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6 장 《보감》
7
품들여 준비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곤도와 허모의 손때묻은 부하들도 다 죽어버렸다.
후유꼬는 빈방에 홀로 까딱않고 이렇게 한겻이나 앉아있었다. 그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속에서 웬 녀인이 후유꼬를 마주보고있다. 후유꼬는 그 거울의 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거울에 비친 녀인이 후유꼬- 자기란 말인가.
얼굴의 살이 쪽 빠진 녀인이 망연자실하여 앉아있다. 후유꼬는 자기의 뾰족한 턱이며 뺨을 쓰다듬었다.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나이도 서른이 넘었다. 열일곱살나이에 고니시를 따라 이 나라에 들어와 의서를 훔치러 돌아친지도 어언 열여섯해가 흘렀다.
후유꼬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짜내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쭈르륵 눈물이 뺨으로 굴러내렸다.
한두해도 아닌 열여섯해, 그 나날들에 겪은 일들이 눈앞에 서서히 떠올랐다.
불쑥 나고야가 보고싶었다. 녀성으로서 후유꼬가 대상한 첫 사내였다. 철없던 그 시절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녀성의 순정도 젊음도 희생하는 녀걸로 자기를 상상하며 나고야에게 자기 몸을 고스란히 바친 후유꼬였다.
그후론 나고야의 의도에 따라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사내들에게 후유꼬는 자기의 미모와 젊음을 바쳐왔다. 때로는 자기가 과연 정상인간인가 하는 생각, 나도 녀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아키우고싶어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던가. 어머니가 되고싶었고 제가 낳은 아이의 말큰한 살에 뺨을 대고 어머니만이 맛볼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후유꼬는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어머니만 있었더라면 자기의 운명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수 있지 않을가. 헌데 어머닌 자기를 버리고 어데론가 달아났다.
들리는 소문엔 다섯번째 사내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는것이였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다고 해서 어머니가 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후유꼬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돌이켜보며 생각했다.
그런 자기의 속을 나고야는 바둑판에 건너간 금을 내려다보듯이 환히 들여다보았다.
후유꼬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준 그날의 나고야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조선으로 떠나기 앞서 나고야가 불쑥 후유꼬에게 제 속을 비치면서 《난 후유꼬를 놓아주고싶지 않아. 너와 영원히 헤여지고싶지 않아. 일생 널 내곁에서 떼놓지 않고 너와 행복하게 살고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하고 말했었다. 그때 폭소를 터뜨리며 쏘아주었지만 그때에야 후유꼬는 나고야가 자기를 몹시도 사랑하고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이 세상에 날 녀성으로 대해주는 사내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날밤 행복이란게 뭐인가 하는것을 제나름으로 분석해보았었다. 그다음부터 그앞에 나타난 나고야는 주인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내로 보였고 그래서인지 위험한 이 길을 떠날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리라는 비장하다고 할 그런 각오를 가지고 쉬이 떠났었다.
후유꼬는 감았던 눈을 떴다. 거울에 해쓱해진 녀인이 산발하고 앉아있다. 후유꼬의 생각은 가지를 쳐 조선에 와서 있었던 일들이 헨둥하게 떠올랐다. 자기의 손에 죽은 절간의 중이며 제 손으로 미치게 만든 허모며 의서를 빼오려고 제 몸을 해치던 일이며… 다음으로 허준의 준수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설유와 예영이를 비롯한 허준의 집식구들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허준, 허준! 그는 외로운 섬에서 이 시각 뭘하고있을가.)
순간 후유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 허준이를 찾아가보자. 설사 의서를 빼내오지 못한다쳐도 허준이를 만나보자. 그런 큰 의서를 쓰는 허준이건만 그는 지금 역적으로 몰려 외진 섬에 위리안치된 신세가 아닌가. 내 비록 의서를 못 빼낸다고 해도 허준이를 찾아가 그의 실패한 인생을 감상하며 그가 한 그 모든짓이 허무하고 맹랑하며 아무런 의의도 없음을 자인케 하리라. 나고야가 의서를 그리도 탐내는것은 자기의 명성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허준이가 그리도 극성스레 의서를 쓰는것도 명성때문일것이다. 허나 그 유명짜한 명의는 역적으로 몰려 생사를 기약할길 없는 날바다 한가운데 섬에 갇혀있다. 아무리 큰 의서를 썼건만 생의 종착점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러니 허준을 찾아가서 패자는 후유꼬-내가 아니라 허준임을 증명하리라. 또 그가 류배를 간 현시점에서 《동의보감》은 영원히 미완성원고로 남아있을것이다. 차라리 그 저주로운 의서원고를 불태워버렸으면…
약해지는
요염하고 아릿다운 녀인이 거울에서 후유꼬를 마주본다.
(아직은 내가 미워지지 않았어. 이제 돌아가면 나고야상이 날 싫다고 하지 않을게야.)
거울에서 물러난 후유꼬는 펜과 종이를 들고 책상에 마주앉았다. 허준을 찾아가는 이 길이 나고야가 준 임무를 수행하는 로정에서 마지막길이 될수도 있다는 예감이 그를 책상에 마주앉게 하였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펜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부지런히 글을 써나가던 후유꼬는 와락 종이를 움켜쥐였다. 그의 눈에 이름할수 없는 빛이 흘렀다.
(아니야, 승부는 아직 일러!)
후유꼬는 손에 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방바닥에 줴뿌렸다.
다음날 후유꼬는 혜민서에 사촌오빠의 소식이 왔기에 가보려고 한다는 구실을 대여 며칠간 말미를 받고 허준이 위리안치되여있다는 곡도로 떠났다.
곡도에 이른 후유꼬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허준이 정배지에서 의서를 쓰고있으며 그의 원고를 설유와 기동이가 받아간다는것이였다. 설유와 기동이가 날자를 택하여 원고를 날라간다는것을 안 후유꼬는 그들과 어기치지 않기 위해 날자를 선택하고 허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파수군졸에게 술과 은전을 안겨준 후유꼬는 그에게서 열쇠를 받아쥐고 허준이 있는 가시울타리 삽짝문을 열고 들어섰다.
발볌발볌 방안을 들여다보던 후유꼬는 한동안 그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백발의 허준이 땅바닥에 꿇어앉아 의서집필을 하고있었다. 얼마나 일에 열중하는지 열쇠를 여는것도 문을 여는것도 자기가 방앞에까지 온것도 모르고 의서원고에 온넋과 주의를 집중하고있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사면에 온통 무슨 글인가를 써놓았다. 눈을 쪼프리고 벽면을 주시해보니 분명 의술에 관한 글이였다.
그러니 허준은 이런 위리안치된 곳에서 종이와 붓이 없어 벽면에 의서원고를 썼단 말인가. 저 필묵은 분명 남편의 성정을 잘 아는 설유가 가져왔을것이고 그래서 지금은 벽면이 아니라 종이에 의서원고를 쓰고있는것이리라.
후유꼬는 한방망이 얻어맞은듯 머리가 핑 돌고 귀에서는 고막이 찡-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인간을 굴복시켜보려고 내 여기까지 왔던가, 이런 불굴의 인간이 초인간적인 의지로 쓴 의서를 나고야와 일본은 훔쳐서 제것으로 뻐젓이 만들려고 했단말인가, 아무리 조선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인간은 어쨌든 인간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허나 후유꼬는 혀를 깨물며 그런 생각을 한 자기를 후회하였다. 남을 딛고 일어서야 산다! 남을 딛지 못하면 내가 짓밟히고만다! 누구의 말이던가? 나고야가 한 말이였다. 그 말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후유꼬는 씽 한발을 방안으로 들이밀었다.
《선생님!》
원고에 정신이 팔려있는 허준은 듣지 못한듯 반응이 없다. 재차 후유꼬는 허준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허준이 머리를 들었다. 한참이나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 주시해보더니 눈을 크게 뜬다.
《아니, 이게 누군가? 혜민서의 수미가 아닌가?》
후유꼬는 나부시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펴는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이 어인 일이오이까? 이 험한 곳에서 선생님을 뵈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소이다. 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곳에… 》
뒤말을 채 잇지 못하고 후유꼬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내여 흐느꼈다. 허준이 말없이 후유꼬의 어깨를 안아일으켜주었다.
《됐네, 됐어. 그만하라구!》
후유꼬는 허준의 팔에 이끌려 일어서다가 허준의 가슴팍에 와락 안기며 몸부림을 쳤다. 자기 품에 안겨 소리내며 흐느끼는 후유꼬의 잔등을 쓸어만지는 허준의 눈가에 추연한 빛이 어렸다.
《그만 그치게. 내 이렇게 살아 의서를 쓰고있지 않나. 수미도 의서를 쓰는게 소원이라고 했지. 그래, 수미나 나나 의서를 위해 태여난 인생인데 죽을 때까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끝을 봐야 옳지. 안그렇나?》
후유꼬는 허준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런 후유꼬를 바라보는 허준의 모습은 마치 인자한 아버지그대로의 모습이였다.
후유꼬는 저도모르게 주눅이 드는것을 애써 누르며 눈굽을 훔쳤다.
《수미가 이 먼곳에 어떻게 다 왔나?》
《선생님이 이런 곳에 계시는걸 모르구 소녀 계속 찾아헤매였나이다. 헌데 이 험한 곳에서도 계속 의서를 쓰시는군요. 이런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의서를 써야 무슨 필요가 있겠나이까.》
한동안 후유꼬를 바라보던 허준이 몸을 돌려 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저 멀리 파도설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후유꼬의 눈이 웬일인가 해서 올롱해졌다.
《수미는 화담 서경덕이라는분을 알고있나?》
《송도삼절로 불리우는 서화담선생을 소녀가 왜 모르겠나이까.》
《그래, 송도삼절의 하나였지. 유명한 황진이라는 녀인이 그렇게 불렀지. 그 화담선생의 글에 이런 문장이 있네. 한번 들어보겠나?》
후유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허준은 시조를 읊조리듯 그 문장을 입에 올렸다.
《삶과 죽음의 리치를 이미 안지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고 배워서 의심이 없는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쾌활함을 느끼였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니 마음이 참 편안하구나!》
그 문장을 외우고난 허준이 후유꼬를 찬찬히 응시하더니 침착한 어조로 말하였다.
《아마 수미가 사는 일본에선 이런 문장이 나올수가 없지. 그렇지 않나?》
후유꼬는 깜짝 놀라 입을 항 벌리였다.
《왜 그렇게 놀라나? 수미가 위급한 병자로 꾸미고 우리 집에 와서 예영이 어머니를 독약으로 마취시키고 의서원고를 훔쳐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 예영이를 통해 나한테 접근하려고 혜민서에 들어온게 사실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 서있는 후유꼬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허준의 눈에서는 불이 일고있었다.
《그래 수미가 허모라는 내 이복형을 통해 의서를 훔치려다가 실패하니 제가 직접 고육계를 쓰면서 우리 집에까지 온것을 내가 모를줄 알았는게지?…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 정말 후안무치한 패륜이야.》
후유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여 허준이가 자기의 정체를 이렇듯 샅샅이 알고있을가. 유일한 증인인 허모는 미쳐서 기억력을 상실했고 증거로 될만 한것은 제 손으로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곤도와 세 놈팽이는 다 저승에 갔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였다. 의아해하는 후유꼬의 귀에 허준의 사리정연하고 론박할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수미를 만나러 혜민서에 간것은 예영이가 말한 너의 경력에 의심이 들었기에 그걸 확인하려 해서였지. 수미의 아버지가 의원이라는데 내 알기에는 경상도의원중엔 사량왜변때 끌려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 그리고 해수병을 쉽사리 고치는 의원이라면 내가 모를리 없겠는데 동래의원중엔 그런 젊은 의원이 없었지. 있었다면 최주부라는 늙은 의원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 스승의 친구였어.
예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그런 의심이 드는걸 식구들에겐 말하지 않았지. 수미가 날 찾아와야 도리상 옳지만 그래서 내가 수밀 찾아간거야. 수미를 만나보구 난 대뜸 수미가 거짓말을 한다는걸 알았지. 그후 집의 하인에게 우리 집에 업혀왔던 녀인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신통히도 수미와 인상특징이 꼭같지 않겠나.
더구나 수미를 업고 온 오빠라는 사내의 눈밑에 왕사마귀가 있더라는 말을 듣고 네가 왜년임을 확신하게 되였지. 그 왕사마귀란 놈은 거제도에서 예영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잔인하게 학살하고 의서를 략탈해간 우리 예영이 어머니의 철천지원쑤였거든.
후에 내가 예영이 어머니에게 왕사마귀가 업고왔던 녀인이 혜민서에 다니는 수미라고 말해주자 우리 집사람이 펄펄 뛰더군. 그래서 왜놈들이 의서를 노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어.
슬픈것은 나에겐 형이 되는 허모가 네년놈들의 간계에 걸려 짝자꿍 치다가 미쳐버린거지.
어찌 보면 응당한 귀결이라 볼수 있네만 그래도 형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되였으니 가슴이 아파, 아프구말구.
헌데 수민 여긴 어떻게 되여 왔나?》
후유꼬는 자기의 정체를 발가놓는 허준의 그 론박할수 없는 추리와 사실자료앞에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정녕 허준이라는 이 사내앞에 선 자기가 졸지에 아이가 된듯싶고 자기의 위선이 홀라닥 발가벗기우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이사람은 의원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어떻게 우리가 빈틈없이 짜고든 내막을 말짱 알고있는가. 기가 죽어가는
《용케 알아내셨군요, 선생님! 선생님은 의원보다는 포도청대장이 어울리실것 같군요. 정말 우리 일을 손금보듯 아시네요.
차라리 이런 곤욕을 당하며 의원을 하기보단 포도청의 대장을 하셨으면 운명이 더 길할수 있었는데 참 안됐군요. 선생님의 추리와 판단에 손을 들었어요.》
《이젠 이 허준일 알겠나?》
《전 솔직히 선생님을 보면 감탄을 금할수 없어요. 녀성으로서 선생님의 의지와 완강성에 놀라움과 경탄이 절로 나온답니다. 역적으로 몰리워 이곳에 처박히고서도 의서를 쓰시는 선생님의 그 의지와 완강성은 녀성인 나로 하여금 진심으로 되는 존경심을 품게 하는군요.》
허준은 허울을 벗고 로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며 빈정투로 말하는 후유꼬의 새말간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허거프게 웃었다.
《허허! 내가 젊은 미인한테 굉장한 영웅남아로 보였군. 그래 누가 수밀 여기로 보냈나?
남의 피와 넋이 스민 의서를 훔치려 한다는게 도대체 륜리에 맞나?
그렇게 훔친 의서를 제것이라고 우기자는건데 손바닥으론 해를 못가리우는 법이야.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기로서니 그런 후안무치한 행위를 용서할수 있겠나?
그러다간 천벌을 받아, 천벌을!
그리고 한마디 할것은 녀성으로 태여났으면 녀성답게 살아야지 왜 남의 땅에 와서 온갖 악행과 패륜을 일삼으며 그 고운 용모와 젊음을 헛되이 썩이는지 난 알다가도 모르겠어.
이제 이 〈동의보감〉이 나가면 우리 나라는 물론 이웃나라들에도 그 책이 넘어갈건 뻔한데 그러면 그걸 보면서 호상간에 의술교류도 하고 좋은것은 배우고 하면 되지 않겠나?
헌데 왜 이런짓을 하는지 난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어. 내 말이 틀리나?》
후유꼬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앞에 서있는 허준이와 자기를 이 길로 떠민 나고야는 조선과 일본의 손꼽히는 명의임이 틀림없었다. 허나 두사람을 비교하면 도저히 견주지 못할 전혀 딴세상의 사람들이였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는 문제이기 전에 인생을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가.
허준의 말이 옳았다. 너무도 당연한 리치였고 너무도 반박할수 없는 론거였다. 그런 허준이기에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이런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그리고 래일이라도 당장 역적으로 락인되여 처형될수 있는 속에서도 배포유하게 의서를 쓰고있는것이 아닐가.
후유꼬는 모멸감과 수치감 그리고 허준에 대한 존경심과 녀성으로서의 공경의 마음이 엇갈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빌고싶었다. 이런 깨끗한 인간앞에, 이런 의지의 소유자앞에, 이런 높은 지성을 가진 사내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싶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고싶었다.
후유꼬는 무너지듯 그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허준선생님!-》
그리고는 눈을 꼭 감았다. 쓰디쓴 패배와 인간적고뇌의 눈물이 찔끔 솟구쳤다. 허준은 그러는 후유꼬의 모양을 눈여겨보았다.
《선생님! 용서를 비는 말은 하지 않겠나이다. 다만 선생님의 그 결곡하고 깨끗한 인생이 이 후유꼬를…》
《후유꼬라- 그 이름이 참 곱구만. 그 이름처럼 아름답게 살라구. 그게 인생이야. 사람이 살면 몇년을 살겠나?
나도 이젠 다 살았어. 그래서 내 죽기 전에 나라와 후대들앞에 무엇인가 남기려구 이렇게 모지름을 쓰는거야. 이제 <동의보감>이 완성되면 사람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그 책을 보면서 오래오래 살거구 또 오래 살면서 나라를 위해 뭔가 유익한 일을 해놓으려고 애쓸거구 그러느라면 나라가 살찌구 강해지는거지.…》
허준의 말에는 진심이 어려있었다. 그의 말속에는 자기라는 인간이 없었다. 애오라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만이 있었다.
후유꼬는 아아한 창공을 바라보듯 눈물투성이인 머리를 쳐들고 허준을 우러렀다. 거대한 산악이 일본녀인의 앞에 우뚝 서있었다. 심중의 격정을 담아 후유꼬는 한마디 말만 남겼다.
《허준선생님! 이 소녀는 영원히 당신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세상을 떠나가렵니다.》
그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허준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는 의서원고앞에 쭈그리고앉아 붓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