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6
이제는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사흘후에 있게 될 일을 생각하는 허준의 마음은 천근무게로 짓누르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과연 이것으로 의술을 배우려던 나의 꿈이 동강나고마는가? 어머니가 또다시 수강비를 마련해주리라는 담보는 아직 없었다.
이제 사흘이 지나면 그동안 의술을 배우던 류이태의 집을 떠나야 한다. 칼로 살점을 저미는듯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류이태에게서 호된 추궁을 받은 이후에도 설유는 한본새로 허준의 의술습득을 성심으로 도와주었다. 틈이 있으면 병자치료에 도움이 될 비방들을 적어 아버지 몰래 허준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그윽한 두눈은 여전히 호심깊은 호수마냥 그끝을 가늠할수 없었다. 그윽하면서도 사려깊은 눈길로 허준의 의술탐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말없이 왼심쓰는 설유앞에서 허준은 제편에서 오히려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져가지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였다. 비록 설유의 눈길을 마주보기 저어하지만 허준은 설유의 그 마음이 눈물나도록 고마왔다.
유시(오후 5~7시)경에 이르자 사람들의 걸음이 좀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류이태는 급한 병자때문에 왕진을 나갔고 설유는 약초를 사러 초약집으로 가고 없었다.
허준은 자못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혀 두달나마 자기의 체취가 스며있는 아래방과 웃방 그리고 류이태에게 졸경을 치르던 웃방너머의 방을 추연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이때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염이 시허연 웬 늙은이가 찾아들어왔다. 방안을 휘둘러보던 로인은 허준이앞에 머리를 숙이더니 어줍게 입을 열었다.
《저, 일전에 부탁한 약을 가지러 왔소이다.》
《그렇소이까? 로인장은 뉘신지요?》
《건너편 마을에 사는 박서방이올시다.》
웃방으로 올라온 허준은 약서랍을 열고 그속에서 《박서방》이라고 적혀있는 첩약꾸레미를 꺼내들었다.
약꾸레미를 넘겨받던 로인이 머밋거렸다.
《저… 의원님.》
의원이라는 그 부름에 허준은 송구스러웠다.
《전 아직 의원이라 부르긴 멀었소이다.》
《그래두 의원이야 의원이지요. 의원님, 이거 여쭙긴 황송하오나 이번에는 그만 약값을 마련하지 못했소이다. 다음번에 가져오면 안되겠소이까?》
허준은 난처하였다. 의원님이라고 깍듯이 불러주는 로인이였다. 허나 다음번에 약값을 내겠다고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 순간 허준의 뇌리에는 단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자기의 수강비를 받아내던 류이태의 매정한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저 로인장, 이건 제 맘대로 할 일이 아니오이다. 약을 둬두었다가 약값을 치르고나서 가져가야 할것 같소이다.》
《네- 알겠소이다.》
로인의 밭고랑같이 깊숙이 패인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이 패이는듯 하였다. 로인은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휘적휘적 뜰아래로 내려섰다. 로인의 등구부러진 모습이 허준의 눈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그날 저녁이였다. 병치료 나갔던 류이태도 돌아오고 설유도 금방 들어서는무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류이태가 설유를 돌아보았다.
《얘. 급한 병자가 온 모양인데 어서 나가봐라.》
설유가 달고온 사람을 바라보던 허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까 되돌려보냈던 로인이 커다란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타났던것이다. 바구니속에는 보기만 해도 탐탁해보이는 검정암닭 두마리가 사이좋게 마주앉아있었다.
《아니 로인장, 어인 일로 이렇게 밤늦게 걸음을 하였소이까?》
류이태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저 의원님, 이거 아뢰옵긴 황송하오만 우리 집살림이 하두 구차스러워 제 미처 약값도 없이 아까 약을 지으러 왔댔소이다. 아들의 병치료에 약을 꼭 더 써야겠기에 이렇게 렴치를 불구하고 또 찾아왔소이다. 치료비대신에 이 암닭을 올리면 안되겠소이까?》
보매 그 암닭은 집에서 애지중지하는 알낳이닭인듯 하였다.
《아니, 아까 약지으러 오셨댔소이까?》
《네, 헌데 의원님이 안 계시기에 작은 의원님에게 여쭈었더니 약값을…》
로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류이태는 얼핏 허준을 돌아보더니 설유를 불렀다.
《얼른 가서 로인장것으로 지은 첩약꾸레밀 내오너라.》
설유에게서 약꾸레미를 넘겨받은 류이태가 흔연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로인장, 그 암닭은 그냥 가지고 돌아가시오이다. 그리고 약값을 물기가 힘들면 그대로 가져다 쓰시오이다.》
《아, 그렇게야 어떻게… 이 암닭이라도 성의로 아시고 받아주소이다.》
《로인장, 일없소이다. 우리 집살림이 그닥 궁색하지 않으니 로인장이 약값을 몇번 물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날것이 없소이다. 어서 그냥 돌아가시오이다.》
로인이 황송해하며 머리를 거듭 조아렸다.
《의원님, 고맙소이다!》
로인은 설유의 바래움을 받으며 대문밖을 나섰다. 로인을 돌려보낸 후 류이태는 허준을 데리고 웃방으로 올라왔다.
《임자, 여기에 좀 앉게.》
허준은 옹색한 기색으로 류이태의 앞에 나앉았다.
《임자가 보기에는 저 로인장한테서 약값이 얼마 나올것 같은가?》
허준의 눈앞에는 누덕누덕 기운 베옷을 걸치고 짚신을 신은 로인의 정상이 불쑥 떠올랐다. 로인의 그 쭈글쭈글한 얼굴에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자기의 수강비를 꼬박꼬박 받아내군 하던 칼칼하고 랭랭한 류이태의 얼굴이 겹쳐들었다. 허준은 도무지 류이태의 말뜻이 가늠이 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자는것인지…
《내 오늘은 말 좀 하세. 예로부터 의술은 인술이라 했네. 자넨 나에게서 의술도 배워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의원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자질도 준비해나가야 하네. 의술은 물에 빠져죽거나 불에 타죽게 된 사람을 살려내는것과 같은 일일세. 때문에 병자가 급할 때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 구원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물에 빠져죽거나 불에 타죽게 되네.》
류이태의 어조는 자못 엄엄했다.
《의원이 어진 마음이 있으면 어찌 물에 빠져죽고 불에 타죽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앉아 구경할수가 있겠나? 그런데 어떤 의원들은 남의 이런 급한 때를 리용하여 병자를 기만하고 자기의 재물을 챙기려들려고 하거든. 이런 의원들은 명실공히 의원이라 볼수 없네. 그리고 병자의 아픈 심정을 리용하여 자기의 리익을 챙기려드는건 도적놈 심보와 다를바 없네.》
허준은 전혀 뜻밖인 류이태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왜 자기의 수강비와 자기 어머니 그리고 허모의 치료비는 꼬박꼬박 받아냈던가.
《자네 심정은 알만하이. 왜 자네 모친과 형의 치료비는 드팀없이 받아내는가 그거지?
음, 난 량반들한테서는 꼭꼭 치료비를 받아내네. 높은 벼슬에 있거나 잘사는 량반부자일수록 값을 더 비싸게 받군 하지. 그 량반들이나 자네 형의 돈은 과연 어데서 난것인가? 그게 다 나라에서 준 록봉에서 나온건가? 그 록봉보다 더 큰 금전과 재물들을 량반댁네들은 자기 권세를 리용하여 이제 금방 왔던 로인장과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짜내고있지. 이제 왔던 로인장네도 온 집안식구들이 새벽부터 저녁늦게까지 늘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있네, 그런데도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지.
그럼 그들이 지은 쌀은 다 어데로 가나? 량반댁님들이 조세로 다 빼앗아가네. 난 그 량반네들이 빼앗아간 가난한 백성들의 재물을 그들에게 다시 돌려주자는걸세. 그래서 량반네들의 치료비를 비싸게 받아 급해하는 백성들을 위해 쓰군 하네.
이건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내가 일관하게 지키고있는 준칙이야. 내 말의 뜻을 알겠나?》
허준은 감동의 눈길로 류이태를 바라보았다. 저
허준은 새로운 눈길로 류이태를 쳐다보았다. 허준의 눈길에 비낀 속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 류이태는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지었다. 홉사 자식을 대하는 웅심깊은 아버지의 인상처럼 느껴졌다.
《말이 터진김에 좀 물읍세. 자네 나하구 약속한 날자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네. 그래, 자넨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의원님, 어떻게 하나 의술을 꼭 배우려 하오이다.》
두말없이 허준은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터놓았다.
류이태가 두눈을 쪼프렸다. 그렇게 부드럽게 보이던 그의 인상이 다시금 칼칼하고 매정한 기색으로 되돌아갔다.
《그래, 대체 의술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배우려 하나? 자네의 그 의도를 한번 좀 들어보세나.》
마치 서당에서 시험을 받아내는 엄격한 훈장같았다. 류이태의 그 물음에 허준은 자못 긴장해졌으나 인차 마음을 다잡았다.
금방 한 류이태의 말속에서 허준은 그의 사람됨을 더욱 깊이 알게 되였다.
류이태에게서 의술을 배우는 첫 시기에는 그의 수사본에 자자구구 적혀있는 전언의 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었고 그다음에는 전언에서 밝힌 뜻과는 달리 치료비와 수강비에서는 단 한치의 에누리도 없는 모순된 행동을 보고 반신반의하면서 그닥 좋지 않은 눈길로 그를 보아오던 허준이였다. 헌데 오늘에 와서는 자기에게 간곡하면서도 엄한 어조로 의술은 인술이며 의원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의술의 진가를 깨우쳐주는 그의 말속에서 류이태의 사람됨을 명백히 가늠하게 되였다.
허준은 자기가 아무리 후세의 사람들에게까지 재부로 될수 있는 의서를 남기려는 뜻을 품고있다 하여도 이 일을 아무에게나 발설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요즘 세월에 자기처럼 이런 뜻을 품고있는 사람들이 대체 몇이나 될가?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뜻을 내비치면 허무맹랑한짓을 한다고 비웃을것은 자명한 사실이였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말이 장하게 들리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것이였다. 허준은 아직까지 어머니와 외할머니외에는 자기 심중을 내비친적이 없었다.
허준은 용기를 내였다. 류이태야말로 자기의 이 진정한 뜻을 내비칠수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두달이라는 기간을 류이태에게서 의술을 배워왔으니 이제는 자기의 초지를 표명할 때도 된듯싶었다.
허나 우려감도 없지 않았다.
과연 류이태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수 없었다. 그렇지만 두려울것도 잴것도 없었다. 어느때인가는 한번은 반드시 부딪쳐야 할 일이 아닌가. 허준은 낮으나 힘있게 대답하였다.
《의원님, 재삼 말씀올리건대 전 의술을 끝까지 배우고싶소이다.》
《의술을 배워선 대체 뭘하려나?》
《의원님, 제가 의원님에게서 제일 감명을 받은것은 의원님께서 쓰신 <언해향약방>의 전언을 읽고서였소이다. 특히 <만일 각이한 병들을 치료하는 각이한 약재들을 자상히 서술한 책이 있으면 그것은 마치 밤길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이 병을 치료하는 요긴한 방법들을 알려줄것이다. …
이 의서를 끊임없이 보충하고 수정하여 나중에는 높은 경지에 이른 의서를 내놓을 결심을 가지고 생의 마지막까지 노력해보려고 한다. … 잘된 의서 한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줄뿐아니라 우리 후세의 사람들도 그 덕을 오래오래 입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병으로 일찍 죽거나 잘못 치료할 념려도 없게 된다.> 라는 문구는 정말 제 마음에 들었소이다. 저도 의원님의 그 뜻과 넋을 따르고싶소이다.》
《그러니 자네도 의술을 배워 종당에는 큰 의서를 남기겠다는건가?》
허준은 눈을 번쩍이며 확신성있게 대답하였다.
《네! 그렇소이다!》
《흠-》
류이태의 입에서 대중하기 어려운 가벼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류이태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 큰 의서를 쓴다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나?
이건 명의가 되는것보다 더 힘든 일이야. 명의로 이름을 날려 병자들을 솜씨있게 치료한다는것과 나라의 재부로 될 큰 의서를 쓴다는것은 그 무게가 엄청나게 달라. 높은 의술로써 병자들을 잘 치료한다고 하여 의서를 쓸수 있는건 결코 아니야. 좋은 의서를 쓰려면 풍부한 치료경험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분석종합하는 능력과 뛰여난 문장구사능력이 있어야 하는거네. 예로부터 생각은 뻔한데 글로 옮기기는 힘들다는 말도 있지 않나?
치료는 잘하지만 그것을 좋은 글로 남기지 못하는 의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때문에 좋은 의서들은 나라의 재부로 되는것이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걸세.
<향약집성방>, <의방류취>와 같은 의서들이 바로 그러한 재부이지. 그런데 자네 그럴 용기와
허준은 결연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의원님! 제 생의 마지막까지 노력할 결심이나이다! 저의 일생의 뜻과 목표가 바로 그것이오이다!》
류이태는 허준의 강렬한 눈빛에서 그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력력히 읽을수 있었다. 이 두달어간에 허준의 사람됨에 대하여 어지간히 파악하면서 내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던 류이태였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요구성을 높여왔다.
높은 향학열과 정열, 강한 정의감, 의로운 뜻과 확고한 목표, 이것이 허준의 기본장점이였고 인간상이였다.
류이태는 자기의 호된 추궁이 있은 다음에도 설유가 몰래 자기의 치료비방들을 허준에게 끊임없이 넘겨준다는것을 다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딸을 책망하지 않았다. 설유 역시 허준의 이와 같은 사람됨에 공감이 되여 그렇게 했을것이다.
한동안 허준을 바라보던 류이태가 설유에게 말했다.
《얘 설유야, 저 웃방너머 장농에 내 금고가 있을게다. 그걸 가져오너라. 》
설유가 묵직한 금고를 들고 내려오자 류이태는 그 금고를 열더니 허준이 수강비로 바쳤던 금가락과 두개의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놓았다.
《옛네. 이건 임자가 나에게 바쳤던 수강빌세.》
허준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왜 그렇게 놀라나. 다시 되돌려주는걸세.》
허준은 어안이 벙벙하여 류이태를 바라보았다.
《이젠 내 자네에게 터놓고 말하지. 내가 지금까지 자넬 너무 박하게 대했다고 나무람했을거네. 허허! 사실은 말이야, 그건 내가 자네의 성정과 의지를 떠보느라고 일부러 그런걸세.》
류이태의 얼굴에 자못 추연한 기색이 흘렀다.
《내 이제 뭘 더 숨기겠나. 나에게도 지난날 자네처럼 높은 향학열과 좋은 머리를 가지고 의술을 배운 제자 넷이 있었네.
그들도 나에게서 처음 의술을 배울 땐 머리를 조아리며 이담에 명의술을 지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하겠노라고 맹세를 했지. 헌데 그 네 제자들가운데서 두명은 의술을 리용하여 제 재물을 늘구기에 여념이 없었고 나머지 두 제자는 큰 의서를 쓴다고 한해동안 부산을 피우더니 다 집어던지고말았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쉬이 제자들을 믿을수 있겠나? 사람이 자기의 의로운 뜻을 펼치고 자기의 목표대로 나라의 재부로 되는 큰 의서를 세상에 내놓는다는것은 결코 쉽게 결심할 일이 아닐세. 허지만 난 오늘 임자의 그 말을 그대로 믿고싶네. 만일 임자가 참말로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 결심을 지켜나간다면 내가 자네에게 귀를 잡고 절을 하겠네.》
《선생님!》
허준의 입에서 처음으로 류이태를 가리켜 선생님이라는 부름이 저도모르게 울려나왔다.
류이태의 눈귀에 축축한 물기가 내배였다. 허준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였다. 허준의 손을 끄당겨 돈꾸레미를 들려주며 류이태가 입을 열었다.
《이건 다시 가져가서 자네한테 필요한 의서들을 사는데 쓰라구. 좋은 책들을 더 많이 보아야 의술을 높일수 있고 또 그보다 더 훌륭한 책들을 쓸수 있네.》
《선생님! 제 기어이 선생님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그리고 목숨이 지는 날까지 저의 초지를 굽히지 않고 꼭 나라의 재부로 될 큰 의서를 만들도록 하겠소이다!》
허준의 절절한 말을 듣고있는 설유의 그윽한 눈에서 맑은것이 고요히 흐르고있었다.
《음, 자네의 말을 들으니 내 이제야 마음이 놓이누만!
좋네! 이제부턴 자네에게 내 의술을 깡그리 배워주지. 그러니 절대로 맥을 놓지 말고 더욱 분발해서 우리 서로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의술을 닦아보세나.》
집에 돌아온 허준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류이태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그 말을 듣고난 려월은 련신 눈굽을 훔쳤다.
《네가 귀인을 만났구나! 이런 고마운 일이라구야…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면 좋겠냐.
얘, 준아! 류의원님에게서 꼭 의술을 잘 배워 명의가 되고 큰 의서를 써서 그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거라!》
밤늦도록 불이 꺼질줄 모르는 허준의 집우의 허공중에서 휙- 긴 원을 그리며 별찌가 떨어졌다.…
이제는 허준에게 류이태는 자기 운명의 둘도 없는 스승으로 되였다. 허준의 불같은 열정과 류이태의 진정어린 전수에 의해 그의 의술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이를 두고 제일 기뻐한것은 설유였다. 설유는 늘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있는 그윽한 눈으로 향학열에 불타는 허준을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그리고 허준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발벗고나섰다.
아직까지 의학이라는 학문에 들어서서는 설유가 허준의 선배였고 또 선생이기도 하였다.
철이 들어서부터 의원노릇을 하는 류이태의 심부름을 하면서 의술을 익혀온 설유였다.
류이태가 바삐 돌아갈 때에는 설유가 웃방너머의 방에서 틈틈이 의학의 기본리치와 원리들인 음양오행설, 장상론, 상한론 등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해주군 하였다. 서로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의학의 원리와 의술을 론하는 때가 잦을수록 그들사이의 정은 어느덧 깊어만졌다.
류이태는 이 모든것을 다 알고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척 하였다.
날이 감에 따라 허준의 의술이 늘어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배우고 터득하고 숙련해야 할 문제들은 허다하였다.
어느덧 류수와 같이 한해가 흘렀다.
류이태는 허준을 병자치료에 적극 인입하기 시작하였다. 실천속에서 의술을 더욱 련마시키자는것이였다. 그 나날속에 허준의 의술은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였다.
어느날이였다.
한 젊은 사내가 대문을 벌컥 열어제끼며 황황히 들어섰다.
《의원님! 우리 아버지가 또 위완통이 와 배를 그러쥐고있소이다!》
류이태가 허준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얼른 가서 봐주게!》
가방을 들고 뜰아래로 나서는 허준을 보고 젊은 사나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의원님, 우리 아버지가 류의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소이다!》
류이태는 젊은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준을 소개하였다.
《자네도 알고지내게. 나와 같이 치료하는 허의원일세.》
젊은이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이 언뜻 비끼는것을 허준은 어렵지 않게 간파하였다. 허준은 류이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류이태는 일단 결심한 일이니 쓰다달다 말할게 없다는듯 허준과 젊은이를 일별해보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허준은 설뚱한 심중을 감추지 않는 젊은 사내의 뒤를 쫓아 병자가 있는 집으로 떠났다.
허준이 병자의 집에 들어서니 얼굴이 창백한 로인이 배를 그러안고 방안에서 딩굴고있었다. 로인의 얼굴에 깨알같은 땀방울이 돋아있었다.
《로인장, 어디 한번 좀 봅시다.》
허준은 맥을 짚어본 다음 위를 눌러보았다. 명치끝에서 딴딴한게 만져졌다. 식장으로 온 위완통이였다.
《로인장, 조금만 참으소이다. 제 이제 제꺽 고쳐드리리다.》
허준은
(음, 건비(비위를 건전하게 하는것)시키기 위해 상완, 중완혈을 써주고 리기(기를 통하게 하는것)시키기 위해 사간혈(합곡과 태충혈을 같이 써주는것)을 써주며 그다음 위의 극혈인 량구혈을 써주면 즉효로다. )
허준은 처방된 침혈들에 잽싸게 침을 들이박았다. 하도 숙련한 보람이 있어 침은 마치 애호박속에 박히듯 살속으로 쑥쑥 들어갔다. 침을 놓은 허준은 병자의 반응상태를 예리하게 살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한식경이 지나도록 병자의 위아픔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로인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아이고! 명치야! 아이고 배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준은 당황했다. 자기가 배운데에 의하면 이쯤되면 틀림없이 위아픔이 가라앉아야 하였다. 그는 다급히 병자에게 다가가 침자루를 긁기 시작했다. 병자의 비명소리, 벅벅- 침대를 긁는 소리.
그러나 병자의 상태는 여전하였다. 로인이 소리를 질렀다.
《류의원님을 모셔와라! 류의원님을! 어서 빨리! 아이고 명치야!-》
옆에서 치료하는 허준을 미타하게 바라보던 그 집 아들이 그를 향해 눈을 한번 찔 흘기더니 허준이 미처 말릴새도 없이 후닥닥 뛰쳐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후 류이태가 다급한 걸음으로 로인의 집으로 들어섰다. 허준은 안절부절하며 류이태를 맞아들였다. 병자의 상태를 가늠해본 류이태는 허준이 꽂은 침대를 잡고 살살 돌려보았다. 머리를 기웃거리던 류이태가 로인에게 꽂은 침대를 모조리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허준의 얼굴은 불시에 수수떡처럼 붉어졌다. 로인의 아들이 마깝지 않은 기색으로 허준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어 류이태는 자기의 침통에서 침을 뽑아 잽싸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허준이 놓았던 그 침혈그대로였다. 그리고는 침자루를 잡고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로인의 입에서 후- 하는 긴 숨이 흘러나왔다. 류이태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려들었다.
《로인장, 이젠 됐소이다.》
로인이 류이태의 손을 꼭 잡았다.
《역시 명의는 명의로다! 침놓는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아도 진짜로 침을 놓을줄 아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소이다. 류의원님은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명의요.》
로인의 찬사에 허준의 얼굴은 모닥불을 쓴것처럼 달아올랐다.
치료를 마치고 그 집을 나선 허준은 한마디 말도 없는 류이태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처럼 알길 없었다. 원인이 무엇일가? 선생님도 나와 꼭같은 침혈을 쓰지 않으셨는가? 분명 자기도 꼭같은 방법으로 침을 놓지 않았던가. 침을 놓고… 침자루를 가볍게 몇번 돌려주고… 다만 다른것은 류이태가 자기의 침통에서 꺼낸 침으로 병자에게 침을 놓았다는것뿐이다.
그렇다면 침대에 문제가 있다는것이 아닌가? 침의 재질이 차이나는가? 분명 선생님의 침은 내가 쓰는 보통침이 아니라 특수한 침인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새에 어느새 류이태의 집에 당도하였다.
방으로 들어온 류이태가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왜 그렇게 된것 같나?》
《저 선생님, 혹 침의 재질에…》
허준은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대답하면서도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침의 재질이라…》
류이태는 자기의 침통에서 침을 꺼내들었다.
《이 침이 자네의 침과 재질이 다르단 말인가?》
《?!》
《그럼 내 자네에게 한번 보여줄테니 똑바로 보게나. 어서 자네 바지가랭이를 좀 걷어올리게.》
류이태는 자기의 바지가랭이도 같이 걷어올리면서 허준에게 말했다. 그리고나서는 호침을 들고 허준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자네 다리의 족삼혈에 침을 놓겠네.》
허준은 영문을 모르고 자기의 다리를 내밀었다. 따끔하는 감각이 느껴지면서 시큰하고 쩌릿한 감각이 다리아래쪽으로 쭉 뻗어내려갔다.
《자, 이젠 자네 차례일세. 내 다리의 족삼리혈에 침을 놓으라구.》
허준은 류이태가 내민 다리에 그리 어렵지 않게 침을 들이찔렀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자는건지… 허준은 자못 궁금증을 털지 못한채 류이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기본이야. 내가 자네에게 놓은 침자루를 잡고 살살 돌려보라구. 그러면 침대가 잘 돌아가지 않을거야.》
허준은 류이태의 말대로 자기의 다리속에 박힌 침자루를 잡고 가볍게 돌려보았다. 류이태의 말대로 침대는 쉽게 들여박혔으나 살속에 박힌 침대는 마치 그 무엇에 그러잡힌듯 좌우로 돌리려고 해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젠 자네가 나에게 놓은 침대를 한번 돌려보라구.》
허준이 류이태의 다리속에 박힌 침대의 침자루를 잡고 돌려보니 거침없이 돌아갔다.
《이젠 무엇이 차이나는가를 알겠나?》
《네, 헌데 아직 자상한것까지는 잘 모르겠소이다.》
《음, 그럼 내 설명해주지. 자네가 놓은 침은 왜 살속에 박혔는데도 거침없이 돌아가는가? 그건 자네가 침을 놓으면서 득기(침감)를 얻지 못했기때문이야. 침혈처방을 병에 맞게 잘 구성했다고 해도 그 침혈에 침을 놓을 때 득기를 얻지 못하면 오늘 자네와 같이 아무런 치료효과를 얻지 못하게 되네. 득기는 병자가 느끼는 득기와 술자(의사)가 느끼는 득기가 있네. 병자가 느끼는 득기는 아픔과는 다른 뻐근한감, 시큰시큰한감, 부풀어나는감, 주위장기를 끌어당기는감 등이 쭉 뻗쳐나가는것이야.》
허준은 그제서야 류이태의 말이 리해되기 시작하였다.
《네에…》
《그리고 술자가 느끼는 득기는 침을 꽂을 때와 꽂은 다음에 침대에서 가벼운 경련이 이는감이 느껴지는거야. 이건 높은 숙련과 오랜 경험 그리고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 느낄수 있네. 술자는 침을 놓으면서 이러한 득기감을 느껴야 하지.
득기를 잘 얻자면 매 침혈에 맞게 정확한 깊이까지 들이찔러야 하네.
오늘 자네가 배의 중완혈에 놓은 침은 좀더 깊이 찔러야 득기가 얻어지네. 자네는 위가 천공될가 두려워 제 깊이에까지 충분히 찌르지 못하였는데 그건 다 술법이 능하지 못하기때문이야.
득기가 충분히 얻어지면 침을 꽂은 주위의 근육들이 침대에 딱 밀착되여 침자루를 가볍게 돌리면 잘 돌아가지 않네. 허나 득기를 얻지 못하면 자네가 놓은 침처럼 이렇게 거침없이 돌아가지.
침을 놓는데서 득기를 얻지 못하면 치료효과가 없어. 이젠 내 말의 뜻을 알겠나?》
《네, 알겠소이다.》
허준은 아직도 자기가 얼마나 많은것들을 터득하지 못했는가를 다시금 절감하였다.
참으로 우리 나라의 의술은 정교하면서도 섬세하며 심도가 깊었다. 그 깊은 술법들을 다 터득하려면 아직도 멀고도 멀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류이태가 그루를 박으며 허준을 쳐다보았다.
《다시한번 강조하네만 의술에서 고정격식화된 도식은 금물이야. 같은 병을 앓는다 해도 병자들마다 치료의 경과와 병증상이 다르고 치료반응도 서로 각이하네. 그러니 의술의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술법들을 그에 맞게 잘 적용해야 하네, 그래야 진짜명의로 될수 있네.》
《선생님, 알겠소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명심할건 내 다시금 상기시키네만 자네의 최종목표는 명의로 되는데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후세에 남고 나라의 재부로 될 큰 의서를 쓰는거야.
난 여기에 더 큰 기대를 걸고있네.
헌데 좋은 의서는 하루이틀사이에 하늘중천에서 뚝 떨어져내려오는것이 결코 아니야.
그러니 동서고금의 의서들을 부지런히 탐독하면서 동시에 자네가 병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터득한 경험자료들을 글로써 적어놓아야 하네. 그 하나하나가 밑거름이 되고 축적되면서 나중에는 큰 의서를 쓸수 있는 틀거리가 마련되는거야.
내 자네의 그 일을 실현하는데 기꺼이 밑거름이 되겠으니 자넨 자네의 몸에 실린 중임을 자각하고 더욱 분발해야 하네. 그시그시 명의로 이름을 떨치는건 그리 어렵지 않네. 그러나 자네는 그보다 더 큰일을 해야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하네. 그걸 보고 큰뜻을 품은 사람이라고 하지. 내 말의 뜻을 알겠나?》
《선생님, 선생님의 뜻을 꼭 명심하고 제 힘껏 노력하겠소이다!》
《음.》
류이태는 그제서야 온 얼굴에 느슨한 웃음을 떠올리고 자못 대견한듯 허준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장한 아들이 큰일을 하였을 때 만족해하는 아버지의 모습그대로였다. 왜 그런지 허준은 후날 류이태를 추억할 때면 이날의 모습이 떠오르군 하였다.
그날에야 허준은 비로소 설유가 늘 앉은뱅이책상앞에 앉아 붓을 놀리는것이 바로 류이태가 자기에게 강조한 그러한 치료경험자료들을 기록하고있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허준은 더욱더 분발하였다. 그 나날에 침구술을 익히느라 자기 몸에 침대를 꽂다나니 허준의 팔과 다리, 몸은 온통 침자리투성이였다. 어느날 아침 허준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세면을 하고 랭수마찰을 하는데 어머니가 지나다가 외마디비명을 질렀다.
《아니, 네 몸이 왜 그렇냐?》
허준은 바삐 웃옷을 주어입었다.
려월이가 막무가내로 허준의 웃옷을 들추고 외할머니를 소리쳐불렀다.
《어머니, 얼른 나와 이걸 좀 보세요!》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외할머니가 무슨 일인가 해서 나왔다.
허준의 배에 틈없이 남아있는 침자리를 쓸어만지는 외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원 자식두… 꼭 이래야만 의술을 배운다더냐? 세상에, 제몸을 이렇게 만들자니 오죽 아팠겠니?!》
아들을 그러안은 려월은 너무 억이 막혀 말을 못하였다. 그 순간 려월의 눈앞엔 과시장에서 쫓겨나오고도 아무 일도 없은듯이 흔연스레 자기 물음에 대답하던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들은 그 모진 고통을 홀로 묵새기며 자기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았었다. 헌데 오늘은 의술을 배운다면서 제몸에 저렇게 침을 놓자니 오죽인들 아팠으랴 하는 생각에 오열을 터뜨렸다.
《이 녀석아, 이 어미 몸에 침을 놓으면 안된다더냐? 무슨 애가 그리도…》
《할머니, 어머니!
왜들 이러세요? 이젠 침놓는건 눈감고도 할수 있어요. 아무렇지 않은데 왜들 이러세요.》
아들의 몸을 쓸어만지는 려월의 눈에선 눈물이 그칠줄 몰랐다. 허나 그 눈물은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만이 흘릴수 있는 그런 눈물이였다.
그의 의술솜씨가 높아지는데 따라 그의 명성은 차츰 산음지경을 벗어나 린근고을에까지 서서히 퍼지게 되였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앞으로 허준이 걸어가야 할 길은 너무도 멀고 생소하였으며 그 길에 어떤 시련과 애로가 가로놓여있는지는 누구도 알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