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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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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리반장은 얼른 돌아서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밋거리였다.

《책임비서동지, 저…》

《뭔지 말하오.》

《다름이 아니라 혜경동무를 당장 데려가주십시오. 까딱하면 큰일나겠습니다. 벌써 보름동안이나 밤을 새운데다가 전 굶다싶이하면서 우리한테 밤참을 보장하느라… 저러다간 영낙없이 쓰러지고맙니다.》

혜경이의 여돌진 성미에 충분히 그럴수 있었다.

《알겠소.》

그때 차츰 어둠이 바래여가는 역사쪽에서 두팔을 옆으로 내저으며 달려오는 혜경의 발자국소리가 토닥토닥 울려왔다.

태혁은 한손을 허리에 올려짚고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낯익은 활개짓이며 금방 엎어질듯 뛰여다니며 명랑하게 웃군 하는 귀염성스러운 모습때문에 혜경은 늘쌍 가정부인인 제 나이보다 훨씬 애젊어보인다.

태혁은 철도침목을 골라짚으며 숨가쁘게 달려오는 혜경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어 몇걸음 마주 걸어갔다. 그러나 정작 혜경이와 마주선 태혁은 억이 막혀 무슨 말을 못했다. 자그마한 쇠주전자와 종이봉지를 량손에 갈라쥔 혜경은 꼭 기관차대 녀인들의 행색이였다. 도당에 있을 때의 보동보동하던 얼굴이 고달픈 객지생활에 치워 반쪽이 되고 창백해졌다는것이 어둠속에서도 헨둥히 알리였다.

《책임비서동지, 이 날씨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름만에 만난 혜경은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막 반가와했다.

혜경이가 아무리 기뻐해도 태혁은 그의 축간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혜경이 힘들지? 뭘 가져왔소?》

《더운 물과 강냉이빵입니다.》

혜경이의 그 말에 수리반장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였다.

《보십시오. 바로 이렇습니다!》

혜경은 옆에서 수리반장이 눈을 딱 부릅뜨고 투덜거리여도 이젠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소리라는듯이 생긋 웃으며 태혁에게 견인기의 수리정형을 보고했다.

《저 수리반장동무랑 밤을 꼬박 패면서 두달 걸려도 어방없다던 견인기수리를 보름동안에 끝냈습니다.》

《알고있소. 정말 수고했소. 내가 여기로 혜경동무를 보낸 보람이 있구만. 이건 대단한 성과요.》

태혁은 그렇게 말하고 또다시 혜경의 반쪽이 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수리반장의 말처럼 혜경을 기관차대에 더이상 둬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돌아가는 차편에 데리고가야 할것 같았다.

《혜경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는데 오늘은 나와 함께 가자구. 수리반장동무도 이젠 혜경이가 없어두 된다니말이요.》

기관차대 수리반장이 혜경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나 하여 그를 힐끔 훔쳐봤다. 그는 우둘투둘하게 생긴 외형과는 달리 인간성도 있고 혜경을 여간 아끼는 눈치가 아니였다.

혜경은 잠자코있었다.

《왜 말이 없소?》

《책임비서동지…》

뒤말을 흐려버리는 혜경의 두눈에 별안간 엷은 눈물이 감돌았다.

《지금 희천시 로동계급은 주먹을 부르쥐고 일어섰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찾아오시여 공작기계공장이 돌아가게 되였다면서 온통 들끓고있습니다. 굶주림때문에 퉁퉁 부은 얼굴로 공장에 출근합니다. 죽어도 기계설비를 베고 죽겠다고들 합니다. 전 그 억센 모습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발을 악물고 하루빨리 견인기를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태혁은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혜경은 견인기의 수리작업만이 아니라 그에게 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상기시키고있었다. 지금 어디서나 식량난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있다. 혜경은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한 눈물겨운 사실, 로동자들과 기술자들이 모진 기아와 생활난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가를 구태여 까밝혀 말하지 않았다. 혜경의 두눈에 가뿍 고여있는 눈물만이 그가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해주고있었다.

《알겠소. 혜경이.》

《책임비서동지!… 전 돌아가고싶어도 갈수 없습니다.》

혜경이가 갑자기 쓰러질듯 하며 비칠거리였다.

수리반장이 말한것처럼 보름동안 굶다싶이하며 밤을 새웠으니 아무리 속대가 강한 혜경이도 능히 꺼꾸러질수 있었다. 태혁은 수리반장이 왜 그처럼 혜경을 데려가달라고 완강히 우기였는가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되였다. 그러나 혜경은 애써 눈웃음을 지으면서 그 무슨 시라도 읊듯이 열정을 담아 말하였다.

《책임비서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 견인기까지 붕- 기적소리를 울리며 힘차게 뛰면 온 희천시 로동계급들이 마구 환성을 올릴겁니다. 우린 오늘 낮 12시 견인기의 시운전시각이 되면 기적소리를 요란하게 울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온 희천시가 들썩하게 말입니다!》

태혁은 혜경의 뜨거운 마음에 감염된듯 터져나오는 눈물을 삼키면서 목청을 돋구었다.

《혜경이, 왜 희천시만 들었다놓겠소. 그 기적소리를 전천탄광의 탄부들도 다 듣게 하자구! 지금 전천탄광의 〈20주년갱〉은 예상외의 침수로 생산이 중단되였소. 탄부들이 갱안의 물을 퍼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리는데 그들에게도 동무들이 살려낸 견인기의 기적소리는 힘이 되고 용기를 불러일으킬거요. 희천과 전천, 온 자강땅에 메아리쳐가게 기적소리를 더 크고 더 장중하게 울리시오!》

태혁은 원래 요란한 언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이지 그 어떤 즉흥적인 감정의 분출이 아니였다. 그래서 언제나 부단히 사색하고 탐구하며 침착성을 잃을 때가 없는 태혁이였지만 오늘은 혜경이앞에서 꽉 움켜쥔 오른손을 내흔들면서 목메인 소리로 힘주어 말하였다. 평시에 늘쌍 조용하고 무게있게 울리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쇠판이라도 두드려대는것처럼 희천시가의 고요한 밤대기를 흔들면서 드렁드렁 울려퍼졌다. 혜경은 자기의 말이 그렇게도 태혁의 기쁨으로 되였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눈을 깜박이며 서있다가 《알겠습니다. 책임비서동지!》 하고 희열에 넘쳐 대답하였다. 그러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저 멀리 동쪽하늘가에서는 벌써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희천시를 성벽처럼 둘러싼 산발들이 어느덧 미명속에 거연한 자태를 희붐히 드러내고있었다.

태혁은 수리작업반장에게 손을 쳐들어보이고는 두눈에 눈물을 머금은 혜경을 세워두고 곧 전천으로 떠났다. 희천기관차대 견인기는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이제 전천탄광만 살려내면 당장 숨통을 조이며 엄습하는 어려운 생활난을 한고비 넘길수 있었다. 그후에 제기되는 문제는 그때에 가서 두고볼 판이였다. 지금은 전천탄광문제만 해도 아름이 차고 다른 일에 마음을 쓰고싶지 않았다.

태혁은 전천탄광에 당도하자 승용차의 차창쪽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탄광마을의 버럭산밑에서 나붓기는 붉은기발들과 구호판들, 질통을 지고 분주히 드달려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 시선이 끌리였다. 《수집탄》채취에 떨쳐나선 청년돌격대원들의 들끓는 전투장이였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고 써붙인 구호판을 배경으로 바글바글 끓어대는 돌격대원들의 땀투성이얼굴들이 차츰 눈앞에 선명히 안겨왔다.

웬 젊은이가 버럭더미에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승용차를 향해 기운차게 달려왔다. 도청년동맹비서였다.

《차를 세우시오!》 태혁은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승용차는 차체를 부르르 떨며 올리막길에서 급히 멎어섰다.

태혁은 얼른 차문을 열고나갔다. 장관우도 뒤따라 내렸다.

《청년대장, 수고하오.》

태혁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년동맹비서의 얼굴과 작업복은 숯덩이처럼 새까맸다. 그는 태혁의 손을 잡으려다가 당황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석탄가루에 범벅이 된 상처자리가 얼핏 눈에 띄였다.

《아니, 온통 물집투성이구만.》

《뭐 이까짓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년동맹비서는 태혁이 잡고 살펴보는 손을 당기면서 셈평좋게 웃었다.

《손이 이렇게 만신창이 됐는데두 동문 웃누만.》

《책임비서동지, 저 질통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기내기로 뛰여다니는 처녀들은 어떤지 압니까? 어깨에 피멍이 져도 막무가내로 일합니다. 어떤 처녀들은 어깨의 살가죽이 다 벗겨지고 그 자리에 석탄가루가 묻어 시꺼멓게 석탄입묵이 생겼습니다.》

《뭐 석탄입묵?…》

태혁은 억이 막혀 더 말을 못했다. 이십대의 한창 피여나는 처녀들의 아릿다운 몸에 석탄입묵이 생기다니?… 청년들이 하루 《수집탄》을 2백t씩 생산한다지만 너무나도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생각에 가슴속이 쓰리여났다.

태혁은 희천기관차대에 가서 혜경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처럼 아픈 마음을 안고 몇발자국 거닐다가 청년동맹비서와 다시금 마주 섰다.

《동문 자랑삼아 말하지만 이건 너무해! 청년동맹비서. 장군님께서 우리 혁명의 천하지대본이라며 얼마나 아끼시는 청년들이요? 저 꽃다운 처녀들의 어깨에 석탄입묵이 생긴 사실을 아시면 장군님께서 동무나 나를 용서하실것 같은가! 대답해보라구. 우리 자강도의 실태는 어렵고 난관은 첩첩히 앞을 가로막아나서지만 그것으로는 변명이 되지 않어. 다른 방도가 있을텐데 우린 아직도 그걸 찾지 못하고있거든. 찾지 못하구 있어…》

짓수굿이 고개를 숙였던 청년동맹비서의 두눈이 감때사납게 번뜩이였다.

《책임비서동지, 우린 그 어떤 고통도 얼마든지 참고견딜수 있습니다. 설사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부족되는 석탄을 〈수집탄〉으로 보충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탄광의 〈20주년갱〉은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전력부족으로 갱안의 물을 퍼내지 못합니다. 양수작업은 중지되고 채탄장들은 거의다 침수됐습니다.》

《…》

태혁은 숨이 꺽 막혔다. 두말없이 돌아선 그는 승용차에 오르며 차문을 힘껏 후려닫았다. 거기서 탄광사무실까지는 멀지 않았다. 잠간이면 걸어갈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목전에서 벌어지고있는 사태의 엄중성은 단 일분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고 사정없이 그를 때려 몰았다. 태혁은 우선 탄광지배인을 만나 구체적인 실정을 료해하기로 마음먹고 손기척도 없이 지배인실에 불쑥 들어섰다. 마침 탄광지배인, 기사장, 도당선전부일군들이 모여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하다가 그가 방안에 급히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섰다.

《앉소. 앉으시오.》

태혁은 그들이 제자리에 앉자 거센 목소리로 물었다.

《지배인동무, 지금 전력이 얼마나 보장되오?》

탄광지배인이 거푸시시한 얼굴을 쳐들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하루 두시간도 안됩니다. 밤낮으로 열흘동안 퍼내야 할 방대한 물이 갱안에 차있는데… 고작 두시간입니다. 현재상태에서는 탄광을 구원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전혀 방도가 없단 말이요?》

《지금 같아선 암담합니다. 당분간이나마 도안의 공장들에서 전력을 당겨올수 있으면 좋겠는데 누구도 결론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는 국가적으로 보장하는 공장, 기업소들의 전력을 좌우지할 권한이 없잖은가요. 어제 송배전부 지배인한테 제기했는데 대번에 재판감이라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탄광지배인이 도로 앉자 태혁은 도송배전부 지배인의 말을 입속으로 되씹었다.

《재판… 재판감이라구?》

원칙적으로는 송배전부 지배인말이 옳다. 그렇다고 전천탄광을 페갱시키겠는가? 크나 작으나 여기에 자강도 지방산업공장들이 목줄을 걸고있는데 누구도 결론할 사람이 없다는 탄광지배인의 말이 쇠방망이처럼 정수리를 때렸다.

(역시 전력… 전력이 문제다!)

탄광의 막막한 사태를 실증하듯 지배인실의 책상우에 큼직한 카바이드 구리등잔이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벌써 몇해째 국가적으로 긴장된 전력때문에 도안의 주요 공장기업소들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한다.

밤이면 주민지역들이 어둠속에 잠기고 병원에만 겨우 전기를 보장하는 형편인데 어디에 전력이 있겠는가. 전력이 없으면 희천기관차대 견인기도 부득불 멈춰설수밖에 없다.

태혁은 몸부림이라도 치고싶은 그런 가슴아픈 생각끝에 전화기가 놓인 탄광지배인의 책상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장군님께 전천탄광이 처한 위급한 실태를 보고드리려던 그는 컴컴한 낯빛으로 굳어졌다. 수화기를 꽉 틀어잡은 태혁의 손이 가늘게 떨리였다.

탄광지배인이며 기사장, 도당선전부 일군들은 모두 긴장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태혁의 귀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미끄러져내렸다.

태혁은 탄광지배인실을 나선 때에야 비장한 결심을 품고 장관우에게 짤막히 말했다.

《부위원장동무, 오늘 강계에 가면 〈수집탄〉생산에 떨쳐나선 청년들에게 어깨받치개와 지원물자를 보내주시오. 난 평양으로 올라가겠소.》

태혁은 탄광사무실마당에 서있는 승용차에 오르자 곧 평양을 향해 떠났다.

 

6

(1)

 

붐비는 승용차들과 무궤도전차들, 뻐스들, 인도에 차넘치는 시민들의 물결… 오늘도 수도 평양은 예나 다름없이 설레며 흥성거리고있었다.

늘쌍 자강도 두메산골의 가파로운 령길을 숨가쁘게 오르내리다가 초고층건물들이 수풀처럼 펼쳐진 번화가의 대도로에 들어선 태혁은 눈에 보이는것마다가 새롭게 느껴져 오래도록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는 수도의 서쪽관문에 현대적인 광복거리가 생겨난 이듬해 자강도에로 내려갔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해가 흘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찾아올 때면 번마다 정든 고향집의 뜨락에 들어선것처럼 감회가 새롭고 마음이 평온해지는것은 자나깨나 한시도 잊어본적없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행복감때문이였다. 아마도 그래서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수도시민들의 발걸음은 저렇게도 활기에 차고 얼굴들에 밝은 웃음이 넘치는것이 아니겠는가! 널다란 신작로의 량켠에 화려하게 솟은 고층살림집들의 무수히 번쩍거리는 창문들과 상점, 식당들의 장식간판들… 태혁은 그 활기찬 거리의 모습에 심취되여 저도모르게 전천탄광에서 있었던 괴로운 일을 가뭇 잊어버린 자신을 깨닫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태혁의 승용차는 옥류교를 지나서 동평양의 제일 아늑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잡은 전력공업부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직 수도의 부위원회, 중앙기관 직원들이 퇴근하기엔 이른 때여서 별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예견한 시간에 안성맞춤히 도착한셈이다.

큼직한 통유리가 거울처럼 알른거리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른쪽벽에 자그마한 접수구가 붙어있었다. 스물두셋 나보이는 접수실안의 처녀가 눈이 둥그래서 그를 내다보았다. 태혁은 어린 처녀앞에서 출입절차를 엄격히 지키며 겸손하게 신분증을 꺼내보이였다.

《리성하부부장동무를 만나려고 왔소.》

태혁은 그렇게 말하면 처녀가 리성하의 방에 전화를 걸어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리던가 군말없이 들어가라고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녀는 한참이나 신분증을 받아쥐고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콩튀듯 의자에서 냉큼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아이, 자강도당 책임비서동지군요.》

태혁은 처녀가 감격하여 부르짖는 바람에 그를 의아히 마주보았다.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낯이 설었다. 그가 잘못 보지 않았다는것이 곧 처녀의 말을 통해서 확증되였다.

《저… 한가지 물어도 좋습니까?》

처녀는 태혁의 바쁜 걸음을 지체시키고있는데 대한 보상이라도 치르듯이 송곳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귀엽게 생긋 웃어보였다.

(원, 이런 성화라구야.)

태혁은 성가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처녀의 깜찍한 웃음에 항복이라도 하듯이 너그럽게 응했다.

《뭔데 말하오.》

《제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웃지 마세요. 요즘 우리 청년동맹원들은 자주 도당책임비서동지에 대한 말을 하면서 떠들어댑니다. 책임비서동지가 부모없는 고아들을 이삼십명씩이나 집에서 키워주신다고요. 그애들과 하루세끼 죽이면 죽 똑같이 잡수신다는데 정말이예요?》

태혁은 처녀의 너무나도 당돌한 질문에 당황히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디서 난 소리요?》

《다들 그러는데 틀림없대요.》

《동무.》

태혁은 어이가 없어 허우대가 큰 몸을 접수구앞에 굽히며 가만히 말해주었다.

《그건 꽝포야 꽝포!》

《어마나!》

처녀는 멀리서 웅글게 울려오는 대포소리같은 태혁의 말을 듣고 손등으로 커다랗게 벌린 입을 가리웠다.

《그 코흘리개들을 이삼십명이나 모여놓으면 우리 집이 콩나물시루가 되게? 내 그래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거요. 우리 강계엔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주는 육아원, 고아원이 있소. 모두 합해서 사백명가량되니 그애들한테 소속된 부모, 취사원, 의사들도 약차하오. 식당노르마로 말하면 우리 집 수준같은건 어방도 없소. 그애들한테는 아직 강냉이죽도 먹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내가 뭣때문에 제 집에다 수두룩히 끌어다놓고 고생시키겠소. 그렇잖아?》

태혁은 빙긋이 웃고 이젠 들어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시늉으로 눈을 끔벅였다. 처녀는 쌍까풀진 두눈이 올롱해서 그를 쳐다보다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책임비서동지, 어서 올라가보십시오. 부부장동진 방에 계십니다. 방금전에 금속공업부 부장동지가 만나고 돌아갔으니까요. 방은 어딘지 아십니까?》

처녀가 비로소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어찌도 사랑스러운지 그의 복성스러운 량볼을 쓸어주고싶었다.

《그래, 알구 있소.》

태혁은 처녀가 두손으로 친절하게 돌려주는 신분증을 받아 잠바 웃주머니에 넣고 리성하의 방으로 찾아가면서 생각했다. 리성하부부장도 저 귀여운 처녀처럼 자기를 적극 도와나서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아무튼 어려운 걸음을 했지만 이만하면 마수거리가 괜찮은셈이였다. 리성하도 자강도태생이니만큼 아무리 전력이 긴장해도 자기의 딱한 사정을 들으면 모른다고 딱 자르지는 않을것이다. 태혁은 그러지 않아도 이전에 정무원에서 사업할 때부터 리성하와는 자주 상종하며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다. 오늘까지 그들의 관계가 가깝게 유지되여온것은 전적으로 태혁의 안해 신숙경의 덕분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때였다. 당시 후방병원 간호장이였던 신숙경이가 담당한 호실에 강계출신의 포병소위가 입원해있었다. 금방 전선에서 호송되여왔을 때만 해도 전혀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했던 중상자였다. 세차례나 어려운 수술을 이겨내며 구사일생으로 소생한 소위는 무서운 고민을 안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전선으로 다시 나갈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것이였다. 온통 붕대로 둘러감은 그의 얼굴은 늘쌍 찌푸둥했다. 강계사람들이 유순하다지만 그는 매일밤 뜬눈으로 밝히면서 몸부림쳤다. 그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면서 의사에게 달려들어 《나를 왜 살렸소!》라고 무례한 언사를 퍼붓는 바람에 병원안에는 자주 소동이 일어났다. 저러다가 정신착란이 일어나지 않을가 싶어 진정제를 먹이려고 해도 소위는 간호장쯤은 우습게 여기며 약봉지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사납게 굴던 소위가 한번은 신숙경의 손을 잡고 전투장에서 물러서게 된 자기의 분한 마음을 토로하며 황소의 영각같은 울음을 터뜨리자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소위는 후방병원이 놈들의 폭격을 당한 날 불타는 입원실안으로 뛰여들어가 환자들을 구원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소위가 남기고간 전투가방안에는 고향의 어머니한테서 받은 한장의 편지가 소중히 간직되여있었다. 승리하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담겨있는 편지를 읽은 숙경은 얼굴을 싸쥐고 흐느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신숙경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부대가 강계에 주둔한 기간 잠간 짬을 내여 소위의 고향집에 들려보았다. 류동산밑의 나지막한 동기와집, 울바자도 없는 뜨락안에서 포병소위의 동생이 군복차림의 낯선 처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군수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맏아들이 전사한 소식을 받은 후로 공장에 나가서 살며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유별나게 머리가 크고 눈망울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동생은 신통히도 형의 얼굴을 비껴닮아 숙경을 놀라게 하였다. 동생은 그날 이전에 형이 그런것처럼 숙경의 손을 잡고 눈물이 그렁해서 애원했다. 형의 원쑤를 갚을수 있게 군대에 입대시켜달라고!… 그의 절절한 부탁을 들어줄수 없는 숙경은 가슴이 아팠다. 그때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던 소위의 동생, 그가 바로 리성하부부장이였다… 리성하는 자기의 인생에 한순간 얼핏 비꼈다 사라져버린 후방병원 간호장을 잊지 않고있다가 몇해전에 공화국창건절날 김일성광장의 초대석에서 감격적으로 만나 통성을 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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