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2 장
1
리윤재의 고향집은 김해읍 변두리에 있다. 아버지때부터 살아온 낡은 초가집이다. 더구나 남정이 없는 집안에서 집손질을 한지 오래되니 그 퇴락상은 말이 아니다. 헐어빠진 삽짝에 펑 뚫린 개구멍에는 해묵은 넝쿨이 발처럼 줄줄이 드리워있고 초가지붕은 몇해나 이영을 잇지 않았는지 시꺼멓게 고삭고 내려앉아 드문드문 산자가 드러나서 흥부네 집처럼 밖에서 가는비가 오면 방안에 굵은 비가 쏟아질 형편이다. 살창이 마사진 방문과 부엌문의 펑 뚫린 구멍에는 군데군데 누데기를 틀어막고있다. 종이가 없는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빈궁상이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며느리 정씨는 토방에서 겉보리를 절구질하고있고 시어머니 김해댁은 마루에 앉아서 쌀겨를 채질하고있다.
오랜 시간 절구질을 한 정씨가 팔이 아픈지 잠시 숨을 돌리며 시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그 쌀겨 어디서 난거예요?》
《방물장사 나갔다가 벌어온거다. 쑥버무리라도 해먹어야겠다.》
정씨는 한숨을 호 쉬였다. 자기가 최도사집에서 침모노릇을 하여 손톱이 닳도록 일해주고도 이따금 받아오는 한되박의 겉보리로는 끼니를 이어갈수 없기때문에 시어머니가 저런 구차한노릇까지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방물장사에 나서서 한달중에 스무날가량을 방물보따리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는것도 간신히 입벌이라도 해서 식솔 하나라도 줄이자는데서였다.
이 집안에서 굶주림은 이미 만성적인것으로 되였다. 그중에도 정씨는 그 허줄한 음식조차 한번도 배불리 먹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 전날의 아련하던 모습은 간곳이 없고 얼굴이 까칠하고 가무잡잡해졌으며 푹 꺼진 눈만 더 커보인다. 아직 젊은 나이에 윤기있던 머리칼이 뿌옇게 바래여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인다.
《그런데 애아버지한테서는 왜 통 소식이 없을가요. 잘못된게 아닐가요?》
《방정맞은 소리, 애아범이 원래 그런줄 몰라서 그러느냐. 공부에 미쳤지, 미쳤어. 그래도 언제건 뻐젓이 돌아올게다. 걱정말아.》
시어머니는 남자 못지 않게 허우대가 크고 얼굴생김새도 굵직굵직하며 성미가 드세여서 이렇게 큰소리는 치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앓고있다는것을 정씨는 모르지 않았다.
삽짝밖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딸 순경과 근화가 뽀르르 달려들어왔다. 순경은 열두살이고 근화는 네살아래였다. 둘다 누덕누덕 기운 무명저고리에 검정몽당치마를 입고 발은 맨발이다. 발뒤꿈치가 갈가리 터갈라진것으로 보아 난생 신이라고는 신어본것 같지 않다.
《엄마, 언니가 소똥구리의 소똥을 주어먹었다.》하고 근화가 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했다.
순경은 동생을 흘겨보며 투덜거린다.
《최도사집 손자가 먹는거라고 했어. 배가 고픈걸 뭐.》
정씨는 혀를 끌끌 찼다.
《이것아, 아무리 그렇기로 소똥이야 어떻게 먹니, 냉큼 세수하고 오너라.》
그리고 최도사집에서 가져온 밥사발을 꺼내놓았다. 그것은 침모에게 먹으라고 한끼씩 주는것을 아이들 생각에 안 먹고 가져온것이다. 아이들은 반찬도 없이 맨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흉년에 아이 배 터지고 어른 굶어죽는다더니 저년들 에미 생각은 않고 처먹는 꼴 좀 보지.》하고 할머니가 기가 막혀한다.
이때 삽짝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키가 훤칠한 양복쟁이가 집안을 기웃거리다가 아무말없이 삽짝문으로 들어선다.
정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양복쟁이만 보면 지난날 치근거리던 최도사의 둘째아들 최재현이 아닐가 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보니 이게 웬일인가, 남편이 난데없이 자기앞에 서있는것이다. 정씨는 절구공이를 든채 굳어져버렸다. 절구공이가 맥없이 쿵 떨어지면서 정씨의 입에서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 얼마나 고생했소!》하고 리윤재는 안해의 너무도 일찌기 젊음이 시들어버린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마루에 올라가서 억이 막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어머니에게 큰절을 하며 울먹이였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흔들고 두드리며 울음의 넉두리를 터뜨렸다.
《그래도 살아는 있었구나. 십년이나 제집을 버리고 애비의 림종도 못했으니 이런 불효망측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령감이 불쌍하지, 마지막숨을 넘기면서도 줄곧 네 이름만 부르다 갔으니…》
그러다가 낯선 사람을 이상한 얼굴을 하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두 손녀를 보고 한숨을 쉬였다.
《저년들 보지. 제 애비도 못 알아보는구나, 너희 아버지다. 인사를 해야지.》
그러나 두 계집애는 아버지라는 말에 눈이 둥그래서 비실비실 뒤걸음질을 친다. 이렇게 두 딸이 다 크도록 터럭만큼도 해준것이 없는 죄스러움을 그는 서글픈 웃음으로 굼때였지만 부녀간 십년간의 정의 공백은 그후에도 두 딸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처럼 어진 아버지를 몹시 어려워했다.
그는 이윽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산소에 가봐야겠는데요.》
《가만있거라. 그냥이야 어떻게 가겠느냐. 뭘 좀 챙겨야지. 령감이 평생에 그리도 좋아하던 술을 령전에라도 한잔 부어야 할게 아니냐.》하고 어머니는 염낭에서 구멍뚫린 백통전을 꺼내여 며느리에게 주며 일렀다.
《술과 북어를 조금 사오너라.》
안해가 빈 병을 들고 삽짝밖으로 사라지자 리윤재가 물었다.
《그런데 누이동생들은 다 출가를 했습니까?》
《말도 말아. 너 없는 동안 집안이 풍지박산이 됐다.》하고 어머니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한줄기 주름패인 볼로 쭈르르 흘러내린다. 그는 워낙 성질이 강의해서 남앞에서 우는소리를 하는 일이 없으며 더구나 눈물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오죽하면 저러랴싶어 그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싶지 않아 리윤재도 궁금은 한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술을 사가지고 돌아와 부엌에서 딸가락거리던 안해가 잠시후에 간단한 제물을 조그만 함지박에 담아이고 나오자 리윤재는 어머니가 꺼내주는 베옷과 베감투를 받아들고 안해의 뒤를 따라갔다.
김해읍은 동쪽에 유유히 흐르는 락동강을 끼고 일망무제하게 뻗은 평야로 해서 근처에는 무덤 하나 쓸 야산도 없다. 락동강을 젖줄기로 김해벌은 기름지지만 그것이 제땅이 아니니 농민들은 끝없이 가난하다. 게다가 락동강의 변덕으로 수재는 끊임없어 집과 가산을 잃고 논밭을 떠내려보내고 일생을 락동강물에 쫓겨다니면서도 이 고장을 떠나지 못하는것이 또한 이곳 농민들이다.
김해는 지금은 퇴락한 군소재지이지만 그 옛날에는 금관가야국의 500년간의 도읍지였다. 금관가야는 여섯개 가야국가운데서도 문화가 가장 륭성했다. 그것을 보여주는것이 김해읍 서쪽 서당동수림속에 있는 김수로왕릉유적이다. 1800년전에 쌓아올린 릉입구에는 력사의 이끼를 들쓴 가야루가 오늘도 의연히 우뚝 서있다.
또한 여기에는 한길이 넘게 쌓아올린 돌우에 황소만 한 큰 바위가 뉘여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이 김해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재촉할 때 부사 서례원 등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군사들이 사기를 잃고 뿔뿔이 흘어지고 성이 함락되였다. 그러자 고을의 유생 송빈이 흘어지는 군사를 모아 끝까지 항전했다. 송빈은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빼여들고 육박전을 벌렸고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창칼에 끝내 절명했는데 바로 그 바위우에 정좌하고 북향하여 절하고 운명했다. 그래서 이 바위는 송빈의 순절암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황소처럼 생긴 이 바위에는 그 옛날 순절의사의 피가 스며있는것이다.
리윤재는 소년시절에 의로운 넋이 깃든 이 순절암을 자주 찾아가 상상의 눈으로 송빈의 장렬한 최후의 모습을 더듬으며 자기도 그처럼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리라 다짐하군 했었다.
이 고장에서는 가장 높은 무척산이 북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데 거기서 뻗어내린듯 한 나지막한 야산들이 기복을 이루고있고 드문드문 소나무가 서있는 사이에 군데군데 무덤이 있다. 이 야산 한구석에 리윤재의 아버지 리용준의 묘지도 있다.
살아서 가난하고 명색없던 사람은 죽어서도 묘지 하나 번듯하게 쓰지 못한다. 리용준의 묘지도 그 주변의 많은 묘지와 한가지로 초라했다. 비석도 상석도 없고 《학생 리용준지묘》라고 쓴 나무표말이 하나 서있을뿐이다.
정씨는 묘지앞에 돋아난 풀우에 백포를 펴고 그우에 준비해온 제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초라한 제상이였다. 제상을 차릴 때마다 아버지가 흔히 외우군 하던 《홍동백서 어동육서 동두서미 좌포우혜》 (붉은것은 동쪽에, 흰것은 서쪽에, 물고기는 동쪽에, 육은 서쪽에, 머리는 동쪽에, 꼬리는 서쪽에,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으라는 뜻)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는 서글픈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리윤재가 상복을 입고 무덤앞에 꿇어앉아 밥주발의 뚜껑을 여니 보기에도 무참한 꽁보리밥이였다. 제상에 쌀밥 한그릇 떠놓지 못한것이 자기의 죄이기라도 한듯 뒤에 서있던 안해가 고개를 외로 돌렸다. 리윤재는 술을 따라 잔을 올리고 부실부실한 보리밥을 한숟갈 떠서 나물국을 담은 놋대접에 놓고 숟갈은 보리밥에 꽂고 저를 북어자반우에 놓은 다음 잠시 돌아서있다가 제배하고 땅바닥에 꿇어엎드렸다. 눈물이 콱 쏟아졌다.
리윤재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초상은 어딘지 외로운것이였다.
술은 좋아하면서도 술친구와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일자무식이면서도 어딘지 선비처럼 도고한데가 있었다. 경상도녀자가 대개 그렇듯이 목소리가 크고 성미가 괄괄한 안해와는 반대로 그는 말수가 적고 얌전하기가 남산골샌님 같았다. 그는 마흔살이 넘어서부터는 병이 잦아 한생 지어온 농사일이지만 너무도 힘에 겨워 입버릇처럼 되여버린것이 《내가 빨리 죽어야지.》하고 한숨을 쉬는것이였다. 그의 힘으로는 타개할수 없는 가난이 지긋지긋하기도 했던것이다.
리용준은 외로와보일뿐아니라 실지로 외로운 사람이였다. 그는 이 고장태생이 아니라 스무살때 혈혈단신으로 김해에 떠들어온 사람이였다. 그러므로 리윤재에게 아버지우로는 단 한사람의 친척도 없고 옆으로는 사촌 한사람 없었다.
리용준은 황해도 안악태생이라고 했지만 실지는 서울 남촌태생이였다. 그의 광주리씨가문에는 한음 리덕형(17세기초 조선봉건정부때 령의정까지 올랐던 관료)을 비롯하여 뜨르르한 벼슬아치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의 할아버지대에 내려와서는 과거에 급제 못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집안이 령락되여버렸다는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홀로 김해에 떠들어오게 되였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한 일이 없다.
김해에 떠들어온 그는 살기 위하여 최도사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였다. 최도사는 의금부 도사를 지내다가 락향하여 김해고을의 토호로 되여 토색질로 거부를 모으고 김해벌의 기름진 땅을 대부분 손아귀에 넣은 대지주이다. 리용준은 등이 휘도록 고역을 치른지 4년만에 가난한 농사군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간은 났으나 최도사집 땅을 부치는 소작살이의 멍에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불우한 운명에 대한 한이 일생을 두고 그의 가슴을 허비였지만 그는 땅 없고 힘 없는 농사군으로서 팔자를 한탄이나 하는 체념으로 굳어져버렸다.
개천에서 룡이 난다고 그의 천한 집안에서 리윤재는 너무도 뛰여난 아들이였다. 서당에서 미친듯이 한문을 공부하던 아들이 열아홉살때 갑자기 무엇을 깨달았는지 읍에 가서 신식학교에 들고 머리를 빤빤히 깎고 돌아왔다.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에 조선정부에서 단발령을 내리고 우선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머리를 깎게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간에서는 유교도덕이 꽉 들어차있어 머리칼이나 수염 한오리를 깎는것도 불효불충으로 인정되던 시대였다. 더구나 머리를 깎는것은 왜놈의 풍속을 받아들이는것으로 여겨져 배일사상과 결부되여 완강히 배격되고있었다.
머리를 빡빡 깎고 집안에 들어서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어험, 어험.》하고 헛기침으로 분노를 삭이다가 반닫이에서 베옷과 베감투를 꺼내여 몸에 걸치더니 방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아이고, 저놈이 왜놈에게 넋을 팔아먹었으니 살아도 죽은거나 한가지구나. 나라를 팔고
리용준의 이 완고성은 그의 무지와 고독의 산물이였고 천대받은 한생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리윤재가 다 자란 총각으로서 불의에 머리를 깎고 김해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간것은 비상한 결심이 없이는 안되였지만 그렇게 결심하도록 일깨워주고 추동한것이 리은상이였다. 그는 리윤재의 재주를 알고 아꼈던것이다.
리윤재가 10년만에 귀향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키우는 친구는 리은상이였으나 그도, 그의 가족도 이미 이 고장에 없고 남아있는것은 아직도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돌다리뿐이였다.
웃마을과 아래마을사이를 흐르는 개울에는 원래 나무다리가 놓여있었는데 해마다 장마철에 물이 나서 떠내려가 사람들이 노상 발벗고 건너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불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다못해 리은상이 돈을 내고 마을젊은이들을 휘동해서 개울에 돌다리를 놓았다. 그는 그렇게 남을 위할줄 아는 사람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리은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조차 그 돌다리를 아직도 《은상다리》라고 부르는것이다.
어느덧 해가 먼 서산마루에 걸리고 황이 든 석양에 비친 무덤은 더욱 쓸쓸해보였다. 무덤가에 핀 한떨기의 할미꽃은 세상이 보기 역겨워 무덤가에 숨어서 핀듯 했다.
리윤재는 할미꽃을 한송이 꺾어들고 외솔나무에 기대여앉았다. 안해가 조용히 와서 옆에 앉았다. 리윤재는 안해에게 말없이 할미꽃을 주었다. 오랜 세월 정에 주린 안해는 그나마도 고마운듯 소중히 받아서 비로도같은 자주빛꽃잎을 볼에 대여본다.
이윽고 리윤재가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집안이 풍지박산이 됐다고 하셨는데…》
《그 얘길 다 어떻게 하겠어요.》하고 안해가 한숨을 쉬였다.
《금옥이는 내가 집에 있을 때 시집갔다가 한해만에 자식도 없이 남편을 여의고 집에 와있었지.》
《그래요, 큰시누이는 친정살이를 몇해 하다가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어디 가서 안잠자기라도 해서 혼자 입벌이라도 하겠다고 서울에 갔는데 그후에는 한번도 다녀간 일이 없어요.》
《금지와 옥엽이는 그때 출가전이였는데…》
《그래요. 과년한 딸 둘을 끌어안고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몰라요. 우리가 너무도 가난하니 데려가려는 마땅한 자리가 있어야지요. 어쩌다가 혼처가 나타나면 우리처럼 밑이 째지게 가난한 사람뿐이지요. 그래도 처녀로 늙힐수는 없어 금지시누이를 구가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그는 직업을 못 얻어 굶으며, 먹으며 살아갔어요. 그러다가 일본에 건너가면 벌어먹을수는 있다는 말을 듣고 솔가해서 훌쩍 건너갔지요. 그게 한 5년전인데 지난해에 일본에 큰 지진이 났을 때 구씨가 까닭없이 왜놈에게 맞아 죽었다는군요. 그러니 시누이가 올망졸망한 어린것들을 데리고 남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리윤재는 안해가 일본에서 간또대지진때의 왜놈들의 조선인대학살을 두고 말한다는것을 곧 알았다. 간또대지진은 일본력사상 최대의 지진으로서 도꾜, 요꼬하마를 비롯한 간또지방에서 순식간에 수십만호의 집이 불타고 14여만명이 죽고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때 일본정부는 대지진의 후과로 일본국민들속에서 고조되는 반정부감정을 조선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하여 신문과 방송으로 《조선사람이 각지에서 불을 질렀다.》, 《조선사람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허위선전을 했고 내무대신이라는자는 《조선인박멸》을 긴급명령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와 경찰, 재향군인, 자경단, 청년단 등과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그리하여 두주일이 남짓한 사이에 도꾜와 그 부근에서만 해도 2만 3천여명의 조선사람이 무참하게 학살되였다. 이것은 인류력사상 류례드문 대살륙만행이였다. 이 광란적인 살륙의 소용돌이속에서 자기의 매부가 죽었다는 말에 리윤재는 치를 떨었다. 이국살이의 고달픔을 몸소 뼈저리게 느꼈던 그는 누이동생이 다른데도 아닌 원쑤의 나라에서 고립무원하게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하는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쉽게 오고갈수도 없으니 오랜 세월이 지나면 금지도, 그의 자식들도 영영 남이 되고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엽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기구했다. 그 당시 내 나라에서 왜놈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기여 살길을 잃은 많은 농민들이 정든 제고장을 버리고 행여나 하여 해외에 류랑의 길을 떠났다. 하와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민으로 갔다. 돌아가는 말에 의하면 하와이는 사철 봄이고 땅은 기름져 살기 좋은 락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가닿은 하와이는 락원이 아니라 로동의 생지옥이였다. 가혹한 양놈농장주밑에서 노예처럼 고역에 시달려야 했다. 더구나 총각들은 결혼할 대상도 없었다. 그래서 고국의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신부를 구해달라고 청원해왔다. 소개군들에게는 좋은 돈벌이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하루는 옥엽의 어머니 김해댁에게 소개군이 사진 한장을 들고 찾아왔다. 사진에서는 한 젊은이가 승용차에 기대서서 벙글벙글 웃고있었다. 옷차림도 그만하면 멋쟁이였다. 그 승용차가 과연 그 젊은이의것인지 아닌지는 알길이 없지만 하와이에서는 자동차가 눅거리라고 한다. 김해댁은 신랑감은 그만하면 괜찮은데 어딘지도 모를 먼 나라에 딱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딸을 어떻게 시집보내겠느냐고 거절했다. 그만한 정도로 물러설 소개군이 아니였다. 당자인 옥엽을 살살 꼬였다. 우선 신부의 사진을 저쪽에 보내여 그쪽마음에 들면 려비전액을 보내온다는것이다. 몸덩이 하나만 가지고가면 일생을 호강할수 있다는것이다. 너무나 지긋지긋한 생활고에 신물이 나고 앞으로도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아무런 담보도 없는 처지에서 옥엽의 마음이 동요했다. 당자가 움직이니 어머니인들 어쩔수 없었다. 두달후 떠나는 날 부산부두에서 혈혈단신으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딸이 어머니를 붙들고 울고울었다. 두번 배고동소리가 울리고 배는 떠났다. 《아뿔싸!》하고 그제서야 어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것이 영리별이 아닌가? 다시 만날 기약은 없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눈물로도 씻을수 없는 또 하나의 멍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던 안해는 울고있었다.
자식 없는것이 상팔자라더니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의 가슴에 란도질을 하지 않은 자식이 없다. 어머니의 기구한 팔자를 슬프게 생각하며 리윤재는 화제를 돌렸다.
《내 참 안됐지만, 그동안 참 용케 살아왔구려.》
《저는 최도사집에 침모로 들어가서 밥술이나 얻어오고 어머니는 방물장사를 하셨어요. 떠돌아다니며 입벌이나 하신거지요. 죽지 못해 살았지요. 그런데 당신은 또 집을 떠나실래요?》
리윤재는 대답을 못했다. 아버지의 묘에 성묘나 하고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계획이 산산이 깨여져나가는것을 느꼈다.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무슨 면목으로 다시 나가겠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이젠 가족을 위하여 농촌에 파묻혀야 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에 비감과 절망이 저녁 땅거미처럼 스며들었다. 학문을 버리면 자기에게 남는것이 무엇인가? 좌절의 아픔을 느끼며 그는 해저무는 뿌연 하늘을 이윽토록 바라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