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6 장  《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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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의 집에 갔다가 헛탕을 치고 돌아온 허모는 며칠이 지난 후 수미가 있는 별장으로 향하였다. 설유를 정복 못한 수욕을 수미에게서라도 보충하려는 심산으로 그곳으로 발길질하는 허모의 가슴속에서는 설유에 대한 복수심이 아직도 이글거리고있었다.

내 오늘은 그냥 물러났지만 언제인가는 네년의 그 숙녀인체 하는 몸뚱아리를 발기발기 벗겨놓고야말테다! 영영 돌아올수 없는 허준이놈을 기다리느라면 네년의 그 도고한 기상과 목숨처럼 여기는 정조도 이 허모앞에서 한갖 무용지물이라는것을 깨닫게 되리라.

이렇게 윽벼르느라니 옹쳤던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것 같았다.

물론 설유와 수미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녀성이였다. 수미와 같은 녀인에게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순결함과 고상함과 같은 미가 없었다. 설사 쾌락을 안겨주고 욕정을 마음껏 푼다쳐도 인간의 넋을 떠난 생명체본능의 이성화합뿐이였다.

그러나 설유는 누구나 바라면서도 쉽게 가질수 없는 그런 고상함과 순결함을 온몸에서 풍기고있어 말로는 표현할길 없는 미로 허모를 유혹시키고있었다. 수미가 아무리 허모에게 미칠듯 한 관능적색정을 안겨주어도 설유의 그런 미에 비하면 봉황과 닭같이 그 격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설유를 굴복시키지 못한것이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수미의 그 관능적인 몸뚱아리를 머리속에 떠올리느라니 숨소리가 빨라지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오늘은 내 수미에게 허준이놈을 어떻게 통쾌하게 복수했으며 설유년의 가슴을 어떻게 허벼놓았는가를 뻐기리라. 늘 봐야 이 허모를 허준이보다 낮추 보는 수미였다.

별장에 이른 허모는 거드름을 부리며 팔자걸음으로 대문앞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자박자박 발자욱소리가 나더니 수미의 요염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이, 나리가 오셨네요!》

수미가 정녕 반가운듯 두손을 가슴우에 모으며 탄성을 질렀다.

《잘 있었나? 그새 더 예뻐졌는걸.》

허모는 수미의 코를 손으로 가볍게 튕겨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리가 오시지 않아 가슴을 조였어요. 무슨 불상사라도 있는가 해서…》

허모는 불상사라는 소리가 수미의 새빨간 입에서 거침없이 튀여나오자 버럭 성난척 하였다.

《방정맞게, 불상사라는건 무슨 소린가? 만사대길인 날 어떻게 보구 그래?》

수미의 말은 그저 지나가는 말이 아니였다. 선조의 사망과 때를 같이해서 허준이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석구의 보고를 받고 수미는 혹시 허모에게서 무슨 사달이 난게 아닌가 하고 은근히 가슴을 조이고있었던것이다.

석구는 그러면서 허준이 그새 의서집필을 다그쳐 퍼그나 진척이 되였다고 하면서 나고야로부터 의서를 빨리 빼오라는 독촉이 왔다고 알려왔다.

수미는 허준이 지금껏 집필했다는 의서원고만이라도 훔쳐낼수 없을가하는 생각으로 며칠동안 석구와 머리를 줴짰다.

허지만 신통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허모의 힘을 빌어보면 어떨가고 궁리를 하고있었다.

능글능글한 허모를 꽉 그러쥐자면 처음부터 반격을 가해야 한다. 수개같은 이 자식은 이제 막무가내로 날 땅바닥에 엎어뜨리고 그짓을 하려고 접어들것이다. 미욱하면서도 제 말마따나 머리가 팽이처럼 돌아가는 이 녀석은 여간 흉측하지 않단 말이야. 전번에 내가 거짓병을 꾸민 다음부터 날 가까이하면서도 뭐인가 숨기고있고 혼자서 끙끙거리는게 아무래도 무슨 변이 날것 같애. 가만, 이 자식이 날 의심하는게 아니야? 오늘 한번 이놈을 혼쌀내주자. 내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걸 똑똑히 버릇을 가르쳐줄테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수미가 불의에 허모를 역습하며 매섭게 따져물었다.

《어느 계집년과 붙어있다가 오늘에야 나타났어요?》

허모는 갑자기 돌변한 수미의 그 태도를 계집이라면 누구나 가지고있는 변덕과 질투로 치부하며 껄껄 웃어댔다.

《원 계집들이란, 내가 천하미인인 수미를 두고 대체 어느 계집과 붙어다닌단 말인가? 그것두 말이라구 하나?》

수미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처음엔 모르겠더니 이자 보니 나리는 거짓말을 곧잘 하시오이다.》

《거짓말이라니? 그건 웬 생벼락맞을 소리냐?》

허모는 수미의 뾰로통한 얼굴을 재미나게 바라보며 여전히 흐물거렸다.

《생벼락을 맞긴 맞아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야 왜 오늘에야 기신기신 얼굴을 내밀어요? 남은 저를 위해 밤낮으로 가슴에 재가 앉도록 눈빠지게 기다리는데 나린 언제한번 이 수미를 진정으로 생각해본적이 있어요? 만나면 수개처럼 제볼장이나 채우면 그뿐이라는거지.》

수미는 눈물까지 똘랑똘랑 떨구며 행악질을 해댔다.

《아아, 울기까지 할게 있나. 내 그럼 오늘 너에게 기쁜 소식을 하나 말해주지. 아마 네가 들으면 너무 좋아 까무라칠거야!》

방금까지도 눈물을 줴짜던 수미가 언제 울었던가싶이 해쭉거리며 허모의 앞으로 바투 다가앉아 그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도 들었겠지? 임금이 붕어하신걸 말이야.》

수미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임금님이 죽다니?》

허모는 자못 큰 사실이나 알고있는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임금님이 저세상 사람이 되였어. 늘 골골 앓으시더니 끝끝내 세상을 떠나셨거든. 그래서 조정이 죽가마끓듯 벅작거렸지. 새 임금이 등극하셨는데 그 임금으로 말하면 왕비의 적자인 대군이 아니라 빈의 소생인 군이란 말일세. 듣자니 선왕과의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다고 하네.

그건 그렇구. 네가 제일 기뻐할것은 이번 기회에 그 허준이놈을 아예 매장해버렸다는거야. 알겠나? 그 으시대던 허준이놈을 귀양다리신세에 빠뜨렸다 그거야.》

허모의 그 말이 수미에게는 마른 하늘에 벼락치듯 들렸다. 수미는 그자리에서 뒤로 흠칫 물러나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그게… 사… 실이오이까?》

허모는 갑작스레 펄쩍 놀라는 수미의 모습을 보며 너무 기뻐 그러는가고 제잡담하며 범잡은 포수마냥 기고만장해서 설명을 달았다.

《왜, 믿어지지 않나? 이 허모감찰나리가 선왕의 죽음을 그놈과 련결시켜 죄목을 꾸며 정배를 보냈단 말이야. 이제 내 그놈을 저 바다가 외진 섬에 위리안치시키고말테다!

그래, 어때? 이 감찰어른이 솜씨있게 해제꼈지?》

수미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표독스러워졌다. 까만 눈동자에선 적의가 서리발쳤다.

허모는 표독스러운 그 모습에 머리칼이 쭈빗거리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것 같았다.

《아, 아니…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수미의 입에서 씹는듯 한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왜 그러냐구? 그래 그 허준이라는 어의를 정말로 정배보냈단 말이오이까?》

허모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년이 갑자기 왜 이렇게 독기를 뿜는건가?

《응- 진짜로 정배를 보냈어. 벌써 대여섯날이 잘되는데 네 인상이 너무 무서우니 말문이 다 막히누나. 그 허준이놈을 정배살이를 보냈다는데 그렇게까지 놀라나? 이제 몇달만 있으면 그놈은 가시울타리속에서 무주고혼이 될거야. 흐흐흐-》

제말에 스스로 흥이 나서 허모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수미를 바라보며 짐승울부짖음소리를 터뜨렸다.

《머저리같은 자식!》

수미의 입에서 튀여나온 그 말에 허모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 뭐? 머저리같은 자식이라구? 이년 봐라. 곱다곱다하니까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야, 쌍년아! 너 지금 누구한테 감히 욕지거리냐?》

《쌍년? 이 망할놈의 자식!》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북받친 수미가 오른발을 돌려 허모의 머리를 걷어찼다.

허모의 자그마한 몸뚱아리가 벽에 가 쾅- 부딪쳤다. 엉기엉기 일어난 허모가 수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년이 미치지 않았어? 어따 대구 발길질이야, 응?》

엉기적거리는 허모의 자그마한 상판에 수미의 왼쪽발이 날아갔다. 또다시 허모의 몸체가 벽에 부딪쳤다. 순식간에 허모의 상통이 피투성이가 되였다.

《이놈아! 내가 왜 너같은 놈한테 몸을 준줄 알아?》

수미가 허리춤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꺼내들었다. 허모의 실눈이 그 순간 소눈깔이 되여버렸다.

《어쩌자는거냐?》

수미의 입에서 매몰찬 소리가 튀여나왔다.

《쓸모없는 네놈을 지옥에 보내려구 그래! 그러나 죽기 전에 똑바로 알고 죽어!》

《네년은 대체 누구냐?》

《누구냐구? 이젠 말해주지. 죽은 놈은 영원히 비밀을 지킨다구 우리 주인나리께서 일찌기 내게 가르쳐주셨어. 난 저기 바다건너에서 의서를 빼올 임무를 받고 온 사람이야! 알겠어?》

《그럼, 왜년? 리해수대감의 애첩이라는건?》

《리해수는 무슨 말라빠진 리해수야. 난 그런 놈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놈의 얼굴을 본적도 없어! 난 허준의 이복형인 네놈을 통해 허준이 쓴다는 그 의서를 빼올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네놈에게 갔던거야. 다행히도 네놈이 계집이라면 개처럼 달려드는 색광이여서 쉽게 이곳에 발을 붙일수 있었어. 허준이가 쓴다는 의서를 빼오느라구 생명까지 내걸구 도박했으나 채 완성되지 않은 원고 한권밖에 손에 넣지 못했지. 그것두 절반짜리 원고말이야. 그래서 난 그놈이 원고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어. 기다리느라면 그놈의 경계심도 늦추어질것이고 그러면 우린 그 기회를 타서 의서원고를 훔치기로 작정했던거야.

헌데 미욱한 네놈이 허준을 정배지에 처넣었으니 우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였어. 색골같은 네놈때문에 우리의 대사가 수포로 돌아갔단 말이야! 그러니 쓸모없는 네놈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수미, 지금까지의 정을 봐서라두…》

수미가 획 돌아서더니 앙천대소하였다.

《하하하. 뭐, 수미? 정? 아직도 이 나리가 꿈에서 깨나지 못했구나! 야 이놈아, 난 수미가 아니라 일본인 후유꼬야! 그리구 무슨 도깨비같이 정 타령질이야? 너같은 수개한테 내 몸을 맡길 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린 이 후유꼬다!》

한동안 기염을 토하고난 후유꼬는 정배지에 가있을 허준을 생각해보았다.

환갑나이인 허준이가 꽤 지탱해낼가. 만일 그가 의서를 채 완성 못한 상태에서 죽는다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말것이였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후유꼬는 허모를 당장 태질을 해서 죽이고싶었다. 한아비의 피를 받고 나온 형제이지만 얼마나 천양지차인가.

《내 비록 우리 일본을 위해서 의서를 훔치러 왔다만 너의 이복동생이라는 허준인 역시 사내장부이고 영웅이야. 내 진심으로 그에겐 머리가 숙어진다.》

갑자기 허모가 벼락같이 일어서면서 자기옆에 있는 탁자를 들어 후유꼬에게 내던졌다. 순간 등을 돌리고있던 후유꼬가 몸을 휙 날리면서 탁자를 피하고는 다리를 휘둘러 허모의 머리를 드세게 들이찼다.

허모가 허궁 들리웠다가 옆으로 나떨어졌다. 다시 후유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자빠진 허모의 목을 무릎으로 내리쳤다. 허모는 순간적으로 기절하였다. 손가락으로 목을 짚어본 후유꼬는 장안에서 비상약을 꺼내들었다. 1돈만 물에 타서 먹으면 그 즉시로 미쳐버리는 극약이였다.

온갖 기억력과 인간적감정을 말살하고 오직 먹는것밖에 모르는 식물인간으로 화하는 약을 수미는 술에 타서 기절해 쓰러져있는 허모의 입을 벌리고 그안에 쏟아부었다.

죽여버리고싶어도 일도 성사시키지 못했는데 흔적을 남기고싶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아무 일도 없을것이다. 사람들은 제 동생이 류배갔으니 그로 하여 신경을 쓰다가 미친것으로 알고있을것이다.

수미는 방안에서 자기의 흔적이 될만 한것은 모조리 아궁에 처넣고 불을 달았다.

그리고 허모의 괴춤에서 손바닥만 한 문서를 꺼내들었다.

거기에는 허모의 심복들의 이름과 나이, 거처하는 곳이 밝혀져있었다.

후유꼬는 그속에 적혀있는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문서도 불이 황황 일고있는 아궁에 처넣었다.

그러고도 안심치 않아 방안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보고난 후유꼬는 정신을 차린듯 일어나앉은 허모의 얼친 얼굴에 귀쌈을 한대 갈겼다.

《빠가야로! (머저리같은 자식)》

왜말로 욕질하고나서 다시 조선말로 소리쳤다.

《네놈은 이젠 미친 놈이 되고말았으니 차라리 죽는것보다 못할거다!》

방안을 한번 휘둘러본 후유꼬는 어둠속으로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허모의 별장에서 새여나온 후유꼬는 그달음으로 석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석구의 세모눈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이 밤중에 웬일입니까?》

후유꼬가 별치 않다는듯이 한마디 내뱉았다.

《허모 그놈을 처리해버렸어요. 》

《그럼 죽였소이까?》

《아니, 기억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반편으로 만들어놨어요.》

《옥상의 정체를 그놈이 눈치챘나이까?》

《그건 아니예요. 그 우직스러운 놈이 글쎄 허준을 정배보냈다지 않아요.

조선왕이 급사한 기회에 그 미련한 놈이 글쎄 허준이를 복수한답시고 왕의 죽음을 어의인 그에게 책임을 들씌웠다나요. 그래놓고는 희떱게 구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글쎄, 이제 위리안치시키겠다고 윽벼르고있지 않겠어요.》

석구는 후유꼬의 조수격이다.

30년전 거제도의 약제사를 기습할 때 스물댓살이던 석구도 이제는 반백이 되였다. 더부룩한 머리칼은 색이 바래 윤기가 없었으나 사무라이의 잔인성은 오히려 죽지 않았다.

석구의 일본이름은 곤도, 삼포왜란때 뒈진 아비의 복수를 한답시고 돌아치다가 나고야의 손에 걸려들어 오늘까지 장장 서른해를 조선땅에 두더지처럼 숨어있었다.

일본의 규슈섬에는 후유꼬와 나이가 비슷한 딸이 있었다.

곤도의 집은 나고야가 돌봐주고있었다. 어서 빨리 그 저주로운 의서를 훔쳐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이라도 뚱땅거리며 살아볼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여태껏 이 나라에서 숨도 못 쉬고 살아오고있었다. 유일하게 의사를 소통할수 있는것은 요염하고 괴퍅하기 그지없는 후유꼬였다.

곤도가 혀를 찼다.

《원, 저런 놈 봤나. 여태까지 위리안치되였다가 살아남은 놈은 없다고 하던데. 그럼 허준이라는 의원놈은 그곳에서 섬귀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웨까. 만약 그렇게 되면 허준이가 쓰던 의서는 누가 쓰며 또 우리가 어떻게 의서를 빼오리까?》

후유꼬가 두눈을 쪼프리고 골똘히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의서를 빼내는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어요. 허모가 언제인가 말하는걸 들으니 허준이 이미 완성한 의서중에는 〈내경편〉이 네권정도이고 〈외형편〉도 역시 네권정도라 하였어요. 벌써 그것만 해도 여덟권이예요. 그리고 그때로부터 시일이 퍽 지났으니 아마 지금쯤 완성된 원고는 대략 열댓권은 실히 될것 같아요. 허준이가 살아돌아온다는 담보는 없어요. 그러니 우린 어떻게 하나 완성된 의서만이라두 빼내와야 해요.》

《적지 않은 분량이군요.》

《옳아요. 이것만 손에 넣어도 큰 의서를 넉근히 만들수 있어요. 나고야 겐이어른께서는 바로 이걸 요구하고계셔요. 이 열댓권씩이나 되는 원고의 알속에 나고야 겐이어른의 명함을 붙여 세상에 공포하면 이건 금전 몇천냥을 얻는것보다 더 큰 소득으로 될수 있어요.》

곤도가 머리를 기웃거렸다.

《요는 옳은데… 그 의서의 행방을 어떻게 찾겠소이까?》

《그게 문제예요. 전번에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분명 온 집안을 발칵 다 뒤졌으나 찾지 못하지 않았나요. 그걸 보면 집안에는 감추지 않았다는걸 말해줘요.》

곤도도 그 당시에 제 눈으로 목격한지라 딴소리를 할수 없었다.

《집안에 없으면 집밖에 있다는 소리인데… 혹시 마당 어디엔가 파묻지 않았을가요? 우리 사람들도 귀중품은 땅을 파고 감추지 않소이까?》

후유꼬가 눈을 깜박이였다.

《나도 바로 그 생각이예요.》

곤도는 후유꼬가 자기 말을 긍정해주자 흥이 나서 자기가 아는것을 열심히 쏟아놓았다.

《내 조선에 살면서 눈여겨 살펴보니 이 나라 사람들도 흔히 귀한 물건들은 오지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묻는 습관이 있습디다.》

《우리 일본의 풍속도 조선사람들이 건너와 퍼뜨린것이 많아요. 그렇게 보면 그 의서는 틀림없이 허준의 집마당 아니면 뒤울 어데인가에 파묻었을수 있어요. 헌데 땅속에 묻어놓은 항아리를 어떻게 찾겠어요? 쇠꼬챙이로 뚜져볼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온 땅바닥을 다 파헤쳐볼수도 없고… 이 일은 쥐도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해제껴야 하는 일이 아니나요.》

《그건 걱정마소이다.》

세모눈을 반짝이던 곤도가 얼른 일어서서 웃방에 올라가더니 방망이 하나를 들고 내려왔다.

《그건 뭘 하는거예요?》

곤도의 세모눈에 삵웃음이 스쳐지났다

《박달나무망치오이다. 저하고 같이 뒤울로 가시오이다.》

후유꼬는 영문을 모르고 곤도의 뒤를 따랐다. 뒤울 중간에 이르자 곤도가 멈춰섰다.

《자, 이제 내가 하는것을 자상히 보시오이다.》

곤도가 땅바닥을 박달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리니 탁- 탁- 하는 야무진 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는 여길 두드리는 소릴 한번 들어보시오이다.》

자리를 옮겨 그옆의 땅을 두드리자 텅- 텅- 하는 궁글은 소리가 울렸다.

《아, 알겠어요. 당신은 확실히 머리가 도는군요.》

후유꼬가 진정으로 감탄하며 탄성을 질렀다.

《나야 능한 장공인이 아니오이까?》

《헌데 이 항아리안엔 무엇이 있어요?》

《지금까지 나고야 겐이어른께 제가 보낸 비밀자료들이 다 이 항아리속에 있소이다.》

후유꼬는 다시한번 곤도의 빈틈없고 주도세밀한 일솜씨를 칭찬해주었다. 방안으로 들어와 후유꼬는 곤도와 구체적인 거사안을 토의하기 시작하였다.

《집이 비여있을 때 들어가서 렴탐해야 할것 같아요. 이즈음 그 집 안주인의 신경이 바싹 살아있을건 뻔해요. 아차 실수하여 그 신경을 설 다쳐놓으면 일을 그르칠수 있어요.》

후유꼬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의서의 은닉장소를 내탐하려는 자기들의 기도를 설유가 알아채는 날에는 그 의서가 뒤울이나 앞마당의 땅속정도가 아니라 자기들이 전혀 가늠할수 없는 깊은 산속에까지 영원히 묻혀버릴지도 몰랐다. 실로 심사숙고하여 대할 문제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집이 비여있을 때에 행동해야 해요.》

《옥상, 누구의 분부라고 거역하겠소이까.》

곤도의 달아오른 눈에 광기가 번뜩거렸다.

허나 일은 후유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후유꼬와 곤도가 허준의 집 앞골목에서 쌍심지를 켜고 눈을 밝혔으나 설유는 밖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을 번갈아가며 길목을 지키다가 랑패를 본 년놈들은 다시금 이마를 짓쪼았다.

곤도가 초조해하는 후유꼬의 마음을 눅잦히며 말하였다.

《안되겠소이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며칠 좀 더 기다려보소이다.》

후유꼬의 암고양이같은 눈에 새파란 불꽃이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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