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4 장
9
요즘 리경심의 일은 왜 그런지 꼬이기만 했다. 올봄에 나서 이제는 중토끼가 다 된 후보토끼 여러마리가 쓰러졌던것이다. 너무나 참혹한 현실앞에 그는 눈앞이 아뜩했다.
《동무넨 도대체 뭘 했어요? 다른 동무들은 건설때문에 눈코뜰새없이 뛰여다니는데 뭘 했나 말이예요?》
그는 후보토끼사양공들을 호되게 다몰아댔다.
《소독은 매일 했어요?》
나어린 사양공들은 말없이 머리만 끄덕이더니 장마철에 대책했어야 할 콕시디움병예방을 미처 하지 못했다고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건설에 자주 동원되다나니…》
《듣기 싫어요.》
경심은 후보토끼우리호동을 나오고말았다. 그는 새로 지은 토끼우리호동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층층 다락모양을 한 토끼우리호동은 벌써 눈이 부시도록 회칠을 하고 그 다음층들은 청색, 감색, 연푸른색, 밤색 등으로 조화롭게 장식되여 우아하기 그지없다. 말그대로 동화에 나오는 토끼동산을 방불케 했다.
지금껏 짧은 기간에 이 모든것을 꾸리느라 반원들모두가 얼마나 뛰여다녔던가. 예상외로 군안의 토끼반장들을 위한 보여주기는 이틀이나 앞당겨 진행되였다. 경심은 새로 지은 호동에 토끼들을 옮기고 당장 콤퓨터화는 불가능한것이여서 최소한 청소소독의 기계화만이라도 보여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안되여 새로 지은 토끼우리호동만을 보여주게 되였다.
군안의 토끼반장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그들은 원래의 호동들까지 구경하겠다고 후보토끼우리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에게 뜻밖에도 토끼들이 죽어가는 모양을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던것이다. 아침까지만 하여도 별일없었는데 한낮무렵이 되여 급격히 병증세를 나타내는 바람에 안내하던 경심이도 놀랐고 토끼반장들도 놀랐다. 토끼기르기를 전문하는 사람들이여서 그럴수 있는 일이라고 위안했으나 경심은 화로를 뒤집어쓴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는 방황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모든게 다 내 잘못이다. 눈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보여주기를 대치하려 했으니 너무나 응당한 귀결이 아닌가. 결코 누구한테 자랑이나 하자고 작업반을 현대화하는 일을 시작한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본의든 아니든 경심은 제 이름이나 내려는 공명주의자로 되여버렸다.
순미를 따라앞서겠다는 오직 그 한가지 생각으로 아글타글 뛰여다녔지만 결국 이번일을 계기로 망신만 톡톡히 당한것이였다.
이제 무슨 낯으로 순미를 대하며 고향사람들앞에 나선단 말인가.
반원들만 없다면 실컷 울기라도 하련만…
경심은 누군가 뒤에 다가서는 인기척에 돌아섰다. 박승완이였다.
《반장동무, 오늘일을 교훈으로 삼읍시다.》
대답을 안했다. 까닭없이 분이 치밀어올랐다.
《동문 어째서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어요?》
《반장동무, 날 용서하오. 어떤 비판이든 다 접수하겠소. 하지만 오늘은 말 좀 해야겠소.》
박승완은 한걸음 다가섰다. 표정은 어두웠지만 두눈에서는 불꽃이 이는듯 했다.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그 눈빛앞에 경심은 일순 당황해졌다. 아니, 두려웠다. 아닐세라 그의 입에서 낮으나 준절한 목소리가 괴롭게 울려나왔다.
《반장동문 우선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예요?》
《물론 괴롭겠지만 이 말만은 들어주기 바라오. 반장동무한텐 리상이 없소. 목표가 없단 말이요. 기껏해야 동창생을 따라앞서 자기의 존재를 시위하겠다는 좋지 않은 질투와 야심이 있을뿐이지. …》
경심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활등처럼 굽어든 눈섭이 파르르 떨리고 앙다문 입술에서는 금시라도 피가 터질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침착하고 여유작작했다.
《아주 좋아요, 계속하세요.》
《순미동무한테는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귀중한것이 있소. 그것은 바로 아름답고 고상한 리상이요. 고향땅을 살기 좋은 무릉도원으로 꾸려 아버지
그런 순미동무와 비해볼 때 나나 동무나 얼마나 아득한 차이가 있는가 말이요. …》
《그만하세요. 이제는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경심은 획 돌아섰다. 한겨울의 랭기가 슴배인듯 한 바람이 승완의 얼굴에 들씌워졌다.
경심은 경황없이 걸음을 옮겼다. 눈물이 콱 솟구쳤다.
뭐, 내가 순미와 하늘땅차이라고? 질투쟁이, 야심가… 도대체 나한테 순미보다 부족한것이 뭐란 말인가. 나도 그 애만큼 뛸것은 다 뛰고 노력할것은 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저 동문…
누구든 만나 자기의 안타깝고 억울한 심정을 터놓고싶었다.
경심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정윤심의 집으로 향했다.
중학교때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인정이 많은 상급생이였던 그에게 심중을 터놓고 조언을 받고싶었다. 일단 결심을 하고나니 걸음이 빨라졌다.
염소작업반 합숙을 지나 정윤심이네 집마당에 들어서니 창문마다 불빛이 환했다.
정윤심은 능금골 우량종염소와 당장 생산에 들어갈 염소들의 배합먹이때문에 고심한다더니 오늘은 집에 내려온 모양이였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소리가 울렸다.
《윤심동무 있어요?》
부엌문이 활 열렸다. 그새 몸이 더 풍만해진 윤심이 달려나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토끼반장동무가 우리 집엘 다 오구. 몹시 바쁠텐데…》
《보고싶어서요.》
《모르겠다. 혹시 그 땅벌같은 성미에 이 정윤심이를 콕콕 찌르려고 오지나 않았는지…》
《설사 그렇다 해도 난
어느때보다 심정이 복잡한 속에서도 그런 롱이 스스럼없이 나가는지 경심은
《어마나, 너 정말 앙큼하구나. 뭐 1:3이라구, 호호호…》
윤심은 배까지 그러쥐고 웃었다.
《오늘 저녁 특식을 할 계획이였는데 마침 잘 왔어.》
윤심은 커다란 비닐버치에 가득 담겨있는 데친 수리취(떡 해먹는 취)를 가리켰다.
《누구 생일이라도 되는가요?》
《아니, 그런건 아니구…》
윤심은 조찹쌀이 좀 생겼길래 취를 넣고 떡을 쳐서 반원들에게 가져다줄 생각이라고 했다. 가마에 안친 쌀이 어느 정도 익었는가를 가늠해보고난 그는 지금은 할일이 없으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경심을 떠밀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신혼생활을 구경하고싶은 호기심이 없지 않았던것이다.
알른알른한 장판방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웃방으로 올라가는 문옆의 옷걸개에는 사관장의 령장이 달린 신종선의 군복과 오각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군모가 걸려있었다.
리경심의 눈길은 군복앞섶을 가득 채운 훈장과 메달에 쏠렸다. 국기훈장, 전사의 영예훈장, 군공메달…
(저런 제대군인들과 일하고있으니 순미가 왜 성수가 나지 않을가…)
앉은뱅이책상우에는 액틀에 끼운 결혼식사진이 놓여있었다. 연분홍치마저고리를 입고 앞가슴에 아름다운 꽃송이를 단 정윤심은 활짝 핀 함박꽃처럼 얼굴에 웃음을 담았는데 제낀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역시 꽃송이를 가슴에 단 신종선은 입을 꾹 다물고있는것이 어딘가 모르게 무뚝뚝한 인상이다.
순간 경심의 눈앞에는 방금전까지 자기를 질책하던 박승완의 침통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마나, 새망스레 내가 왜 이러니, 자존심도 없이…)
그는 붉어지는 얼굴을 누가 볼세라 책상우에 있는 두툼한 학습장을 집어들었다. 뜻밖에도 윤심의 일기장이였다. 남의 일기장을 보는것은 실례였지만 남의 생활을 엿보고싶은 충동만은 누를수 없었다.
그는 부엌쪽을 흘끔 살피며 《빨리 들어오세요.》 하고 한마디 해보았다.
윤심은 마침 심심하면 책이나 좀 보라고 이른다. 책상우의 책꽂이에는 많은 기술서적들이 꽂혀있었다.
경심은 얼굴에 생긋이 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번졌다.
첫장에는 그 무슨 심장의 구조 비슷한것이 그려져있고 염소의 해부생리학적특징들이 적혀있었다. 결혼후에 쓴 일기책인지 신종선과 련애하던 내용은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여러장을 넘겼다. 그러다 불쑥 눈에 들어오는것이 정자로 박아쓴 《당원의 의무와 권리》이다.
(이 동무가 요즘 입당준비를 하는건가?…)
《…당원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새삼스러운 물음같다.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의 주인공인 강연옥이와 같은 처녀가 진짜
혁명임무에 충실하고 언제 어데서나 항상 아버지
우리 풍덕땅에도 강연옥이와 꼭같은 주인공이 있다. 고향사람들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처녀, 고향을 위해 자기의 청춘을 깡그리 불태우는 처녀!
그는 바로 라순미이다. 나는 비록 나이는 우이지만 그를 선배처럼, 어떤 때는 어머니처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다.》
경심은 두눈을 꼭 감았다. 마치 자기가 보란듯이 그런 글을 남긴듯 했다.
《…그는 고향 풍덕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꾸려 아버지
건설의 삽을 처음으로 박던 그날 전경도를 방목덕에 올려다 세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거나 남들보다 더 훌륭하게 우리 고향을 꾸리지 못한다면 언제가도 아버지
그 불같은 호소에 모두가 호응해나섰다.
하여 지금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전투가 벌어지고있다. 그속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락천적이며 랑만적인 생활을 창조하고있다.
옥련이는 투쟁속에서 단련되고 노래를 세련시켜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무대에까지 올라갈수 있게 되였다.
우리 풍덕은 앞으로 몰라보게 전변될것이다. 벌써 그날이 보인다. 일을 해도 오직 아버지
경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다음장을 번졌다. 제목부터가 특이했다.
《만능의 투쟁방식, 만능의 무기!
우리가 전투에 궐기해나섰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빈손으로 어떻게? 라는 의문을 품었었다. 그러나 순미는 조금도 비관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대체 그의 심장은 얼마나 크고 열렬하기에 그렇듯 강하고 억센것일가?
나는 물었다.
〈반장동무, 세멘트 한그람, 철근 한토막 없이 우리 힘으로 꽤 해낼수 있을가?…〉
그는 말했다.
〈기술원동무, 우린 지금껏 당의 사랑과 은정, 국가적혜택속에서만 살아왔어요.
요즘 난 심장에 물어봐요.
일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제기되면 그저 우에서 해결해주기만을 바라지요. 우린 자기 고향을 꾸리면서 자재타령이나 하고 우에서 대줄것만 바란다는건 말이 되지 않아요.
난 정말 많은것을 모르고 살고있어요.
아버지
자력갱생! 이것이면 돼요. 앞으로 부닥치는 모든 애로와 난관, 장애물들도 이 위력한 무기로 쳐갈기자요. 〉》
경심은 순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보고싶어 장을 넘기다가 문득 이런 글을 보게 되였다.
《…신동무는 나에게 병원에 가서 부인과상담을 해보라고 몇번째나 말을 한다. 걱정말라고 하는데도 자꾸 재촉한다.
남자들이란 녀성과 아이들에 대해 그렇게 세심한 존재들일가. 하긴 그래서 남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말라고 했더니 아이가 얼만큼 컸는지 알고싶어 죽을지경이란다. 난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말았다. 아이야 응당 클 때가 되면 클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고마움에 목이 메였다. 다심한 남편, 뜨거운 사랑…》
《동지애》라는 제목의 글도 있었다.
《순미반장이 옥련이한테 했다는 말을 몇번이나 음미해보았다.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혁명적동지애이다. …》
경심은 더 읽을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마침 정윤심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구태여 윤심이한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방금 본 일기장의 글이 자기에게 해주는 정윤심의 말없는 충고처럼 생각되였다.
윤심은 김이 문문나는 조찹쌀을 절구에 쏟아넣으며 이마의 땀을 훔치고있었다. 경심은 찬물에 담그어놓은 절구공이를 집어들었다.
《일솜씨가 여간 빠르지 않군요.》
《토끼반장이 목젖 삼켜질가봐 속도전을 했지.》
《고마워요.》
그들은 한동안 절구질을 하여 새파랗게 물이 든 취찰떡을 버치에 가득 담았다.
경심이 정윤심의 집을 나섰을 때에는 하늘에 별들이 총총한 밤이였다.
윤심은 그를 바래워주면서 자주 오라고 친절하게 당부를 했다. 마을로 내려온 경심은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토끼작업반으로 향했다. 어쩐지 잠이 올것 같지 못했다. 일을 하고싶었다.
선전실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박승완이 그냥 남아 책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반장동무, 어델 갔댔소. 계속 찾아다녔는데…》
《나를요?》
《반장동무를 진심으로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잠을 잘수가 없었소. 반장동무도 역시 같을거라고 생각했소. 이렇게 나왔으니 내 생각이 옳았던것 같소.
우리 이제부터라도 손잡고 일을 잘해보기요.》
경심은 아무 대꾸도 없이 박승완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보오? 내 말이 기분 거슬리오?》
《지금껏 동물 믿어온 내 잘못에 대해 생각하고있어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요?》
박승완의 표정은 대뜸 긴장해졌다.
《동문 도대체 남자가 맞긴 맞아요? 남자라면 응당 후려치는 맛이 있어야지 비굴하게 눈치만 보면서…
원칙과 어긋난다고 생각했으면 이미전에 때려주었어야 할게 아니예요? 정신을 번쩍 차리게…》
《허허허… 이건 정말 예상치 않았던 공격이로군.》
그제야 처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승완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니 반장동문 앞으로 주먹이 센 신랑을 만나야겠구만.》
《아니요. 난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는 총각이면 더 바랄게 없어요.》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말이란 결코 입으로만 하는것이 아님을 두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