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불우한 서자

8

 

려월모자가 산음으로 떠나간다는 소리는 오매에게 청천벽력이였다. 려월의 집에 가서 한바탕 화풀이를 한 오매는 그가 실신하여 거의 죽게 된것을 허준이 다행히도 발견하고 용한 녀의원의 치료를 받아 소생시켰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을 들은 다음부터 아니, 려월의 집문밖을 나서는 그 시각부터 남편이 자기의 처신에 분감을 가질것이고 그러면 여불없이 자기를 더 쌀쌀히 대해줄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기는 영영 남편의 사랑은커녕 살뜰한 말 한마디 들을수 없다고 짐작하고있던 오매이다. 그래서 오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남편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한데서는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저 령감이 분명 려월년의 집에 갔을터인데…)

오매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 아이들이 다 자라 둥지를 떠난 이 나이에는 일명 《신혼생활》을 한다고 부러워하는 때이다. 갓 시집와서는 아이를 낳을래 그래, 그다음에는 어린아이들을 키울래 그래 또 시부모를 모실래 그래 언제한번 남편과 따끈따끈한 부부생활을 누릴수 없었던 녀인들은 아이들이 커서 시집장가를 갔거나 제 일거리를 찾아 떠나가면 그때에야 진정한 부부생활을 누린다고들 한다. 그래서 이 나이때의 녀인들은 더 젊어지고 더 세련되며 더 자기의 용모를 가꾼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정신에 자기를 가꿀새 없던 녀인들이 이 나이에는 별스럽게 거울에 마주앉는 때가 많으며 언제 생겨났는지 알수 없는 자기의 흰머리카락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고 남은 여생이나마 편안하고 재미나게 살려고 한다.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녀인들은 젊었을적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지부럭거리며 헤덤비던 남편을 더없이 소중히 여긴다. 진짜 부부생활의 진미는 이때라고들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씨암닭을 잡는다, 구기자술을 담근다 하며 남편의 기력을 왕성하게 하는 온갖 보약들을 마련하느라고 뛰여다니는것을 하나의 락으로 여기지 않던가.

오매도 다름아닌 그 나이때다. 두 딸은 이미 한성에 있을적에 출가했고 아들은 저 경상도에 가서 공부를 하고있다. 이 집에 남아있는것은 자기와 남편 둘뿐이다. 하루종일 빈방에 홀로 앉아있다가 저녁이면 집에 들어서는 남편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가 애써 준비한 음식을 골라집어주고 남편이 달게 드는것을 보며 무등 기뻐하는 나이, 잠자리에 함께 누워서는 아이들과 시부모의 눈이 있어 저어했던 애무와 정을 깡그리 쏟아부으며 부부라는게 바로 이런것이구나 하고 맥놓고 솔곳이 잠에 들 나이였다.

녀인들에게서는 인생의 절정기라고 할수 있는 나이건만 오매는 청상과부처럼 너렁청한 빈방에 홀로 멍청히 앉아 심연의 실꾸레미를 풀고있다. 마치 부처님앞에서 불공을 드리고 속죄하는 심정이였다.

비록 남편앞에서 추태를 부렸지만 남편의 애무와 그 석쉼한 목소리, 지어 코고는 소리까지 그리운 오매였다. 려월에게 빠져있다지만 부부간의 정이 영 없어지지 않은 남편이였다. 그날밤에 남편앞에서 처신한 자기의 행실은 오매생각에도 낯이 뜨거운노릇이였다. 그때엔 설음과 화김에 더구나 울컥하면 참지 못하고 한바탕 밸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이기에 그런 추태를 부렸지만 (오매생각에도 분명 자기의 행실은 추태였다.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갓쓰고 뒤를 보는것 같이 속이 편안치 않았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남편의 기색에 왼심을 썼다. 헌데 남편은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전혀 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오매와 한잠자리에 들군 하였다. 헌데 삑 돌아누우면 그만이다. 그리고는 옆에 오매가 있는지 없는지 코를 골아댄다.

무반출신이여서 그런지 맹꽁징꽁하는 고라리생원이나 삼강오륜이 어떻소, 도덕이 어떻소 하는 골치아픈 말거리만 꺼내는 문반출신과는 달리 뒤가 없고 성큼성큼한 남편이 갑자기 앵돌아진 계집년처럼 그렇게 처신하자 오매는 제편에서 더 바빠났다. 차라리 욕이라도 콱 하고 잠자리라도 따로 하면 좋으련만 이건 도저히 남편의 속을 대중할수 없다. 물론 입이 무겁고 자기의 속을 잘 내보이지 않는 남편의 성정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오매는 산악같이 막아선 남편의 떡판같은 잔등을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다가는 제풀에 돌아누워 눈물을 머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침 밥상을 물린 남편이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준이모자가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오.》

오매는 흠칫 놀랐다.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놀라오? 부인이 제일 기뻐할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 말을 남기고 남편은 문밖을 나섰다.

남편의 말대로 려월이 없으면 응당 기뻐해야 할 오매가 아니던가. 헌데 기쁘기보다는 속이 허우룩했다. 무슨 까닭으로 허준의 모자가 고향행을 하는것인가? 오매는 머리를 쥐여뜯으며 생각을 굴려보았다. 려월이 경상도 산음에서 남편을 따라왔으며 산음에는 그의 홀어머니와 양조부모가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던 오매이다.

자기의 성화에 못이겨 일시 피하는것인가? 그런것 같진 않다. 분명 남편의 입에서는 《준이모자가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오.》 라는 말이 튀여나왔다. 이는 려월이 스스로가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소리이다. 남편의 의사가 아니라 본인의 의향이라는것인데 그러면 남편이 승낙했다는 뜻이 아닌가.

오매는 려월의 백옥을 다듬은듯 희고 매끈한, 본댁으로서가 아니라 녀성으로서도 심술이 나는것을 어쩔수 없는 그 아름다우면서도 싱싱한 젖가슴이며 몸매를 상상해보았다. 숨이 꺽 막히게 녀성인 자기도 감탄하는 아릿다운 육체가 눈앞에 떠오르자 남편이 그런 려월이의 고향행을 승낙했다는것이 도저히 풀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여기엔 무슨 쪼간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야 그년한테 미쳐돌아가는 령감이 호락호락 보낼수 없어.)

오매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할수 없었다. 이럴 때엔 아들이 그리웠다. 제 애비한테 개처럼 욕을 처먹으면서도 한본새로 글공부대신 계집질에 돌아치는 아들이다. 언제인가 애비한테 하도 욕을 처먹기에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장가라도 보내면 그 버릇이 떨어지지 않을가 해서 혼사말을 비쳤더니 그래두 속은 살아서 《내 이제 장원급제하면 조선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제일가는 미인을 안해로 삼겠으니 너무 걱정마우!》하고 호언장담하던 아들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야, 너처럼 꾀죄죄한 시골장생한테 어느 눈먼 계집이 시집오겠다던?》 하고 빈정대니 대뜸 낯색이 시퍼래서 《내 이래 뵈두 제갈량을 찜쪄먹는 모사라우다.》하는데 그 뱁새눈에선 이 어미도 거절할 불이 황황 뿜어져나오는것이였다. 그다음부터 다신 혼사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아들의 머리는 정말 팽이 한가지로 얼마나 잘 도는지 애비도 혀를 찬다. 허모가 곁에 있으면 즉석에서 려월모자의 속내를 손금보듯 알아낼것이 틀림없다. 헌데 천리밖의 그애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불현듯 아들의 말이 생각났다. 애비와 허준의 집에 대한 일을 책방이 자기에게 기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책방과 의논하면 무슨 신통한 소리를 들을수 있을게 아닌가. 혹 아들에게 기별할런지도 모른다.

오매는 자기가 제일 심복하는 하인을 불러 귀에 대고 나직이 분부하였다.

《넌 이제 당장 가서 책방나리를 데리고오너라. 절대로 사또가 눈치채지 못하게, 알았냐?》

《명심해 들었소이다.》

사또댁 하인노릇하기란 헐치 않다. 한 고을의 정사를 주관하는 사또댁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못하면 다른 량반댁의 하인들과 달리 그 벌이 간단치 않다. 룡천고을의 사또댁 내외간의 갈등과 모순을 제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하인은 오매의 분부대로 군수 몰래 책방을 데리고 오매앞에 대령하였다. …

마가을의 바람에 락염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자기의 결심이 남편의 동의를 받은 후부터 려월의 몸은 생각외로 호전되였다. 이젠 몸에 난 상처도 다 아물고 때없이 어지럽던 머리도 천고마비의 가을철의 쾌청한 날씨처럼 거뜬하였다. 그런데다가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와 치료해주는 죽순의 성의로 려월은 온몸에 생기가 넘치고 본래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되찾은 기분이였다.

이제 사흘후에는 산음으로 떠나게 된다.

려월은 그간 자기를 성의껏 치료해준 죽순을 위해 소박하나 지성껏 음식을 차리고 그와 선복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한 보름나마 치료를 받는 사이에 려월은 죽순이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여버렸다. 나이를 따져보니 자기와 동갑이다. 자기와 나이가 같은 죽순에게 이제 겨우 열서너살밖에 안되는 딸애가 있다는것이 머리가 기웃거려졌으나 려월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이날 허준은 상을 물리고나서 죽순에게 어떻게 되여 의술을 배웠는가를 물었다. 바라지창으로 은은한 달빛이 비쳐들어온다. 온종일 약초를 찾아 산판을 헤매던 선복은 려월이가 내여준 이불우에서 쌕쌕거리며 단잠에 들었다. 허준의 그 물음에 죽순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이 집에 올 때부터 이들모자가 저 경상도 산음으로 떠나간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죽순이다.

산음, 죽순에게 있어서 산음은 가슴아픈 사연이 못박힌 고장이다. 아니, 꿈속에서라도 가고싶은 곳이면서도 영원히 갈수 없는 고장이기도 하였다. 죽순은 지꿎게 묻는 허준의 그 눈길앞에서 자기가 더는 속이면 안된다는것을 느꼈다. 더구나 려월이를 통해 이들의 산음행이 허준의 장래를 위한 길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천진하다고 할 정도로 순박하고 향학열에 불타는 허준이가 왜 그런지 못잊을 그 사람의 모습으로 안겨와 암담한 어조로 지나온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죽순의 어릴적아명은 후남이였다. 한때 한성장안에서 신진출신 인재로 조야의 이목을 모으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된서리를 맞고 경상도 산음으로 내려간것은 죽순이 아직 세상에 태여나기 전인 1519년이였다. 이해 11월에 있은 이른바 기묘사화라 일컫는 이 란리통에 조광조, 김정 등과 그를 추종한 사람들이 모조리 조정에서 숙청되였는데 아버지는 단 하나의 리유 즉 조광조 등이 제안하여 그해 8월에 실시한 천거별시(현량과)급제생이라는것으로 하여 탄압을 당하였다. 다행히도 조광조 등과 직접적인 연줄이 없었던 관계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고향인 산음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생의 말년까지 벼슬길과는 담을 쌓고 오직 학문연구와 산수구경으로 세월을 보내였다. 산음에 내려간지 5년후에 아버지는 부모들의 주선으로 충청도 은진태생인 어머니와 결혼을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딸만 셋을 낳았다. 행여나 해서 네번째로 낳은것도 또 딸이라 부모들은 덮어놓고 그의 이름을 《후남(후에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이라고 지었다. 헌데 후에 낳은것도 또 딸이여서 부모들은 더이상 아이낳이를 포기하고말았다. 이후로 산음읍내에서는 죽순의 집을 가리켜 그전의 《한성집》이라 부르던것을 《딸딸이네 집》이라고 불렀다. 《한성집》이라면 잘 몰라도 《딸딸이네 집》이라면 코흘리개들도 다 알았다.

죽순이라는 이름은 후날 그가 한성의 전의감에 있는 의원양성소를 다닐 때 고쳐지은 이름이다.

한생을 벼슬살이와 등을 지고 음울한 심사를 책과 산수구경으로 달래던 아버지는 그가 일곱살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계집애들만 한구들 있는 《딸딸이네 집》이였지만 형제들사이의 정은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자별하였다. 그중에서도 남달리 총명하고 담찬 죽순에 대한 언니들의 관심은 류다른것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쾌활한 죽순은 남정이 없는 집안의 공기를 순간에 밝게도 하고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죽순이 열다섯살잡히던 해에 한성에 있던 이모가 산음에 내려왔다가 남달리 눈썰미가 있고 학문에 밝은 그의 재주를 아쉬워하면서 제사 키워준답시고 데리고 올라갔다. 이모는 비록 녀성이였지만 글읽기를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였는데 남편도 없이 홀로 사는 언니의 처지가 가긍하고 또 죽순이가 계집애이지만 재주가 뛰여난것이 기특하여 한성으로 데리고갔던것이다. 그무렵 이모부는 사간원의 정언(정6품)벼슬을 하고있었는데 안해의 말을 듣고 며칠밤 궁냥을 하다가 계집애가 학문을 배워선 벼슬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재간을 하나 배우는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지금 나라에서 의원양성소를 운영하는데 거기에 들어가 의술을 배우는것이 어떠냐고 죽순의 의향을 물었다. 아버지도 없이 홀어머니손에서 자랐지만 사내 못지 않게 담차던 죽순이라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응하였다.

헌데 바로 이 결심이 죽순의 일생을 그리도 가슴아픈 상처를 입힐줄 어이 알았으랴.

죽순은 부지런히 의술을 배웠다. 천성적으로 눈썰미가 있고 머리도 좋았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그는 얼마 안 있어 의원양성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의술의 진미를 파고들수록 죽순은 재미나고 성수가 났다. 사람들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비방을 알려주어 그들의 병이 완쾌되게 하는 의술은 죽순에게 있어서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죽순의 시야에 두 사내가 비껴들었다. 그중의 한사람은 의원양성소에서 의술을 배워주는 내의원 의관인 스승이였고 다른 한사람은 산음의 시골의원인 류이태였다.

죽순에게 의술을 배워주는 스승은 일찍부터 의술을 익혀 그때 당시에는 내의원의 의원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렸으나 의술에서는 엄지손가락에 꼽히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나라님의 병도 봐주었다고들 하는데 장차 궁중의 어의는 스승이 될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한 스승에게서 의술을 배운다는것은 죽순에게 있어서 일종의 긍지였고 보람이였다. 죽순은 스승의 고명한 의학지식과 류창한 언변에 완전히 심취되여있었다. 더구나 스승은 세명의 녀의원양성생들가운데서 류달리 죽순에게 관심이 컸고 살뜰하게 대했다. 오죽하면 함께 의술을 배우는 녀양성생들속에서 《선생이 죽순에게만 의술을 몰래 배워준다.》고 수군거릴 정도였겠는가. 어쨌든 죽순이 양성생들속에서 두각을 나타낸것은 본인의 이악한 노력도 있겠지만 스승의 남다른 사려와 관심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었다. 허나 죽순과 스승의 관계는 엄연하게 양성생과 선생이라는 사제관계였다.

죽순은 이성문제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 항용 자기 일에 열중하는 녀성들 대부분이 이성문제에선 생둥이 한가지듯이 오직 죽순은 의술을 배우는것밖에는 이여의 일에는 무관심하였다. 하긴 그런 성정으로 해서 남들은 시집가는 그 나이에 의술에 미쳐돌아간 죽순인지도 모른다. 죽순은 의술선생에 대해 언제한번 이성적감정을 품은적이 없었으며 그저 풍부한 그의 의학지식과 막힘없는 처방, 치료에 반해있었을뿐이였다. 녀양성생들속에서 두사람의 관계를 놓고 여러가지 뜬소문이 돌았지만 죽순은 자기와는 무관한것으로 심상하게 여겼다.

그러던 둘관계가 갑자기 이성관계로 번져진것은 어느해 여름이였다. 양성생들의 수강은 몇개 조로 나뉘여 진행되군 하였는데 이날 받아야 할 의술내용은 내과치료와 관련한 실지치료법이였다. 죽순이 속한 조는 모두 네명인데 세명은 남양성생이고 녀자는 죽순이 하나뿐이였다. 실지치료법은 대체로 배워주는 선생과 배우는 양성생들이 서로 저들의 몸을 치료대상으로 삼고 진행하군 하였는데 먼저 남양성생들의 치료법실천이 끝나자 맨 나중에 죽순의 차례가 되였다.

생각없이 선생의 손에 제 몸을 맡기고 누운 죽순은 자기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스승의 눈길앞에서 불쑥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무리 사제관계라고 해도 상대는 남성이고 자기는 처녀가 아닌가. 아직 그 누구도 만져보지 못한,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자기의 새하얀 동가슴이며 배살갗을 다름아닌 남성의 손에 맡긴다고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숨소리가 높아지고 모닥불을 들쓴듯 부끄러웠던것이다.

어떻게 스승의 설명을 들었는지 스승이 떨리는듯 한 (분명 스승의 목소리는 떨렸다. )목소리로 무엇을 말했는지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왜 그리도 시간은 더딘지 짜증이 났다. 여느때는 스승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강론시간이 좀더 길었으면 하던 자기였건만 이날따라 그 시간이 지루하고 길기만 하였다. 눈을 꼭 감고 누워있는 죽순의 머리는 그런 생각으로 온통 뒤죽박죽이였다.

《자 이제는 내가 말한대로 죽순이 한번 치료를 해보오.》

불쑥 귀전을 때리는 스승의 목소리에 죽순은 감았던 눈을 뜨고 얼른 일어나 옷가짐을 수습하였다. 죽순이 누웠던 자리에 스승이 드러누우며 자기가 하던대로 제 몸에 치료를 해보라고 하였다.

지금껏 실험삼아 많은 병자들의 몸부위를 누르며 타진하고 치료를 해온 죽순이였다. 허나 어째선지 자기앞에 드러누운 스승의 몸에 손이 가지 않았다

《왜 그러나? 내가 방금 말한 황달시 처방법을 해보오 》

죽순은 스승의 배부위를 꼭꼭 누르는 제 손이 자기 손같지 않았다.

허둥거리는 죽순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던 스승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쏘듯 한마디 던졌다.

《죽순은 래일부터 의원양성소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의술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쓸데없는 잡생각에 옴하니 그게 무슨 의학도인가. 그래도 난 죽순일 크게 믿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지…》

그 말에 죽순은 후닥닥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난 녀성이기 전에 의술을 배우는 사람이다.

《용서하소이다, 선생님! 의술에 뜻을 둔 소녀가 잡생각에 일시라도 빠진것을 용서하소이다.》

스승은 말없이 죽순을 한동안 굽어보더니 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의술을 배운다는게 쉽지 않아. 더구나 녀성의 몸으로 남자들도 선뜻 배우려 하지 않는 의술을 배운다는게 정말 어려운 일이야.》

그러더니 스승은 고개를 푹 떨구고있는 그의 얼굴을 다정히 들어올렸다.

《죽순인 의술을 배우기엔 너무 곱게 생겼어. 정말 나도 죽순을 볼 때면 자기를 겨우 억제하지, …》

그 말을 하는 스승의 눈에선 홰불이 황황 일었고 숨소리는 황소숨을 쉬는듯 하였다. 그 불길에 죽순은 제 몸이 타버릴것만 같았고 졸지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저도모르게 죽순은 매시시해지는 제 몸을 겨우 지탱하며 쓰러지듯 스승의 품에 안겼다. 죽순을 꼭 그러안은 스승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전을 세차게 두드렸다. 망연자실한 죽순은 그저 스승이 하는대로 몸을 맡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행복했던지 아니면 슬펐던지, 죽순은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꿈을 꾸는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잠시후 죽순은 자기가 스승의 품에 안겨 누워있다는것을 의식하고 후닥닥 그의 품에서 일어나 옷가짐을 수습하고 방안을 뛰쳐나왔다. 정신없이 뛰여가는 그의 눈에선 눈물이 샘솟듯 흐르고있었다. 남양성생들이 눈이 퀭해서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날 밤 죽순은 한잠도 이룰수 없었다. 새삼스레 자기 나이가 스무살이 넘었다는것을 인식하였다. 눈을 감으면 자기의 새하얀 몸을 더듬던 스승의 기다란 손감각이 아직도 제 몸에 머무른듯 하고 자기를 정답게 바라보던 그 섬광치던 눈빛이 얼른거려 끝내 긴긴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닭이 홰칠무렵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죽순의 두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베개잇은 화락하니 젖어있었다.

며칠동안 죽순은 스승을 마주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앞에 서게 되면 마치 자기가 알몸으로 나선것 같이 느껴지고 아직도 그의 손이 제몸을 만지는것 같아 저도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더구나 어머니도 모르게 자기가 처녀의 몸을 상실한것이였다. 그리고 녀성의 몸으로 의술을 배운다는게 허망한짓같이 여겨졌다.

과연 내가 스승을 마음에 두고있었던가?

저 혼자 묻고 대답하기를 그 몇번…

대답은 《아니.》였다. 헌데 그는 그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던것이다. 어떻게 되여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죽순이 저자신도 알수 없었다.

그저 죽고싶었고 실컷 울고싶었다. 한달후 죽순은 끝내 병치료를 구실대고 어머니가 계시는 산음으로 내려가고말았다. 다시는 의술을 배우고싶지 않았고 스승과 마주서고싶지 않았다.

그런 모진 생각끝에 산음으로 내려간 죽순이 반년후에 다시 양성소에 올라오게 된것은 전수이 류이태라는 산음의 젊은 의원때문이였다. …

어느덧 첫닭이 홰치는 소리가 울렸다.

《벌써 날이 밝는군요 》

죽순이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뇌이였다.

《앞으로 우리가 또 만날 때가 있겠지요. 산음에 가면 류이태라는 의원이 있어요. 도련님은 보아하니 학문연구를 일생의 목표로 내건것 같은데 그 류의원이 도련님과 비슷해요. 혹 만나게 되거들랑 내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니, 내 생각에는 도련님과 류의원이 아마 인연이 있어 꼭 만나게 되리라고 믿어지는군요. … 이젠 우리 이야기도 끝을 봐야지요. 내가 다시 의술을 배우고 오늘과 같은 의원이 된것은 류이태라는 그분때문이예요. 그분이 없었더라면 난 이 세상에 더는 없을런지도 몰라요.》

과시장에서 쫓겨난 후 장차 무엇을 할것인가 모색하던 허준은 자기의 마음이 은연중에 의학으로 쏠리고있음을 느꼈다.

무엇인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고싶은 욕망이 그로 하여금 의학으로 떠밀었는가 아니면 생사기로에 놓였던 어머니를 귀신같이 살려내는 죽순의 의술에 탄복해서일가.

《선복이 어머니! 아직은 잘 모르겠소만 저도 의학을 배울가 하오이다.》

《도련님이?!》

허준의 그 말에 옆에 앉아 죽순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짓던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아들과 죽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소이다. 왜 그런지 이즘에 와서는 의학이라는 학문에 마음이 쏠리는것을 걷잡을수가 없소이다. 화담선생님처럼 벼슬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실지로 유익한 일을 하고싶나이다. 그러나 리론상의 론의가 아니라 실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 다시말하여 의원님처럼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사람들이 앓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수 있게 하는 의술을 배우고싶은 충동이 자꾸만 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소이다.》

죽순은 그윽한 눈으로 열에 떠서 상기된 허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거예요. 허나 난 도련님을 믿어요. 도련님의 그 의기와 초지가 마음에 들어요. 류의원이 나에게 하던 소리를 십오년이 지난 오늘 도련님한테서 다시 듣는군요. 좋아요! 난 절대찬성이예요.》

《정말이오이까?》

《그래요. 그 길로 가세요. 도련님은 꼭 성공할거예요. 아니, 난 굳게 확신해요!》

《고맙습니다. 의원님! 의원님은 오늘 저에게 정말 뜻깊은 말씀을 해주셨나이다. 제 기어이 의학탐구의 길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소이다!》

《준이야! 그 말이 정녕 참소리냐?》

려월의 눈에 감동의 빛이 흘렀다.

허준은 어머니의 손을 자기 손우에 덧놓으며 힘있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모자의 그 모습이 죽순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럼 도련님이 떠나가실 때 저에게 있는 의서 한권을 드릴테니 참고해보세요. 사실 그 책은 류의원이 저에게 준 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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