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3 장
3
서북쪽하늘에 무겁게 드리워있던 침침한 구름이 어느 사이에 산정우를 재빛세계로 덮어버렸다.
조선동해를 가까이에 낀 고산지대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거센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중대병영이 있는 산릉선으로 올리불자 유진성은 불시에 싸늘한 랭기를 느끼였다. 계절로는 봄이라 하지만 아직도 늦겨울의 마지막몸부림이 온몸을 오싹하게 만드는것이다.
《허. 제법 롱구장맛이 나누만. 우리 병사들이 이 산고지에 운동장을 다 만들다니. 정말 랑만가들이요.》
《휴식날이면 소대별 롱구경기로 산정이 떠들썩합니다. 저 건너편 녀성기관총수들도 경기를 구경한답니다.》
로영진의 자부심어린 목소리에
《중대장동무, 드세찬 병사들인데 롱구공이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야단이겠구만.》
얼굴이 갱핏하여 눌러쓴 군모가 좀 커보이는 젊은 지휘관은 갑자기 긴장을 풀며 두손을 맞잡았다.
《예, 저 아래서 롱구공을 주어오는데 반시간은 걸립니다. 그래서 우린 경기때마다 배구를 잘하는 동무들을 한개 분대가량 이 옹벽아래 대기시키군 합니다.》
《흠, 기발한 생각이요. 그런데 중대장동무, 저 롱구대말이요. 저쪽 롱구대가 좀 낮아보여. 한 5cm정도 차이나는것 같구만. 앞으로 훌륭한 롱구선수도 나올수 있는 중대인데 롱구대규격이 틀리면 안되지.》
중대장과 긴 장대를 찾아든 병사들이 급히 달려갔다. 유진성도 호기심이 들어 그들을 뒤쫓아갔다. 사실 그가 보기에는 두 롱구대의 높이가 같아보였던것이다. 높이를 세심히 재던 중대장이 놀란 눈으로 유진성을 올려다보았다. 두 롱구대높이는 분명 5㎝ 남짓이 차이가 나는것이였다. 유진성은 흥분과 신비로움에 잠겨 얼굴이 온통 상기된 중대장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돌아섰다.
어찌 그것을 령장의 안광이 남보다 예리하고 투철해서라고만 보겠는가. 아니, 그보다도 병사들을 생각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심장의 눈이야말로 뭇사람들이 스쳐지나는 자그마한 현상까지도
유진성은 후더운 가슴을 붙안고 중대세목장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세목장은 넓고 해빛이 잘 비쳐들어 밝고 아담했다.
수행원들이 빙 둘러선 세목장안은 예상외로 조용했다. 유진성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사람들을 조심히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굳어지고말았다. 앞으로 더 나갈념을 못하고 물탕크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신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기셨는지 아무 말씀없이 그냥 차거운 물탕크안에 손을 잠그신채 철철 넘쳐나는 맑은 물을 바라보신다. 물은 보기에도 선뜩하리만큼 차거워보였다.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여나
유진성은 좀자르다가
《
근심과 걱정에 젖은 갈린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으나
유진성은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문득
《가만, 이자 뭐라고 했소?》
유진성은 마냥 달아오르는 뜨거운 눈길을 들었다.
《
말끝을 맺지 못하는 유진성을 유심히 올려다보시던
《허. 그래? 난 물이 차다는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소.》
《?!…》
세찬 바람이 불어치자 두텁게 드리웠던 재빛구름 한끝이 열리면서 강렬한 해빛이 쏟아져내렸다. 그러자 자연은 갑자기 생기를 띠고 활기있게 술렁거리는것 같았다. 황백색산벼랑이며 협곡밑의 이깔숲들이 물기를 머금은채 설레이고 산새들이 날개들을 번쩍이며 창공을 가득 채운다.
《부대장동무, 내 오늘 왔던김에 동무네 병사들에게 특식을 좀 해주려하오.》
《?!…》
젊은 장령이 뜻밖의 일에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마침 물이 끓고있구만. 부관동무, 어서 지함의 만두를 가마에 넣소. 만두가 풀어지지 않게 살짝 익혀야 하오. 응, 조심히!》
《아무래도 만두가 량이 좀 모자랄것 같구만. 이 주변의 녀성기관총중대 병사들에게도 맛을 좀 보여야지 늘 롱구경기만 구경시킬수 없지. 우리가 병사들을 위해 만두를 좀 빚어보기요.》
《사령관과 유진성동무도 어서 자리를 잡소. 어디 동무네 솜씨도 봅시다.
어떻소? 사령관동무는 만두빚는걸 다 잊어버린게 아니요? 제손으로 해먹어야 맛이 더 있는 법이요. 자, 그럼 다들 앉소. 먼저 밀가루반죽부터 하기요.》
리평해가 물을 솔금솔금 두며 가루를 이겨나가는데 어찌나 솜씨가 잽싸고 빠른지 순식간에 반죽덩어리가 생겨난다.
《아까말이요. 정말 난 손이 찬줄을 느끼지 못했소.》
《?!…》
《오히려 속이 달아올라 눈물을 보일번 했소. 콸콸 쏟아지는 수도물을 보니 병사들을 위해 년로하신 몸으로 이 높은 고지우에 오르셨던 우리
〈허허. 이 지팽이가 동무를 울렸구만. 내가 오늘 좀 식을 내느라고 지팽이를 짚었는데 뭘 그러나. 〉
〈이걸 아무래도 치워야겠소. 병사들이 보면 또 울겠소. 그러지 않아도 물배낭을 지고 고생하는 우리 병사들인데… 자, 다들 이리 오시오. 이 고지우의 병사들이 물고생을 안하게 방안을 토의합시다. 올라오며 보니 돈이 좀 들더래도 계단식양수장을 하나 놔야 할것 같애. 병사들을 위해 뭘 아낄게 있나. …〉
동무들, 저 수도물은 이렇게되여 중대의 세목장에까지 쏟아지게 된거요.
정말 우리
《!…》
끝이 안으로 보기좋게 오무라든 알맞춤한 크기의 만두들이 상우에 가지런히 놓이기 시작했다. 곁에서 일손을 돕고있던 중대장과 사관장이 생각깊은 눈길로 그 사랑의 만두를 뚫어지게 지켜보고있다.
《그날
내 그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오늘 만두를 가져온거요. …》
《!…》
유진성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눈길을 내리깔았다.
병사들에 대한
아니, 이것은 결코 놀라운 충격도 새로운 발견도 아니였다.
인간은 환희와 신비한 감동속에 늘 잠겨있다면 그것을 평범한것으로 감수하기마련이다. 유진성은 눈물진 시선으로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야전승용차가 고지를 내리기 시작하자
눈석임물을 뒤집어쓴 야전승용차가 철령기슭에 이를 때까지
굽인돌이를 지날 때마다 푸른 바늘잎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산벼랑들과 양지쪽언덕들에 연분홍빛갈 같은것이 점점이 붉게 타며 시선을 끈다.
철령마루부근에 이르자 야전승용차가 멈춰섰다.
령밑 협곡에서 철령특유의 골바람이 불어와
《참, 철령은 볼수록 아름답소!》
《
《아까부터 눈여겨봤는데, 벌써 진달래라… 참, 놀라운 일이요.》
《원래 진달래는 눈석이가 한물 진뒤 핀다는데 저도 이 고장에서 처음 목격합니다.》
리평해는 우선우선한 표정을 짓고
《정말 아름답소. 진달래는… 우리
유진성은 향기진한 꽃을 바라보고계시는
한떨기의 꽃을 봐도 늘
이윽고 철령을 내린 야전승용차는 병사들을 찾아서 또다시 먼 행군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