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불우한 서자
2
허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개다리소반앞에 마주앉아 책을 펼쳐들었다. 그러는 아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려월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얘야, 오늘 저녁에는 일찌기 자려무나.》
허준은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는 오매의 앙탈이 또 있을가 우려해서 하는 말이다. 생각같아서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고싶었으나 허준은 고집스레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 전 절대로 허무하게 살수 없소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한뉘 그렇게 속절없이 살바에야 차라리 세상에 태여나지 않음이 더 낫지 않겠소이까. 너무 근심마소이다. 이 아들이 이제 무슨 일을 하든지 의로운 일을 할 날이 꼭 올것이니 믿어주소이다. 제 나이 벌써 스무살이오이다. 남이
《아서라, 네 처지에서 무슨 큰일에 대해 론하는거냐?》
《어머니, 제가 말하는 큰일이란 벼슬길을 말하는것이 아니오이다. 꼭 벼슬을 해야만 의로운 일을 하고 큰일을 한다는 법이 없지 않소이까?》
려월은 아들의 말을 리해할수 없었다. 공포감과 의아함이 사슴눈처럼 커다란 그 눈동자에 그대로 어려있었다. 안절부절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일별하고난 허준은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보료를 좀 주소이다.》
《그건 왜?》
《글쎄 좀 주소이다.》
커다란 보료를 받아든 허준은 지게문에 다가가 걸더니 불빛이 한점 새나가지 않게 문가녁까지 꼼꼼하게 여미고는 다시금 개다리소반에 마주앉아 책에 눈길을 박았다. 아들의 그러한 행동을 바라보는 려월의 입에서 땅이 꺼지는듯 한 긴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관아의 관속들과 백성들은 영특한 아들을 두었다고 부러워하지만 왜그런지 려월의 가슴속에는 대견함보다도 불안감이 묵은 체증마냥 꽉 매달려 좀처럼 가셔질줄 몰랐다.
(불쌍두 하지, 공부하는것두 남의 눈을 피해가며 해야 하니… 장차 얼마나 많은 수모와 멸시를 받을고? 제 처지에 뜻은 또 무슨 뜻이며 의로운 일이란 또 뭐인고?)
어데선가 청맞은 귀뚜라미소리가 가락맞게 들려왔다. 슬픈지 아니면 배고파서인지 알수 없건만 귀뚜라미소리는 한적한 고요를 깨뜨리며 멎을줄 모른다.
하루의 번잡한 정사를 마치고 저녁상을 물린 허륜은 대청마루에 나와 습관처럼 머리를 기웃하며 관아의 서켠구석에 자리잡고있는 별채를 바라보았다. 언제 봐야 밤늦게까지 불빛이 슴새나오던 별채가 오늘따라 먹물뿌린듯 새까맣다.
(웬일인고?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는가?)
허륜은 려월과 그가 낳은 허준에 대해 늘 왼심을 쓰군 하였다.
본댁인 오매에 비해 나이가 젊은데다가 용모도 절색이고 마음씨 고운 려월은 허륜의 마음을 흠씬하게 하는 녀인이다. 한개 고을의 관장으로 하루종일 군정사에 부대끼다가도 안팎으로 아름다운 려월을 마주하면 허륜은 모든 시름이 씻은듯이 사라지군 하였다. 그래서인지 려월에 대한 애틋한 정은 식을줄 몰랐고 그것으로 해서 본댁인 오매의 새암은 날이 갈수록 더해간다는것을 모르는바 아니였다.
려월이 낳은 아들인 허준 역시 정이 가는 자식이였다. 말없고 준수하며 영특한 허준은 아비인 허륜의 마음에 푹 들었다. 용모도 자기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자기와 려월의 피가 합쳐져선지 키가 늘씬하고 정기도는 두눈을 가진 훤한 얼굴이였다. 그와 반면에 본댁의 아들인 허모는 키도 허준이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고 바싹 여윈 하늘소처럼 빼빼 마르기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골골거리며 자라더니 커서도 여전히 비들비들 하였다. 두 아들을 대비해볼 때마다 허륜은 허준이 차라리 본댁의 몸에서 나온 애라면 얼마나 좋을고, 그러면 영낙없이 장원급제하여 출장입상할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허나 나라법으로 벼슬길을 엄금한 서자출신이라 아무리 재간이 좋고 날구뛰여도 어쩔수 없는 숙명이 허준의 목에 걸려있었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시험전에 응시자가 4대조상의 관직과 성명, 본관 등을 쓴 문건과 보증서를 제출하여 신원을 확인한 다음 이름을 등록하여야 하는데 이를 일명 《록명제도》 라고 한다. 이러한 록명은 성균관시 응시자는 성균관에서, 한성시 응시자는 한성부에서, 향시 응시자는 해당 지역에서 관찰사가 파견한 위임관리가 진행하군 하였는데 이러한 록명제도는 응시대상이 아닌 사람이 끼여들지 못하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과거응시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죄를 범한탓으로 영영 등용되지 못하는자, 탐관오리의 아들, 두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방정치 못한 녀인의 아들과 손자, 첩소생의 자손에게는 문과시험과 생원 및 진사시험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서얼출신이 잡과에 응시할수 있다고는 하지만 《경국대전》에는 서얼로서 기술직에 허용되는것은 2품이상 관리의 첩자식들이라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허륜이 제일 맘을 쓰고 골머리를 앓고있는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고충을 허륜은 혼자서 끙끙거리며 안고있어야 하였다. 오매의 푼수없는 심술과 투기는 늘 이 방과 뜨락은 물론 사또가 정사를 보는 동헌대청의 곳곳에 배회하고있었던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허륜이 오매가 낳은 아들인 허모를 영 무시하는것도 아니였다. 어쨌든간에 허모는 명실공히 허씨가문의 종손이였다. 비록 건달기가 있고 잘사는 부자집자식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놀음과 도박, 계집질에는 오금을 못쓰지만 곰곰히 뜯어보면 꾀있고 살아갈줄 아는 녀석이였다. 허륜은 허모가 앞으로 크게 출세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벼슬길이란 허모와 같은 권모술수와 계략이 있어야만 성공할수 있었다. 더구나 량반신분이라면 얼마든지 벼슬길을 톺을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실력이 모자라면 금전을 뿌려서라도 허모를 벼슬길에 올려세우자는것이 허륜의 속구구였다. 그래서 그를 평안땅에서 수천리 떨어진 유명짜한 백운동서원에 보냈던것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야 허준의 앞은 보이지 않았다. 첩소생인 서얼의 운명을 타고난 허준이라 제아무리 뛰여난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어림없는것이 량반세상의 법도였다. 신분차별이 심한 지금의 세상에서 금전도 때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이런 근심과 불안감이 늘 천근무게의 방아공이처럼 가슴에 달려있는 허륜이여서 저녁상을 물리면 어김없이 불이 꺼질줄 모르는 별채를 넌지시 건너다보군 하는것이 습관으로 되여버렸다. 날이 새도록 켜져있는 그 불빛은 허륜에게 걱정과 근심을 덧놓아주는 한편 일종의 자부감도 안겨주군 하였다. 그 자부감이란 제 피를 받은 허준이 비록 서자이지만 남보다 영특하고 글공부에서 뛰여나다는 긍지로부터 오는것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이하여 별채의 불빛이 꺼져있을가?
의혹이 짙었으나 허륜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여기며 심상히 지나쳤다.
그러나 그다음날 저녁에도 별채의 불빛이 꺼져있었다.
(?…)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쳤다. 제잡담 허륜은 대청마루를 나섰다. 오매가 도끼눈을 희뜩거리며 두툼한 입술을 삐죽거리는것을 등뒤로 느끼며 허륜은 개의치 않고 마루를 내려섰다.
《어험-》
가벼운 기침소리를 내며 허륜은 틀진 팔자걸음으로 스적스적 별채로 향하였다. 별채에 이른 허륜은 또 한번 가벼운 기침소리를 낸 후 지게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헌데 이 웬일인가.
열려진 지게문앞에 커다란 보료가 축 드리워져있었던것이다.
《엉, 이게 대체 뭐냐?》
허륜은 기겁해서 소리쳤다. 려월이 황황히 보료를 벗겨내렸다.
방안에 들어선 허륜은 의아한 눈길로 방안을 일별해보았다. 려월이 당황감을 감추지 못하며 방석을 꺼내들어 자리를 권하고 책을 들고 일어선 허준은 가볍게 문안인사를 한다. 이윽하여 허륜은 올방자를 틀고 방석우에 앉으며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허륜이 물었으나 려월은 소곳이 숙인 머리를 들념을 하지 않고 대답이 없다.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사태의 진상을 제꺽 알아차린 허륜인지라 자기의 물음이 괜한짓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방안에는 숨막힐듯 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에 질려 자그마한 별채가 금시라도 터질듯 하였다. 그 정적을 깨뜨리며 허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 이미전부터 생각해온것인데 차라리 일이 이렇게 번져진김에 말 좀 하세. 아무래도 임자네 모자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네. 내 임자네가 살 집을 한채 따로 장만해놓았으니 그리로 가서 사는것이 더 좋을상싶네. 거긴 조용하고 또 사람들의 눈길이 덜 미치는 곳이니 임자의 마음도 좀 편할거구 또 준이의 글공부에도 알맞춤할걸세.》
허륜은 려월의 어깨너머로 글줄에 눈길을 주고있는 허준이를 힐끗 건너다보았다. 글을 읽는것처럼 보이나 허준이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한다는것이 대뜸 짐작되였다. ·
《그래 준이 생각은 어떠냐?》
머리를 책속에 박고있던 준이가 돌아앉았다.
《아버님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음- 그리 하도록 하자.》
말을 마친 허륜은 거쿨진 몸을 일으키더니 가벼운 기침소리를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본채에 들어선 허륜은 방안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을 굴려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허준의 모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것이 마음편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방더러 조용하면서도 서원과 가까운 곳에 집 한채를 마련하라는 지시를 주었더니 며칠전에 사또님의 분부를 시행했노라고 보고하는것이였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들을 이사시키면 골치 아픈 일이 하나 덜어지는셈이다.
오매는 눈을 꾹 감고 앉아있는 남편을 두려운 눈길로 살펴보았다. 다년간의 체험을 통해서 오매는 령감이 저런 모양을 하고있을 때면 속으로 무슨 큰일을 내정하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한바탕 분풀이를 해대는것보다 남편의 저런 모습을 오매는 더 두려워하였다. 남편은 아무리 성날 일이 있어도 웬간해서 고아대거나 그 성깔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저렇게 좌선하는 스님처럼 눈을 꾹 감고 머리를 앞뒤로 흔들어대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러나 그뒤에는 항상 말없는 위압과 은근한 질시가 서서히 따르군 하였다.
그러나 오매는 남편이 아무리 엄하고 두렵다 해도 려월에 대한 심술과 질투심만은 절대로 버릴수 없었다. 남편에게 추궁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려월과는 끝까지 해보고싶은 심사가 목구멍까지 차있었다. 같은 녀성으로서 한 사내에게서 애정을 받지 못한다는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천첩에게 존귀한 량반댁정실이 밀리운다는 자격지심이 더 머리를 쳐들어 려월이를 보기만 하여도 눈에서 불이 이는 오매였다. 할수만 있다면 남편이 혼이 빠져 돌아가는 려월의 머리끄뎅이를 잡고 사람들이 붐비는 저자거리로 종일토록 끌고다녀야 속이 씨원할것 같았다.
남편의 눈이 무서워 차마 그런짓은 못하였지만 앉으나서나 려월이를 골탕먹이고 그의 가슴을 허비고싶은 생각이 개구리밑구멍의 실뱀처럼 지꿎게 머리속에 붙어다니는 오매였다.
잠시후 감았던 눈을 뜬 남편이 입을 다시는 소리가 오매의 귀를 따갑게 때렸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남편이 한번씩 입을 다실 때마다 오매는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틀림없이 열흘 아니면 보름이상이나 무거운 침묵이 뒤따른다.
입을 다시고난 허륜은 심사가 편안치 않고 오매의 처사가 못마땅하다는듯 또 한번 《어험!-》 하고 기침소리를 남기고 웃방으로 쑥 올라가버렸다. 정실안해인 자기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웃방으로 올라가버리는 남편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오매의 두툼한 입술이 비죽이 삐여져나오고 도끼눈에선 불시에 눈물이 핑 괴여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