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4 장 왕실의 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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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에서 올라온지 반년이 흘렀다. 허준은 여전히 치료와 의서의 자료수집으로 바쁘고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였다. 그가 넘겨주는 자료들은 설유가 받아 분류하고 항목별로 정리하였다.
제1편 《내경편》에 대한 자료철은 점점 부피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허준은 밤늦게까지 자기가 치료한 자료들을 정리하고있었다. 그옆에서는 언제나와 한본새로 설유가 자료를 분류하고있었다. 한창 일에 열중하고있는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누가 왔나 보오. 무슨 급한 병자가 생긴게 아닐가?》
때없이 대문을 두드리는 병자들을 맞아들이는데 습관이 된 그들이였다. 설유가 하던 일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인차 설유가 기동을 등뒤에 달고 들어왔다.
《선생님, 안녕하셨소이까?》
그동안 허준은 기동의 곁방살이에서 벗어나 자기의 집에서 살고있었다.
내의원 판관이라고 그에게 량반들이 모여사는 장동근처에 기와집 한채가 차례졌던것이다. 집은 덩실했지만 방안은 검소하였다. 남다른게 있다면 커다란 탁자우에 놓여있는 종이뭉테기들과 설유가 항목별로 분류하여 차근차근 쌓아놓은 참지묶음이 있을뿐이였다. 또 방의 한쪽벽면에는 층층으로 된 서가가 있었는데 그 서가에는 그새 허준이 모아들인 의서들이 주런이 꽂혀있었다. 허준이 의아해서 물었다.
《늦은 밤중에 대체 웬일이냐?》
기동의 인상은 불안해보였다.
《선생님, 지금 삼남지방에서 두창(천연두)이 돌고있다고 하오이다.》
《뭐라구?》
허준의 얼굴에 놀라움과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벌써 산음에서만도 몇명의 두창을 앓는 병자들이 나타났다 하오이다.》
허준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장구름이 끼였다. 설유의 낯색이 새하얘졌다.
《두창이라 하면 험한 역려(전염병)인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말인가.》
허준의 말소리는 침통하였다. 아직까지 두창을 치료할 이렇다 할 치료처방이 없었다.
《알겠네. 내 좀 곰곰히 생각해보겠네. 자넨 며칠 있다가 다시 나에게 와보라구.》
《알겠소이다.》
기동이 돌아간 후에 허준은 붓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설유가 조용히 다가갔다. 남편의 심중에 그 어떤 파도가 일고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설유였다.
《어서 분부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무엇인지.》
허준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설유의 시선에서 힘을 얻은듯 탁자우의 자료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우선 이 자료들을 다 거두어넣소.》
설유의 눈이 애기사슴의 눈처럼 커졌다.
《아니. 어쩌실려구?》
《이제부터 두창에 대한 치료처방을 찾아야겠소.》
《그럼 정리하던 이 자료들은 어찌 하실래요?》
《그건 잠시 뒤로 미루기요. 의서를 쓰는것도 다 병을 고치자구 쓰는게 아니겠소. 지금 퍼지고있는 두창에 대한 치료처방들부터 먼저 찾아내야겠소.》
설유는 허준의 말에 동감이라는듯 두눈을 슴벅거렸다.
《옳아요.》
설유가 자료들을 치우는데 허준이 별안간 소리쳤다.
《참, 그렇지. 우리가 한성부로 올라올 때 선생님이 주신 수사본에 두창에 대한 자료가 있던 기억이 나오. 얼른 그것을 찾아봐주오.》
설유가 재빨리 서가에서 류이태의 수사본을 뽑아들더니 책장을 번졌다.
《여기엔 두창에 대한 병증세는 있으나 그 치료처방은 없군요.》
《그렇소?》
허준이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설유를 돌아보았다.
《그 증상에 대하여 선생님이 뭐라고 쓰셨는지 한번 들어보기요.》
설유가 맑은 목소리로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두창의 초기에는 열이 나면서 재채기와 기침을 하며 하품을 자주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얼굴이 벌겋게 되고 잘 놀라며 손발이 싸늘해진다. … 3일만에는 온몸에 구슬(발진)이 생기는바 먼저 붉은 반이 생기고 도드라지면서 점차 물집으로 된다. 이것은 곪아서 고름집으로 되며 고름집은 말라서 딱지가 되고 그것이 떨어지면 흠집이 생긴다. …》
허준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구슬이 돋기 전은 어떠할가?》
설유가 두눈을 반짝이더니 귀띔하였다.
《구슬이 돋기 전에는 상한증(풍한사에 의해 생긴 병증)세와 비슷하대요. 이때에는 해기(땀을 내서 병사를 몰아내는것)시키고 출두(발진이 나오게 하는것)시키는 림법(치료방법)으로 치료해야 할것 같군요.》
허준이 오른손주먹으로 왼손바닥을 마주쳤다.
《옳소, 그러니 승마갈근탕을 가감해서 쓰는것이 적합할거요. 그리구 또…》
방안을 거닐면서 허준은 또다시 혼자소리로 되뇌이였다. 설유가 머리를 갸웃하고 긴장해한다.
《그리고 풍한사를 받아 구슬이 잘 돋지 않을 때에는 패독산이나 삼소음에 몇가지 약초를 더 가감해주고 기혈이 허해서 구슬이 잘 돋지 않을 때에는 십선산을 써야 할것 같구만.》
《그게 적합할것 같군요.》
허준과 설유는 서로 묻고 대답하며 상대의 의견을 보충해주면서 밤깊도록 치료비방을 의논하였다.
허준은 지금까지의 자기의 치료경험과 의술을 깡그리 동원하였으며 의술과 약초에 대하여 허준 못지 않게 정통하고있는 설유가 이에 적극적으로 합세하였다.
며칠동안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교환하면서 두창치료비방을 연구하였다. 닷새째 되는 날 동쪽하늘이 푸름푸름 들리울무렵 허준은 설유와 함께 두창의 매 단계에 대한 치료처방을 비교적 완전하게 세워놓을수 있었다. 류이태의 수사본이 큰 밑천으로 되였다. 이것은 허준의 지금까지의 치료경험의 총화였으며 풍부한 의술경험의 산물이였다. 허준은 이틀간에 걸쳐 이미 세워진 치료처방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또 따져보았다. 확신이 생기자 허준은 기동을 찾았다.
《기동이, 자넨 빨리 이 처방을 가지고 산음으로 내려가게. 거기에 가서 류선생님과 상론하여 처방의 타당성을 다시한번 확인한 후에 병자들에게 적용해보게. 그리고 병자들의 반응상태와 효험을 잘 관찰하여 그 상황을 나에게 알려주게나. 나야 내의원에 매인 몸이니 쉬이 자리를 뜰수가 없지 않나. 그러니 자네가 책임지고 빈구석이 없이 처리하길 바라네.》
《알겠소이다.》
다급히 돌아서는 기동을 허준은 다시 불러세웠다. 설유의 손에 크지 않은 두루미가 들려있었다. 허준은 그 두루미를 받아 기동에게 주며 강조하였다.
《참, 내 잊을번 했네. 이건 검은참깨기름일세. 자네가 치료를 해야 하겠는데 이 검은참깨기름을 조금씩 마시게. 그럼 두창을 치료하면서 그 병에 걸릴 념려가 없어.》
기동의 눈에 격정의 잔물결이 일었다.
《선생님, 사모님! 정말 고맙소이다. 제 꼭 일을 빈틈없이 하고 돌아오겠나이다.》
《됐네. 어서 이길로 내려가게.》
기동은 연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씽 바람을 일구며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한달후에 기동은 한성으로 돌아왔다. 치료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는 기동의 말에 허준과 설유는 온 정신을 집중하였다.
《선생님의 처방은 병자들에게서 열명중 여섯, 일곱명정도에서 효험이 있었소이다. 그래서 류선생님과 부인께서 선생님의 기본처방에 몇가지 약초들을 더 섞어 치료하였나이다.》
《어디 좀 보세나.》
허준은 기동이 넘겨준 처방들을 다시금 세밀히 따져보며 분석해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료를 설유에게 넘겨주었다. 설유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적어나갔다.
《선생님, 이번에 두창을 앓는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보니 예상치 않았던 증세들이 많이 나타났소이다.》
《어떤 증상들인가?》
《대체로 열이 몹시 심하게 나면서 구슬이 하루동안에 다 돋아나는 병자들은 매우 위중하였소이다. 그리고 2일만에 구슬이 내돋은 병자들 역시 그 증세가 위중하였소이다. 미열이 나면서 3일후에 구슬이 돋은 병자들은 좀 증세가 경하였고 또 4~5일만에 몸이 싸늘하면서 구슬이 돋은 병자들은 더욱 경하였소이다.》
《음…》
허준은 이 모든 다양한 증상들을 설유더러 조목조목 적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 조목에 근거하여 또다시 그에 맞는 처방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보름이 지난 뒤 새로운 처방들을 보충하고나서 허준은 기동에게 말했다.
《이번엔 나와 같이 가세.》
《아니? 선생님께서 직접 가신단 말이오이까.》
기동은 물론 설유도 깜짝 놀랐다.
《내의원에서 승인할가요?》
그러나 기동의 우려는 그와 달랐다.
《선생님, 그러시다가 그 험한 역려에 옮기라도 하시면…》
허준의 립장은 단호하였다.
《관청일에서 몸을 빼는것은 나에게 생각이 다 있네. 그리고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라는 사람이 병을 무서워하면 절대로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하네. 그러니 다른 말은 더 하지 말자구.》
다음날 허준은 내의원의 실지 책임자격인 정(정3품)에게 장인 류이태가 사망직전의 위중한 병을 앓고있어 산음에 다녀오겠다고 통사정을 하여 겨우 열흘간의 시간을 승인받을수 있었다.
내의원에서 나오는 길로 허준은 기동과 함께 산음을 향해 말을 달렸다.
산음에 도착한 허준은 류이태와 죽순의 조언을 받으며 기동과 함께 밤낮으로 두창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그 나날에 허준은 두창에 대한 치료비방들을 날마다 더 새롭게 보충하여 완성해나갔다. 두창에 걸린 병자는 산음을 비롯한 경상도에서만이 아니라 한성부에서도 생겨났다. 먼저 남산골에서부터 병이 일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아침에 달래가 자기 집에 온 칠성에게 롱삼아 말했다.
《칠성아. 네가 왔는데 왜 내 눈이 이렇게 깔깔해질가? 네가 온것이 아마 싫은가봐.》
그 말에 칠성이가 투덜댔다.
《이젠 나같은건 건너다보기나 해요? 듬직한 서방이 생겼는데 나같은거야 그저 놀림가마리로 여기겠지. 흥!》
칠성이가 밤알을 량볼에 물자 달래가 깔깔대며 그의 코를 잡아당겼다.
《사내라는게 옹졸해가지구 무슨 푸념질이 그리 많아? 됐다. 여기 앉아 떡이나 먹어라. 어제 네 매부가 날 먹으라구 사온거야. 참, 내 말은 진짜야. 눈알이 깔깔한게 막 죽겠구나.》
그제야 칠성은 달래의 말이 롱말이 아님을 알았으나 인차 일없겠거니 하고 생각하였다. 헌데 오후엔 달래가 연방 하품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니, 칠성아! 오늘은 왜 이럴가? 청청대낮에 하품이 왜 이렇게 연방 나올가?》
칠성은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달래에게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섰다.
그날밤 달래는 열이 나면서 잠들수가 없었다. 겨우 잠들가 하다가 와뜰와뜰 놀라 깨나군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달래의 집에 들린 칠성이가 열이 나면서 와들와들 떨며 아래목에 쪼그리고 누워있는 달래를 발견하고 펄쩍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거 달래누이, 두창에 든게 아니요?》
고열에 시달리던 달래가 칠성에게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
《얘! 너 끔찍한 소릴 하겠니? 뭐가 두창이라는거냐?》
그러나 달래의 기대와는 달리 병은 점점 더 위증해지기 시작했다. 급해맞은 칠성이가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달래에게 말했다.
《누이, 조금만 기다려요. 내 얼른 가서 기동형님을 데려올게요.》
다급히 달려온 기동은 달래의 귀방울을 잡아보았다. 싸늘하였다. 급히 물었다.
《가슴이 활랑거리질 않소?》
달래가 간신히 머리를 끄덕이였다. 기동이가 놀라서 소리쳤다.
《두창이요! 이건 구슬이 돋을 징조요!》
《뭐라구? 아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내가 그 몹쓸 병에 걸리다니. 날 좀 살려줘요. 난 아직 젊지 않았나요. 기동오라버님, 날 좀 살려주세요!》
기동이가 그속에서도 야단부리며 고아대는 달래의 그 말이 우스워서인지 키득거렸다.
《소리치는걸 보니 아직 죽자면 멀었수다.》
《아니야, 난 그러다가 인차 죽을수 있어. 랑군을 만나 이제 깨 쏟아지게 사는가 했더니 그놈의 망할 두창이 하필이면 나한테 와가지구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굴가? 아이구, 오라버님! 날 좀 살려줘요.》
롱질 절반, 진담 절반인 달래의 목소리는 나중에는 울음소리, 넉두리로 번져졌다. 한마디 롱을 했다가 넉두리를 하는 달래를 보는 기동은 바빠맞았다.
《아, 좀 기다리오, 내 곧 약을 지어주지.》
달래가 도리머리질을 하였다.
《아니, 아니야, 난 허의원님한테서 치료받을테야! 이런 중한 병을 기동오라비가 꽤 고칠수 있어? 아이고- 칠성아, 얼른 허의원님한테 갔다오너라!》
기동이가 그 말에 신경질을 부렸다.
《이런, 난사라구야! 허의원님이 그렇게 바쁘신데 어떻게 오신다구 그래?》
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오르는지 달래는 헛소리치듯이 한본새로 고집하였다.
《아니야, 허의원님만이 날 살려줄수 있어!》
달래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기동은 칠성이를 돌아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칠성이, 얼른 가서 허의원님께 여쭈어봐라. 난 여기서 달래의 병을 돌볼게.》
《알았수다!》
칠성이가 문밖으로 냅다 뛰여나갔다. 잠시후 칠성이와 함께 허준이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누이! 누이가 그렇게도 찾던 의원님이 오셨수다.》
눈을 감고 죽은듯이 누워있던 달래가 그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그속에서도 정신이 또릿한지 자기가 할 소리를 다 하였다.
《이젠… 내가 살았구나! 허의원님이… 오셨… 으니 난… 이젠 살… 았… 어…》
그 말을 남기고 달래는 정신을 잃었다.
허준은 급히 다가가 달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두창의 구슬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는데 색이 검붉었고 속으로 꺼져들어있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위급한 상태였다. 달래의 온몸이 갑자기 경련으로 푸들푸들 떨기 시작했다. 기동이가 다급히 일어나 경련으로 가드라드는 달래의 팔다리를 붙잡으려 하자 허준이 소리쳤다.
《가만 놔두게. 이렇게 고열로 경련이 일 때에 꽉 붙잡으면 기혈이 돌지 않아 병을 더 위중하게 하네. 그리고 빨리 홍면산을 준비하게!》
홍면산은 전갈, 마황, 형개이삭, 천마, 감초가 들어간 약으로서 달래와 같은 증상의 치료에 쓰이는 약이였다. 홍면산을 달인 약이 들어가자 달래의 경련은 다소 풀려지기 시작했다. 이어 허준은 재차 가미일륙산(곱돌 240그람 <수비한것, 즉 물과 함께 보드랍게 간것임>, 감초 24그람, 주사 12그람 <수비한것, 룡뇌 1. 2그람을 고루 섞은 약>)을 깨끗한 물에 타서 먹이였다.
하루가 지나자 점차 열이 떨어지고 경련이 완전히 풀리였다. 허준은 재차 병독을 깨끗이 해제하기 위해 가미패독산을 달여먹이였다.
한주일후 달래의 병은 말끔히 나았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달래가 허준의 팔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애고, 허의원님이 아니였더라면 난 이미 저승길에 갔을거예요.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고!-》
그 모습을 보는 기동과 칠성이의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칠성이
허준의 피타는 탐구와 노력으로 하여 그처럼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던 두창에 대한 치료방법들이 점차 확립되여가기 시작했다. 허준은 설유와 함께 이 모든 자료들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그 이후 허준은 장기간의 탐구와 의술경험에 기초하여 1601년(선조 34년)에 상, 하 2책으로 된 《언해두창집요》를 완성할수 있었다. 언해란 우리 글로 된 책이라는 소리이다. 여기에서 평범한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지혜와 의술을 깡그리 바치려는 허준의 의로운 뜻을 엿볼수 있었다. 그는 의서를 하나 써도 일반사람들이 쉽게 읽고 실지 병치료에 써먹을수 있도록 우리 글로 쓰군 하였다. 《언해두창집요》뿐아니라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를 비롯한 의서들도 그의 이러한 의지와 민족애가 반영된 의서였다. 《언해두창집요》는 허준의 의학자로서의 량심과 불타는 넋이 깃든 또 하나의 귀중한 창조물이였다.
그런데 두창에 대한 허준의 이와 같은 치료는 오히려 함치우네들의 비난과 험담의 대상으로 되였다. 함치우는 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손가락을 하늘로 쳐들고 고아댔다.
《미친 지랄이야! 내의원 의관이라는 지체에 천한 백성놈들을 찾아가 그런 악성역려를 치료하다니, 그게 어디 말이 되느냐 말이야. 그러다가 그 역려가 관아에 아니, 궁실에까지 옮겨지면 어쩌자구 그런 망탕짓을 하는가.》
완칠이가 맞장구를 쳤다.
《옳소이다. 역시 천한 서얼놈은 올데갈데 없다니깐요. 그게 어디 감히 조정의 내의원 의관으로서 할짓이오이까.》
늙수그레한 의관이 그들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그래두 판관이 아니였으면 온 한성시가에 그 역려가 퍼질번 하지 않았수. 그러니 어찌 그르다고만 볼수 있겠소.》
그 말에 여러 의관들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수긍하였다. 함치우의 세모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그 의관의 얼굴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허나 함치우는 다른 말은 더 하지 못하였다.
한편 허모는 내의원 의관으로 발탁된 허준에게서 잠시도 예리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일은 허모의 생각과는 달리 예상외로 허준에게 유리하게 번져지고있었다. 내의원에 들어간지 1년도 되기 전에 벌써부터 허준을 두고 명의라는 평판이 조정의 관리들속에서 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허모는 먹은 살이 다 내리는것만 같았다.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그가 그처럼 하내비처럼 믿던 박근원은 귀양살이신세에 놓이고말았다. 사헌부의 장관으로 있던 박근원이 리이를 탄핵하다가 강계로 정배간것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오는것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근원이 실각되여 사라지자 허모로서는 닭쫓던 개 울담 쳐다보는 격이 되고말았다.
허나 허모는 다시 새로 대사헌으로 부임되여온 리해수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전 령상 리탁의 아들인 리해수는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황해감사, 대사간 등을 거쳐 대사헌으로 오른 사람이였다.
박근원이와는 전혀 달랐다. 뢰물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고 리기심도 그닥 보이지 않았다. 허모는 꾸준히 자기의 상전을 관찰해보았다.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못이 짬이 있어 들어간다더냐? 제아무리 현인군자라고 해도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서 허모는 허준이 다닌다는 내의원에 귀를 기울였다. 완기의 사촌동생인 완칠이 내의원에 있어 그에게 허준에 대한 여론을 알아보게 하였다. 산음현감을 하던 완기는 지나친 주색으로 페인이 되고 종당에는 암행어사출두에 걸려 봉고파직되였다. 그 소식을 듣고 허모는 계집질이라는것도 어찌 보면 사내들의 몸을 해치는 백해무익한 독약이나 같다고 생각하였다.
완칠이 불쑥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식을 안고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내의원의 이전 판관 함치우가 허준을 썩은 이발처럼 미워한다는것이였다. 허모는 어느날 남대문에서 길을 어기던 함치우를 일부러 찾고는 넌지시 물었다.
《내의원의 허의관이 의술이 높다던데 그게 사실이요?》
허모와 풋낯이나 아는 함치우였다. 함치우는 자기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허모가 살갑게 묻자 어떻게 대답할가 하고 잠시 궁냥하다가 언젠가 완칠이가 《허준이 사헌부의 허모감찰과 이복형제인데 두사람의 사이가 피맺힌 원쑤보다 더하지요.》라고 말하던것이 생각나 그 말이 사실인지 떠보려는 심산으로 아닌보살하고 이렇게 대척하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헌데 들리는 소문에 그가 허감찰의 이복동생이라던데 그게 사실이요? 그리구 서얼이라고들 하더구만.…》
허모는 아리숭하게 말끝을 사리는 함치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함판관은 참 귀가 넓구만. 언제 남의 가정내막까지 다 알아내셨소. 그리구 내 이복동생이 서자인데 어쨌다는거요. 다른 서얼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내 동생은 자기 노력으로 높은 의술을 소유하여 조정의 내의원 판관으로까지 발탁되였으니 난 그걸 자랑으로 생각하고있소.》
허모는 우정 함치우를 판관이라 괴여올렸다. 함치우는 자기앞에 서있는 허모가 권모술수가 능하다더니 과연 틀리는 말이 아니였구나 하고 생각하며 한수 더 떴다.
《하, 내 자네가 이복동생이고 서자인 허준을 그리도 높이 사는줄을 몰랐구만. 내 앞으로 자네의 그 자랑스러운 서얼동생님을 잘 돌봐주지.》
허모는 그 말에 머리를 수그리며 사의를 표하고는 간다는 말없이 휙 돌아섰다. 그러는 허모를 바라보며 함치우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허모란 놈은 듣던바 그대로 의뭉스러운 작자가 분명하였다. 함치우와 헤여져 자기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선 허모는 방안에 들어갈념은 하지 않고 뜨락을 오락가락 거닐기 시작하였다. 그의 실눈에 독기가 풍겼다.
(그리도 기운차던 뜸부기도 하지가 지나면 후줄근해진다는데 허준이 이 자식아, 올리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이야. 어디 두고보자. 내 네 자식을 기어이 매장하고야말테다. )
허모는 언제인가 한번은 기회가 오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함치우의 말에서 허모는 그것을 더 굳게 확신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