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3 장 한성에 나타난 시골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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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후 허준과 설유는 어린 예영이를 데리고 산음으로 향하였다. 산음을 떠난지 꼭 삼년만이였다. 허준이가 한성으로 떠나던 그해 겨울에 외할머니는 로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산음에 당도한 허준은 먼저 류이태를 찾아뵈웠다. 설유는 집에 가닿기 전부터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허준과 설유는 류이태의 앞에 공경스레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설유도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렸다.
《아버지! 저희들도 없이 홀로 사시느라 얼마나 고생많으셨나이까.》
류이태는 희색이 만면하여 흔연히 말하였다.
《고생은 무슨 고생, 보다싶이 내 몸은 건강하다. 청원 이 사람의 소식을 내 다 들었네. 정말 장하네. 자네의 소식을 들으니 내 한 십년은 더 젊어지는것 같다니. 그 인총이 많고 넓디넓은 한성바닥에서 명의로 성공하고 또 의과급제하였다니 내가 자넬 헛보지 않았어. 참말로 장하네. 자넨 이 산음을 떠날 때 나와 한 약속을 세해만에 실현했네. 저 한성에서부터 자네에 대한 소리가 들려올 때가 나에겐 제일 기쁜 날이였어. 정말 고마운 일이네.》
정녕 류이태는 허준의 스승이고 아버지였고 생의 은인이였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허준은 마음속의 진정을 담아 다시한번 절을 하였다.
《이 모든건 선생님께서 절 이끌어주고 가르쳐주셨기때문이오이다. 제가 오늘날에 이른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은혜오이다. 다시한번 저의 큰 절을 받아주사이다.》
류이태가 두손을 내저었다.
《왜 이러나? 그건 다 자네의 노력일세. 그리구 예영이 에미가 구실을 잘했기때문이지. 내 그전에도 말했었지만 오래전에 나한테서 배운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어. 허나 자네는 뜻을 이루었거든. 하지만 아직은 첫걸음에 불과해. 그때 내앞에서 다진 약속을 잊지 않았을테지?》
《제가 어찌 그걸 잊겠소이까. 자나깨나 그 생각뿐이오이다.》
《음, 그래야지. 자네가 그 뜻을 이루면 의원으로서, 스승으로서 또 설유를 키운 아버지로서 내 여한이 없겠네. 부디 그 뜻을 이루어주게.》
《그 말씀을 명심하겠소이다. 아버님!》
불쑥 허준의 입에서 아버님이라는 부름이 튀여나왔다. 류이태의 얼굴에 감개무량한 빛이 흘렀다. 그는 말없이 허준의 두손을 꽉 잡아쥐였다. 잠시후 류이태가 흐린 안색으로 물었다.
《집엔 아직 못 들렸을테지?》
《이제 찾아뵐가 하오이다.》
류이태가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자네 마음을 굳게 가지라구.》
허준은 눈을 크게 뜨며 다급히 물었다.
《아니, 어머니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생겼나이까?》
《어머니가 위급하네. 자네의 어머니가 적(배속에 생긴 덩이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고정된 위치에 있으면서 아픈 부위가 이동되는 일이 없이 고착되여있는것. 오늘날의 암)에 들었어.》
《적이라니요? 혹시 취(배속에 생긴 덩어리가 일정한 형태와 고정된 위치가 없고 아픔이 여기저기로 이동되는 병증)가 아니오이까?》
《분명 적일세.》
《무슨 적이오이까?》
《간적(간암)일세.》
설유의 입에서 탄식소리가 흘려나왔다.
《어마나, 어쩌다가…》
허준의 얼굴에 시꺼먼 먹장구름이 끼였다. 그러는 허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류이태가 말을 계속 이었다.
《작년초에 벌써 간적이 중기에 이르렀지. 그래서 리기활혈의 립법(치료법)으로서 목향지각환과 화중환을 써주었네. 그래서 금년초까지는 상태가 좋았었는데 그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되여 이젠 말기에 이르렀네. 지금 기혈이 몹시 쇠약해져 내 일전에 향사륙군자탕으로 보기, 보혈시키면서 여기에 활혈약을 적당히 처방해주었네. 임자 어머니가 일에 지장이 된다고 하면서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에 자네에게 알리지 않았네.》
허준은 어머니의 병이 더는 수습할수없이 위급하다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어서 빨리 가보라구.》
허준은 설유와 함께 허둥지둥 집으로 향하였다.
빈방에 홀로 누워있던 려월이가 앓던 사람같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서는 허준과 설유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앉았다.
《아니. 이게 아애비가 아니냐?》
《어머니!》
허준은 려월의 싸늘한 손을 꼭 부여잡았다. 설유 역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려월의 두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이게 대체 어인 일이시오이까?》
려월은 수척한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며늘애야, 울긴? 이젠 다 나았다. 이젠 너희들을 보니 살것만 같구나. …》
허준은 어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볼이 훌쭉 꺼져들어간 어머니의 얼굴은 누렇게 뜨고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그리도 부드럽고 맑던 얼굴에 도간도간 검붉은 반점이 나있고 귀밑머리는 반백이 되였다.
의원의 눈으로 직접 보니 어머니의 병은 상상했던것보다 더 위중하였다. 허준은 황황히 어머니의 맥을 만져보았다. 맥박이 겨우 팔딱팔딱 뛰고있었다. 칼로 저미는듯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자기의 감정을 어머니가 눈치채면 더 마음을 쓸것 같아 허준은 애써 자기를 다잡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눈을 내리깔고 허준은 조용히 품속에서 의과급제를 확인하는 《백패》를 꺼내여 려월에게 내밀었다.
《어머니, 보시오이다. 의과자격증이오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과거시험응시자에게 국가는 채점에 따라 합격자들에게 합격증을 주군 하였는데 문무과의 합격증은 붉은 색갈의 합격증이라고 하여 《홍패》라고 불렀고 생원진사시와 잡과의 합격증은 흰색이라고 하여 《백패》라고 불렀다.
강파른 손으로 려월은 새하얀 합격증을 받아들고 입속으로 되뇌이였다.
《교지. 의원으로 있는 허준은 의과에 제1번째로 합격한자이다. 계유년 X윌 X일(임금의 도장)》
《백패》에 쓰인 글을 한자한자 읽고난 어머니의 커다란 두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히기 시작하더니 그만에야 누렇게 뜨고 어둑컴컴한 여윈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늘은 정말 내 마음이 후련하구나. 이제는 이 에미가 맘을 놓고 눈을 감을수 있을것 같구나. 서자라고 그렇게 천시를 받고 과시장에서마저 쫓겨났던 아애비가 오늘은 이렇게 당당한 의과자격을 받다니, 참말로 꿈만 같구나!》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허준도 끝내 눈물을 흘리고말았다. 설유도 옷고름으로 연신 눈굽을 찍으며 그저 어린 예영이의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려월의 일생은 량반댁에 첩으로 들어와 어느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고통과 시름이 봄눈이 녹듯 일순간에 다 가셔진것만 같았다.
허준과 설유는 어머니와 오래동안 쌓이고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
아들과 며느리, 손녀를 맞은 려월의 얼굴에 다시금 생기가 오르는듯 하였다. 허나 그것도 하루이틀을 넘기지 못하였다. 이미 병이 너무 기울어진 상태였던것이다.
더구나 일구월심 아들의 일이 잘되기만을 념원하며 언제면 뜻을 이룬 아들을 다시 만나랴 하는 간절한 희망만을 품고 하루하루 지탱해오던 려월이다.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지는 속에서도 그 념원과 희망으로 이를 사려물고 다시 일어나군 하던 려월은 아들과 며느리를 만난 그 다음날부터 애써 지탱해오던 마음의 기둥이 급속히 무너지고말았다.
허준이 자기의 의술을 깡그리 발휘해보았으나 그 어떤 의술도 어머니를 구원할수 없었다. 말그대로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날 려월은 혼미해지는 의식을 가다듬고 아들과 며느리를 조용히 불러앉혔다.
허준은 어머니가 마지막숨을 몰아쉬고있다는것을 피부로 느끼고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 짜내며 어머니가 힘겹게 입을 떼였다.
《얘들아! 내 명이 이젠 다된가부다. 그새 너희들이 이 못난 에미로 해서 고생이 많았지? 아들애야 그리고 며늘애야! 사람이 한생을 사느라면…》
맥이 없는지 어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때이르게 건너간 눈귀의 주름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굴러내렸다.
허준은 말없이 잔약한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설유가 손수건으로 어머니의 눈가장자리에 맺힌 눈물을 정히 훔쳐주었다.
한참후에 눈을 잔조롬히 뜬 어머니가 조갈든 입술을 감빨며 띠염띠염 말을 이어나갔다.
《아들아, 내 아들아, 부디 명심… 하거라. 난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만 넌 꼭… 네 뜻대로 곧추 가거라. 뒤돌아보거나 주저하지 말구 말이… 다. 알겠냐?》
허준은 눈물을 머금으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어머니의 말씀을 잊지 않겠소이다.》
어머니가 한손으로 더듬하며 설유의 손목을 잡아쥐려고 하자 설유가 제꺽 어머니의 손을 두손으로 부여잡았다.
《며늘애야! 너도 어려서 친부모를 왜놈들에게 다 잃구 류선생님손에서 자랐는데… 난 너를 친딸로 여겼어, 그래서 너의 친어머니가 되여주자고 했더니 이젠 안되겠구나. … 예영이 애비를 잘 도와줘라. 아애빈 어려서부터 마음이 착하고 뭘한다 하면 끝을 보고야마는데 네가 옆에서… 그리구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자꾸나. 준아!》
《예- 어머니!》
《혈붙이 하나 없는 설유를 내대신 어머니가 되여주고 또… 기어이 둘이 마음합쳐 준이가 만들겠다던 의서를 꼭 완성하거라. 의서가 다되면 나에게 꼭 알려다우.… 내 땅속에 가서도 너희들의 행운을 빌… 련… 다.》
《어머니!》
허준과 설유는 마지막유언을 남기는 어머니의 품에 동시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얘들아… 내 마지막으로… 어디 한번 안아보자.》
《어머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의 잔약한 두손이 허준과 설유의 잔등을 내리쓸더니 그만에야 스르르 미끄러져내렸다.
허준은 어머니를 부여안고 몸부림쳤다.
아,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나서 처음으로 허준은 소리내여 울었다. 단 하루라도 기를 펴고 사셨더라면 허준의 마음이 이리도 아프지 않았을것이다.
새삼스레 허준은 자기의 의술이 아직은 높지 못하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머니의 운명이 그러하다쳐도 의원인 자기의 의술만 높았어도 어머니는 더 오래 사실수 있었을것이 아닌가. 자기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어머니를 눈을 펀히 뜨고 저세상에 보냈으니 허준아, 너는 불효자식이로다! 인간세상이야 내 힘으로 어찌 바로잡겠냐만 의술만 높으면 사람들이 장수하며 오래 살수 있을게 아닌가. 그렇다. 내 기어이 의술의 집합체인 의서를 남겨 사람들의 생사여부에 실지 도움을 주리라.
이 길이 어머니에게 못 다한 효도를 다하는 길이라고 허준은 생각하였다.
어머니를 정히 감장한 후 허준은 삼년상을 치르며 고향에 그냥 남았다. 살아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를 늦게나마 하고싶었다.
달포가 지난 어느날 어머니의 봉분옆에 지어놓은 초막으로 류이태가 찾아왔다. 상복을 입고있는 수척한 허준에게 류이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임잔 언제까지 예서 있을텐가?》
《네?》
뻔한 일을 묻는 류이태를 허준은 어리둥절하여 쳐다보았다.
《이렇게 계속 어머니를 지킬 심산인가 말이네?》
《아니,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인지…》
《큰일을 눈앞에 두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상복을 입고있으려나?》
그제서야 허준은 스승이 묻는 취지가 깨도되였다.
《선생님!》
다른 말을 더 할수 없었다. 너무나도 스승에 대해 잘 알고있는 허준은 그가 왜 삼년상을 치르고있는 자기의 심중을 모르랴 하는 생각에 구태여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후에 그 침묵을 깨뜨리며 류이태가 입을 열었다.
《자네심정은 십분 리해되네. 하지만 이렇게 하는것이 진정으로 어머니를 위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짧은 생각일세.
림종시 어머니가 자네에게 당부한것을 벌써 잊었나? 자네의 뜻을 성사시켜 의서를 만드는것이 바로 어머니가 바란것이고 또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길이 아니겠나.》
류이태는 자기 말에 대한 허준의 반응을 가늠하려는듯 그새 눈이 쑥 들어간 그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넨 큰뜻을 품은 사람이 아닌가. 자네가 한성부로 떠날 때 내 말했네만 나도 일찌기 큰 의서를 쓸 뜻을 품고 나섰으나 일생에 시간이 모자라서 그 뜻을 미처 이루지 못했네. 큰뜻을 품은 사람에게서 제일 귀한것은 다름아닌 시간일세. 자네의 뜻대로 큰 의서를 쓰려면 일생을 뛰고 또 뛰여도 시간이 모자랄걸세. 헌데 그 금같이 귀중한 삼년세월을 어머니의 상을 치른다면서 이 초막에서 흘려보낸다는게 난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일세. 부지런히 병자치료를 하고 그 과정에 얻은 경험들을 종합분류하여 의서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료를 부단히 축적해야 할 자네가 아닌가. 삼년상을 치르는것이 물론 조상전래의 법도이지만 큰일을 위해서는 때론 작은것을 희생할줄도 알아야 성공할수 있네. 그래 앞으로 자네의 뜻을 이루어내는 로상에서 이보다 더 큰 불상사와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 있다 하면 어쩔터인가.》
류이태의 말소리는 점차 허준에 대한 질책으로 넘어갔다. 허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스승의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있었다.
《내 구태여 자네에게 훈시할 생각은 없네. 허나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효도가 무엇이겠는가를 명심하고 옳은 결심을 내리길 바라네.》
이윽고 류이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적스적 산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스승의 허리는 별로 더 구부러지고 걸음걸이도 휘청거리는듯싶었다.
(선생님!-)
다음날.
허준은 어머니의 묘소앞에 꿇어앉았다. 그옆에는 설유가 소곳이 꿇어앉아있었다. 이 시각 허준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수 없는 격정이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어머니, 불효막심한 이 아들을 부디 용서해주소이다. 허나 큰뜻을 위하여 용단을 내리고 떠나가오이다. 기어이 내 의지와 뜻을 굽히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이 길에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의서를 완성한 날 다시 어머니를 뵙겠나이다.
어머니, 그날을 꼭 믿어주십시오.)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허준은 오래도록 어머니의 묘앞에 서있었다.
며칠후 허준과 설유는 류이태의 바래움을 받으며 산음고을을 떠나 한성부에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