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불우한 서자

6

 

려월은 며칠동안 어슬녘이 되도록 동구밖에 나가 초조한 마음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아들이 실력이 높다고 해도 정작 과거보러 떠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오밀조밀하고 강녘에 어린애를 내놓은듯싶어 도무지 진정할수 없었다. 오늘도 벌써 몇번이나 동구밖에 나온 려월이다.

(이젠 과시가 다 끝났을텐데… 왜 아직 안 돌아올고?)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가엔 별들이 또글또글하다. 별들이 반짝이는 저 멀리 하늘가밑 어딘가에 있을 고향으로 가고싶고 불쑥 어머니의 얼굴이 못견디게 그립다. 서로 내기나 하듯이 반짝거리는 저 별들을 산음에 계시는 어머니도 보고계실가 하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가 걸어온 수난에 찬 운명을 자기가 그대로 걷고있다는 생각이 부지중 갈마들었던것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려월이다.

어렸을 때 《난 왜 아버지가 없나?》 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네 아버진 저 먼곳에 일하러 가셨단다. 이제 우리 려월이가 이만큼 크면 아버지가 고운 색동옷을 사가지고 돌아오신단다.》

손을 자기의 머리우로 쑥 올리며 말하고난 어머니는 조용히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때는 왜 어머니가 우실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마도 아버지가 보고싶어 그러는가부다 여겼던 려월이다. 때때로 려월은 한밤중에 잠결에 자기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있는 어머니를 보군 하였다.

제일 잊혀지지 않는것은 려월이가 다섯살 잡히던 설날아침에 있은 일이다.

아침에 깨여난 려월은 깜짝 놀랐다. 머리맡에 고운 색동저고리가 놓여있었다. 아니, 그럼 저 먼곳에 가신 아버지가 오셨나?

마침 부엌에서 들어오던 어머니가 눈에 띄워 려월은 그 품에 뛰여들며 소리쳤다.

《엄마, 아빠가 왔어. 이것 봐, 내 색동저고리!》

어머니는 려월이를 꼭 껴안고 《그래, 정말 곱구나. 어서 한번 입어봐라!》하고는 덤벼치며 새옷을 입는 자기를 거들어주었다. 새옷은 마치 려월이의 몸을 재고 만든듯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이때 할아버지가 들어오더니 《어이구, 려월이가 마치 선녀같구나. 옷이 날개라더니 우리 손녀가 정말 곱구나.》하셨다.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할머니까지 방안으로 들어와 새옷을 입은 려월이를 한동안 바라보는데 이상한것은 할머니의 눈귀가 젖어있는것이였다.

새옷을 입고 기분이 붕- 뜬 려월이가 방안에서 뱅그르르 한바퀴, 두바퀴 돌다가 어지러워 비칠거리니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깔깔거리며 돌아가던 려월은 어지럼증으로 비칠거리다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는다는게 그만 수건을 쓴 어머니의 머리를 손으로 다쳤다. 어머니가 휘청거리는 려월이를 부둥켜안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머리수건이 벗겨졌다. 어머니품에 안긴 려월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탐스럽던 어머니의 머리채가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중처럼 빤빤했던것이다. 지나던 길손들이며 동네사람들이 려월이를 보고 《저앤 꼭 제 에미를 빼물어 정말 이쁘구나.》 하기에 려월은 내가 정말 우리 엄마처럼 생겼나 하고 생각하며 그때마다 어머니의 새하얀 얼굴이며 칠칠이 검은 머리채를 만져보군 하였다.

그 순간 려월은 머리칼 한오리 없는 어머니가 딴 사람으로 보이며 더럭 겁이 났다. 그만에야 려월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수건을 황황히 집은 어머니는 려월이가 울음을 터치자 당황해하며 부엌으로 뛰쳐나갔다.

할머니가 말없이 려월이를 껴안았다. 려월은 앙상한 할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칭얼거렸다.

《우리 엄마 아니야. 난 아빠한데 갈래. 아빠야!-》

려월이의 잔등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이 후두두 떨리고 려월의 얼굴에 할머니의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 철없는것아! 이 세상에 없는 아빠가 어데 있다구 계속 찾냐, 응?! 설날이라구 네 에미가 자기 머리태를 팔아 새옷을 사온걸 알기나 하냐!》

부엌에선 오열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려월은 할머니의 말을 리해할수 없었으나 어머니가 그 아름다운 머리채를 팔아 자기의 새옷을 사왔으며 아버지가 세상에(무슨 소리인지는 다는 몰랐지만) 더는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려월은 할머니의 품안에서 발딱 일어나 부엌으로 뛰여가 벽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흔들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아빠소리 안할래. 엄마야!》

벽을 의지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서있던 어머니가 돌아서며 와락 려월이를 끌어안았다.

《려월아, 내 딸아!》

아,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그후부터 려월은 다시는 아버지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그가 허륜을 따라 산음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려월에게 가슴속에 고이 묻고있던 가정의 래력을 눈물속에 들려주었다. 그러시며 어머니는 려월의 손에 친할머니의 유물인 옥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궁녀였던 할머니의 유물이자 한가정의 유산이였다.

려월은 손에 낀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먼 남쪽하늘가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렀다.

《지금 이 시각도 애오라지 이 딸이 행복하기만을 원하시는 어머니! 걱정마세요. 어머니의 손자가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와요. 그앤 꼭 합격 될거예요. 이 고을에서 준이만큼 공부를 잘하는 애는 없어요. 내 이제 준이를 앞세우고 어머니를 찾아뵈렵니다. 어머니!-》

문득 어둠속에서 말투레질소리가 들렸다. 려월은 바삐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준이냐?》

어느새 그쪽으로 발길이 향했다. 조용히 집으로 들어서려던 허준은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대답하였다.

《예, 준이오이다.》

허둥지둥 달려간 려월은 허준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지금 오느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였느냐?》

허준은 어머니가 가을바람부는 언덕에 얼마나 오래 서있었으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 제대로 되였소이다.》

《그래, 수고했구나.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허준은 타고온 수레를 끌고가는 사람에게 얼마간의 삯돈을 쥐여주고 어머니의 팔을 끼고 집으로 향하였다.

《시장할텐데 어서 밥부터 먹거라.》

방안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려월은 가마목에 놓아두었던 밥을 챙겨가지고 들어왔다.

머리를 수굿이 하고 밥상에 마주앉은 허준은 이번 일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말할가 망설이였다. 평양부에서 여기 룡천까지 수백리길을 수레를 타고오면서 허준은 커다란 심리적굴곡을 겪었다. 처음에는 수치감과 모멸감으로 자신을 다잡지 못하다가 다음은 격분으로 가슴을 끓이였다

지금은 그 소용돌이와 돌풍은 다 지나가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셈이다.

허준은 기나긴 수백리길에서 일생 벼슬을 버리고 오직 학문탐구에만 심신을 깡그리 바쳤다는 화담선생의 모습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우렷이 떠오름을 어쩔수 없었다.

(화담선생은 일생 벼슬을 하지 않았어도 후세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지 않는가.

력사와 후세사람들은 비록 신분은 평범해도 뜻이 높고 기개가 높아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에서 귀중한 재부를 창조한 화담선생과 같은 사람들을 길이 기억한다. 반면에 비록 권문세가의 자손이나 고관대작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그들이 벼슬이나 관직이 높아도 자기자신만을 위해 살았기때문이리라. 칠전팔기라는 말처럼 이 길에서 쓰러지지 않고 내 기어이 뜻을 성취하리라!)

문제는 한생을 바쳐 이룩할 목표와 일감을 하루빨리 찾는것이였다.

《뭘 생각하느냐? 국이 다 식겠구나.》

려월이 밥상앞에 앉아 숟가락을 든채 멍청해있는 허준의 앞으로 음식그릇을 밀어놓으며 한마디 하더니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 물사발을 들고들어왔다.

이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허륜의 격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뭐 어찌 되였다구?! 과시장에서 시험도 못 치르고 쫓겨나왔어?》

《아니?!》

쨍그랑- 려월의 손에서 물사발이 떨어졌다. 려월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자리에 폴싹 주저앉는다.

서슬이 푸르딩딩해서 방안으로 들어선 허륜은 려월의 낯색이 창백해진것을 보고서야 그가 허준의 일을 전혀 모르고있으며 이 소식이 그에게 얼마나 큰 타격으로 되는가를 깨달았다. 허나 일은 이미 엎어놓은 물함지였다.

려월의 낯색이 새하얗게 질리는것을 띄여본 허준이 숟가락을 든채로 어쩔바를 몰라한다. 그들모자를 일별해본 허륜이 애써 노기를 다잡으면서 입귀로 한마디 내뱉았다.

《내 감영의 도사 그놈을 그저…》

들어올 때처럼 허륜이 휭 바람을 일구며 방에서 나가버리자 려월은 그자리에 맥없이 스르르 쓰러졌다.

《어머니! 어머니!》

허준은 쓰러진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소리쳐불렀다. 숨소리마저 간간하다. 허준이 이불을 내려 어머니를 정히 눕히고 인중을 눌러주고 손발을 주물러주자 한참후에 려월이 정신이 든듯 눈을 가까스로 뜨더니 뚫어지게 아들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허준의 눈굽에 고여있는 눈물을 훔쳐주었다.

《자식두, 그런 큰 아픔을 혼자 묻고있다니…》

어머니의 두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더니 볼을 타고 베개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음날 이른새벽 허륜은 평양부를 향해 자견마를 달렸다. 그날 늦은저녁에 평양부에 이른 허륜은 곧바로 도사의 집이 있는 경상골로 쳐들어갔다.

《아니, 군수령감이 이밤중에 여기까지?》

한창 상에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도사는 수백리나 되는 룡천땅에서 날아온 허륜을 보고 도깨비가 방안에 들어온것만큼이나 후닥닥 놀라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엉?! 자네를 신주같이 믿구 내 아들을 맡겼는데 시험도 못 쳐보고 과시장에서 쫓겨나다니?

그래 너도 사람이냐? 해주마 하고 약속까지 하구도 과시장에서 쫓아내?!

그리고도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이 의리도 없는 자식!》

한주먹 안길듯 무섭게 따지고드는 허륜을 보며 사태의 진상을 알아차린 도사는 이럴 때 주눅이 들면 상대가 더 기승을 부린다는것을 잘 알고있기에 곧 마음을 다잡고 흔연스럽게 대꾸하였다.

《제가 있는 힘껏 노력해보았소만 일이 여의찮아 어른의 의사대로 되지 못했소이다.》

《뭣이 어쨌다구?》

도사는 헤식은 웃음을 띠우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말이지 이번 일을 어른의 요구대로 성사시키려고 제 재간껏 노력했지요. 헌데 일이 안될세라 이번 초시는 지난번과 달리 등록할 때부터 깐깐히 검토했나 봅니다.

상시관어른이 댁의 아들이 서얼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룡천군수의 신분위조행위를 관찰사어른에게 상소하겠다는것을 제가 겨우 말렸소이다.》

허륜은 펄쩍 놀라며 되물었다.

《상시관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리 준이 일은 나와 자네밖에 모르는 일이 아닌가?》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소이다. 듣자니 그 댁에서 누가 발설했다는지…》

잡아먹을것처럼 길길이 날뛰는 허륜의 눈치를 살피며 도사는 아리숭하게 얼버무렸다.

자기 집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허준의 모자와 자기뿐이다. 그것도 허준의 모자는 자세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있다.

《네가 이제 와서 우리 집안에 그런 험턱을 들씌워? 차라리 목이 달아날가봐 손을 뗐다고 말하는게 옳지 않나?》

여전히 한본새로 푸락푸락하는 허륜이지만 기상은 한풀 죽은듯 하였다.

《말이 난김에 터놓는다면 상시관어른의 말처럼 이 사실이 감사나리께 알려지고 조정에 상주되면 군수령감이나 그 일을 알고도 눈을 감아준 나는 봉고파직당하기 일쑤지요. 량사(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가만있을리 없지요. 하루가 멀다하게 탄핵상주문이 임금의 탑상에 쌓일거우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은 령감이나 허씨가문을 위해서도 다행이라 생각하시는게 마음이 편하지요.》

삽사리마냥 자기의 눈치를 살피며 묘하게도 빠져나가는 도사의 세모진 얼굴을 바라보는 허륜은 그의 속심이 십분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분명 이자가 누구한테서 사촉을 받았던가 아니면 다른 놈한테서 더 큰 뢰물을 받고 허준의 일을 밀어버린게 틀림없다. 그래놓고는 마치 제사 허륜의 앞일을 생각해서 처신한듯이 놀아댄다. 입이 쓰거웠다.

허륜은 그와 마주서서 시비를 했댔자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변명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모르게 울컥 분기가 더 북받쳐 밥상을 힘껏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밥상우의 음식들이 산지사방으로 뿌려졌다. 도사의 얼굴에 새빨간 고추물이 튀였다. 얼굴에 묻은것을 씻으며 도사가 눈살이 꼿꼿해서 언성을 높였다.

《왜 이러시우? 난 그래두 령감을 생각해서 상시관어른에게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신분위조행위를 무마시켰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소이까? 오히려 나한테 귀잡구 절해야 할 령감이 이 무슨 추태요? 정말 섭섭하웨다.》

이젠 제편에서 도리여 큰소리를 친다. 허륜은 철면피한 도사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너같은걸 그래두 친구라고 믿은 내가 눈이 멀었지.… 내가 보낸 금가락과 삼을 당장 내놓으라. 이 쓸개빠진 자식!》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우? 말이라구 아무 말이나 탕탕 해도 일없수? 그리구 령감이 보낸 물건은 나한테 없수다. 그 물건은 상시관어른을 무마시키느라구 다 주었수다.》

《뭣이? 이자 보니 네놈이 감영의 도사라구 하늘높은줄 모르누나. 정말 내 물건을 못 내놓겠어?》

허륜은 도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세차게 흔들었다.

《아, 이러지 마시우다. 못 내놓는게 아니라 없수다. 있어야 내놓을게 아니유?》

아무리 그래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였다. 허륜은 욱-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도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도사가 벌렁 나자빠져 발버둥질을 하며 방바닥에 뒹굴었다.

《퉤, 더럽다! 너같은 놈은 제명을 못살구 뒈질게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던 허륜은 한참이나 방바닥에서 아부재기를 치며 뒹구는 도사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그길로 감사가 거처하는 선화당으로 찾아갈가 생각하던 혀륜은 일이 이미 글러진바에야 그랬댔자 긁어부스럼을 만드는것 같아 숙소에서 하루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에 룡천으로 향하였다.

룡천으로 돌아오면서 허륜은 이 일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철석같이 약속한 도사가 어째서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겼는지 암만 생각해보아도 모를 일이였다. 분명 여기엔 무슨 쪼간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쥐도새도 모르게 꾸민 일이 어떻게 되여 상시관의 귀에까지 날아들어갔을가. 도사는 제 입으로 《그 댁에서 발설》 했다고 말하였다. 이 일은 례방비장밖에 모른다. 허륜은 례방비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면 례방비장은 오위도총부에 있던 허륜이 룡천군수로 부임되여와서 처음부터 오른팔처럼 믿고 정사를 펴나간 사람이다. 사람이 눈썰미가 있고 또 신용이 있었으며 자기의 말이라면 목숨까지도 불사할 위인이다. 그런 그가 절대로 이 일을 발설말라고 한 군수의 당부를 잊을리 만무하다.

(그러니 례방비장은 아니야. 그럼 어느 놈일가?)

불현듯 허준의 모자라면 눈에 달이 떠서 매삼치던 오매와 허모가 떠올랐다. 그렇다. 이는 그 모자에게서 사달이 난게 분명하다. 미욱한 오매의 머리에선 상시관까지 주무를 수가 나올수 없다. 팽이머리라는 아들놈의 작간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공부라면 얼굴부터 찌프리는 허모는 때로 애비인 허륜이도 아연케 하는 갑작수를 잘 쓴다. 그 수가 얼마나 치밀하고 상상을 초월하는지 허륜은 (저놈이 앞으로 길을 잘 들면 정승자리에도 오를수 있지만 자칫하면 저놈때문에 가문이 망할수 있어.) 하는 생각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군 하였다.

헌데 천리밖에서 서원에 다니는 놈이 어떻게 알수 있을가.

문득 별안간 집에 나타났던 허모가 간다는 소리도 없이 경상도로 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씩 올적마다 은전을 내놓으라고 에미를 든장질하며 성화를 먹이던 녀석이 이번에는 너무도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그러고보면 그놈이 올적마다 책방이란 놈이 별스레 분주탕을 피우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아차, 그러니 책방이다! 그놈이 례방비장과 이발과 입술관계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아닌가. 지독스레 술을 좋아하는 례방비장이 깜찍하기 그지없는 책방놈의 술을 얻어먹고 발설한것이 분명하다. 책방놈이 또 아들놈에게 전달했을것이구. 그래서 식년시를 한해 앞둔 가을에 초시를 치른다는것을 모르지 않는 허모 그자식이 별안간 집에 온것이다.

(허모 그놈이 준이의 향시응시를 훼방놓으려고 제 에미와 짜고 한짓이 분명해. 맏아들녀석이 한짓이 분명하다면 제 에미가 모를수가 없어. 그렇다면 허모녀석이 경상도로 내려가면서 감영에 들린게 확실한데 그놈이 누구를 만났을가? 그리구 이런 일은 빈손으로는 절대로 안되는데 혹시 이년놈들이 내 금전을 훔쳐낸게 아닐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숨이 가빠졌다. 오매는 남편의 금고에 충분히 손을 댈수 있는 말하자면 낯가죽이 솥뚜껑보다 더 두꺼워 저밖에 모르는 녀인이였고 허모 그자식은 제 에미를 닮아 눈섭 하나 까딱 않고 제동생을 궁지에 몰아넣을 놈이였다.

그러고볼 때 려월이는 오매와 천양지차였다. 설사 눈앞에 은전이 있어도 남편에게 고스란히 바칠 순진하기 그지없이 마음이 곱다. 그래서 그 미모보다 마음에 끌려 본댁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려월이를 끔찍이도 위해주고싶은 허륜이다.

수시로 허륜은 인격상에서나 용모상에서나 봉황과 까마귀같은 두 녀인을 대비하면서 이 세상에 량반(저도 물론 량반이지만)출신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도 용모도 추한데 평민이거나 천한 신분출신의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마음도 용모도 고울가 하고 생각하였다. 풀수 없는 이 수수께끼를 허륜은 자기식으로 백성들이 저렇게 용해빠지니 가난뱅이신세를 면치 못하는것이라고 눌러버렸다.

이 시각 허륜은 자기식의 그 위안이 허위이고 거짓이며 위선인듯 생각되면서 그 허상을 후려치기라도 할듯 미친듯이 말을 몰아댔다.

룡천읍에 당도한 허륜은 먼저 례방비장을 불러들였다.

아닌 밤중에 사또의 부름을 받고 동헌대청에 들어선 례방비장에게 허륜은 다짜고짜로 소리쳤다.

《이놈! 내가 그만큼 당부했는데도 비밀을 발설해?!

그래, 허준의 일을 책방한테 말했지? 내 그만큼 술을 삼가하라고 했건만 네놈은 그 술버릇을 떼지 못해 간사한 책방놈한테 얼리워 이 군수가 당부한 가정사를 발설해?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네놈이 오늘 내 손에서 죽는 날이다!》

영문을 모르고 불소나기를 뒤집어쓴 례방비장은 사또가 분격한 까닭을 알아챘다.

그리지 않아도 감영으로 떠나기 전날밤에 책방이 차린 술상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취김에 사또댁 작은도령이 향시에 응시할것 같은데 요즘 그 일로 사또가 골머리를 앓고 그래서 내가 감영에 봉물짐을 인솔해가는 길에 여사여사하게 해야 한다고 떠벌인것이 늘 마음에 걸려있던 례방비장이다.

가뜩이나 사또댁 작은도령님이 과거장에서 서얼이라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바늘방석에 엉치를 댄것같이 불안해있던 례방비장은 군수의 불호령에 넙적 그자리에 꿇어앉았다.

《소인이 그만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그놈의 술때문에…》

허륜은 너무도 쉽게 자백하는 례방비장을 쏘아보며 극도로 노기가 북받쳤다. 행여나 그의 입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잘랐으면 허준의 일이 이렇게 된것은 다 팔자탓이라고 밀어버리려 했던 그였다. 예로부터 팔자도망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이는 본댁과 소실, 그 아들들간의 싸움질이 제발 없기를 바라는 한가닥 희망이 사그라지고 마음에 없지만 불피코 제 손으로 처리해야 할 그 싸움질의 서막이 열렸다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오는 불만이고 그 불만이 터뜨린 분노였다.

《여봐라!》

미리 기다리기라도 한듯 형리들이 나섰다.

《정사를 태만하구 술을 처먹으며 관가의 비밀을 루설한 저놈에게 볼기 스무대를 안겨라!》

그러지 않아도 비장들속에서 사또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저들을 우습게 여기는 례방비장을 아니꼽게 보던 형방비장이 이때라고 생각하고 딴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게 형리들에게 사정두지 말라는듯 오른쪽 세 손가락을 가만히 펴들었다. 형리들은 관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저들만이 통하는 신호가 있는데 룡천관가의 형리들은 저들이 봐줄 대상 다시말해 경하게 매를 안겨야 할 대상은 오른쪽손가락 하나를, 그보다 세게 다스려야 할 대상은 손가락 두개를, 제일 심하게 매를 안겨야 할 대상은 손가락 세개로 약속되여있었다.

저들의 우두머리의 말없는 지시에 따라 형리들은 살 때를 만난듯이 례방비장의 새하얀 엉뎅이에 사정을 두지 않고 매질을 안겼다. 잠간사이에 례방비장은 시체마냥 축 늘어졌다.

마지막까지 그 혹독한 매질을 지켜본 허륜은 책방을 호출하여 닥달질을 하려다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만일 책방을 훈칙하면 사또가 제 아들문제때문에 형을 내렸다는 소문이 나돌수 있다는 위구감이 머리를 쳐들었던것이다. 례방비장놈만 입을 다물면 이 일은 더 퍼지지 않을것이다. 사또 자제가 서얼이여서 과시장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참을수 있다. 허나 사또가 제 아들을 위해 뢰물을 먹였다가 수포로 돌아가자 그 분풀이로 관속들을 매로 다스렸다는 흉문이 돌아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 흉한 소문이 나돌면 영낙없이 포폄에서 제일 락후하게 평가된다. 평안땅에서 무반출신 군수이지만 문반출신들이 납작해지도록 언제나 포폄에서 상으로 평가되던 허륜이 아닌가.

 그길로 허륜은 자기가 은닉한 금은재물이 어떻게 되였나 하여 집우의 다락으로 올라갔다. 금고를 열어보던 허륜은 경악하여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금가락이 열개씩이나 없어진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다락에서 내려온 허륜은 내실의 문을 왈칵 잡아제꼈다.

윤기 자르르한 노전에 함지만 한 궁둥이를 붙이고앉아 대추알을 까고있던 오매가 화들짝 기겁하며 궁둥방아를 찧었다. 남편의 서슬푸른 기상에 단박에 기가 질려 물었다.

《아니, 왜 그러시나이까? 무슨 일이 있소이까?》

허륜은 기가 질려 뒤로 물러나는 오매를 노려보며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부인은 허모녀석과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했소?》

당장 일을 칠것 같은 남편의 무서운 기상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오매의 턱이 달달 떨렸다.

《아닌 밤중에 그건 웬 소리나이까?》

턱은 떨고있지만 대답소리는 천연스러웠다.

《모른단 말이지. 그럼 금가락 열개는 어디에 감췄소?》

금가락이라는 소리에 오매는 대답이 궁해졌다. 하인년놈들에게 밀어버릴수 있지만 그놈들은 그 장소를 도저히 알수 없으니 통하지 않는다.

《왜 대답 못하오? 입이 얼어붙었소?》

더는 남편과 숨박곡질을 할수 없었다. 아니 더는 이렇게 살고싶지 않았다. 딸년들은 출가하고 아들은 저 멀리 경상도에 공부하러 갔다. 너렁청한 이 방안을 홀로 지키고있는 자기의 설음이 불현듯 가슴에 치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터진바에는 아들을 낳아 허씨가문의 대를 이어놓은 당당한 정실이지만 하대를 받고있는 자기의 설분을 남편에게 터놓고싶었다.

오매는 울먹이며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 금가락은 첩이 꺼냈나이다. 허모가 이번에 집에 왔다갈 때 필요하다고 해서 주었소이다.》

허륜은 눈물을 떨구며 너무도 쉽게 토설하는 오매의 태도에 한순간 당황해났다. 오매답지 않은 공손한 태도였다.

녀인의 눈물앞에선 사내들은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다. 언제나 들소마냥 길길이 날뛰며 승악이 센 오매가 뻗대지도 않고 제가 금가락을 꺼냈다고 고백하니 허륜은 입을 하 벌리고 아연해질수밖에 없었다. 방금전까지의 노기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잡으며 허륜은 그냥 한본새로 다불러댔다.

《이젠 가장의 금고에까지 손을 뻗치다니. 허참, 내가 지금껏 이런 도적과 한집에서 살았뇨?

그래 허모녀석이 그 금가락을 어데 쓰려고 가지고갔소?》

오매는 응당하다는듯이 숨기지 않았다.

《허준이녀석이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려구 감영의 도사에게 주는것 같소이다.》

그 말에 방금전까지도 가라앉았던 노기가 하늘중천 되살아났다.

《뭣이 어째?! 이 륙실할것들!

제 새끼와 동생을 잡아먹으려고 가장의 금고에서 금가락을 훔쳐 구미여우같은 놈팽이에게 섬겨바치다니, 에잇!-》

어느새 자기의 손이 오매의 뺨으로 날아갔는지 허륜자신도 몰랐다,

철썩!-

오매의 희멀쑥한 뺨에 시퍼런 구렝이가 살아나고 두툼한 입술사이로 선지피가 슴새나왔다.

《네년은 어떻게 생겨먹은 년이기에 그리도 흉측스럽구 악착하냐? 에미라는게 이리도 속이 시꺼멓고 심술이 바르지 않으니 그 몸에서 삐져나온 아들이란 녀석은 글공부는 하지 않고 주색질에 미쳐돌아가다 못해 이제는 제 동생마저 잡아먹구 제 애비얼굴에 똥칠을 하구 다니지…

당장 이 집에서 썩 나가!》

불의에 남편한테서 따귀를 얻어맞은 오매는 그 순간 리성을 잃어버렸다. 지금껏 참아온 설분과 남편에 대한 야속함, 려월과 허준에 대한 증오감이 뚝을 터쳐놓은 도랑물마냥 가슴속에서 분출하였다. 오매는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목청껏 고아대기 시작하였다. 량반댁가문에서 어릴적부터 받아온 요조숙녀요 부부유별이요 하는 도덕규범들을 귀신한테 집어던진 오매는 체면도 렴치도 분간못하는 녀인으로 화하고말았다.

벌떡 일어나 남편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해대며 기염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뭐? 이 집에서 나가라구? 그래, 내가 령감태기가 빚어놓은대로 있는 밀가루반죽같은 려월이년인줄 알아?! 어따대구 나가라야!

이 집의 안주인이 령감태기눈에는 그 천한 려월이년으로 보이느냐?》

허륜은 갑자기 가로 뜬 눈으로 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오매의 행동에 눈이 퀭해졌다. 이 무슨 일인가. 우리 양천 허씨가문에 어데서 이런 몰상식하고 무지한 년이 나타났담? 한 고을의 관속들과 백성들의 생사권을 손바닥우에서 좌우지하는 군수라는 이 허륜이 제 녀편네앞에서 이 무슨 꼴인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치는데 오매의 미친증은 최절정에 이르렀다.

《내 이날이때까지 두상태기가 려월이년과 그 새끼를 끼고도는것을 참고 또 참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가슴에 멍이 들대로 다 들어 온통 상처투성이야! 령감태기가 려월이년과 한이불속에서 뒹굴 때 내 이 손으로 가슴과 허벅다리를 얼마나 꼬집어대며 울었는지 알아? 눈물이 아니라 피가 가슴에서 콸콸 흐를 때 령감은 그년과 실컷 재미를 보았지?!

그래, 이 오매는 사람축에 못 드는 미시리라더냐!

자, 봐라! 어서 보란 말이야. 내 설음의 상처투성이를 보란 말이야!》

오매는 제 손으로 와락 도련을 벗어던지더니 속옷을 잡아뜯었다. 염소젖통같은 유들유들한 젖가슴부위가 시퍼런 멍으로 얼룩졌다.

《아니, 이년이 환장을 한게 아니야?》

오매는 이번에는 치마자락을 쭉 벗어내리고 속곳만 걸친 실팍한 다리를 허륜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투실투실한 그 허벅다리에도 온통 시퍼런 멍이 들었다.

《오냐- 환장을 했다, 환장을 했어! 그래, 어쨌단 말이야?!

내가 아들과 짝짝꿍 해서 그 서얼자식을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려구 금가락을 훔쳐 갖다고였다!

그래 어쩔테냐? 어쩔텐가 말이야!

정실댁 량반자식은 제쳐놓구 천첩의 서얼자식을 과거응시시키다니, 조상들앞에 죄스럽지 않아?!

난 이 집안에 떳떳한 사람이야! 허씨가문의 신주를 모실 종손을 낳은 나를 그래, 령감이 이렇게 천대하는게 조상들앞에 죄짓는게 아니구 뭐야!》

허륜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남들이 다 자는 이 한밤중에 군수가 사는 동헌대청의 안방에서 내외간이 시앗싸움을 했다는 소문이 래일이면 온 관내에 쫙 퍼질수 있다. 한번 되게 혼쭐을 내려고 잡도리를 했던 허륜은 거꾸로 혼쭐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녀자가 독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바로 오매와 같은 녀인을 두고 이르는 말이렷다. 벙어리마냥 허륜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입만 쩝쩝 다셨다. 좀더 건드렸다간 홀라당 알몸으로 온 동헌이 떠나갈듯 돌아칠것 같았다.

허륜은 체면과 인격을 중시하는 량반이였다. 오매의 이 넉두리가 언제 판이 날지 알수 없다. 만일에 허륜이 이제 한마디 한다던가 주먹행사를 한다면 또 다른 흠을 걸고들며 아예 란장판을 더 크게 벌릴 오매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던가, 더러워 피한다지 않았던가.

허륜은 흰자위를 희뜩거리며 암범처럼 날치는 오매를 어처구니없이 쏘아보다가 휙 돌아서서 방문을 걷어차고 별채로 향하였다. 그뒤로 오매의 넉두리인지 행악질인지 계속 뒤따라왔다.

《이젠 내가 하는 말이 맞갖지 않다는거지?

오,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그 첩년과 놀아대던 별채로 가는구나! 그 계집의 냄새를 맡고싶다?!

그러면 별채에 갈게 있나. 나를 피하느라고 따로 사준 그 집에나 콱 가봐라!》

별채에 들어선 허륜은 벌렁 바닥에 드러누웠다. 밖에서는 악을 쓰며 웨쳐대는 오매의 넉두리가 한동안 끊기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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