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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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눈부신 금빛으로 물들어버렸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던 깊은 수림도 이삭이 무르익은 누런 들판도 무엇인가 다치면 금시 툭 터질듯 한 충만감으로 무겁게 설레인다. 그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없이 완성의 극한점까지 이른 계절의 조화, 자연의 무섭고도 검질긴 창조의 몸부림이였다.
어디를 보나 수확하는 계절의 은근한 음향과 안정된 색조와 신비함이 가득차 눈길을 뗄수없이 만든다.
들에는 실한 벼이삭들이 땅이 꺼지도록 품위있게 늠실거리고 야전승용차가 굽이를 도는 양지쪽 산기슭마다 아지가 휘도록 갖가지 열매들이 대지를 향해 수줍게 인사를 드리고있다. 이따금씩 안겨드는 마을 터밭들에도 씨받이로 남겨둔 늦강냉이의 총알처럼 탄탄히 여문 이삭들이 먼 해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빨갛게 구워 얹은 흙기와들마다 첫 서리를 기다리는 누런 동이같은 먹음직한 호박들틈새로 검붉은 김장고추들이 류별나게 눈길을 끈다.
좋은 가을이였다. 엄혹한 겨울과 간고한 봄이 눈바람속에 싹을 틔우고 준엄한 여름이 가물과 큰물속에 넋을 바친 중요한 계절이였다.
병사들과 함께 인민들과 더불어 헤쳐온 고난의 자욱이 무심하게 생각되지 않으셨다.
인민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주력군으로 믿으시고 억척같이 걸어온 그 길우에
우리 병사들이 자란 키이자 우리 군력의 높이인것이다. 우리 병사들은 혁명의
좋은 가을이였다. 정치도 수확하는 계절에 들어선것인가.
《유진성동무, 어제 외무성의 보고서를 보니 필리핀과 카나다에 이어 오스트랄리아도 외교관계문제를 제기해왔다면서요?…》
《예, 이 행성우에 우리 나라와의 외교관계선풍이 불고있습니다. 유럽동맹내에서도 열기가 올랐습니다. 도이췰란드, 이딸리아, 에스빠냐가 검질기게 달라붙고 력대적으로 보수적인 영국까지 자세를 낮추어 접근해오고있습니다.》
《하하하, 그러단 외교부문에 간부고갈이 들겠소. 어떻소? 유진성대장도 군복을 벗고 런던주재 대사로 나가보지 않겠습니까? 템즈강바람이 동무에겐 아주 좋을수 있소.》
《아닙니다,
점잖게 앉아 귀를 기울이던 리평해대장이 자기를 거드는 바람에 짐짓 정색을 하고 입맛을 다셨다.
《
리평해가 능글거리자 유진성은 그의 무릎을 철썩 갈겼다.
《에끼, 한수 더 뜬다니까…》
《하하하, 이거 군대의 고위지휘성원들이 싹 빠지면 우리가 누굴 데리고 일한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향긋하고 미묘한, 익는 계절의 산냄새가 물씬물씬 풍겨들었다.
《우리 혁명의 전도는 밝게 열리고있습니다. 요즘 정세를 분석해보면 미국정세도 결국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계속 눈치를 보는 형편입니다.
최근에는 미국방장관이 유엔주재 우리 대표부를 통해 조건부없는 정부간 고위급접촉을 제기해오고있고 클린톤의 평양방문까지 암시하고있어 세계를 놀래우고있습니다.》
《
유진성의 보고에
《우리가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련합세력의 움직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우선 력점을 찍을수 있는 성과는 제국주의련합세력의 악랄한 군사적압력과 검질긴 경제봉쇄에도 끄떡없이 보란듯이 붉은기를 높이 들고 전진해온 우리 당의 선군정치의
하지만 우리는 적들이 머리를 숙일수록, 미소를 지을수록 그들의 속에 간직된 검은 칼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혁명의 장래도 적들이 떠드는 〈평화공존〉도 우리의 위력한 군력에 달려있다는 진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민군대는 우리에 대한 적들의 유화전략과 평화에 대한 화려한 문구들이 신문지상에 나돈다 해도 절대로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총대로 사회주의조국을 수호해야 합니다.
총대, 총대에 모든것이 달려있습니다. 선군정치는 우리 당의 전략적인 로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종일관 우리의 총대인 병사들속으로 찾아가는것입니다.》
유진성은 한순간에 우리 혁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을 응축하고 집대성하여 하나의 선명하고 단순한 진리로 간추려내시는
한순간 그 어떤 섬광같은것이 그의 뇌리를 때렸다. 그것은 평범하고 늘 체험하는것이였으나 지금 그는 눈을 번쩍 뜬 기분이였다.
유진성대장은 무엇인가 평범하면서도 거대한 진리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한듯싶어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유진성대장은
문득 얼마전 뉴욕에서 돌아온 봉명주소장이 보내온 자료가 떠올랐다. 그것은 서방두뇌진이 모여 품들여 연구작성한 《세계를 매혹시키는
…고향ㅡ백두산, 가문ㅡ
유진성은 가슴속에 가득찬 생각을 어쩔수 없어 차창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눈부신 채광을 받은 가을숲과 산악들이 부드럽고 선명한 보라빛운무속에 서서히 눈에 안겨든다. 그는 이 땅 어디서나 볼수 있는 례사로운 산천이 그저 무심하게 보이지를 않았다. 그 말없이 빛나는 축복받은 강산에 무릎을 꿇고 엎디여 절을 하고싶었다.
그대, 조국, 나의 조국, 너는 비록 광활한 땅은 아니여도 어떻게 되여 지구를 눈아래로 굽어보는
선군정치ㅡ그것은
《가만, 운전사동무, 차를 좀 세워주오. 저게 아이들을 태운 차가 아니요?》
좁은길 맞은켠에서 아이들을 가득 태운 파란 중형뻐스가 마주오고있었다. 아침해빛에 번쩍이는 차창안으로 하얀 등산모며 야영배낭들이 언뜻언뜻 눈에 띄운다.
급히 멎은 뻐스에서 몸매가 쭉 빠진 날렵한 녀성이 탄력있게 내려 어쩔줄 모르며 달려왔다.
《
녀성은
《아니, 이게 누구요? 단아동무가 아닌가!》
아이들처럼 야영모를 눌러쓴 최단아의 해맑은 얼굴이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금시 연한 주근깨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래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던 길이요?》
《소년단야영소로 가는 길입니다. 이 애들은 제가 담임한 학급학생들입니다.》
최단아뒤에 오구구 따라섰던 아이들이 일제히 인사를 드리며
《그러니 단아동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전연군관마을 아이들의 선생이 됐구만.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래 박신철동무랑 잘 있나?》
최단아는 눈이 부신듯 망울이 큰 새별눈을 가늘게 쪼프리고
《한철준동지와 같은 군부대에서 부대장으로 복무합니다. 벌써 보름째 함께 전술훈련에 나가있습니다.》
《그래? 하, 이거 신혼생활에 재미가 없겠는걸?》
《아닙니다,
최단아는 작고 동그스름한 얼굴이 발그레해가지고 눈길을 잠시 떨구었다.
《하하하, 아주 좋소. 이건 정말 현대식사랑, 아니 군대식사랑이요! 랑만적이거든. 그래 명진이는 정치대학으로 떠났다지?》
《예, 졸업하면 전연으로 다시 온다고 계속 벼르는 편지가 옵니다. 지금은 김강인동무가 뒤를 이어 분대장을 하고있습니다.》
《오, 강인이! 좋은 동무야. 진짜 병사거든. 단아동무, 강인동무를 만나면 내 인사를 전해주오. 우리가 한번 꼭 들리겠다고 말이요.》
리평해대장이 곁에 서있다가 자랑스럽게 말씀올렸다.
《
연한 보라빛을 띤 억센 산악들의 깊은 골짜기를 따라 단풍숲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그 화려하고 따뜻한 단풍숲도 서리발같은 아아하고 거친 산정까지는 가닿지 못한다. 아름다운 단풍숲과 날카로운 산악은 이상한 조화를 이루며
억셈과 부드러움이 어울려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형성한 류다른 풍경이였다.
《강인동무가, 우리 병사들이 보고싶구만!…》
《자, 단아동무,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야영소로 떠나오. 좋은 철이니 야영생활이 재미있을게요.》
《
금시 최단아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맺혀 파들거렸다. 입귀가 약간 우로 들린 도툼한 입술이 격정으로 일그러진다.
《왜 그러오? 단아동무!》
최단아는 가슴에 손을 모아잡고 큰 호흡으로 숨을 내쉬였다. 하얀 얼굴에서 딸기씨같은 주근깨들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
《야영지, 전선이라… 정말 의미깊게 들리누만. 얼마나 좋습니까. 군인은 언제나 전선에 있는 법이요.
최단아는 맨 마감으로 뻐스에 오르며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자, 어서!》
황금빛수림사이로 파란 뻐스는 가볍게 달려가고있었다. 하얀 등산모며 산뜻한 야영배낭들이 점점 더 멀어져간다.
《자, 동무들, 그럼 우리도 떠납시다. 전선으로, 병사들을 찾아서!》
아이들을 태운 뻐스는 흰 파도가 설레이는 야영지로 향하고있었다.
야전승용차는… 전선으로 달리고있었다.
후 기
이태전 이 작품을 창작하기 앞서 나는 전선서부의 어느 한 전방지휘소에 오른적이 있었다.
군부대장인 오장령과 함께 탄 우리 군용차는 험준한 고지정점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올리뻗은 도로를 따라 숨가삐 달렸다. 어찌나 경사가 급하던지 몸이 뒤로 사정없이 쏠리고 금시 차가 미끄러져 아찔한 천길벼랑밑으로 굴러떨어질것같은 위구심이 점점 커갔다.
앞자리에 앉은 오장령의 철빛얼굴은 무표정했다.
(설마 이 험한 길에
나는 마음속으로 위안하며 위태로운 그 길이 끝날 때까지 불편함을 겨우 참았다.
전방지휘소에 올라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나는 놀랐다.
길은 우리가 오른 그 아슬아슬한 외통길뿐이였다.
나는 분노를 금치 못하며 오장령에게 《항의》했다. 아니, 이런 험한 길에
오장령도
전선길들에서 생겨난 나의 이러한 충격들이 이 소설에 어느정도 형상되여 독자에게 전달될지 알수 없다.
소설은 단숨에, 약 석달어간에 창작되였다. 그것은 우리
장편소설 《고요한 행성》을 창작하였을 때는 성과작으로 내세워주시며 젊은 작가의 가슴에 분에 넘치는 《
이 작품을 취재하고 창작완성하는데 도움을 준 장령들과 군관들, 병사들과 진실한 나의 벗들에게 충심으로부터의 사의를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