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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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반일만세시위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일어나 전국각지로 확산되고있다는 소식이 이 녕변산골에도 빛발같이 날아들었다.
며칠째 조선어교원 리윤재의 하숙방에서는 거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여 물끓듯 했다. 이 학생들을 이끄는것은 최기봉이라는 학생이였다. 그는 신식학교에 늦어돌어와서 나이가 여느 학생보다 많기도 하지만 워낙 말수가 적고 성격이 강의해서 학생들은 물론 교원들도 어렵게 대하게 되는 젊은이였다. 키는 중키이나 다부진 몸집에도, 형형한 눈빛에도, 쇠소리가 나는 목소리에도 사람을 위압하는듯 한 힘이 있었다.
거사날자도 결정되였고 각면에 파견할 성원들도 지명되였다. 독립선언서도 수백장 등사하여 각자가 휴대하였다. 이밤이 새기 전에 각처로 떠나야 할 젊은이들은 가슴을 들먹이며 리윤재의 얼굴을 응시하고있다.
최기봉이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무슨 해주실 말씀이 없습니까?》
한참 말이 없던 리윤재가 이윽고 당반에서 한지두루마리를 꺼내더니 방바닥에 쫙 펴놓았다. 어지간한 족자 하나의 크기는 잘되였다. 그는 허리춤에서 장도를 뽑아들더니 시퍼런 날을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푹 박고 썩 베였다. 피가 뿜어나왔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손가락으로 한지우에 《반일구국》이라고 큼직하게 썼다. 종이에 피는 새빨간 글자가 어스름속에서 호롱불에 반사되여 사람들의 눈을 찌르는것 같았다. 학생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리윤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가 조국앞에 피로써 다지는 맹세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마지막피 한방울까지 바칠 각오를 합시다. 완전무장한 왜군에게 맨주먹으로 저항하는 우리에게 믿을건 오로지 분노한 백성의 힘뿐이요.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건 바로 제군의 반일구국의 정신이요.》
최기봉은 이 중대한 시각에 피로 쓴 《반일구국》이라는 글자가 몇백마디의 말보다도 더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는것을 믿었다.
거사날 리윤재는 숭덕학교운동장에 립추의 여지없이 모여선 학생들과 주민들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랑독했다. 랑독도중에 왜군헌병대가 달려든다는 고함소리가 들리고 학생들이 그에게 피신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독립선언서의 랑독을 멈추지 않았다. 청중은 손에 땀을 쥐고 독립선언서의 마지막글자까지 다 들었고 리윤재는 피신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헌병에게 끌려가면서 그는 수갑을 찬 두손을 높이 쳐들어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헌병이 후려치는 연덩어리가 달린 채찍에 얼굴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그는 만세 삼창을 그치지 않았다. 잠시 위축되였던 군중속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리윤재가 녕변봉기의 주도자로서 3년징역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뜻밖에도 먼 김해에서 안해가 의복을 해이고 면회를 왔다. 집에 소식을 알린 일이 없는 그는 안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저으기 놀랐다. 그때 그는 안해의 말을 듣고 이 땅의 한끝에서 한끝인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자기의 소식을 전해준게 최기봉이라는것을 알았고 그의 의리있는 행동에 크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는 최기봉을 만난 일도 없었고 그의 소식을 들을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