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5 장 의서도적놈들
5
《저, 나리님!》
일을 마치고 집앞에 이른 허모가 대문을 열고 한발을 막 뜨락에 들여놓는데 등뒤에서 웬 녀인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마치 은방울을 굴리는듯 하였다.
허모는 흠칫하며 돌아섰다. 자기 집 대문앞의 비술나무뒤에서 소복단장을 한 웬 녀인이 서있었다. 첫눈에도 쭉 빠진 절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서 저런 미인이 내 집에 나타났는가? 허모는 얼굴에 무표정한 기색을 짓고 녀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녀인이 주저하며 허모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이였다. 나붓이 인사를 하고난 녀인이 얼굴을 들었다.
《나리님! 외람된 첩의 소행을 너그럽게 용서하소이다. 사실은 나리께 소청이 있어 련 사흘째나 이 집근처를 맴돌았나이다. 아녀자의 행실이 아닌줄 알면서도 생각끝에 나리를 찾아왔소이다.》
용건이 어쨌든 이것은 분명 허모에게 굴러온 먹이감이였다.
허모는 앞에 선 녀인이 대체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녀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낼듯 녀인이 무안할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갸름한 얼굴의 새까만 반달눈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사내들의 호감을 자아내는 길들이지 않은 야생말같은 성정이 엿보였다. 날이 선 코아래에 륜곽이 또렷한 입술이 꼭 다물려있고 말할 때마다 가쯘한 하얀 이가 별스레 눈길을 끌었다.
쪽진머리는 동백기름을 발랐는지 반지르르 기름기가 돌았고 허모로부터 두어걸음 사이 두고 서있는 녀인의 몸에선 코를 자극하는 생신하고 향긋한 체취가 풍겨왔다. 뭇사내들이 탐낼만 한 계집이 눈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허모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웬 계집인데 낯도 코도 모르는 우리 집에 찾아왔을가?
《청이란건 대관절 뭐냐?》
《저- 첩은 이전 대사헌 리해수대감이 돌봐주던 수미라는 녀인이옵니다.》
《뭐, 뭐? 리해수?!》
허모는 홀로 산길을 가다가 범을 만난것마냥 깜짝 놀랐다.
리해수라니?! 자기의 귀가 잘못 듣지 않았는가 하여 손가락으로 귀구멍을 쑤셨다. 그리고는 수미라고 부르는 미모의 녀인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리해수가 좌의정 정철과 함께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임금의 분노를 사서 외직으로 강등되여 어느 자그마한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딱히 그곳이 어디인지 허모는 모르고있었다.
도리상 어데로 갔는지 알아보는것이 옳겠지만 지금에 와서 리해수는 허모에게 있어서 다 파먹은 김치독같은 존재였다. 오히려 리해수에게 들이민 금은붙이가 (비록 많지는 않지만) 생이발이 뭉텅 떨어져난간것처럼 아깝기 그지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당초에 딴놈한데 붙었을걸 하고 생각하였다.
헌데 리해수켠에서 한입에 삼켜도 비린내가 나지 않을 생신한 계집이 나타나 은근히 교태를 부리며 현혹시키니 대관절 이게 무슨 연고일고?
허모는 속으로 바싹 긴장해졌다. 방금전까지만 하여도 계집의 미모에 마음이 끌려 머리속에서 흉측한 생각을 하고있던 그 감정은 허공에 던진 돌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순간 팽이머리가 부지런히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분명 그 무슨 부탁을 가지고 걸음을 하였을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열의 아홉은 금전에 대한 부탁일것이다. 부러운것없이 풍청거리던 대사헌벼슬에 있다가 어느 궁벽진 외직벼슬에 있자니 오죽이나 금전이 그리울가. 그래서 미인계를 쓰는것이 분명하였다.
허나 계집이 아무리 곱고 구미가 동한다 하더라도 금전만은 쉬이 내줄수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렇지 않다간 귀한 재물을 잃을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물건이란 한번 나가면 되돌아오는 법이 없는 지금세월에 그렇게 되면 손해볼것은 자기밖에 없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허모는 자못 너그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 대감어른은 무고하시냐?》
《네, 대감나리는 늘 허모감찰어른에 대해 칭찬하시오이다. 어수선한 이 세월에 그렇게 의리있는 관리는 보기 드물다고 입버릇처럼 외우나이다.》
정말 낯이 간지럽고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언제인가 리해수도 허준에게서 병을 치료받은적이 있었다. 그다음부터 리해수는 허모를 뜨아한 눈으로 치떠보았다. 아마 어데서 들었는지 허모가 허준을 옥에 처넣은 일을 두고두고 외우면서 그를 따돌림하였다. 허모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에 있던 량반이 벼슬이 옮겨가서 행여나 하고 리해수를 찾아갔더니 다짜고짜로 꾸지람이였다.
《내 자네를 헛보았어. 사람이 그러면 못써! 세상에 제 동생을 옥에 처넣는 그런 몰인정이 또 어데 있나? 그 허준이라는 명의가 자네의 이복동생이라면서?! 아무리 척을 졌다고 해도 제 동생을 모함하여 옥살이 시키는게 어디 사람이 할짓인가! 다시는 내앞에 얼씬거리지 말게! 등골이 다 선뜩하네. 제 동생을 잡아먹는 사람이 나라구 안 잡아먹겠나?!》
허모는 그 방을 어떻게 나섰는지 알수 없었다. 잔등은 화락하니 젖었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삶은 시래기마냥 어깨가 축 처져 돌아가는 허모의 귀전에 리해수의 가시돋친 마지막말이 따라왔다.
《어떻게 되여 저런 놈이 사헌부에 들어왔는고? 그걸 보면 박근원이 눈이 멀었지. 제 피줄도 물어메치는 이리같은 놈팽이를 등용했으니 말이야.》
그다음부터 쉰밥 대하듯 허모를 외면하던 리해수였다. 지평(사헌부의 정5품벼슬로서 정원이 두명임)으로 등용할 의향이 있나 가늠해보느라고 갔다가 메주만 먹은 허모는 아예 단념하고말았다. 사헌부의 장관인 리해수가 허용할리 없었다. 자기를 무슨 염병앓는 사람처럼 대하는 리해수밑에서 벼슬이 올라간다는것은 하늘의 무지개를 잡으려고 하는것만큼이나 허망한 노릇이였다. 솔직한 말로 리해수가 강직되였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제일 기뻐한것은 다름아닌 허모였다. 그에게 비록 많지는 않아도 섬겨바친 금은재물도 아깝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자기를 눈꼽찌만큼도 여기지 않는 그 태도가 더 밸이 꼴렸다.
헌데 그 리해수가 자기를 의리가 있다고 칭찬한다니 이 어디 될 말인가. 궁벽한 외지에서 고독스레 보내다나니 갑자기 성인군자로 되였는가. 그렇게 둔갑하지 않았다면야 가히 이런 말이 나올리 없었다. 아니면 이제 와서 허모라는 인간이 필요해서 손을 내미는것인가. 하여튼 소가 웃다가 꾸레미터질노릇이였고 고양이대가리에 뿔이 돋았다는 말이였다.
리해수가 그렇게 말할리 만무하였다. 그렇다면 이 계집은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걸가. 내 환심을 사려는게 분명한데 그 목적은 무엇일가. 분성적을 살짝 하였지만 타고난 미모는 한성시가에서도 보기 드문 인물이였다. 저 구중궁궐에 있다는 궁녀라면 대비할런지…
허모는 당장에라도 계집을 문초하여 그 속내를 파헤치고싶었다. 허나 자제하였다. 좀더 알아보자. 이 계집이 대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듣던중 제일 반가운 소리로군. 헌테 나한테 소청이 있다는건 무슨 소리냐?》
녀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소녀는 대감어른이 외직으로 내려간 다음 홀로 지내고있소이다. 대감어른을 따라 내려가겠다고 하니 나리께서 젊은 내인이 궁벽한 외지에 내려가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시면서 그냥 여기에 남겨두셨나이다. 그러면서 감찰나리의 소리를 하시면서 바쁜 일이 있거나 도움받을 일이 있으면 찾아가보라고 하셨소이다. 그러시면서 자기가 감찰나리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고 후회하였나이다.》
후유꼬는 슬며시 허모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리해수가 좋아하던 녀인으로 꾸미고 찾아왔으나 뜻밖에도 허모의 태도가 뜨아한것을 직감한 후유꼬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리해수와의 관계가 여의치 않은것이 분명하였다.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그의 기분상태는 그걸 말해주고있었다. 그렇다면?!
순간 후유꼬는 자기를 바라보는 허모의 눈빛에서 뿜어져나오는 색감을 간파하였다. 에두를것이 없이 직방 들이대야 한다. 호색한들은 색으로 다스려야 한다는것을 자기가 상대한 사내들을 통해서 체득한 후유꼬라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나다를가 상상외의 반응이 일어났다. 허모의 실눈에 생기가 띠였다. 긴장해있던 얼굴표정이 느슨해지고 점잖던 몸가짐이 퍽 자연스러워진듯싶었다. 말투도 제법 살갑기 그지없었다.
《네 혼자 산다니 고생이 막심하겠구나. 리해
그래, 네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그런건 아니오이다. 다만 나리의 명함을 익혀들었던지라 오늘은 그저 면식이나 익히자구 찾아왔소이다.》
《그럼 오늘 이렇게 모처럼 찾아왔는데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자.》
《괜찮소이다. 소녀가 초면에 어떻게 감히 나리의 집에 발을 들여놓겠소이까.》
《너의 집은 어데바루 있느냐?》
《남산골에 있소이다.》
허모는 다급히 자기의 말을 수정하였다.
《그러지 말구 소뿔은 단김에 빼란다구 래일 이 시간에 영추문앞에 와있거라. 그때 나와 다시 만남이 어떠냐?》
《!》
영추문이란 이전 경복궁의 서쪽에 있었다. 임진조국전쟁때 경복궁은 왜놈들에 의해 불타버렸으나 성문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이날밤 허모는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옆에서는 마누라가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코를 골고있다. 아이낳이를 하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젖가슴이며 살갗은 광택을 잃지 않았다. 허나 허모의 눈앞에는 마누라의 싱싱한 육체가 아니라 안개속에 싸인 미모의 녀인이 오락가락하였다. 마치도 다 들여다보이는 엷은 창가림속에 온몸을 드러낸 미인이 어서 오라고 손젓는것만 같은 느낌이였다. 분명 그 계집은 홀로 독수공방하는 외로움을 달랠길 없어 자기를 찾아온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내우하는것 같지만 속내는 사내의 품을 그리워하는것이 헨둥하였다. 생판모를 사내보다 그래도 리해수와 안면이 있는 이 허모에게 의탁하는것이 나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사흘씩이나 내 집 담장을 빙빙 돌며 만나려 했겠는가. 계집이란 사내가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법이다. 그것도 주지육림속에 절어있던 고관들의 품에서 젊은 미모를 밑천으로 기생하는 절색의 미인들은 올데갈데없이 그러한 부귀를 누리고싶어한다. 이 허모가 비록 사헌부의 말직벼슬인 감찰이라 해도 금은재물과 수완은 한 나라의 정승보다도 못하지 않으니 이런 천하절색의 미인이 제발로 찾아온것이 아닌가. 잠재해있던 자기과신이 머리를 쳐들었다.
허준이놈은 밤낮으로 의서요 뭐요 하면서 몸을 혹사하지만 난 평생을 이렇게 마음껏 환락을 누리리라.
허모는 비록 리해수의 흔적이 그 녀인의 온몸에 남아있다고 해도 놓치고싶지 않았다.
무릇 색에 밝은 사내들은 그 측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생둥이보다 사내를 다루는데 솜씨가 있는 녀인들을 즐겨찾는 법이다.
래일이면 수미(후유꼬)를 품안는다고 생각하니 계집질에 골이 빠진 허모이지만 가슴이 울렁거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튿날 영추문앞에서 수미를 만난 허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를 자기의 별장으로 데리고갔다. 수미의 집으로 가고싶었으나 남산골이란게 몰락한 량반들이 몰켜있는 곳이라 쉬쉬한 소문이 날수 있었다. 이 별장은 은밀한 밀담을 하거나 계집질을 할 때마다 리용하군 하는 곳이였다.
풍성한 주안상앞에 허모는 수미와 마주앉았다. 주안상을 들여놓은 하인이 여느때와 같이 눈치빠르게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밀랍초가 타며 은은한 빛을 뿌렸다.
정작 마주앉아보니 요염하기 이를데 없었다.
《네가 혼자서 남정도 없이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냐? 그래서 내 나의 옛 상관에 대한 추억이랄지, 그 어른과 인연깊은 너를 생각해서 차린 음식이니 사양말고 어서 들거라.》
두무릎을 단정히 꿇어앉은 수미의 눈에 감동어린 빛이 흘렀다.
《고맙소이다. 나리! 첩을 념려해주는 그 마음에 몸둘바를 찾지 못하겠나이다. 첩이 먼저 한잔 붓겠소이다.》
잔에 술을 부으려고 기울인 수미의 옆모습을 일별하는 허모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였다.
보기 드문 절색이였다. 용모가 아름다운 미인은 한성에도 많았고 또 그런 미인들과 정사를 나눈것이 한두번이 아닌 허모였지만 수미의 온몸에서 풍겨오는 관능적인 색감은 그에게 광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그 광기는 걷잡을길 없었다.
《얘, 수미야! 너도 한잔 들렴.》
처음엔 사양하는척 하더니 쫄곰쫄곰 마시는데 술이 들어가자 발그스레한 그 용모가 더욱 허모의 피를 끓였다. 어느새 허모는 수미의 곁으로 바싹 붙어앉았다. 허모가 한잔 하면 수미도 한잔 하는데 서로의 주량이 짝지지 않았다.
《하, 이자 보니 제법인걸. 오늘은 네가 곁에 있으니 술맛이 참 좋구나!》
허모는 말하면서 슬며시 수미의 허리를 껴안았다.
수미가 마지못해 응하는척 하면서 허모의 몸에 자기의 싱싱한 육체를 붙이였다. 계집을 대할 때마다 느끼군 하는 이상야릇하고 짜릿한 전률이 허모의 온몸을 휩쓸었다.
《그래, 리해수대감이 보고싶지 않느냐?》
어망결에 허모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튀여나왔다.
코를 자극하는 향긋한 냄새와 자기의 팔에 허리가 잡힌채로 할딱거리는 수미의 숨소리에 얼이 나가버린 허모였다. 무슨 말을 한다는게 불쑥 튀여나온 소리였다. 그와 함께 수미의 허리를 그러안은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이제는 수미의 몸이 허모의 몸과 하나로 붙어버렸다. 수미가 허리를 비틀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였다.
《아니, 나리! 이러시면 안되오이다. 날 놓아주세요.-》
허모는 아예 두손으로 수미를 꽉 그러안고 그의 동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지 마세요.- 리해수대감나리가 이걸 아시면 난 어떡해요? 아!-》
허모의 몸이 수미의 몸을 덮쳤다. 허모는 미친듯이 수미의 저고리고름을 잡아뜯었다.
어디선가 귀뚜라미소리가 음침한 야경의 정적을 깨뜨리며 청높이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