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5 장

4

 

둥근달이 덕우에 높이 뜬 저녁이다.

류옥련은 달빛을 함뿍 받으며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길옆의 풀들이 달빛에 번들거렸다. 키낮은 떨기나무들이 은빛으로 채색되여 빛을 뿌린다.

옥련은 달밤의 정서에 흠뻑 취하여 노래를 부르고싶었으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줄 몰랐다.

그가 능금골어구를 벗어났을 때 뒤쪽에서 《옥련동무―》, 《옥련동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겨끔내기로 울리더니 어느새 여러명의 방목공총각들이 그를 따라섰다.

《옥련동무, 왜 쫓기는 사람처럼 뺑소니치는거요? 우리가 뭐 호랑이라도 되오?》

누군가 한마디 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등뒤에 감추고있던 꽃묶음을 가슴에 척척 안겨주는것이였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얼결에 받아안고도 영문을 알수 없었다.

《뭐 다르게 생각지 마오. 옥련동무가 도예선경연에 올라가 합격하고 왔지, 또 요즘 우량종염소들의 상태가 부쩍 좋아지지, 그 모든게 다 옥련동무의 공로이자 우리 방목공들의 자랑이란 말이요. 그러니 응당 축하를 받아야지.》

그들은 열이 올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동무들, 전 그런 요란한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올리춰주는건 더욱 싫구요.》

옥련은 일부러 깔끔하게 말했으나 속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물결쳤다.

《역시 아름다운 처녀들은 겸손하다니까…》

《아니, 소박하지 뭐.》

《어쨌든 의미가 있는 꽃다발이니 그리 아오.》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 그들은 마치 누군가가 앞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듯 처녀를 뒤에 남기고 앞으로 달아빼는것이였다.

순간 뒤쪽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울렸다. 김태식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옥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방목공총각들이 꽃다발을 안겨준 의미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왜 그런지 발길을 뗄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웬 꽃다발이요? 굉장하구만!》

《흥, 시치미를 떼지 말아요.》

옥련은 태식이 어쩔 사이도 없이 그의 활 헤쳐놓은 앞가슴에 한아름 되는 꽃을 안겨주었다.

《아, 이러지 마오. 동무들이 다 생각이 있어 동무한테 준것 같은데 그걸 나한테 주면 결국 이 꽃다발은 동무와 내가 함께 받은것으로 되지 않소?… 그러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단 말이요. 이를테면…》

《그만해요. 듣지 않아도 알만 해요.》

《그렇소? 이 김태식의 진정을 알아주어 정말 고맙소. 그런데 이 꽃다발은 어쩐다? 그렇지. 우리 함께 이 꽃다발을 방목지에 정히 드립시다, 우리를 안아키워주고 염소들을 살찌우는 고마운 땅에…》

태식은 안고있던 꽃을 길옆의 풀판에 놓았다.

옥련은 갑자기 눈굽이 뜨거워올라 한옆으로 돌아섰다. 그의 마음이 고마왔다.

태식은 오늘 저녁 방목공들이 집에 다녀오도록 조직사업을 했다. 생산절기를 앞두고 바삐 보내다나니 언제한번 집에 가볼새가 없었던것이다.

옥련은 식당근무를 서는 송순애가 부식물걱정을 한터여서 집에 내려갔다오려고 나선 걸음이였다. 그런 사정을 태식에게 비추었더니 하는 소리 또한 엉큼했다.

《혹시 신랑감이라도 온게 아니요? 그래서 어머니한테서 련락이 오고…》

분명 그전의 일을 념두에 두고 비꼬는 말이였다.

옥련은 조용하나 맵짜게 내쏘았다.

《그렇다한들 동무하구 무슨 상관이예요?》

《왜 상관없겠소. 방목조장으로서 자기 조원의 일생문제에 관심을 돌리는거야 응당하지.》

《정말 너그러운 생각이군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듯…》

그렇게 한마디 쏴주고는 서둘러 방목지를 떠나왔는데 어느새 뒤따라온것이다.

《옥련동무, 난 말이요…》

태식은 달밝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 나삐 생각하지 마오. 난 그저 동무가 훌륭한 총각을 동지로 만나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풍덕땅 총각들중의 한사람이요.》

《그래요?》

《아무렴… 옥련동무, 집에 들렸다가 인차 돌아서겠소? 함께 올라오기요. 난 사실 시간이 없는데 어머니의 성화가 하도 심해서 이렇게 내려오지 않소. 나이를 어지간히 먹으니 처녀들이 부모들한테 받는 닥달보다 총각으로서 받는 닥달이 더 크단 말이요.》

태식은 속이 상하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어머닌 그저 만나기만 하면 색시감소리란 말이요. 오늘 저녁도 분명 그러루한 일 같은데 참 야단은 야단이요.》

《야단은 무슨 야단이예요, 아주 좋은 일인데…》

옥련은 비웃음을 띠고 톡 내쏘았다. 그가 거짓말을 엮어대는 엉큼한 심리가 빤히 내다보였던것이다.

《그러니 옥련동무도 일생을 함께 할 총각이 나타나면 무척 기쁘겠구만.》

《남을 거들게 있어요, 제 처신이나 바로 하면 되지. …》

《지금껏 생면부지였던 처녀와 어떻게 마주서겠소. 우리 고향에도 김태식이와 일생을 같이할 아름답고 성실한 처녀들이 많은데…》

옥련은 문득 태식의 노래수첩이 생각났다. 숱한 처녀들이 제 손으로 노래를 적어주고 이름까지 남긴 희한하기 그지없는 그 수첩… 야릇하고도 이상한 감정이 솟구쳤으나 내색하지 않고 명랑하게 웃었다.

《왜 웃는거요? 남은 진실을 말하는데…》

《처녀들이 많아 좋겠군요, 그들을 다 책임져야겠으니 장가를 가기는 코집이 글렀어요.》

《아니,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요?》

옥련은 입을 꼭 다물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총각이였다.

그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도극장무대에 나섰을 때 온몸을 지배하던 감정, 고향과 집단 그리고 동무들에 대한 생각, 더우기 자기와 함께 2중창을 부르고싶다고 한 태식에 대해 생각하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렴치없게도 자기의 가슴에 슬그머니 자리잡은 그를 의식하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가. 부정하려고 애쓸수록 더 가깝게 다가만 서던 그 모습…

하지만 그 감정을 조금도 표현하고싶지 않았다. 자꾸 꼬집어주고 쏘아주고싶은 심정뿐이였다.

이런것이 과연 사랑일가.

옥련은 도무지 질정을 할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면 응당 아껴주고 위해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옥련동무,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오?》

《정 알고싶어요?… 어머니가 정해놓은 처녀도 생각할래 돌격대시절에 친했다는… 자주 편지를 보내오는 처녀들도 생각할래… 그러니 언제 고향처녀에 대해 관심할 짬이 있겠어요?》

얼마전에 작업현장에 일이 있어 내려갔던 그는 태식이한테 오는 편지(그에게 자주 편지하는 처녀의 이름이 있는)를 전해주었는데 그때 《이 누님이 또 편지를 보냈군.》 하며 슬쩍 눈길을 피하는것이였다.

어쩐지 변명처럼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것을 념두에 두고 말했는데 태식의 얼굴이 대뜸 긴장해지는것이였다.

옥련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활랑거렸다.

내가 너무하지 않았을가? 이 동무가 왈칵 성이라도 내면 어쩌나?…

불쑥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같아서는 달아나고싶었다. 그러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태식은 여전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 침묵이 가져올 결과를 예감한 옥련은 먼저 마을쪽으로 달려내려갔다. 뒤에서 태식의 부름소리가 들렸으나 그냥 뛰였다.

혹시 그한테 말 못할 사연이 있는것은 아닐가? 그렇다면 난 이제 어째야 하나?…

옥련은 그 생각으로 하여 집에 들어서서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부모들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필요한 부식물과 갈아입을 옷을 싸든 그는 인차 밖으로 나왔다. 어쩌다 내려왔다가 하루밤 자지도 않고 올라갈바에는 뭣때문에 왔는가고 지청구를 하며 어머니가 큰길까지 따라나왔다.

《그렇게도 바쁘냐?》

《예, 우량종염소들을 새끼생산에 진입시킬 전투를 벌려요. 시간이 없어요.》

《원, 염소방목공일이 인공위성을 쏴올리는것보다 더 힘든것 같구나.》

《그래요.》

정보배는 딸이 당장 달아나기라도 할듯 손을 꼭 잡았다.

《얘야,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 좀 하렴. 도에 있는 총각을 만나지 않고 훌 내려온 네 속심이 도대체 뭐냐? 그 생각을 알아야 이 에미도 손을 쓸게 아니냐.》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어요.》

《그게 글쎄 어느때냐?》

옥련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꼭지를 뗐다.

《어머니, 한가지 말씀드릴건 고향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시집가고싶은 생각이 나에게 전혀 없다는거예요. 아무리 도시가 화려하고 살기 좋아도 난 싫어요. 그건 순미와 경심이랑 나눈 약속때문만이 아니라 심장이 그렇게 요구하고있어요. 어머닌 중앙무대에까지 오르게 된 이 딸을 자랑하고싶어하시는데 만약 내가 여기 풍덕땅에서 나서자라지 않고 우리 청년염소반원들처럼 좋은 동무들과 같이 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을수 있었겠어요. 전 고향의 풀 한포기, 염소 한마리가 천금보다 더 귀중해요. 온 세상을 둘러봐도 우리 풍덕땅처럼 좋은 곳은 없어요.

저의 심정을 리해해주세요. 어느때인가는 이 류옥련이를 끝없이 사랑해줄 좋은 동무가 꼭 나타날거예요. 그리고 이미 나타난지도 모르고요.》

정보배는 딸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어져가는 옥련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그린듯 서있을뿐이였다.

옥련은 부지런히 걸었다. 길가엔 한결 더 밝아진 달빛이 한벌 쭉 깔렸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마저 드는 산촌의 밤정서를 더해주는 그 달빛이 방목지에서 내려올 때와 또 다르게 가슴을 흔들었다.

(어머닌 아무 말씀도 안하셨지?… 자신도 이 땅에서 나서자라 한생 뿌리를 내리고 사시였으니 이 딸의 심정을 리해하셨을거야. )

옥련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각에도 태식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비로소 의식했다. 그 엉큼한 말투, 덜퉁한 행동거지… 그속에 깃들어있는것이 정말 나에 대한 사랑일가.

순미는 그것이 진정이라고 말을 했었다. 《흰제비》를 찾기 위해 그토록 애쓴것만 보아도 그 진정이 리해되였다.

하다면 나의 심장은… 정말로 그를 위하여 불타고있는가?

그는 천천히 걸었다. 사랑한다면 응당 서로가 소원하는것을 위해 힘을 바쳐야 할것이다.

태식은 오직 염소방목을 잘해서 염소마리수를 늘일 생각밖에 없었다. 돌격대시절의 누이한테서 자주 편지가 오는 사연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보자.

길옆의 돌배나무밑에서 누군가 불쑥 나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옥련은 깜짝 놀랐다. 등에 큼직한 배낭을 진 태식이였다.

《동문 뭐예요, 사람을 놀래우면서…》

옥련은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숨을 톺았다.

《심장이 그렇게 약해가지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앞에서 노래를 부르겠소. 아무래도 동무심장에 대해서는 이 김태식이가 관심해야지 안되겠소. 그건 그거구 밤중으로 돌아설 마음을 먹었으면 이 김태식이가 먼저 나와 기다린다는것쯤이야 알았어야지.》

《기다릴 사람은 따로 있어요.》

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아오. 그래서 더욱 힘이 생긴단 말이요.》

《실없는 소린 그만하고 일이나 잘하세요. 남자가 시시하게 밤낮 허튼소리…》

《동무가 바란다면… 그럽시다.》

태식은 옥련의 우량종염소들이 이번가을에 어떻게 하면 《흰제비》처럼 세마리의 새끼를 낳게 하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는가고 물었다.

옥련은 대답을 못했다. 염소들의 영양을 올리는데만 신경을 썼지 그에 대해서는 탐구를 못해본 그였다. 그렇다고 그냥 있고싶지 않았다.

《그 문제는 순미가 늘 강조하는대로 2년3산생산조직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봐요.》

《2년3산생산조직에서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뭐요?》

《동문 날 시험치는거예요?》

옥련은 앵돌아진듯 하면서도 대답을 했다. 2년3산은 2년에 세번 새끼를 내야 하는것만큼 생산기간을 8개월로 해야 하는것이다, 그러자면 제일 좋기는 9월에 쌍붙이기를 하여 다음해 2월에 새끼를 낳은후 5월에 쌍붙여 10월에 새끼를 받는다. 그리고 다음해 1월에 쌍붙여 6월에 새끼를 받아야 하는것이다.

《그 대답이 틀리지는 않소.

우리 작업반에서 늘 하고있는 일이니까.

문제는 매개 염소들이 한번에 한마리나 두마리가 아니라 세마리, 네마리, 다섯마리까지 낳게 할수 없겠는가 하는거요. 그래야 염소마리수를 빨리 늘일게 아니요.》

옥련이도 그에 대해서 생각 안한것이 아니였다. 태식은 점차 흥이 나서 말했다.

《우리 함께 연구를 해보기요. 물론 생산주기에 약물적용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값비싼 약물을 쓰지 않고도 우리 풍덕땅에서 나는 약초를 리용할수 없겠는가. 그리고 또 염소의 생리적특성을 리용하는 방법들이 없겠는가. …

난 몇가지 떠오르는것이 있어서 나의 염소무리에 도입을 해보는중인데 결과는 두고봐야 하는거고… 안홍진동무가 돌아오면 토론을 해서 전체 염소무리에 적용해볼 생각이요.》

《동문 앞으로 박사가 되겠군요.》

옥련의 말에 태식은 무척 기분이 좋아 큰소리로 껄껄거렸다.

《염소방목공 인민배우에 염소방목공 박사! 얼마나 좋소.》

《어머나, 제 소리나 하세요. 난 왜 자꾸 끌어들이는거예요?》

《왜, 내가 박사가 되는게 싫소?》

《싫지는 않지만 기뻐할 처녀야 따로 있어야지요.》

《난 동무가 제일 기뻐할 처녀가 돼주면 좋겠소.》

《아니, 그렇게는 되지 않을거예요.》

옥련은 딱딱하게 말하려 했으나 어쩐지 목소리가 갈리고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옥련이!》

태식은 마치 성난듯 그의 두팔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옥련은 깜짝 놀랐으나 인차 눈길을 내리깔았다. 콱 뿌리치고싶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어인 일인지 태식이가 두렵게만 느껴지면서 도무지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만약 동무의 우량종염소들이 100프로 삼태를 낳게 한다면 어쩔테요? 그래도 이 김태식을 인정 못하겠다는거요?》

옥련은 여전히 눈길을 들수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두려웠다. 그러나 순순히 굽어들고싶지는 않았다.

《동문 이제라도 당장 그 일을 해낼것 같군요. 탐구에서 조바심은 금물이예요. 피타는 탐구와 불같은 정열이 있어야 성공할수 있단 말이예요. 대답은 그때 가서 하겠어요.》

옥련은 태식이 긴장성을 늦춘 사이에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방목지를 향해 달려올라갔다. 태식의 걸찬 웃음소리가 껄껄 울렸다.

처녀는 걸음발을 늦추며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의 귀중한 동무!…)

길옆의 덩굴밑에서 밤새들이 푸드득거렸다. 잔잔하게 내리비치는 달빛이 흔들렸다.

옥련은 자기가 소리없이 울고있다는것을 몰랐다. 남이 알세라 살그머니 가꿔온 그 사랑이 어느덧 가슴에 깃들어 처녀는 영원히 고향과 운명을 함께 할 자기의 아름다운 미래를 보게 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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