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3 장
1
그동안 물색해본 교원자리는 김해에서도 마산에서도 아무 기별이 없다. 당국에서 승인을 안하는지, 교장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량반이랬다. 먹지 않고 살아가는 도리가 책에는 씌여있지 않느냐?》
어머니의 어이없어하는 말에 리윤재도 우스개로 굼때려 했다.
《많이 읽어가노라면 그런 리치를 깨칠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너를 두고 동네사람들이 뭐라는줄 아느냐, 백결선생이라더라.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소나기에 절반이나 떠내려가는것도 모르고 책만 보는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리윤재가 껄껄 웃었다.
《그것 참 그럴듯하군요. 실지 거문고라도 하나 있다면 백결선생처럼 방아찧는 소리라도 타서 집안을 흥청거리게 하겠건만. 장인이 쓰던 거문고를 지금은 타는 사람도 없는데 나나 주지 않겠는지.》
《실없는 소리 작작해라. 눈깔이 새까만 어린것들 굶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소 갈데 말 갈데 가리지 않고 다니면서도 노상 배 곯는게 애에미니라. 그런걸 알기나 하느냐?》
안해는 최도사집 침모살이를 그만두었지만 삯빨래, 삯바느질, 삯방아 안하는 일이 없이 해야 했다. 그래서 보리 한되박, 두되박 얻어오는 품삯에 온 가족이 매달려 사는것이다. 체소한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는지 마치 새끼를 기르는 암사자같았고 온몸이 의지의 덩어리같았다. 그러나 변변히 먹는것도 없이 힘겨운 일에 밤낮없이 시달리니 병색이 도는 얼굴에 눈만 더 커보였고 그 눈에는 언제나 피로와 졸음기가 실려있었다. 그가 민망한듯 말했다.
《아이, 어머니두, 그런 말씀은 무엇하러 하세요. 공연히 애아버지 마음이나 상하게시리, 밥주걱 든 사람이 밥을 푸다 보면 제 밥그릇이 곯을 때도 있는거지요.》
《됐다, 됐다.》하고 어머니가 장죽으로 담배통을 끄당겨 대통에 담배를 꽁꽁 다져넣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아들에게 한마디 했다.
《최도사집 둘째아들이 네게 직업을 구해주겠다고 하더라며? 목마른자가 우물을 판다고 어찌겠니, 잘 부탁해보려무나.》
어머니는 하도 곤난하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마디 한데 불과하지만 이 말이 리윤재에게는 몹시 괴롭게 들렸다. 최재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서나 때없이 그의 목을 조이고있는것 같았다.
그는 방에 들어가서 책상앞에 앉아 마음을 진정하려고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러나 이 좌절의 나날에 어수선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의 가정형편에서는 그가 베이징에 돌아갈수 없는것은 두말할것도 없고 서울에 올라갈 엄두도 낼수 없다. 이 실직상태에서는 가정을 극단한 빈궁에서 건져낼수도 없다. 당장 살아가자면 최재현같은자의 말을 듣고 왜놈에게 머리숙이는 길밖에 없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자체가 역겨운듯 머리를 세게 저었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쉬고 책을 펼쳤다. 주시경의 《국어문전음학》이였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그는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번민도 실망도 그 책속에 빨려들어가는것 같았다.
그가 주시경의 저서에서 가장 크게 감명을 받은것은 흔히 문법학자들이 하듯이 이미 세워진 문법의 틀에 우리 말을 맞추는것이 아니라 우리 말을 분석하여 우리 말에 맞는 문법체계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방법은 혁신적이고 그 내용은 독창적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주시경이 국어연구에만 골똘하기에는 그의 생활이 너무도 가난했다. 가난에 시달리며 목숨을 줄이면서 그는 국어를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쉼없이 뛰여다녔다. 그가 일으킨 국문운동이 민중교양에 철저히 립각하고있었다는것이 리윤재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철저히 한문의 마술에 걸려있는 민중을 깨우쳐 지식의 첩경을 열어주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국어의 정리와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였다. 그러니 민중교육을 떠난 학문을 위한 학문은 그에게 있을수 없었다.
리윤재는 민중교육을 실천함으로써 학문연구가 완성될수 있다는 주시경의 견해에 공명했고 그것이 그후 한글연구와 그 보급활동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리윤재가 책읽기에 열중하고있는데 삽짝문소리가 삐걱하고 나더니 《이게 리윤재의 집인가?》하는 거치른 말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가 책을 놓고 나가보니 뜻밖에도 순사였다.
《당신이 리윤재인가?》
《그렇소.》
《래일 도경찰부로 가야겠다. 고등과장이 부르신다.》하고 순사는 이런 련락이나 온것이 위신에 손상이 되는듯 무슨 거리만 있으면 시비를 걸고 권력행사를 하려고 눈알을 부라리며 집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싱겁게 돌아가버렸다.
리윤재는 《안자지어》하고 안자의 수레군이 상전의 권력에 등을 대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고사가 생각나서 너절한자의 권력이란 바로 저런것이라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 조그만 사건으로 순간에 이 집 사람들은 근심에 잠겼다. 김해댁은 심기가 불편한듯 장죽에 련달아 불을 붙여물었다. 정씨는 근심어린 눈으로 남편의 기색만 살폈다.
리윤재가 마지못해 어머니에게 말했다.
《근심마세요. 잡아가려면 형사가 직접 오지 순사가 련락이나 오겠어요. 제발로 오라니 제발로 돌아오겠지요.》
《토끼 제 방귀에 놀란다고 나는 저 까마귀같은 놈들은 보기만 해도 너를 잡으러 오는가 해서 가슴이 떨린다.》하고 어머니가 재털이에 대통을 탕탕 두드렸다.
안해는 그제서야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지 절구통에서 찧은 보리를 퍼내여 키질을 시작했다.
리윤재는 가족앞에서 태연하려고 애썼지만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경찰에서는 자기의 중국에 가있은데 대하여 점을 찍어놓고 거기서 무슨 단서라도 잡으려 할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번질는지는 아직은 알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