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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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푸실푸실 함박눈이 내리고있었다. 온 천지가 흰눈에 묻혀 포근히 잠을 자는듯 하였다. 허준은 닷새에 한번씩 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류이태의 집으로 다니고있었다.

룡암포에서 배를 타고 개경의 벽란도에 당도한 허준일행은 날씨관계로 사흘간 지체한 다음 다시 배에 올랐다. 충청도 군산포에 당도했다가 다시 전라도 진도앞바다를 거쳐 경상도 마산포에 당도한것은 룡천을 떠난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였다. 거기서 다시 남해를 에돌아 고성에 이른 허준일행은 삯마를 타고 진주를 거쳐 산음에 이르렀다. 고성에서 진주까지는 60여리, 다시 진주에서 산음까지는 60여리 도합 백이십여리를 수레를 타고오면서 허준은 앓는 어머니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채 추서지 못한 몸으로 근 스무날가량 찬 바다바람을 맞으며 배길과 역로에 시달림을 당한 어머니는 수천리나 되는 로상에서 고열이 나며 심하게 앓았다.

로상에서는 안깐힘을 쓰며 그런대로 버티여오던 어머니였지만 외할머니의 모습을 뵙고는 《어머니!》하고 외마디소리를 내고는 그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새 외할머니는 친자식보다 더한 사랑을 부어주던 양부모내외를 잃고 왕산을 떠나 읍에서 북쪽으로 한 시오리가량 떨어진 오곡마을에서 살고있었다. 그 집은 외할머니의 양부모들이 저들이 다 없으면 홀로 이 산속에서 어찌 살겠는가고 하면서 미리 장만해놓은 집이였다.

외할머니는 너무도 몰라보게 자란 외손자를 쓸어보고 또 쓸어보면서 눈물을 금치 못해하였다. 외할머니와의 해후를 미처 하지 못한채 허준은 어머니의 간호에 달라붙었다. 분명 먼길을 오느라고 로독에 든것 같기도 하고 또 열흘나마 해풍에 시달리다나니 감모(감기)가 온것 같기도 하였다.

룡천에서 떠날 때 죽순이 의술을 꼭 배워 명의가 되라면서 준 의서 한권이 있어 허준은 배를 타고오면서도 줄곧 그 의서를 탐독하였었다. 다는 리해할수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의술이란 이런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고있던 허준은 자기의 밭은 의학지식(아직은 의학지식이라고 말할수 없지만)을 동원하여 어머니의 몸을 덥혀주고 찬물에 손발을 씻어준 다음 외할머니에게 산꿀이 없는가고 물었다. 다행히도 늙은 로인내외가 건사해두었던 산꿀이 있어 허준은 더운물에 꿀을 타서 어머니의 입에 조금씩 넣어주었다. 밤새 신음소리를 내던 어머니가 다음날 새벽이 되니 정신을 차렸다. 한잠도 자지 않고 어머니를 지켜보던 허준이 옆에 앉아 무릎을 모로 세우고 고개방아를 찧고있는 외할머니의 손목을 잡아흔들었다.

《할머니! 어머니가 정신을 차렸어요.》

외할머니가 벌떡 깨나 엎어지듯 려월이한테로 다가갔다.

《이젠 정신이 좀 드냐?》

《어머니, 미안해요. 오자바람으로 어머니에게 근심만 끼쳤군요.》

《아서라, 에미한테 그런 소릴 하면 못쓴다. 내 손자 준이가 이렇게 자랐어도 넌 나한테 여전히 자식이구 난 네 에미야. 그새 얼마나 맘고생이 많았냐? 내 밤새 준이한테서 대충 얘기를 들어 다 안다. 어쨌든 결심을 잘했다. 이젠 빨리 자리털구 일어나 우리 세식구가 재미나게 살아보자꾸나.》

려월의 얼굴을 쓰다듬는 외할머니의 손이 가볍게 떨리였다.

《어머니! 정말 보고싶었어요. 그새 어머니도 퍼그나 늙으셨군요. 머리도 반백이 되시구…》

그 순간 려월은 어릴적일이 생각나 저도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 칠칠 검은 머리태를 팔아 자기의 색동옷을 사왔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였다. 아, 자식을 위해 사심을 모르는 그 어머니의 품에 드디여 내 안겼구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해후를 눈물이 글썽해 바라보던 허준은 문득 죽순이가 말하던 류이태라는 의원이 생각나 외할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몸을 추세우려면 아무래도 그 의원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할머니, 여기 산음고을에 류이태라는 의원이 계시나요?》

외할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 류의원을 다 아느냐?》

《룡천에 있을 때 누가 말해주더군요. 산음에 가면 의술이 능한 류이태라는 의원이 있다구요.》

《그렇댔구나. 그런 의원이 계신다. 그 의원어른의 의술이 얼마나 신통한지 죽어가던 사람두 침대 하나루 살린다더라. 산음경내는 물론 온 경상도땅에 명의라고 소문이 자자하지.》

허준의 눈이 반짝거렀다

《그 의원님의 댁이 어데 있는가요? 여기서 먼가요?》

외할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멀긴? 우리 집에서 그 집이 다 보이는데…》

외할머니가 허준을 창으로 끌고가서 산자락밑에 높이 자란 나무를 가리켰다.

《저기 저 큰 서어나무가 보이느냐?》

눈온 뒤의 엷은 안개가 그물그물 피여나는 속에서도 소소리높이 자란 서어나무가 잘 보였다.

《바로 저 나무밑에 있는 기와집이 류의원네 집이란다.》

《그래요? 그럼 아침을 먹고 제가 가서 의원님을 모셔올가요? 아무래도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려면 의원한테 병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요?》

《음, 그게 좋겠구나. 내 얼른 아침을 차리겠으니 밥을 먹구 갔다오거라. 뉘집 자손인가 물으면 손할머니네 손자라고 해라. 마을사람들은 이 집을 손할머니집이라고 부르니라.》

외할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은 후 허준은 류의원이 살고있다는 그집을 찾아 문밖을 나섰다. 나지막한 초가집들가운데서 서어나무옆의 그중 큰 집이 바로 류의원네 집이여서 수월하게 그 집에 이른 허준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조심스레 집주인을 찾았다.

《계십니까? 의원님이 계십니까?》

허준의 목소리를 듣고 방문이 열리면서 아릿다운 랑자가 퇴마루에 나섰다. 동자질을 하다가 나온듯 팔소매를 걷어올렸는데 앞치마가 흰눈같이 새하얀게 눈뿌리를 자극한다.

《뉘신데 무슨 일이오이까?》

대문에 들어서서 첫대면한 사람이 흰눈같이 정결한 랑자인지라 허준은 한순간 주춤거렸다.

《저 우리 어머니가 심하게 앓아누워서 의원님을 청하려구 왔소이다.》

랑자가 허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그런데 뉘집에서 오셨는지?》

《제 미처 소개를 못했군요. 전 손할머니네 외손자오이다.》

랑자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저 랑잔 의원댁 따님인가? 헌데 어머니는 어데 가고 랑자가 동자질을 할가?

허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비단바지저고리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퇴마루에 나타났다. 허준이 보기에도 칼칼해보이는 첫인상이 칼날우에라도 서슴지 않고 올라설것 같은 기품이 온몸에서 풍겼다.

《젊은이, 무슨 일인가?》

허준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식전아침에 이렇게 뛰여들어 죄송하오이다. 전 손할머니네 외손자인데 어제 평안도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당도하였나이다. 헌데 어머니가 먼길에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심하게 앓고있소이다. 그래서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첫아침에 의원님을 찾아왔소이다.》

류이태는 군말없이 왕진에 응했다.

그날부터 류이태는 매일 준이어머니를 찾아와 침을 놓아주면서 닷새에 한번씩 약을 지어줄테니 찾아오라고 허준에게 말하였다. 며칠이 흘러 닷새째 되는 날 허준은 류이태를 찾아갔다. 아직은 류이태에게 죽순의원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때가 되면 털어놓고 이야기하리라고 허준은 생각하고있었다. 그보다도 허준은 어떻게 하면 류이태한테서 의술을 배울것인가 하는 생각에만 골몰하고있었다. 류이태의 방에 들어선 허준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음 임잔가?》

《네. 약을 지으러 왔소이다.》

류이태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허준은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아래방은 병자들이 와서 순번을 기다리는 방인데 꽤나 널직하였다. 웃방에는 두 벽면을 꽉 채우며 의서를 비롯한 서적들이 꽂혀있고 다른 한면에는 약첩을 올려쌓은 커다란 당반이 놓여있었다. 서가와 마주한 앉은뱅이책상에는 랑자가 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하얀 참지우에 붓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있었다. 랑자의 이름은 설유, 류의원의 외동딸이라고 한다.

허준은 두 벽면을 꽉 채운 서적중의 의서들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죽순이가 준 의서를 읽으며 의술을 배운다는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다른 의서를 더 읽고싶은 허준이다.

힐끗힐끗 서가에 꽂혀있는 의서를 훔쳐보는 허준의 뇌리에 류이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옛네. 이미 지어놓았던 임자 어머니의 약일세.》

흠칫 놀라며 허준은 엉겹결에 약봉지를 받아들었다.

《고맙소이다. 헌데 약값은…》

《음, 전번에 지어간 약까지 합해 열냥을 내게나.》

《알겠소이다.》

약값을 치르고나서도 허준이 선뜻 일어설념을 하지 않자 류이태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임자 다른 일이 또 있나?》

허준은 주밋거리다가 용기를 내여 류이태를 쳐다보았다.

《저, 의원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기 서가에 꽃혀있는 의서를 빌려줄수 없소이까?》

《엉? 의서를?!》

《예, 저 의서를 한번 읽고싶소이다.》

류이태가 놀란 눈길로 허준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머리를 저었다.

《이보게, 젊은이! 저 의서들은 이 집안에서 제일가는 보물들일세. 알겠나? 그러니 함부로 빌려주는게 아닐세.》

그 순간 허준은 자기 입에서 죽순의 이름이 튀여나오려는것을 애써 참았다.

죽순은 다름아닌 이 류이태라는 의원한테서 의술을 배우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직 류의원에 대한 파악이 전혀 없는 자기로서는 서뿔리 의술을 배우겠다고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더우기 이 류의원과 룡천의 녀의원사이에 무슨 련정관계가 있은듯 한데 그 내막을 자기가 알고있다고 암시할 필요는 더욱 없다고 허준은 판단하였다.

앞으로 자기가 류이태와 친숙해져서 서로 진심이 통할 때 죽순이와의 관계는 스스로 알게 되리라.

허준은 류이태의 거절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수 있었다. 바다물이 짠것을 그 물을 다 먹어봐야 안다더냐. 책을 보물에 비기는 사람! 그 말 한마디가 허준의 가슴을 찌르르 울려주었다. 허준은 더 우기지 못하고 류이래의 집을 나섰다. 집에 들어선 허준은 약을 달여 어머니에게 드리면서도 류이태의 집에서 서로 오고간 대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아들의 모양을 주시하며 려월이 조용히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냐?》

《류의원네 집에 있는 의서를 좀 보자고 했더니 단박에 거절하시더군요.》

《그래, 네 생각엔 의술을 꼭 배우겠다는거냐?》

허준은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어머닌 다른 길을 걸었으면 하지요?》

려월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나왔다.

《글쎄, 뭐라고 말할지… 전번 네 일을 놓고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앞날이 묘연하구나.》

《그건 무슨 소리예요?》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앞날에 대해 론하겠냐? 그렇지 않냐?》

과시장에서 응시도 못하고 쫓겨나온 자기의 일이 어머니에게 입힌 상처는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가셔질수 없을것이다. 하긴 그 상처는 허준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영원히 잊혀질수 없었다.

《어머니두 참,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자꾸 꺼내시나요? 사람이 글공부를 하는게 단지 벼슬을 위해서만일가요? 너무 속쓰지 마세요. 벼슬을 못한다쳐도 옳은 뜻만 굳건하면 의로운 일을 할수 있어요. 제 어떻게 하나 의술을 배워 사람들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겠어요. 어머닌 이 아들을 믿지요?》

려월은 이젠 제 에미를 설복하려드는 허준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다 자랐구나 하는 대견함으로 마음이 젖어들었다. 자기가 산음행을 말했을 때 남편이 왜 그리도 기뻐했는지 이제야 리해되였다. 참으로 잊을수 없는 그밤이 어제런듯 떠오르면서 불현듯 오매로 하여 마음속고충을 겪고있을 남편의 정상이 가슴에 걸렸다.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왜 갑자기 이러세요? 아버님생각을 하시지요?》

제 에미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묻는 허준의 그 물음에 려월은 눈을 슴벅이였다.

《마님의 병세는 어떠한지, 마음이 무겁구나.》

오매에게 그렇게도 닥달질과 수모를 받고도 그의 중병이 마치 자기때문에 생긴듯이 자책하며 괴로와하는 어머니의 모습앞에서 허준은 비단결같은 그 마음과 어진 품성이 어머니의 운명을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 허준은 자기의 그런 생각이 어머니의 진심을 모욕하는듯싶어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 저 멀리 룡천땅을 그려보는듯 어머니의 눈빛은 그 심연을 가늠할수 없는 호수마냥 그윽하였다. 아니, 허준의 눈에는 한폭의 그림마냥 아름답게 안겨왔다. 아, 어머니!

닷새가 또 지났다. 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류이태의 집으로 가는 허준의 가슴은 이상야릇하게 설레이고있었다. 허준은 자기의 이 기분상태가 그 집에 가면 아릿답고 단정한 설유의 얼굴을 잠간만이라도 볼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것임을 부인하고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직 몸져누워있고 분명 자기는 앓는 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가는 길인데 왜 이런 엉뚱한 생각에 들떠있는지…

허준은 마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자기의 이 감정이 허망하기 그지없다고 스스로 타매하며 잡념을 털어버리려는듯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정작 류이태의 집에 이르니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세차게 울렁거렸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건만 아랑곳없이 쿵- 쿵- 옆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방망이질소리는 높아진다.

허준은 큰숨을 한번 내쉬고 대문에 들어섰다. 이제는 몇번이나 출입을 한지라 곧장 허준은 토방에 올라서서 조심스럽게 아래방문을 열고 장지문이 달린 류이태의 치료실에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인 일인지 여느때면 아래방에서 순번을 기다리던 병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허준은 조심스럽게 장지문을 두드렸다. 장지문이 열리는것과 동시에 허준은 머리를 숙여 인사하였다. 머리를 들던 허준은 깜짝 놀라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자기앞에 서있는 사람이 류이태가 아니라 설유였던것이다.

온몸이 가다들었다. 무슨 말을 떼야 할지 그자신도 알수 없었다. 얼결에 《저- 약을… 지으러… 왔소이다.》 하는 말이 튀여나왔다.

떠듬거리며 저도모르게 뱉은 말이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설유의 귀에 들릴것만 같아 당황함을 감출수 없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겨우 들긴 했으나 눈은 설유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방안을 헤맨다.

그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얼핏 띄여보더니 설유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은 왕진을 나가셨소이다. 손할머니 도련님이 오시면 지은 약을 올리라고 하셨나이다.》

《네에-》

허준은 황송해하며 저도모르게 허리를 굽석거렸다. 설유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시원해보이는 검은 눈을 들어 저앞에서 쩔쩔매는 허준의 순진한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약꾸레미를 공손히 내밀었다. 허준은 설유를 면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길을 내리깐채 그가 내주는 약꾸레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굽석 인사를 하고 황황히 돌아섰다.

몇걸음 걷던 허준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아섰다. 문가에서 한본새로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짓고 설유가 허준을 응시하고있었다. 문가로 다가선 허준은 용기내여 입을 열었다.

《저, 아씨…》

설유가 무슨 일이냐 하는 눈길로 허준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 그윽한 눈빛은 심산의 옹달샘이런듯 얼마나 맑은지 티 한점 없다.

《무슨 일이오이까?》

《제 일전에도 의원님에게 말씀드렸소만 저 서가에 있는 의서를 빌려줄수 없나이까?》

아버지가 안 빌려주는 의서이지만 허준은 왜 그런지 설유만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것 같았다. 어째서 설유에 대한 그런 믿음이 생겨났는지 자기도 알수 없었다. 늘 병자들로 붐비는 류이태의 집에서 설유와 단둘이 마주선 이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허준은 기대에 찬 눈길로 설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유가 속삭이는듯 한 목소리로 다정히 불렀다.

《저, 공자님!》

공자님이라니?! 허준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분명 아릿다운 처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맑은 목소리였다. 서자라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수모를 받던 자기였다. 허준은 설유의 그 한마디 말에 그처럼 아득해보이던 그가 가장 가깝고도 허물없는 사이로 느껴졌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청을 드려서는 의서를 빌릴수 없소이다.》

《그럼 거절이나이까?》

허준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러한 허준을 바라보며 설유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상심마소이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쓴 수사본(인쇄하지 않고 손으로 쓴 책)이 있사온데 그걸 좀 보여달라고 하시오이다. 오히려 그게 공자님한테는 더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렇소이까?》

귀가 버쩍 트이는 소리였다. 의서를 빌릴수 있다는 희망으로 허준은 단박에 소심하고 의기소침하던 젊은이로부터 담차고 기백있는 젊은이로 변했다. 그는 와락 설유의 하얀 손목을 부여잡고 부르짖었다.

《아씨! 정말 고맙소이다!》

《어마나!》

허준의 손아귀에서 자기의 손을 뽑으며 설유가 지르는 비명소리.

그제서야 허준은 자기가 너무도 기쁜김에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다. 덴겁하며 허준은 어쩔줄을 몰라 두손으로 괜히 바지괴춤을 문질렀다.

허준이 제편에서 도리여 바빠하자 설유는 자기가 본의아니게 그를 옹색하게 만들었다는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허나 난생처음으로 사내에게 손목을 잡히고나니 부끄러움이 온몸을 휩쓸어 애꿎은 옷고름만 잡아뜯었다.

《그럼 하루이틀새에 다시 오겠소이다.》

허준은 노을빛인양 빨개진 설유의 얼굴을 우정 보지 않으려고 헤덤비며 문을 나섰다.

오늘은 참 운수가 좋은 날이였다. 그토록 읽고싶던 의서를 빌려볼수 있는 방도가 생긴것이다. 그 방도는 다름아닌 설유가 가리켜준것이다. 죽순이가 준 의서를 읽고 또 읽어보며 허준은 의학이란 걸코 쉽사리 접어들 학문이 아니라는것을 느꼈다. 그래서 허준은 류의태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려고 생각했지만 이렇다할 타당한 리유가 서지 않아 망설이고있었던것이다.

이제 류이태에게서 의서를 빌려읽으면 자연스럽게 물어볼수 있었고 또 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파악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서가에 있는 의서를 빌려보려고 애썼던것이다.

달아오른 얼굴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식혀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허준은 속으로 자기의 마음을 가늠해보았다. 곰곰히 돌이켜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껏 오직 글공부에만 파묻혀 언제한번 랑자들에게 말을 건네본적도 그리고 눈길을 준적도 없는 자기가 아닌가. 분명 설유에게 한 허준의 오늘의 행동은 그답지 않은 처신이였다.

(내가 혹시 설유를 남다르게 생각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보았으나 자기가 은연중에 설유를 마음에 두고있음을 부인할수가 없었다.

아서라, 아직은 나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 이렇다할 뜻도 세우지 못하고 벌써부터 이성에 대해 론한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 설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허망한 생각을 한다는것은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다.

내 뜻을 세운 다음에는 그 처녀를 찾아가 이 심정을 토로하리라. 그때까지는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허준은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며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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