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5 장
3
늦장마가 지려는 모양인지 밤이 깊어갈수록 비는 그칠줄 몰랐다. 비구름이 길옆의 산봉우리에까지 무겁게 내려앉아 꿈틀거리며 대줄기같은 비를 억수로 쏟아부었다.
야전승용차는 비에 패우고 무한궤도와 포차바퀴에 짓이겨진 험상한 도로를 따라 힘들게 전진하였다.
(비발속에서 행군하는 병사들이 수고하겠군. )
《가만, 부관동무. 행군하는 우리 병사들이 아니요?》
긴장하게 시창앞을 살피던 책임부관이 얼굴을 돌렸다.
《
《음, 보병행렬인걸 보면 그런것 같소. 이 동무들의 행군속도가 대단하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전방지휘소가 아니요?》
《그렇습니다. 전술방안이 바뀐 다음 부대장동무가 행군대오를 무섭게 다그어댄것이 알립니다. 시간적으로 보아 대오가 아직 이 지점까지는 도착 못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임부관은 놀라운지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그 범같은 리평해사령관이 가만 있겠소? 그리고 로영진동무도 겉보기와는 달리 내밀성과 통솔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야전승용차가 대오쪽으로 접근하자 비소리에 섞여 아츠러운 발동기소음과 병사들이 기운쓰는 소리들이 가까와졌다.
《길이 막힌게 아니요?》
《포차가 빠진것 같습니다.》
야전승용차가 멈춰서자
《로영진동무 아니요?…》
《가만, 보고는 그만 두오. 폭우에 길이 막혔구만.》
《
로영진은 퍼렇게 언 입술을 놀리며 절절하게 부르짖었다.
《푹 젖었구만. 우리 걱정은 말고 빨리 행군대오를 지휘하시오. 우린 전방지휘소로 가던 길이니 차가 빠질수 없다면 걸어가겠소.》
《
로영진은 안타까운 눈길로
《허허, 비뿌리는 밤길을 나의 병사들이 걷고있는데
부관과 로영진이 서둘러 따라섰다.
《부대장동무, 그 전지는 걷어넣소. 우린 이런 밤길에 습관되여서 일없소. 그리고 괜히 병사들에게 우리를 알리느라 하지 마오. 행군속도에 지장을 줄수 있소.》
《
격동된 로영진이 멈춰선채 어둠속에서 큰 숨을 몰아쉬였다.
비속을 행군하느라 지친 병사들은 그저 묵묵히 걷고있었다. 꽛꽛해진 방수포비옷을 때리는 비소리와 헛바퀴를 구는 포차소리만이 밤대기를 흔들뿐이다.
어쩐지 병사들속에서 걸으니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시였다. 이대로 내처 걷고싶으시였다.
물홈에 빠진 포차옆을 지나던 병사들중에서 누군가 싱겁게 한마디 던졌다.
《여, 포차! 보병의 도움이 필요하면 어려워말고 제기하게!》
그러자 운전사인지 전진보장대 성원인지가 시들하게 대꾸했다.
《제코나 씻으라구요. 괜히 포차신세를 지려고 넘겨다보지 말고…》
《뭐? 보병이 포차를 넘보아? 듣다 처음듣는 소리- 우린 발이 날개란 말이요.》
몇명의 병사들이 가볍게 웃었다.
포차곁을 지나자 또다시 병사들은 침묵에 빠져 묵묵히 걸었다.
《뒤로 전달! 졸지 말것. 속도 빨리!》
소대장인듯싶은 군관의 짤막하고 엄한 구령이 떨어지자 행군대오는 흠씰하며 전진이 빨라진다.
하지만 몇걸음 못가서 병사들은 다시 눈을 뜬채 졸며 《자며》 걸어간다.
밤, 비줄기, 병사들은 야밤의 행군에 지쳐있었다. 폭우도 어둠도 비바람소리도 그들의 검질긴 졸음기를 날려보내지 못한다.
《동무들, 내 졸다가 영웅이 된 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하라오?》
병사들은 어둠속이지만 자기네 부대장만은 알아본듯 서로들 돌아보며 좋아하였다.
《어서 들려 주십시오.》
한 병사가
《허허, 이건 내가 아끼는 이야긴데 병사들에게야 해줘야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말이요. 사단의 포위작전을 위해 한개 분대가 돌출부에서 적들의 공격을 견제하기 위한 전투를 벌리고있었소. 분대는 3일간 돌출부를 지킬데 대한 임무를 받았소. 그런데 예상외로 돌출부를 차지하려는 미제침략군의 기도가 컸던것 같소. 놈들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련 사흘을 파도식으로 계속 공격해왔거든. 병사들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화선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렸소. 분대의 막냉이전사는 구대원들과 함께 기관단총을 휘둘렀지. 사상자들이 나졌소. 사흘째 되는 날에는 돌출부에 분대장과 구대원 한명 그리고 전사만이 남았소. 며칠째 지금의 동무들처럼 잠 못잔 병사들은 끄덕끄덕 졸다가도 적이 공격해오면 번쩍 눈을 뜨고 섬멸의 불을 뿜군 했지.》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그다음 어떻게 됐습니까?》
곁에 붙어선 젊은 병사가 또 바투 들이대다가 로영진의 손에 잡힌듯 약간 떨어진다.
《분대장은 말이요. 그 가렬한 전투속에서도 아직 화약내를 많이 맡지 못한 전사생각이 내려가지 않아 억지로 그를 떼내여 눈을 좀 붙이라고 명령했소. 전사는 펄쩍 뛰였으나 끝내 화선의 전호벽에 기대여 졸기 시작했소. 피곤이 삽시에 몰려든것이지.》
《야, 그렇다구 저만 졸다니…》
곁의 병사가 아쉬운듯 중얼거렸다.
《허허허, 그런데 말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졸던 전사는 사위가 고요해지자 문득 깨여나버렸소. 오히려 끊길줄 모르는 총포성속에서는 편안히 자던 전사가 사방이 조용해지자 눈을 떴단 말이요. 그러자 전사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소. 미제침략군들이 새까맣게 돌출부를 에워쌌거든. 이미 분대장과 구대원은 전사했지만 기관총소리가 멎자 적들도 의심쩍은지 조심하고있었소. 적들은 드디여 돌출부를 타고앉은줄 알고 여기저기 싸다니며 기세를 돋구고있었소. 어떤자는 총창으로 전호의 탄약상자까지 찔러보기도 하고…
전사는 순간 눈에서 불이 펄펄 일었소. 그는 억척같은 힘으로 일어나 기관총으로 적들을 쓸어눕히기 시작했소. 돌출부를 둘러쌌던 수십명의 적들이 기관총세례에 쓰러지고 그 순간 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였소. 분대는 끝내 자기 임무를 수행했거든. 전사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머리우를 지나가는 아군의 불줄기와 공격의 함성을 들었소.
공격하는 구분대가 돌출부에 도착했을 때 영웅전사는 또 깊은 잠에 들어있었소. …》
《야! 그 전사가 대단한데!…》
《정말 영웅은 뭔가 달라. 용감하구…》
《그리고 기회도 좋았어!…》
《그래 병사동무들! 졸다가 영웅이 된 전사가 그저 운수가 좋아서 위훈을 세웠겠는가! 아니요.
병사동무들! 동무들이 지금 이어가고있는 행군길도 총대로 오늘의 준엄한 난국을 헤쳐나가는 성스러운 투쟁이요. 이 성스런 진군길에서 병사들모두가 영웅이 되여야 하오!…》
병사들은
《알았습니다!-》
비내리는 어둠속으로 활기에 넘친 병사들이 한동아리가 되여 저벅저벅 행군해갔다.
조금 앞서걷던 로영진이 돌아서며 정중한 자세를 지었다.
《여기 물도랑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자, 병사동무들! 어서 건느오!》
그 순간 어둠속에서 흐느낌소리 같은것이 들렸다.
《
로영진이 뜨거운 목소리로 목메여 부르짖자 놀란 병사들속에서 격정의 환호소리가 터져올랐다. 병사들은 자기들과 함께 비뿌리는 진창길을 함께 걸으시며 힘과 용기를 주시고 몸소
《자, 병사동무들! 부대의 결전진입시간이 다가오고있소. 행군속도를 늦추면 안되오. 가기요!》
격동과 흥분에 젖은 병사들이 대오를 정돈하고 다시 행군길에 올랐다.
《로영진동무, 이거 어떻게 된 일이요. 아직 아군지역인데 이렇게 조용해서야 되겠소? 병사들의 진군길엔 힘찬 군가소리가 나와야지! 부대장이 정말 음악과 담을 싼게 아니요?》
그러자 머뭇거리던 그 젊은 병사가 어려움을 잊고
《
《
비뿌리는 전선의 밤, 병사들의 철갑모와 총창이 번뜩인다.
어느새 길이 열린듯 포차들과 장갑차들이 비바람을 헤치며 질주해간다.
약간 뜸해진 비발사이로 점차 밤하늘이 희붐하게 트이고 이제 얼마후이면 별들이 흐를것이다.
총창을 번뜩이는 병사들의 대오우로 힘있는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설한풍이 휩쓰는 험한 산중에
결심 품고 싸워가는 우리 혁명군
이윽고 병사들의 우렁찬 합창소리가 전선길을 뒤흔들며 대지우에 메아리쳤다. 로영진도 그리고 책임부관도 눈물속에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천신만고 모두가 달게 여기며
피와 땀을 흘린자가 그 얼마냐
…
비발이 설펴져 보슬비로 변하자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비구름이 서북쪽으로 밀려가면서 언덕의 숲이 솨솨- 설레이기 시작한다.
총창과 철갑모를 번쩍이며 병사들이 행군길을 다그치고있었다.
멀리 행군대오의 앞길에 갈림길이 나지였다. 여기서 군부대 전방지휘소로 오르는 지름길이 시작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