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제 1 장 불우한 서자
3
그로부터 닷새후 허준의 모자는 고을의 제일 막바지에 있는 솔골로 옮겨갔다. 허륜의 말대로 집을 옮기니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큰짐을 벗어놓은것처럼 한결 마음이 개운하였다.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하여도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불빛이 새나갈가봐 창을 막을 필요는 더욱 없었다. 게다가 말자체로 솔골이라 문을 열면 무성한 솔숲이 솨솨- 설레고 싱긋한 솔잎향기가 풍겨와 정신이 맑아졌으며 서원도 집에서 훨씬 가까와 편리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비로소 려월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피여나고 십년은 더 젊어진듯 본래의 아름다운 용모가 되살아났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환한 모습을 홀린듯 바라보며 허준은 어머니가 저리도 미인이였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이곳에 와서도 허준은 여느때나 다름없이 서원에 다녔다.
이날도 허준은 서원에서 다른 애들과 서당훈장의 강론을 받고있었다. 크지 않은 서원의 강실에는 앉은뱅이책상을 마주하고 스무명가랑의 서원생들이 숨을 죽이고 훈장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훈장의 석쉼하면서도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강실안을 드렁드렁 울렸다.
《…사람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임금에게 순종하는 착한 마음을 타고났으며 이것으로 하여 미천한 짐승들과 구별되고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수 있노라. 그런데 이 착한 성품이 7정(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욕망)에 의해 늘 침해를 받고 또 그로 하여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느니라.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
한창 유교의 례의규범과 교리에 대하여 설교하던 훈장의 눈길이 문득 허준에게로 가 멎었다. 모든 서원생들이 초롱초롱한 눈길로 훈장을 바라보고있는데 유독 허준만은 책상우에 놓여있는 책에 정신없이 눈길을 박고있었던것이다.
훈장은 말을 끊고 조용히 허준에게로 다가가 기웃이 그가 읽고있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훈장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강실은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숨죽은듯 한 그 고요함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허준이 고개를 쳐들다가 자기앞에 서있는 훈장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읽던 책을 손으로 가리웠다.
훈장이 말없이 뼈마디가 살아나는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책을 받아쥔 훈장은 제목을 한번 일별하더니 이마에 내천자를 가로 지으며 몸을 돌렸다.
《공부가 끝나면 준은 좀 남아있거라!》
공부를 파하고 애들이 다 가버린 텅 빈 서당에 허준이 머리를 수그리고 훈장앞에 서있었다.
《음 이건 준이가 보는 책이냐?》
허준은 대답을 못하였다. 이제 어떤 추궁과 꾸지람이 터져나올지 몰랐다. 딱딱하고 사정없는 훈장이다. 듣자니 한성에서 성균관교수로 있다가 고향인 룡천으로 락향했다는 훈장은 모르는것이 없을 정도로 견문이 넓고 유식하였으나 반면에 학생들앞에서는 꼬물만치도 사정을 두지 않는 일명 《막대기》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였다. 허준이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머밋거리는데 뜻밖에도 훈장의 입에서는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화담선생이라 참 훌륭한분이시지.…》
《예?!》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머리를 들었다.
《그래 준이는 이 책을 왜 그렇게 파고드나?》
예상치 않은 물음이였다. 잠시 머밋거리던 허준은 숨기지 않고 제 속생각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사실 서원에서 배우는 경전의 교리보다 화담선생님의 그 높은 학문적깊이와 고결한 넋이 담긴 이 책의 글줄에 더 공감이 가오이다. 더구나 뛰여난 학문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이 아니라 평생 가난속에서도 후세에 남길 이런 책을 쓰신 화담선생님의 그 의지와 뜻에 감동을 금할수 없소이다. 그래서 강론할 때 이 책에 정신을 팔다나니… 선생님, 소생이 잘못했소이다.》
훈장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허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아니, 난 나에게 준이같은 제자가 있다는걸 다행으로 여기네. 그래, 화담선생에 대해 좀더 알고싶지 않나?》
《네. 생각같아서는 그분을 한번 만나뵙는것이 소원이건만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쉽소이다. 아마도 하늘이 소생에게 그런 행운은 주지 않은줄로 아오이다.》
《그럼 내가 준이를 도와주지. 룡만부(의주)에 가면 화담선생의 제자가 서원훈장으로 있는데 나하구는 절친한 사이야. 본관이 송도(개성)인데 거기서 화담선생의 제자로 있었지. 내가 소개신을 한장 써즐테니 한번 다녀오는게 어떻겠나?》
《그게 정말이오이까?》
환성을 지를듯 기뻐하는 허준의 모습을 바라보는 훈장의 얼굴에 느슨한 웃음이 어렸다.
나흘후, 훈장의 소개신을 품은 허준은 의주로 떠났다.
의주고을을 가까이하는 허준의 눈앞에 읍성이 다가왔다. 읍성의 정면에 《해동제일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남문의 모습이 제일먼저 눈에 띄였다. 읍성의 4개 성문중의 하나인 남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높은 축대우에 이층문루를 세운 성문이다. 축대의 가운데에 말발굽형의 무지개문을 시원스레 낸 성문으로는 인총의 행렬이 끊길줄 몰랐다.
남문을 지나 서원으로 향하던 허준은 어느때인가는 한번 찾아보기로 했던 성의 북쪽장대인 통군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로부터 관서8경의 하나인 통군정은 의주성에서 제일 높은 북쪽삼각산봉우리에 의지하여 세운 루정으로서 그밑으로는 압록강의 푸른 물결이 도도히 굽이쳐흐른다. 고려전반기에 세워진 통군정은 몇십년전에 다시 개축확장되여 그 웅건한 자태가 더욱 돋보였다. 흘림기둥에 익공식두공을 얹고 합각지붕으로 건물의 웅장함을 돋군 통군정에 오르니 외세를 발치아래 굽어보며 수만군사를 통솔하던 옛 장수들의 호기찬 모습이 눈앞에 어려오는듯 하였다.
허준은 통군정에 올라 애국으로 심장을 불태우며 외적을 사정없이 죽탕치던 영웅남아들의 다기찬 무훈담을 눈앞에 그려보는 한편 이런 훌륭한 유산을 남긴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에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더구나 건물전반에 입힌 모루단청을 세세히 뜯어보면서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왔다.
(정말 웅장하고 멋있구나. 누가 이런 훌륭한 건축물을 남겼을가? 아마도 이런 건축물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질수 없고 또 사라져서는 안될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유산으로 되겠구나.)
불현듯 화담선생의 저서를 읽으면서 받아안았던 감흥이 새롭게 되살아나면서 이러한 재부를 남긴 사람들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 장차 무슨 일인가 하고싶은 충동이 가슴그득히 차올랐다. 그러면서 이번 걸음에 화담선생에 대해 많은것을 배울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면서 앞으로 더욱 분발하리라는 결심이 차돌처럼 굳어졌다. 통군정을 내린 허준은 길을 물어가며 서원으로 찾아들어갔다. 허준이 내민 소개신을 받아든 의주서원 훈장은 서신을 읽고나서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음, 허준이라 했던가?》
《예-》
《쉽지 않은 젊은이구만, 시세 젊은이들은 <론어> 요, <맹자> 요 하면서 경전에 붙박혀있는데 임자는 새것을 탐구하겠다구 나섰으니 말이네. 더우기 화담선생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니 참 용하네.》
허준에게 자리를 권한 의주서원 훈장이 물었다.
《화담선생의 무슨 글을 읽었나?》 ·
《선생님이 쓰신 <리기설> 을 읽었습니다.》
《그렇구만. 그래, 선생에 대해 뭘 알고싶은가?》
《화담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뭐든지 좋소이다.》
훈장은 허준의 그 정열이 마음에 드는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내가 화담선생의 문하에서 다섯해를 배웠네. 선생과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학문을 익히던 날들을 잊을수가 없어. 화담선생은 송도 동문밖 화정리의 가난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여났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셨으나 살림이 빈곤해서 열네살때에야 겨우 공부를 시작했다네. 비록 늦게 학문을 시작하셨지만 벌써 스물네살에 자기식의 독특한 방법과 사물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을 통해 학문에 도통하셨다네.》
허준은 온 신경을 모아 훈장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강구었다.
《화담선생은 뛰여난 학문을 지니고있었지만 일생 벼슬길은 넘보지도 않았어. 젊은이의 나이가 스무살이라니 아직 벼슬길이란게 어떤것인지는 모를거네. 벼슬길이란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여있는 구정물처럼 악취가 풍기거든. 누가 더 높은 벼슬을 차지하겠는가 서로 다투고 시기하며 물고뜯는게 다름아닌 벼슬길이야. …
서른한살 나시던 해에 조정에서는 천거과를 실시하였는데 개경에서는 화담선생을 추천하였지. 헌데 선생은 이를 거절하셨다네. 마흔세살때에는 모친의 권고로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선발하기 위하여 치루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셨으나 또 벼슬을 거절하셨다네. 그리고 쉰여섯살 되시던 해에는 성균관유생들의 한결같은 추천으로 후릉참봉으로 봉해지셨으나 그것 역시 병을 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잠시 동안을 두고 훈장은 눈길을 허준에게로 돌렀다. 허준은 여전히 한본새로 훈장의 말에 심취되여있었다.
《그후 선생은 고향의 화담언덕우에 서재를 짓고 일생 빈곤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후비육성에 자기의 심신을 다 바치셨네. 나도 그때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네.》
훈장의 눈귀에는 물기가 번뜩이였다.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귀중한 학문과 저서를 남기신것이라 말할수 있네. 선생은 자기의 뛰여난 학문이 자기 하나만을 위한것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으셨지. 그래서 말년에 온넋과 심신을 깡그리 바쳐 <원리기>, <리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을 저술하셨다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보풀이 일도록 읽고있는 책이 바로 그때 선생이 저술한것들이네. 림종을 앞두고 화담선생은 참 뜻깊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네. 삶과 죽음의 리치를 이미 안지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고 배워서 의심이 없음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쾌활함을 느끼였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니 정녕 마음은 편안하도다!> 이 말씀을 남기고 선생은 눈을 감으셨어.…》
훈장의 주름이 굵게 건너간 얼굴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허준의 눈굽도 어느새 축축히 젖어들었다.
《젊은이! 참 허준이라 했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났으면 화담선생처럼 뜻을 가지고 살아야 하네. 그것도 의로운 뜻을 말이네. 그 의로운 뜻이란 뭐겠나?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아니 자기가 태묻고 자란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값있는 재부와 유산을 남기는것이네. 그 재부와 유산이란게 뭐겠나? 아마 그것은 화담선생의 한생이 말해준다고 보아지네. 그런 의미에서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구 하는거네. 저 한성의 세도가들은 금강산이요, 묘향산이요 하는 명승지를 유람하고 숱한 금은재물을 뿌리며 바위에 제 이름자를 새긴다는데 그렇게 이름을 남길것이 아니라 실지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귀중한 유산을 남기는것이 참인생이 아니겠나. 화담선생은 비록 세상을 떠나가셨지만 선생이 남긴 저서들과 학문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게 될걸세. 이 얼마나 광영스러운 일이겠나. 개경의 명기인 황진이와 박연폭포, 그리고 화담선생을 가리켜 <송도3절> 이라 했는데 그만큼 화담선생은 결곡청백하고 대쪽같은 량심을 지닌 학자였구 또 이 나라가 낳은 명인재사이셨지.…》
훈장의 말은 끝났으나 그 여운은 허준의 뇌리를 떠날줄 모르고 심금을 꽉 틀어잡았다.
허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훈장앞에 덥석 두무릎을 꿇고 머리를 수그리며 심중의 격정을 터뜨렀다.
《선생님! 정말 고맙소이다. 갈증을 만난 사람이 샘 만난듯 이 가슴이 순식간에 확 트이는것 같소이다.》
《음- 내 말이 자네에게 감명을 주었다니 참으로 다행일세.》
훈장은 허준의 어깨를 다정히 부여잡으며 자못 흡족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더니 무엇인가 더 긴요한 말을 해줄것이 없는가 두눈을 쪼프리고 생각을 더듬다가 나직이 한마디 하였다.
《가만, 자네가 화담선생을 더 깊이 알려면 그분이 손수 지은 시를 보는것이 좋을것 갈네.》
훈장은 웃방으로 올라가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가지고 내려왔다.
겉뚜껑에는 《화담선생문집》이라고 씌여져있었다
《자, 이걸 한번 읽어보라구.》
훈장이 책갈피를 펼치니 하얀 참지에 일필휘지로 씌여진 두편의 시가 있었다. 허준은 얼른 시구절에 눈길을 주었다.
바위틈으로 콸콸 흐르는 시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부짖노니
슬퍼하는듯 원망하는듯
또 누구와 다투는듯
이 세상에 쌓이고쌓인
천만가지 억울한 사연
하늘 우러러 하소연하여도
통분함은 가라앉지 않노라
(아!-)
허준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마치 자기의 처지를 그대로 호소하는듯싶다. 정녕 서자의 울분은 그대로 바위틈으로 콸콸 소리내며 흐르는 시내물과 같이 허준의 가슴속에서 밤낮을 가림없이 울부짖고있지 않았던가. 허준의 눈앞에는 언제 봐야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보아가며 살아가는 어머니의 가긍한 모습과 창가의 불빛마저 가리워가면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였던 자기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준은 다음의 시구절에 눈길을 주었다.
산속에 숨어사는 선비
고상한 뜻 아는이 없건만
진리의 깊은 맛 알기에
언제나 배고픈줄 모르네
(아, 화담선생님!)
이 시는 자기의 뜻과 의로운 일에 대한 확신이였고 자부심이였으며 긍지였다.
시를 읽으며 흥분해있는 허준을 살펴보던 훈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책을 내가 기념으로 젊은이에게 줄터이니 정히 간수하고 읽어보게나. 장차 먼길을 걸어야 하는 임자에게 도움이 될것 같아 주는것이니 절대로 맥을 놓거나 주저앉지 말게.》
《선생님. 정말 고맙소이다!
선생님은 그 어떤 학문이나 재부보다도 더 귀중한 뜻과 넋을 소생에게 안겨주셨소이다. 의롭게 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뜻과 넋을 바로세우는것이 제일로 중요한줄로 아옵니다. 소생은 이번 걸음에 그것을 더 깊이 간직하고 이 심장속에 바위처럼 새겼으니 실로 먼길을 온 보람이 있소이다. 앞으로 오늘날 재삼 확신한 이 뜻과 넋대로 후세의 재부로 될 귀중한것을 남기기 위해 온 심신을 다 바치겠소이다. 부디 소생을 믿어주사이다.》
훈장은 격정에 젖은 눈으로 허준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그의 두손을 꽉 그러쥐였다.
《그리 해주게. 임잔 아직 젊었지만 그 초지가 마음에 드네. 난 믿어의심치 않네. 사람이 한번 세상에 나서 그렇게 산다는게 쉽지는 않아. 때로는
《선생님 미숙한 저를 그토록 믿어주시니 그 은혜를 무슨 말로 다 표하리까. 제 기어이 화담선생님처럼 초지를 지켜 한생 꿋꿋이 걸어나가겠소이다.》
허준은 천만금보다 더 무거운 맹세를 담아 훈장에게 다시한번 허리를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