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3 장
1
깊은 골짜기와 보라빛 먼 산줄기를 따라 눈석이가 시작되였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는 오랜 잠에서 깨여난듯 눈석임물에 말끔히 씻기여 번들거리고 찬 기운을 밀어내며 해종일 바람이 불어친다. 생기를 잃은채 부옇던 해가 좀 더 바투 다가선듯 따뜻한 해볕이 대지를 골고루 비쳐들자 드디여 파란 풀들이 부풀어오른 땅을 비집고 갸웃이 얼굴을 내밀었다.
봄! 봄은 흘러서 오고 불어서 찾아들고 싹터서 자기를 드러냈다.
엄혹하고 간고했던 겨울이 이제는 물러간것인가.
유진성대장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없이 펼쳐진 검푸른 하늘로 수리개 한마리가 날아올라 봄물든 대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고요한 창공의 적막을 깨뜨리며 아츠러운 비행기동음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해빛에 은빛날개를 번쩍이며 은회색폭격기편대가 하늘을 덮어버렸다. 희뿌연 비행운들이 파란 하늘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해빛을 가리웠다. 편대들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불줄기들이 날아가 타격지점을 때렸다. 각종 차단물과 영구화점으로 구축된 종심깊은 《적》방어진은 삽시에 불바다가 되고말았다. 화광이 솟아오르고 뽀얀 흙먼지가 천지를 덮어버렸다. 비행대는 강력한 선제타격을 련이어 들이대고 타격지점을 벗어났다.
화광과 포연이 차츰 가라앉자 둔중한 포성과 함께 포사격이 시작되였다. 방사포의 불줄기들이
유진성은 쌍안경을 내리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만약 실전이였다면 방어지대의 적은 숨소리도 내지 못할것이였다. 강력한 아군의 폭격과 포격에 적진은 개미한마리 살아남지 못할것이다.
유진성은 시계를 들여다보는 리평해를 건너다보았다. 야전복차림의 우람찬 몸매의 리평해사령관은 혁띠를 조여매서인지 평소답지 않게 젊고 날렵해보인다. 인중이 길고 눈꼬리가 째진 철빛얼굴에는 일종의 긴장과 초조감이 슴배여있다. 그는 한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련속 참모들에게 지시를 주고는 앞선에 말없이 서계시는
유진성은 사령관의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였다. 기실 이번 타격훈련은 이곳 동부지구 군부대가 년초부터 시작해온 훈련의 1차 결속단계였다.
유진성
지난해보다 전진속도와 군종, 병종들의 협동동작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조건이 불비하여 일부 부대들과 같이 뜻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일들이 더러 없은것은 아니지만 리평해는 지휘관다운 완력과 전개력으로
한순간 유진성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최남호… 동무가 어쩌면 그런 행동을 하는가. 이 엄혹한 시각에
문득 유진성은 며칠전 군부대 훈련지도중 도하장에서 얼핏 만났던 김한경대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격이 올곧고 고지식한 대좌는 상관앞에서 조금도 에두르지 않았다. 박신철의 제기를 묵살한 최남호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이미 보고를 받은 문제였지만 벌어진 일을 구체적으로 알았을 때 유진성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진성은 야전천막으로 돌아와 오래동안 상념에 잠겼다. 벌써부터 아래사람들을 무시하고 다소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하군 하는 최남호의 작풍을 알고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지휘관다운 배짱과 전개력으로 은근히 긍정해온
유진성장령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리평해의 눈길을 따라 공격출발계선쪽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재빛숲에서 땅크와 장갑차들이 일제히 기세좋게 달려나와 구릉지대를 내닫기 시작했다. 화염이 가라앉자 타격지점이 또다시 끓어올랐다.
기본타격대는 전격적인 공격으로 《적》방어지대를 타고앉기 위하여 세찬 화력을 집중하며 일사천리로 전진해갔다.
《올해를 훈련의 해로 정했는데 정신이 번쩍 듭니다. 타격이 비교적 째였습니다. 이번에 유진성동무랑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령관동무!》
쌍안경을 드시고 타격집단의 공격모습을 눈여겨 살피시던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곁에 서있던 리평해사령관이 가까이 다가서자
《타격집단편성은 괜찮은데 시간이 문제인것 같소. 지난 시기의 재판입니다. 물론 현대전이 시작되여 아직 이 고전적인 틀을 깬 경험이 없었기때문에 우리의 의견이 생소할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투서렬의 편성과 속도에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유진성은
리평해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
작전경험이 풍부하고 그에 못지 않게 승벽이 센 리평해는 다소 억울해하는듯한 표정이였다.
(사람두 참, 아직도 부대장때 그 버릇은 못버렸단말이야. 어깨에 왕별을 한줌이나 달고도 다른 단위를 이기려고만드니… 무슨 사람이 저런가? 이젠
유진성은 속으로 두덜거리며 맞갖지 않은 눈길로 오랜 전우인 리평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이번 훈련도중에도 이런 승벽때문에 자주 유진성의 핀잔을 듣던 리평해였다.
《허허. 사령관동무, 동무네 성과를 깎자는건 아니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는 오늘 훈련이 만점짜리라고 할수도 있소. 우리가 말하는건 현대전의 전형적인 공격전법을 두고 하는거요.
장엄하고 위용이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틀에 매이고 형식적인 허세를 부리는것같단 말이요.
사령관동무,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뭔지 압니까? 그건 창조성이 없는거요. 새로운 사색, 새로운 지향, 새로운 전진,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 사업에서 창조성이 뭐겠소. 군사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번 포병구분대의 화력복무훈련을 보면서도 새삼스럽게 느껴져 지적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재래식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저건 재래식이라고 볼순 없지만 새 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낡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듭니다.》
《
리평해가 두손을 맞잡으며 어줍은 미소를 띠자
《하하하. 작전전술에서는 제노라 하는 리평해동무답지 않구만. 좋습니다. 함께 연구해봅시다. 새로운 작전문제이기때문에 흥미가 있고 열정이 끓는것입니다.
레닌은 클라우제위츠의 전략리론에 의존하고 모택동은 손자병법에 의거해서 군사활동을 벌렸는데 우리는
파랗게 트인 봄하늘로 꿈틀꿈틀 솟아오르던 화염이 연한 실구름과 한데 어울려 뿌연 운무가 되여 내려앉는다.
마른 담쟁이덩굴이 벽을 따라 차분히 올려붙은 청사옆에 화강석을 다듬어 밑굽과 기둥을 세우고 고급석재로 품들여 지은 아담한 집 한채가 눈에 띄웠다.
《사령관동무, 집이 한채 더 생겼구만.》
《
리평해사령관은 꽉 조여맨 혁띠고리를 바로 잡으며 정중하게 말씀올렸다.
《그렇습니까?》
《사령관동무, 동무들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지휘성원들이
《?!…》
《우리에게 있어서 휴식이란 뭐겠습니까. 병사들이 생활에서 불편함을 모르고 발편잠을 자면 그게 우리 일군들의 기쁨이고 휴식이 아니겠소. 우리가 저런 집에 들어앉아 무슨 휴식이 되겠는가. 오히려 바늘방석에 앉은것같아 마음이 고통스러울거요. 사령관동무, 동무들의 의도는 어떻든지간에 이건
《
리평해는 더 다른 말을 못하고 머리를 짓수그리더니 가슴을 들먹이며 긴 숨을 내쉬였다.
《내 말이 좀 혹독하더라도 들어두시오. 우린 모든 문제를 설정하고 제기할 때 그 첫자리에 병사들을 내세워야 하오. 그래야 탈선이 없거든. 내가 왜
유진성대장동무, 동무생각엔 병사들을 위해 이 집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소?》
《
《군인회관이 있는만큼 그건 틀렸소. 내 생각에는 이 건물을 군인도서관으로 쓰면 어떻겠는가 하는겁니다. 지금 종이사정으로 책부수를 늘이지 못하는만큼 혁명적인 소설들이랑 비치하면 우리 병사들이 일요일마다 즐겨 찾아올거요. 사령관동무의 생각은 어떻소?》
《
《대답이 시원한걸보니 좋아. 우리 인민군대지휘성원들이 무엇때문에 있는가. 병사들이 없다면 우리가 뭐겠소.
자 동무들, 우리 언제나 병사들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복무자들이 되기요!》
유진성은 머리를 수굿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받아안은 뜨거운 격정은 나래가 돋친듯 몇해전에 있은 일을 되살려올리며 크나큰 감동을 불러오는것이였다.
그때
유진성은 늘 마음속 한구석에
어느날 저녁 유진성이 작전방향에서 들어온 통보를 가지고
한손으로 팔굽을 잡으시고 명상에 잠기시여 창밖을 내다보시던
《그래 요즘 부인이랑 앓지 않습니까?》
《
유진성이 얼굴이 불그레해가지고 어줍게 말씀올리자
《동무부인은 정말 속이 깊은 녀성이요. 내가 갓김치를 좋아하는걸 잊지 않고있다니…》
그때 창밖에서 둔중한 폭음이 간간히 들려왔다.
《진성동무! 저 소리가 들립니까?》
《때아닌 폭음이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습니다. 내가 대동강반에 짓는 그 휴식각을 당장 폭파해버리라고 했습니다. 대동강가에 휴식각을 덩실히 지어놓으면 인민들이 속으로 뭐라 하겠소. 저 폭파소리야말로 이
유진성은 심장이 멎는것같은 강한 충격속에
…
관하부대들을 찾으시려는것이였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진성동무, 군부대 전방지휘소와 중대를 돌아봅시다.》
유진성대장이 조심스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일없습니다. 밤길이면 뭐랍니까.
유진성은 난감하여 그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참, 부관에게 일러서 평양에서부터 준비해가지고 온 만두지함을 차에 실으라고 하시오.》
《
《오ㅡ 그건 도중식사감이 아니요. 필요해서 가져가는거요. 좀 모자라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준비한 지함이 하나 더 있겠으니 그것도 마저 싣도록 하시오.》
《알았습니다.》
유진성은 전화로 조직사업을 한후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오늘 진행한 훈련경험에 기초하여 싸움준비를 더 다그쳐야 하겠습니다. 올해를 훈련의 해로 선포했으므로 나는 임의의 순간에 군부대들의 전투력을 예고없이 검열해보려고 합니다. 전번에 공군사령부에 〈폭풍〉을 내렸는데 그 동무들이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긴급출동을 잘해제꼈습니다. 각 비행대가 순식간에 떨쳐나서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라 경계비행에 들어갔는데 하늘을 꽉 덮은 우리 매들을 보고 남조선주둔 미제침략군과 태평양공군이 기겁하여 전투태세에 넘어갔다고 합니다. 어떻소? 사령관동무!
《최고사령관동지! 우린 땅우에 발을 붙이고있지만 한번 본때를 보이겠습니다.》
리평해는 차렷자세를 취하며 자못 배포유하게 말씀드렸다. 눈귀가 약간 째진 그의 네모진 얼굴엔 이 순간 감때사나운 사나이처럼 결패가 흐른다.
유진성은 리평해사령관과 인민군책임일군들과 함께 급히
현관문쪽으로 가시려던
다채로운 조선화기법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잘 살려 창작한 미술작품에는
눈치가 빠른 리평해사령관이 한걸음 나서며 팔을 들어 그림을 가리키였다.
《
리평해는 긍지에 넘친 목소리로 설명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현관문을 나서시던
《사령관동무! 아까 들어올 때도 생각했던건데, 동무들이 정
저 그림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
유진성과 리평해는 그 자리에 우뚝 굳어지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