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4 장
1
횡포한 자연의 돌풍이 휩쓸고지나간 풍덕등판은 오히려 전보다 더 생신한 기운이 차넘치는듯 했다. 방목지의 구획을 표시하느라 박아놓은 말뚝들은 광풍을 이겨낸 그것이 자랑스러운듯 끄떡없이 서있었다. 스러졌던 풀들도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해빛에 키를 솟구며 일어서고있었다. 뜬김같은 수증기가 뽀얗게 덕에 서렸다. 방목쉼터들마다의 돌배나무, 산살구나무, 느티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태평스레 흐느적거린다.
염소작업반건설현장에서는 정리작업이 진행되고있었다. 전투원들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듯이 노래를 부르며 일손을 다그치고있었다. 그 노래소리가 힘과 용기를 주는 나팔소리 못지 않았으나 라순미는 아픈 마음을 안고 건설현장을 꼼꼼히 돌아보았다. 다 올려쌓았던 건물들의 벽체가 무너졌고 무너지지 않은 벽체들도 비바람에 씻기여 보기 싫은 곰보얼굴처럼 되였다.
벽체를 쌓은 건물들을 미장작업을 했더라면 이처럼 피해가 크지 않았을텐데…
순미는 건설장의 모든 피해가 자기때문에 빚어진 일처럼 생각되였다. 성급하게 파제낀 건물주변의 배수로들과 비물에 패인 크고작은 웅뎅이들도 그의 눈길을 아프게 끌었다.
벽체가 무너진 호동건물을 돌아보던 순미는 깨진 블로크쪼각이 발치로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곳에서 정리작업을 하던 리경칠이 냅다 찬 블로크덩이가 그의 앞에 떨어진것이다.
순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경칠이 당황해서 말했다.
《반장동무, 난 지금껏 힘들게 쌓았던 벽체가 무너진것이 분해서 그랬는데…》
《됐어요.》
순미는 그가 분해서 그랬다고 했지만 정확히 명중을 한셈이라고 생각했다. 지휘관인 자기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늘과 같은 피해가 생긴듯이 느껴졌다.
《경칠동무, 다친 발은 일없어요?》
《좀 아프긴 하지만 참을수 있어요.》
《정말?》
《그럼요.》
그는 아직 붕대를 풀지 못한 오른쪽발을 흔들어보이기도 하고 블로크장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아야!》 하고 소리쳤다.
《그것 보세요. 아픈 다리로는 장난을 하는게 아니예요.》
《일없다는데두요.》
순미는 방금 주어든 깨진 블로크덩이를 손에 들고 전경도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비바람피해정리작업을 하는 반원들앞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세찬 비바람에도 전경도는 끄떡없이 서있었다.
순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전경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 무서운 비바람에도 우리의 지향과 념원이 꺼꾸러지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전투원들의 사기도 높다. 이럴 때 지휘관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에 들고있던 블로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부터는 축조가 끝나는 차제로 지체없이 미장작업을 뒤따라세우고 지붕공사도 속전속결 해야 한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신종선이였다.
《반장동문 혹시 동요하는게 아니요?… 지휘관이 맥을 놓으면 대오가 전진하지 못하지요.》
《아니, 분조장동무, 난 지금…》
순미는 자기가 생각한바를 그대로 터놓았다.
《옳소. 나도 그 생각을 하던중이였소.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완전무결하게 완성하는 방향에서 공사를 추진시켜야 할것 같소.》
《그래요. 찍는 블로크들의 질도 더 높이고… 관리위원회와 토론해서 세멘트를 해결해야겠어요.》
신종선은 그의 생각을 지지했다.
라순미는 급히 덕을 내렸다. 그는 작업반호동들에 들려 후보염소무리가 무사한가를 알아본 후 석회로에 갔다.
원형으로 우뚝 솟은 두개의 석회로에서는 여전히 연한 연기가 그물그물 피여오르고있었다. 석회석이 잘 익어가는 모양이였다.
《아바이, 끝내 불을 죽이지 않았군요. 정말 고마워요!》
《무슨 소릴… 참, 벽체들이 무너졌다지? 그만해도 인명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다행일세. 너무 락심말라구. 일하느라면 무슨 일인들 없겠나. 문제는 신심을 잃지 않는거야.》
《고마워요.》
순미는 김희문이와 한동안 건설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을로 내려왔다. 관리위원회에서 비바람피해대책을 토론하는 반장들의 모임이 있는것이다.
그가 관리위원장방에 들어섰을 때는 반장들이 다 모여 자리를 정돈한 상태였다.
앞탁에 앉아있는 권봉석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어려있었다. 그는 사업일지우에 깍지낀 손을 올려놓고 무슨 생각엔가 잠겨있었다. 계획부원이 반장들이 다 모였다고 말해서야 머리를 들었다.
그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나서 지난밤 비바람피해정형을 료해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반장들이 한명씩 일어나 피해정형을 보고했다. 작업반들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건물들의 기와가 날아나고 집짐승우리들이 무너졌으며 풀판과 방목지들이 큰물에 떨어져나갔다.
권봉석은 구태여 염소작업반의 실태만은 묻지 않았다. 그
순미는 심한 중압감을 느꼈다. 관리위원장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긴장하게 기다렸다.
권봉석은 매개 작업반들의 피해복구대책을 이야기하고나서 염소작업반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염소작업반건설문제는 좀 토론을 해보자는겁니다. 현재상태에서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야 하겠는가? 그러자면 건물들의 질을 담보할수 있는 자재가 보장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소, 의견들을 말해보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일어나더니 자재가 마련된 조건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는것이 상책이라는 소리를 했다. 관리위원회 한 일군은 염소작업반이 일단 건설을 중지하고 염소방목에 낯을 돌려 당면한 생산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봉석은 마디불거진 손으로 책상을 다독이며 순미쪽에 눈길을 보냈다.
《반장동무생각은 어떻소?》
순미는 생각깊은 눈길로 모임참가자들을 둘러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우리가 이번에 입은 피해에 대해 숨기고싶지 않습니다. 자재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들
지금 우리는 무너진 벽체를 다시 쌓기 위한 준비와 이번과 같은 피해를 극력 줄이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완강한 투지로 공사를 밀고나가겠다는것이 우리 반원들모두의 한결같은 심정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순미동무의 말이 옳습니다. 계속 밀고나가야 합니다.》
뒤쪽에 앉아있던 리경심이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
《토끼반장동문 앉소.》
권봉석이 손짓을 했다.
《어쨌든 관리위원회에서도 가능한껏 자재를 해결하겠소. 작업반들을 현대적으로 꾸리는 일은 우리가 목표를 세운것이니만큼 그만둘수는 없는것이요. 하지만 당분간 자재가 해결될 때까지 건설을 중지하고 염소사양관리에 집중해야겠소.》
순미는 혀를 깨물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만두었다. 위원장동진 저러니 은송처럼만 하재도 5년은 잘 걸린다는 소리를 하셨지. 오늘의 하루를 주춤거리다간 래일엔 더 아득히 떨어질수 있다는걸 왜 생각 못하실가. …
《염소반 반장동무, 자재만 해결되면 냅다 밀고나갈수 있으니까 걱정할건 없소. 그러니 지시대로 해야겠소.》
권봉석은 순미를 안심시키듯 무슨 말인가 더 했으나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실천이다. 건설을 밀고나갈 결심을 철회해서는 안된다.
순미는 회의시간이 길게만 생각되였다. 한시바삐 밖으로 나가고싶었다. 산소가 희박한 공기속에 있는듯 숨이 막혔다.
출입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농장출판물보급원처녀가 손풍금을 메고 동실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들어섰다.
《무슨 일이요?》
권봉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임이 끝나면 농장초급일군들에게 노래보급을 하라는 농근맹위원회의 과업을 받고왔습니다.》
《노래보급?… 들어오오. 회의는 끝났으니까. …》
처녀는 권봉석이 가리키는 자리에 나섰다.
《노래보급은 이미 나온 노래를 제가 손풍금으로 선창을 떼면 따라하는 식으로 먼저 하고 새 노래를 배우는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은방울 굴리는듯 한 처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먼저 불후의 고전적명작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북두칠성 저 멀리 별은 밝은데
아버지
창문가에 불밝은
장군님 계신 곳은 그 어데일가
…
순미의 가슴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기쁠 때나 힘겨울 때나 최전연으로 뻗은 전선길을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부르고부르던 노래, 작업반원들모두가 심장으로 부르며 지금껏 전투를 벌려온 그리움의 노래였다.
순미의 목소리는 점차 떨리고있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속결심을 더욱 가다듬고있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순간도 주저하거나 물러설수 없다. 이제라도 전선길을 이어가시던
노래보급이 끝나고 순미는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나온 경심이 그를 불렀다.
《순미야, 피해가 심하다지?… 마음고생이 컸겠구나.》
《일없어.》
《락심하지 말어. 우리앞에 평탄한 길만 있는거야 아니지 않니.》
《고마워. 난 끝까지 해내고야말겠어. 석회블로크의 질도 높이고 세멘트도 해결하고… 그런데 너 블로크찍는기계를 그냥 보냈더구나. 너를 생각해서 보냈댔는데…》
《난 너에게 도움을 못 줄망정 짐이 되고싶지 않았어. 리해해줘.》
순미는 경심이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이악하기로 소문난 그로서는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경심아, 먼저 가봐. 난 아무래두 위원장동지를 다시 만나야겠어.》
《알겠어. 관리위원장동지도 아마 마음이 편치 않으실거야.》
경심이 돌아간 후 순미는 한결 개운한 심정으로 권봉석과 마주앉아 사연을 이야기했다.
《뭐, 세멘트?… 그게 어디 있냐? 농장창고엔 물론이구 군에도 귀한게 세멘트야. 어딜 가서 그 많은 량을 해결한단 말이야. 그래서 관리위원회에서도 가능한껏 해결해보겠다는게 아니냐.》
권봉석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만 다셨다. 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관리위원장의 말은 사실이였다.
지금 도와 군들에서 생산하는 세멘트들은 도자체로 건설하는 대규모 수력발전소건설장에 우선적으로 보장하게 되여있었다.
순미는 어깨가 축 처져 작업반으로 향했다. 곧추 건설장으로 올라가지 않고 희문아바이가 석회로옆에 꾸려놓은 기와로에 들렸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리당비서가 와있었다. 붉은 진흙으로 빚은 기와를 로에 넣는 일을 거들던 그는 순미를 보자 덕에서는 벽체가 무너졌는데 여기서는 지붕에 씌울 기와를 굽고있으니 얼마나 락관적인가고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박성복은 순미의 고충을 들여다본듯 땀흐르는 이마를 수건으로 문대며 말했다.
《무너진 벽체는 다시 쌓으면 되는거요. 일을 하자고 하는 사람한테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고. … 이럴 때일수록 신심을 잃지 않는것이 중요하오. 만약 동무가 맥을 놓고 주저앉으면 리당비서가 용서를 안해. …》
《리당비서동지! 명심하겠습니다.》
순미는 속으로 뜨거운것을 삼켰다. 작업반장들이 신심을 잃을세라 뒤에서 떠밀어주고 이렇게 기와로에까지 올라와 땀을 흘리고있는 그의 모습을 보느라니 잠시나마 주저했던 자기가 부끄러웠다.
순미는 세멘트때문에 고심하고있는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물론 세멘트가 있으면야 좋지. 그렇지만 건설을 시작할 때 결의한대로 풍덕땅에 흔한 자재를 가지고 할수는 없을가. … 꼭 세멘트를 써야 벽체가 든든하다는 법은 없소.》
《반장, 우리 힘을 합쳐 해결해보자구.》
김희문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한마디했다.
순미는 기와로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땀을 흠뻑 흘리고서야 덕으로 올라왔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졌다. 바람에 팔락거리는 풀잎들의 설레임소리, 어디 피난갔다 돌아온 밤벌레들이 저들의 존재의 무사함을 아뢰듯 여물지 못한 소리로 쓰륵쓰륵 우는 음향에 귀기울이느라니 말로는 다 표현할수 없는 힘이 용솟음쳐오르는것 같았다.
비서동지말이 옳아. 하자는 사람한테는 꼭 방도가 생기는 법이야. 벽체미장을 삼합토로 해보면 어떨지. … 그러자면 모자라는것이 석회돌이다. 지금까지 면양반 뒤골안에서 날라오던 석회돌원천도 거의 떨어져가고있었다. 어떻게 하든 풍덕땅에 흔한 재료를 가지고 끝까지 건설을 밀고나가야 한다.
순미는 한껏 사색의 나래를 솟구며 작업장을 향해 올라갔다.
합숙건물앞에서 우등불이 타오르고있었다. 건설조청년들이 지붕공사에 쓸 들보와 각목을 마름질하고있었다. 신종선이 일손을 멈추고 맞아주었다.
하루동안 진행한 작업실적에 대해 보고한 그는 정윤심이 능금골에 올라갔다온 말을 했다.
《가설막이바람에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방목공들과 염소들은 무사하다오. 오늘 하루동안에 가설막도 바로세우고 야외식당과 천막들도 다시 고쳐지었다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군요.》
순미는 작업반들의 형편과 관리위원회 모임에 참가했던 일이며 희문아바이네 자재보장조에서 기와를 구워내고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니 우리의 전투는 계속 진행되고있구만.》
《그래요.》
순미는 지금 당장 대책해야 할 문제들을 이야기하였다.
《석회돌원천은 우리 건설조에서 찾아보겠소.》
《소대원들의 토론에 붙여보세요. 난 아무래도 배등령을 넘어갔다 와야겠어요.》
순미는 건설자재문제를 두고 건설부문의 오랜 일군들과 기술일군들을 만나 토론해볼 의향을 비추었다.
《반장동무의 결심을 막지 않겠소.》
신종선은 건설조청년 한명을 그에게 붙여주었다. 그는 반장의 결심을 막을수 없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순미는 작업반일과 타박상을 입은 동무들을 부탁하고는 전투현장을 떠났다.
배등령에 올라서니 저 멀리 최전연으로 뻗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여러개의 전조등빛이 보였다. 순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우리
마음은 저도 모르게 전선길 굽이굽이를 따라섰다. 멀어져가는 그 불빛을 이윽히 바라보던 그는 함께 가던 청년에게 말했다.
《리동무, 내 걱정은 말고 여기서 돌아서야겠어요. 이젠 얼마든지 령을 넘을수 있어요. 한명의 로력이 긴장한 때 동무까지 건설장을 뜨게 할수는 없어요.》
순미의 강경한 요구에 청년은 힘들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새벽에야 읍거리에 들어선 순미는 방송에서 힘있게 울려나오는 보도를 들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