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7

 

허준은 이제는 류이태에게 죽순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으리라 생각하였다. 왜 그런지 두사람사이가 범상치 않은 관계로 여겨지면서 방황하던 자기의 운명을 돌변시킨 두 사람의 일이 마치 자기의 일처럼 여겨졌다.

류이태는 치료를 마쳤으나 집으로 돌아갈념을 하지 않고 주밋거리는 허준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임자가 오늘따라 웬일인가? 나에게 무슨 할 얘기가 있는가본데 주저말고 말하게나.》

허준은 말없이 품안에서 죽순이가 주었던 의서를 꺼내놓았다.

《이게 뭔가? 아니, 이게 어떻게 자네한테 있나?》

죽순이가 준 의서는 《향약채취월령》이라는 의서였다. 류이태가 처음 의술을 배울 때 그의 스승이 그에게 주었던 의서이다. 한권으로 된 이 의서는 세종5년(1423년)에 당시 명의였던 로중례가 유효통, 박윤덕 등과 편찬한 후 다시 검토를 거쳐 세종13년(1431년)에 출판된 책이다.

책을 펼치는 류이태의 손이 후두둑 떨렸다. 맨 앞페지에 류이태의 자필이 있었다.

《의술즉인술(의술은 곧 인술이다.)》

허준을 바라보는 류이태의 눈에 이름못할 감회가 어렸다.

《룡천을 떠나올 때 죽순의원님이 저에게 주신것입니다. 앞으로 훌륭한 명의가 되라고 하시면서 이제 산음에 가면 류이태라는분을 꼭 찾아가 의술을 배우라고, 그 의원님이야말로 자기의 한생에서 제일 존경하는 의원이고 잊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이 책을 기념으로 저에게 주었소이다.》

설유가 눈이 동그래서 아버지와 허준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책장을 펼치던 류이태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바라지창을 열고 북녘하늘가를 응시했다. 놋대야같은 둥근달이 유유히 흘러가고있었다. 아마도 달에게도 제나름의 오고가는 길이 있는가보다. 저 북쪽하늘가 어딘가에 있을 룡천땅의 못 잊을 사람을 그려보는듯 류이태는 못을 박아놓은듯 한자리에 오래동안 서있었다. 방안에 쥐죽은듯 한 정숙이 흘렀다.

허준은 저도모르게 따라 일어섰다. 설유가 조용히 다가가 아버지의 팔을 부여잡았다.

《아버지!-》

딸애의 부름소리에 밖에서 시선을 뗀 류이태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번뜩이였다. 류이태가 손으로 무의식적으로 설유의 동그란 어깨를 어루만지더니 별안간 방안의 정숙을 깨뜨리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달도 밝은데 우리 토방에서 저녁밥을 먹자꾸나. 청원(허준의 자)이 사람! 임자두 오늘밤은 여기서 한술 굼때는게 어떻겠나?! 그리구 설유야! 너 얼른 이 사람네 집에 가서 우리 집에서 밥을 먹으니 기다리지 말라구 일러라! 그새 내 얼른 밥상을 차리지.》

설유가 반색하며 대척한다.

《아이, 아버지가 어떻게? 제 얼른 갔다와서 차릴테니 아버진 얘기나 하세요.》

바빠난것은 허준이였다. 아직 이 집에서 식사를 한적은 없었다. 우선 류이태가 아무리 늦게까지 치료가 끝나도 밥을 먹고 가라고 한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 설유와 한밥상에 마주앉는다는것을 생각도 못해본 허준이다.

헌데 오늘 뜻밖에 죽순의원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가 이런 딱한 처지에 빠진것이다.

바빠하는 허준을 바라보던 류이태가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말을 던졌다.

《임자 <황발이 가감역>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나?》

《예? 그건 무슨 소리오이까?》

류이태는 토방에 나와 올방자를 틀고앉으며 허준더러 나와앉으라고 하고는 이야기의 꼭지를 뗐다.

《이 일은 경상도 함안에서 있었다고들 하고 또 평안도에서 있었다고들 하는데 어데서 있었는가는 중요치 않지. 이 일은 어느 자그마한 고을에서 있은것인데 그 고을엔 남편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살고있는 한 과부가 살고있었다누만.

시집가서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남편이 덜커덕 죽어 과부가 된 녀인이라 자식이 있을리 만무하지. 단지 있다는건 심심풀이로 기르는 <황발이>이라는 개 한마리뿐이였네. 온 몸뚱아리가 흰털로 덮인 이 개는 유독 앞발에 누런 털이 있었다는지. 그래서 동네에서는 그 개를 <황발이>라고 불렀고 동네에서는 그 집에 자식 하나 없으니 개이름을 따서 그 집을 가리켜 <황발이네 집> 이라고 했던가보네.

헌데 문제는 이곳 현감으로 내려온 량반자가 돈냥이나 있다는 집을 탐문하다가 황발이네 집이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이곳 고을에 황발이라 부르는 한 백성이 살고있는데 관내의 토목공사와 온갖 조세반납에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니 얼마나 갸륵하오이까, 그러니 성은을 베풀어 이 황발이에게 고을 선공감 가감역을 제수하여주시면 고을정사에 큰 도움이 될듯 하오이다.> 하지 않았겠나.

선공감이라는게 주로 토목공사와 관련한 일을 주관하는 관청이 아닌가. 그런 선공감에서 종9품인 가감역벼슬이란 림시로 임명하여 일을 시키는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자리라 조정에선 그럼 그렇게 해라 하고 승인하지 않았겠나.》

허준은 엄정하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류이태가 구수하게 이야기를 펴놓는것을 희한하게 여기면서 이야기판에 끌려들어갔다.

《그다음에 문제가 터졌지. 글쎄 황발이가 사람이름이 아니라 개이름이라는것을 알리없는 관속들이 큰 벼슬이나 하사받은것처럼 꽹과리를 치고 새납을 불면서 과부가 사는 집으로 욱- 밀려갔지. 혼자서 외롭게 살던 과부댁이 갑자기 쾡창거리며 관속들이 욱 밀려오자 무슨 일인가해서 눈이 퀭해졌지. 리방이란자가 너스레를 떨며 <이 집에 대통운이 텄수다. 이 집 황발이의 훌륭한 소행이 조정에까지 상주되여 나라님께서 크게 기뻐하셔 선공감 가감역이라는 큰 벼슬을 하사하였으니 경사면 이같은 대경사가 어디 또 있겠수.> 했다지 않나.

마당에서 저혼자 이리 딩굴고 저리 딩굴며 놀던 황발이가 쾡창거리며 숱한 인총들이 몰켜오자 이 무슨 변이나 하고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있던 과부가 황발이가 죽어라고 짖어대자 돌따서서 <이놈의 황발아! 왜 이리 승악스레 짖느냐? 워리, 워리, 우리 황발이! 착하지, 그만 짖어대렴.> 하며 달래였다네.

챠, 이러니 야단이 아닌가. 그제야 관속들이 황발이가 사람이름이 아니라 개이름이란걸 알았지. 모여섰던 사람들이 고금에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라 키득거리는데 바빠난것은 리방이지. 왜냐면 제가 원님의 지시를 받고 문서를 만들어올렸고 원님이란 작자는 알아볼 생각은커녕 저에게 돈을 안겨주는 화수분을 찾았다고 얼씨구 좋다 하구 조정에 상소했으니 이제 책임을 물으면 어떻게 되겠나? 글쎄 그건 그렇다치구 당장은 자가사리 끓듯 모여든 백성들앞에 이 무슨 망신인가. 그들이 키드득거리는 소리가 귀에 안들어올리 없지.

얼결에 나온다는 소리가 <그놈의 개새끼! 은인도 몰라보구 극성스레 짖어대는군.> 하는데 과부가 그 말에 대꾸하기를 <그럼요. 우리 황발이가 다른건 몰라두 짖는것 하나만은 딱소리나지요. 작년 대보름날에 도적이 우리 집에 들어오려구 울담에 붙었을 때 이 황발이가 지금처럼 승악스레 짖어댔지요. 하 그통에 그 도적이 똥줄을 갈기고 뺑소니쳤다오.> 라고 했다네.

리방이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며 <바로 그거란 말이요. 그때 황발이가 목이 쉬도록 짖어댔으니 망정이지 무슨 일이 날번 했소?! 그 도적이 이 집의 재물은 물론 온 마을을 란도질할번 하지 않았소. 그리구 아주머니가 그 도적놈을 잡으려다가 목숨을 잃을번 한것을 이 황발이가 제때에 방지했단 말이요. 그 공적이 하도 기특해서 조정에서 황발에게 선공감 가감역이라는 큰 벼슬을 하사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 이 집에선 상납전과 중비를 크게 내야겠소.> 라고 소리쳤지. 그래서 과부댁은 상납전 오백냥에 중비 삼백냥을 울며 겨자먹기로 관가에 바쳤다고 하네. 량반자들이 벼슬을 놓고 하는 처사가 바로 이렇다네.》

류이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옛말처럼 하는 이야기였으나 허준은 그 말속에 숨은 그의 진의도와 자기의 옹색한 마음을 풀어주려는 그 웅심이 헤아려져 류이태에 대한 존경심이 더 솟구쳤다.

《아버지! 저녁이 다 되였으니 어서 식사하시와요.》

설유가 차린 저녁상은 자못 정갈스럽고 맛스러웠다.

질그릇에 무슨 국인가를 담아들여왔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고소한지 허준의 위를 자극했다. 멸치젓이며 나박김치 그리고 초장을 들여오더니 나중엔 가늘게 썬 무우를 놓은 하얀 밥그릇이 들어왔다. 한성이나 평안도음식만을 맛보던 허준이라 처음 보는 음식들에 호기심이 동했다. 설유가 한되들이 방구리에 소주까지 덧들여와 자못 분위기가 흥성이였다. 설유가 푸른빛이 도는 옥돌잔에 아버지와 허준에게 술을 붓자 류이태가 《자, 어서 쭉 한잔 내게.》 했다. 원체 녀인들만 사는 집이라 술상에 마주앉은적이 드물었으나 허준은 웬간한 사람들을 우습게 볼 정도로 주량이 여간 아니였다. 허나 좀처럼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사내들이 흔히 주량은 도량이고 호걸은 주량이 세야 한다고 저들의 폭주를 변호하지만 허준은 술은 사람에게 유익한것보다 유해로운것이 더 많으며 사내들중에 술로 해서 속절없이 파묻힌 인생이 더 많다고 여기고있었다.

《자, 어서 한잔 쭉 내게!》

저부터 술 한잔을 내고난 류이태가 질그릇에 숟가락을 대더니 희색이 만면해서 좋아했다.

《아니, 이게 풍장어국이로구나. 어데서 풍장어가 나서 이렇게 국을 끓였나?》

《아까 보패네 집에서 아버지에게 드리라구 가져왔더군요. 아버지가 걷지 못하는 저네 할아버지의 다리를 낳게 했다면서 할머니가 보내는것이래요.》

《그렇다구 막 받으면 안되느니라. 그 집에서도 어쩌다 생긴것인데…》

《사천에 사는 보패네 오빠가 며칠전에 왔다가면서 가져온것이래요. 그 집 할아버지가 우린 맛을 못봐두 류의원댁엔 무조건 보내야 한다구 했다는가봐요.》

《그래두 그렇지, 그럼 그 집에 뭘 보내주지.》

《그래서 집에 있던 멸치젓을 좀 보내줬어요.》

허준은 풍장어국이란게 무슨 소린지 알수 없어 국에 숟가락을 넣고 빙빙 돌려보았다. 분명 물고기국인데 국에 콩나물, 록두나물, 고사리, 파가 들어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비린내는 전혀 없고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구미가 동했다.

그러는 그의 모습을 일별하며 류이태가 말을 붙였다.

《임잔 아마 풍장어국이 처음일테지?》

《예, 난생처음 맛보오이다. 물고기국같아보이는데 풍장어란건 무슨 고기인지…》

《풍장어란건 여기 경상도내기들의 사투리인데 바다뱀장어를 두고 하는 말이네. 우리 경상도에선 풍장어국을 귀물로 쳐주는데 풍장어를 손질해서 소금으로 잘 씻은 다음 푹 고아서 채에 걸러 뼈를 추려내지. 그다음에 콩나물, 록두나물, 고사리, 파, 방아잎을 국물에 넣고 끓인다음 양념장을 만들고 산초가루와 후추가루를 치면 국이 다 되네. 비린내가 나지 않는것은 방아잎과 산초가루를 쳤기때문일세.》

허준은 료리에도 해박한 류이태를 보면서 안해없이 딸 하나를 데리고 살다나니 자연히 그렇게 되였는가 생각하며 풍장어국을 한숟가락씩 입에 넣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별맛이였다. 술이 서너잔 오가니 류이태가 말이 많아졌다.

《설유야! 오늘은 이 아버지가 말이 좀 길어진다구 탓하지 않겠지?》

설유가 눈을 핼죽거리며 아버지에게 밉지 않은 웃음을 보냈다.

《내 오늘 이렇게 임자와 술을 드니 기분이 흥그러워 그러니 량해하게.

그럼 풍장어에 대한 말을 하나 마저 들어보게나.

이 풍장어란 놈이 귀물이긴 귀물이야. 언젠가 나이 쉰이 지난 사람이 그 나이에 재취를 한가보네. 본처의 자식들은 다 시집가구 장가가구 후처와 둘이서 사는데 그 새색신 갓 스물이 지난 젊은 녀인이야. 헌데 어찌된 일인지 자식이 생기지 않거던. 그 새색시라는게 우리 설유보다 좀 우인 녀인인데 (그 순간 설유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거 생야단이 아닌가.

그래 하루는 친구들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친구들이 그다음날로 어느 음식점으로 끌고들어가서 이 풍장어국을 대접했더라나. 그것도 매일 세끼씩 닷새째나 말일세. 새색시는 남편이 아침이면 집을 나갔다가 저녁이면 들어오는게 이상하지 않을수 없었네. 헌데 엿새째 되는 날에는 일찌감치 들어와 척 남편이 기다리는데 색시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네. 그야말로 며칠새 제 남편의 기력이 황소같지 않겠나. 늙은 홀애비한테 시집와서 일생을 망쳤다구 후회하던 색시가 그 다음해에 떡돌같은 아들을 낳구 련이어 아들만 둘을 더 낳았다지. 후에 색시가 그 비결을 알고 남편에게 이 풍장어국을 매일 대접했다더군. 그사내가 아흔이 넘도록 살면서도 기운이 웬만한 장정 우습게 보았다니 그게 바로 이 풍장어의 덕이라고 볼수 있지.》

허준은 말없이 국을 뜨기만 하였다.

《내가 왜 밥상에서, 그것두 우리 설유앞에서 이런 말을 꺼리낌없이 하는가?

그건 말일세. 명의가 되려면 섭생에 대해서도 해박하게 꿰들고있어야 한다 그 말일세. 우리 나라의 약초를 향약이라 하면서 그 향약을 리용하여 치료법을 발전시킨 우리 선조들은 사람들이 늘 먹는 음식과 관련한 치료비방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였네. 임자가 앞으로 명의가 되고 또 의서를 쓰려면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물론 산에 있는 산나물과 짐승들, 바다에 있는 물고기 지어 길가의 나무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그를 통한 치료비방을 다 알고있어야 하네.》

허준은 생각지 않게 마련된 음식상앞에서까지 의학도의 본분을 깨우쳐주는 류이태앞에서 다시금 머리가 숙여졌다.

풍장어국에 무우밥을 달게 먹고나니 퍼그나 달이 기울어졌다. 무우밥은 이 산음에 와서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다. 여기 경상도에서는 섣달 그믐날에 먹는 생무우가 산삼과도 같고 여러가지 부스럼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하면서 일상적으로 무우밥을 해먹는 풍습이 있었다.

밥상을 물리고난 류이태가 토방에 걸터앉고 그 량옆에 허준이와 설유가 앉았다.

류이태는 만시름 잊고 흘러가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회억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아마 내 이야긴 설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가보네. 이젠 설유도 이렇게 자랐으니 다 말해도 일없지.

난 본래 해변가 고성에서 나서자란 사람일세. 그리고 설유 저애의 친부모들은 저 거제도에서 한생 살아왔지. 아마 그때가 내가 의술을 한창 배울 때였지.

스승을 따라 거제도에만 있다는 희귀한 약초를 수집하러 갔던 나는 어느날 옥녀봉에 올랐다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을 목격하게 되였네.》

그때의 광경이 떠올라서인지 류이태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의 눈가에 이름할길 없는 비애가 흘러넘쳤다.

옥녀봉산자락에는 한채의 자그마한 산전막이 있었다. 후날 류이태가 들은데 의하면 약초를 캐는 젊은 의원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다섯살난 귀여운 딸이 있었다.

옥녀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던 류이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분명 인기척이 났는데 하고 귀를 강구던 류이태는 멀지 않은 곳의 덤불속에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을 띄여보게 되였다. 주위를 살펴보고 뛰여가보니 젊은 웬 녀인이 간신히 숨을 톺고있었다.

막상 뛰여갔으나 너무나도 처참한 참상에 마주볼수가 없었다. 스물서너살쯤 된 녀인의 옷자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엔 피가 랑자하였던것이다.

땅을 그러안고 쓰러진 녀인을 조심히 안아 돌려보니 녀인의 품속에 댓살된 처녀애가 기절해있었다. 그러니 녀인은 마구 란도질하는 칼부림속에서도 제몸으로 아이를 막아 구원했던것이다.

부랴부랴 머리에 둘렀던 베수건을 샘물에 적셔 피투성이 된 녀인을 씻어줄 때였다.

죽은듯이 의식을 잃고있던 녀인이 가까스로 눈을 뜨더니 류이태를 찾는것이였다.

《이보-세-요. 괜한짓이예요. 난… 괜찮으니 이애를…》

류이태는 녀인의 어깨를 그러안고 알겠다는듯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녀인은 《이애 아버지는… 저기 불탄 집앞에… 왜놈들이 애아버지의 약초비방의서를… 그리구 이애 이름은 설-유- …》 하더니만 류이태의 무릎에 머리를 떨구었다.

녀인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아이를 살펴보니 겨우 숨을 쉬는데 어찌나 맥이 없는지 당장 숨질것만 같았다.

류이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애만이라도 살려야 한다!

높고 험한 옥녀봉을 샅샅이 뒤지며 약초를 찾아헤매다나니 기진맥진한 류이태였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녀인을 움푹 패인 곳에 눕혀놓은 다음 아이를 안고 불탄 집자리에 가보니 자그마한 초가집은 연기로 사라지고 그앞에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장정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두손에 꽉 틀어쥔 도끼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어렵지 않게 사태의 진상을 알수 있었다. 쯔시마(대마도)에 있는 왜놈들이 드문히 쳐들어와 략탈질을 자행하던 때였다. 놈들의 손에 온 집안이 란도질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외딴집에 사는 이들이 어떻게 악착한 왜놈들의 손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는지 보지 않고도 알수 있었다.

류이태는 마을로 뛰여가 스승에게 처녀애를 맡기고 마을사람들을 데리고와서 젊은 부부를 옥녀봉의 양지쪽에 정히 안장해준 다음 다시 내려왔다.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처녀애의 부모들은 약초를 캐여 약을 제조하는 약제사라고 하였다. 린근의 모든 산들에는 그들 부부의 발자취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산을 오르고내리면서 희귀한 약초를 채집하여 약을 만들어서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다.

더구나 설유의 아버지는 약초비방에 관한 의서를 집필하였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건강에 좋은 약초의 이름과 약제조법, 치료방법이 세세히 적혀있어 린근에 소문이 짜하였다.

언제인가 쯔시마에 있는 왜인들이 풍랑을 만나 거제도에 머무른적이 있었는데 그때 설유의 아버지한테서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다. 풍토가 척박하고 인정세태가 메마른 쯔시마에서는 상상도 못할 약초에 의한 치료를 받은 왜인들이 너무도 희한한 치료법에 환성을 질렀다.

그로부터 불과 반년후에 이런 처참한 변이 일어난것이였다.

후날 스승은 자기가 거제도로 간것은 약초채집도 있지만 그곳에 유명한 초약제조사가 있다기에 겸사해서 걸음을 한것이라고 말하였다.

약초를 채집한 다음 들려보기로 했던노릇이 이런 참사와 맞다들었던것이다.

스승의 치료로 처녀애는 쌕쌕거리며 잠들고있었다. 차마 그 어린애를 남에게 떠맡길수 없었다.

다음날 처녀애는 정신없이 부모를 찾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정상에 모두가 눈물을 지었다. 설유는 울음을 그치면 때없이 저혼자 무슨 왕사마귀가 눈밑에 달린 놈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였다고 소리치고는 또 울음을 터뜨리군 하였다.

며칠간 있으면서 설유를 진정시키고 류이태가 물었더니 어린 설유는 띄염띄염 전후수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눈밑에 커다란 왕사마귀가 달린 왜놈이 열댓의 무리를 끌고와 아버지가 쓴 의서를 훔쳐가다가 마침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와 맞다들리게 되였다.

격투가 벌어졌다. 왜놈 둘이 아버지의 도끼에 맞아 머리가 터졌다.

허나 놈들은 열댓이나 되고 아버지는 혼자였다. 성난 사자와 같이 싸우던 아버지는 기진맥진하였다. 자기의 의서를 지키려고 아버지는 마지막기운이 다할 때까지 싸웠으나 그만 놈들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애를 안고 어서 피하라고 소리쳤다.

헛간에 숨어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다가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설유를 안고 뒤산으로 들구뛰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놈들이 기미를 채고 뒤따라와서는 짐승마냥 어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이 엄마에게 달려들 때 설유는 기절해서 그다음의 일은 전혀 몰랐다. 다만 왕사마귀가 달린 왜놈이 엄마와 아빠를 죽였다고 계속 같은 소리만 외웠다.

거제도를 떠나면서 류이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귀로에 올랐다. 마지막숨을 몰아쉬면서 설유를 부탁하던 그의 어머니의 마지막말이 뇌리에 생생하고 부모잃은 설유를 남에게 맡기는것이 인간으로서 차마 할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더구나 그새 설유가 류이태에게 정이 들어 자기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후날 한마을에 살고있는 처녀와 가정을 이루었으나 류이태는 설유를 자기의 딸로 호적에 올리고 정성다해 키웠다. 더구나 젊은 안해가 결혼한 이듬해에 해산도중 난산으로 잘못된 다음 설유는 그에게 있어서 회망이고 생의 전부였다. 안해가 세상을 뜬 그해 겨울에 류이태는 고성을 떴다.

왜서인지 의원이라는 자기가 안해 하나 살려내지 못한것이 가슴에 걸렸고 자기의 무능력이 한스러웠던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살고있는 산음고을로 옮겨왔던것이다.

그후 산음에 자리잡은 류이태는 스승에게서 피타게 의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몇년후에는 명의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류이태가 명성을 날릴쯤에 스승은 조정의 령으로 한성부로 등용되여갔으나 얼마 안있어 온 가문이 몰살되였다는 흉흉한 소식이 날아왔다.

딱히 알수 없으나 봉건조정내부의 알륵관계로 그 제물이 되였다고 하였다.

스승은 화를 입기 전에 보낸 서신에서 의술이 조정정사의 리용물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부디 류이태만은 진정한 명의가 되라고 그리고 설유를 잘 키워 그 부모들이 땅속에서도 마음편히 있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었다.

《내가 설유를 데리고 산음에 와서 한창 이름을 날릴적에 임자가 말하는 그 죽순의원을 만났지. 자칫하면 죽순인 이 설유의 어머니가 될수도 있었건만 운명은 우리 두사람을 이렇게 갈라놓았지.》

그때를 더듬어보는 류이태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