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3 장
6
최남호는 자기가 어쩔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빠졌다는것을 마음속으로부터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결코 어깨우의 별이 가벼워진데서 오는 불명예스러움도 정신적중압감으로부터 생겨나는 억울함이나 모멸감같은것도 아니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기가 저지른 과오의 엄중성을 더욱 통절하게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이제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그 자책의 중량에 짓눌려 거의 앞길이 눈에 비쳐지지 않았다.
이제는 부서동지들이나 안해와 딸을 마주할 때마다 빠져들군하던 거북스러움과 죄의식에서도 벗어난지 오랬다. 그런 개인적인 사소한 감정에 매인다는것은 그
반생을 군복과 함께 걸어오는 길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번 과오는 그것과 질이 다른것이였다. 그것은 거의 배신에 가까운것이였다. 인민군대의 싸움준비에서 중핵을 이루는 훈련을 맡은 자기가
최남호는 상부에서나 동지들이 관대한 책벌로 이번 중대사건을 처리한다해도 우선 자기스스로가
최남호는 며칠밤을 밝히며 오래 생각하던 끝에 진지하고 아픈 마음으로 또박또박 박아쓴 자기 비판서를 당조직에 제출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안은 밖이나 다름없이 아직 입김이 나갔으나 그는 목깃을 열어제낀채 책상앞에 마주앉아 오래간만에 줄담배를 피웠다. 입안이 쓰리고 맛이 썼으나 그는 전혀 가늠하지 못한채 련속 담배를 꼬나물었다.
한순간 최남호는 백두산권총을 받아안던 그 시각을 상기했다.
그 귀중한 선물을 받아안고 충격속에
최남호는 자기가 백두의
최남호는 불붙는 담배대를 그냥 손가락에 끼워든채 두손으로 달아오른 머리를 싸쥐였다.
그는 마치도 무거운 장구류와 중무기를 등에 지고 먼 강행군길을 달리다가 뜻밖의 부상을 입고 대오에서 떨어져 외진 들길에 주저앉은 기분이였다.
긴장과 격동속에 목에서는 단내가 풍기고 팔다리와 온몸의 근육이 과로로 뻣뻣해왔지만 열정과
사람의 생활에서 제일 어렵고 준엄한것이 자기
하지만 지금 최남호의 정신적모대김이 도달한곳은 전진도상도 후퇴지점도 아니였다. 그는
그것을 때늦게나마 깨달았다면 주저없이 물러서야 한다. 세계를 변모시키며 줄기차게 흐르는 대하의 흐름에서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작고 가벼운 물방울에 불과하다.
비로소 그는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였는가를 새삼스럽게 소스라쳐 놀라며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그토록 자부심에 넘쳐 어깨우에 별을 번쩍이며 당당히 걸음을 옮기고, 자못 찌프린 근엄한 낯으로 문건에 수표하고 아래사람들에게 거의 호령에 가까운 명령을 내리고, 일이 늦어질 때면 책상을 두드리고 눈부신 성과가 번쩍일 때면 그속에 자기의 노력과 열정, 과감한 전개력과 완력, 주도세밀한 설계와 치밀한 작전지휘가 깃들어있다고 남다른 긍지를 느꼈던 그 모든것… 당의 믿음과 직급, 훈장과 명예, 그것은 오직 최남호라는 물방울이 대지를 굽이치는 대하의 흐름에 합류되여있을 때만이 가능한것이였다.
인간은 결국 집단속에서만 자기의 가치와 존엄을 지킬수 있고 빛낼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가 지금 쓰거운 후회와 뼈저린 아쉬움속에서 그의 가슴속을 고패치는것이다.
담배재가 내려앉아 손가락짬이 타들어왔으나 최남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상념속을 지꿎게 헤매고있었다.
《이건 뭐요? 사무실안에서 곰이라도 잡자는건가?》
별안간 울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최남호는 흠칫 놀라 머리를 들었다.
최남호는 흐릿한 담배연기사이로 출입문가에 버티고 서있는 유진성대장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유진성의 얼굴은 그 목소리처럼 잔뜩 찌프러져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눈길로 사무실안을 빙 휘둘러보더니 거침없이 창문으로 다가가 공기창을 열어젖혔다. 마치 굴뚝으로 내굴이 빠져나가듯 담배연기가 쑥쑥 밀려날아난다. 유진성은 돌아서서 외투주머니에 두손을 찌른채 최남호를 거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비판서를 읽어봤소. … 제풀에 물러서겠단말이지. 당에서는 과오를 범한 동무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건 뭔가? 결국 도전이 아닌가 말이요? 어디에 대한, 무엇을 위한 도전인가. 내 앞에서 똑똑히 밝히는게 좋겠소.》
《대장동지, 그건 너무하십니다. 제가 무슨… 전 지금
최남호는 이 순간 오히려 머리를 번쩍 쳐들었으나 험악하게 이그러진 유진성의 얼굴을 마주보자 눈길을 떨구고말았다.
유진성은 한손을 외투주머니에서 뽑더니 불끈 주먹을 쥐였다. 어쩌면 그 손이 자제할수 없이 떨려나 틀어쥔지도 모른다.
《그따위 사고방식자체가 또 하나의 과오, 배신이라는걸 동무가 과연 모른단말이요? 그건 나약성이구 자기 기만이고 비겁성이야. 어떻게 최남호가 그런 안일한 결심까지하도록 변질됐는가.
지금
유진성은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치며 띠염띠염 말을 토해냈다. 본시 언변이 류창한 그였지만 이 순간만은 말마디들이 토막났다.
최남호는 그것이 포탄파편처럼 귀에 박혀드는 예리한 공격이였지만 어쩐지 아프지도 노엽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가 이 며칠째 자기
최남호의 무표정한 얼굴빛이 유진성에게는 너무도 뜻밖인듯 그는 의아하고 미심쩍은 눈길을 번뜩였다.
《왜 동무는 자기 속을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툭 터놓지 못하는가. 그래 사람들은 청맹과니인줄 아오? 지금까지 동무는 순탄하게 복무의 길을 걸어왔지. 결국 당의 믿음이 커가고 영웅이 되고 직급이 올라가게 되자 동무는 은연중 교만해졌단말이야. 왜 어깨의 별이 떨어지고 과오를 범해서 사람들, 아래일군들앞에 나서기 창피해서 물러서겠다는건가?
아니면 너희들끼리 한번 해보라, 그래두 일은 실지 내가 제꼈지, 언젠가는 이 최남호를 찾을것이다라는 비뚤어진 심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닌가말이요!》
유진성의 말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낮고 조용해졌으나 그것은 오히려 최남호의 마음속의 만신창이 된 상처우에 진한 소금물로 뿌려졌다.
최남호는 또다시 얼굴을 쳐들려고 했으나 몸이, 목이 그의 의사를 거역해나섰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대장동지는… 저와 한두해를 함께 있었다고 그렇게 모욕하십니까. 그런 서푼짜리 체면이나 옹졸한 생각때문이라면 오히려 전 마음 편할것입니다. 저는, 저는…
아니, 대장동지, 저는 그런 말도 할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최남호는 안깐힘을 쓰듯 힘들게 말을 내뱉다가 불쑥 얼굴을 들었다. 그는 지꿎게 유진성의 눈길을 찾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유진성
사무실안에는 잠시 숨막힐듯한 침묵이 깃들었다.
유진성은 책상곁의 걸상으로 다가가 무겁게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책상우에 손을 뻗쳐 담배갑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피울 생각은 안하고 그저 담배가치를 꺼내들고 빙글빙글 돌리기만했다. 문득 그의 눈길이 책상우에 놓여있는 라이타에 가서 멎었다. 그는 담배가치를 와락 움켜쥐였다. 담배씨들이 부서져 그의 손짬에서 흘러내렸다.
유진성은 무엇인가 속이 답답한듯 다시 움쭉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최남호를 등진채 묵묵히 밖을 내다보았다. 아마 자기의 얼굴표정을 보이고싶지 않아서일것이다.
창밖에서는 저녁이 되자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무엇인가 목메인듯 호소하는듯한 청승맞은 바람소리였다.
최남호는 그 바람의 속절없는 음향을 묵묵히 새겨들었다. 그 순간 유진성이 푹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남호동무가 내 말을 모욕으로 생각했다니 나도… 속을 터놓고싶구만.》
유진성은 힘들게 꼭지를 떼고는 또다시 덤덤히 창밖을 내다본다. 최남호는 번쩍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힘없이 도로 떨구고말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그의 준절한 말들은 다 가식이였단말인가? 최남호는 물론 유진성의 혹독하고 거친 말의 의미를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상관의 말이였고 격화된 감정이 내리치는 회초리였다.
《사람은 인정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했소. 동무가 어떻게… 우리
유진성의 짓눌린 목소리는 다소 떨리였다.
그는 무엇인가를 더 터놓으려다 단념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며 눈길을 떨구더니 어쩐지 맥이 풀린 자세로 갑자기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이윽고 창밖에서 승용차발동소리가 가늘게 들리는듯싶더니 인츰 검질긴 고요가 다시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