 비롯한 어학자들이 일으킨 국문운동의 결과였다.

리윤재가 산만하게 흩어지는 생각을 한곬으로 모으려고 한길앞 땅만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며 걷는데 누군지 바투 다가서며 껄껄 웃었다.

《리선생, 그러다가 <주보따리>처럼 전보대나 사람에게 부딪치기 십상이군요.》

리윤재가 놀라서 고개를 드니 뜻밖에도 신명균이였다. 두리넙적한 얼굴이 환하게 웃는데 눈에만은 언제나 이상한 열기를 띠고있어 그의 열정과 고뇌가 거기에 숨겨져있는것 같다. 그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통탄하여 국문연구에 투신했고 교원생활을 하면서 조선어학자의 길을 걸어 조선어연구회의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되였고 오늘은 규약에 의하여 1년임기로 되여있는 간사장의 책임을 지고있었다.

리윤재는 남에게 보여서는 안될것을 보인듯이 열적게 웃었다.

《비록 결함일망정 <주보따리>에게 견주어진다는건 무상의 영광이군요.》

《오래간만에 만나 길바닥에 장승처럼 서서 말할수도 없고 어쩐다?》하고 신명균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기 안국동에 중앙인서관(출판사)이 있는데 거기 가서 다리쉼을 하는게 어떨가요?》

《갑시다.》하고 리윤재가 흔연히 동의했다.

둘은 안국동네거리를 건너 천천히 걸어갔다. 중앙인서관은 중앙인쇄소건물안에 부속물처럼 들어있었다. 이 인쇄소도 인서관도 리중건이라는이가 경영하고있었으니 한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신명균은 리중건의 부탁으로 인서관에서 출판일을 주관하고있었다. 활판인쇄기의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끊길 사이 없는 건물안의 한 방에 들어가니 방은 비여있는데 책상우에는 방금 인쇄에 넘길 원고의 정리작업이 있었는지 글쓴 원고지들이 어수선히 널려있었다. 신명균은 《출판사일이란 언제나 이렇게 번잡하다니까.》하고 변명하듯 말하며 책상우를 대강 거두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책상 한귀퉁이에 놓여있는 신문지에 눈이 갔다. 그 1면에 군복차림을 한 왜왕의 사진이 큼직하게 실려있었다.

《에라, 오늘은 네가 내 책상을 좀 닦아줘야겠다.》하고 그는 사진이 실린 신문쪽을 뿍 찢어서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리윤재가 빙그레 웃었다.

《신선생, 왜놈세상에서는 그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불경죄로 3년은 징역살이를 해야 하지요.》

신명균은 웃지도 않고 구겨진 신문쪼각을 펼쳐보더니 눈도 코도 입도 없어진 왜왕의 사진을 다시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됐다. 이젠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있거라. 리선생, 앉으시오.》

둘이 걸상을 끄당겨서 마주앉았다.

《물까지 사먹는 각박한 서울살림살이를 시작했으니 고생이 많겠는데 좀 안정이 되였는가요?》하고 신명균이 말꼭지를 떼였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하는걸 절절히 체험했지요.》하고 리윤재가 빙그레 웃었다.

《가난, 감옥살이, 망명 이런것이 리선생을 우리와 오래 격리시켜놓았군요. 선생이 우리한테 오는 길도 참 다난했군요.》

《그러니 이 나이에 이르도록 초학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지요.》

《원 별말씀을. 22년에 <동명>잡지에 낸 선생의 글을 읽고 나는 선생에 대한 상당한 리해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요.》

어색한 얼굴을 한 리윤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조선어연구회에서 제정한 신철자법은 그 시행이 왜 그리도 지지부진한가요? 이게 우리의 국문운동에서 초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왜정치하에서 힘도 돈도 없는 조선사람이 기도해서 바로되는 일이란 거의 없지요. 신문은 신철자법으로 개조하자 해도 새 활자주조에 막대한 돈이 드니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학교교과서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하는것이니 아직은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요. 애로는 그뿐이 아니지요. 신철자법에 대해서는 연구회안에서도 아직 의견일치를 못 보고 그것을 실행해야 할 언론계인사들조차 각인각설을 내놓고있으니 그 실행은 료원할수밖에 없어요.》

이상한 열기를 띤 신명균의 눈을 찬찬히 쳐다보던 리윤재는 농부와 같은 투박한 얼굴에 보일듯말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신선생은 너무 비관하는게 아닌가요?》

《내가 비관하든 안하든 현실은 엄연하지요.》

《인간이 인간일수 없는 감옥살이와 고립무원한 해외망명생활을 통하여 나는 인간의 의지로써 이겨내지 못할 악조건이란 없다는것을 터득했어요. 다니면 길이 생기고 두드리면 문이 열리는게 또한 인간세상이지요. 우리의 일이란 돈이 없건, 비록 혼자이건 하지 않으면 안되기때문에 하는게 아니겠어요. 나는 비록 부족한 인간이지만 이 하나의 의지와 각오만은 가지고 한글운동에 림할 결심이예요.》

리윤재가 호인이면서도 주대가 실하고 행동거지나 견해가 지극히 평민적인것이 신명균의 마음에 들었다. 책상에 팔굽을 짚고 손으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겨있던 신명균이 불현듯 말했다.

《올해가 훈민정음반포 8회갑이 되는 해지요. 그냥이야 어떻게 보내겠나요. 잡지사, 신민사와 의논해보았는데 훈민정음반포 480주년기념식을 주최해주겠대요. 역시 돈문제지. 각계인사들을 광범히 청해다가 기념식도 성대히 거행하고 3대신문도 훈민정음에 대해서 대서특필하게 하자는거예요.》

《이거야말로 한글운동의 침체를 깨뜨리는 좋은 계기로 되겠군요. 480년동안이나 묻혀있던 평범한 날이 력사적인 날로 되겠군.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요! <문화정치>를 떠드는 사이또가 이 문화행사를 막을 구실이야 못 찾겠지. 재미있는 싸움인걸.》하고 무등 기뻐하는 리윤재의 얼굴에는 아이같은 웃음이 확 피여났다.

신명균은 한번도 그렇게 마음껏 기뻐하거나 시원히 웃는 일이 없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와 역시 가난한 연구회의 무거운 짐이 그를 짓누르고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몇시나 되였을가?》 하고 리윤재는 시계를 더듬는것이 아니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도 신명균도 시계가 없었다. 창에는 한풀 꺾인 오후의 해빛이 누렇게 비껴있었다.

《이야기바람에 애꿎은 점심을 건넜군. 어디 가까운데 가서 설렁탕이라도 한그릇씩 합시다.》하고 리윤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이야기의 뒤맛을 되새기며 안국동네거리를 천천히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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