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3 장

5

 

류옥련은 방목을 하면서도 그날 밤의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리고있었다.

김태식이 고향의 처녀를 사랑하고싶어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가, 안 받아들이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것은 동무들사이의 단합이고 사랑이다. 태식의 말이 아무리 귀에 거슬려도 아무러면 옥련이가 잘못되기를 바라서 그러겠는가. 집단의 단합과 동지적우애를 발휘하는데서 우선 너와 나부터 모범이 되자. 그외에도 순미는 많은 말을 했었다.

옥련은 호 하고 긴숨을 내쉬였다. 순미가 한 말이 귀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을 밉게 보기 시작하면 발뒤꿈치도 밉다는데 옥련은 그의 발뒤꿈치를 본적도 없지만 모든 행동과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동무의 거칠고 비꼬는듯 한 말속에 정말 이 옥련이를 위해주려는 마음이 깃들어있단 말인가? 아니, 절대로 그럴수 없어. …

옥련은 방목지에 올라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침일찍 능금골에 올라온 그를 만난 김태식은 작은 눈을 크게 뜨며 식당책임자동무가 어떻게 방목지에 나타났는가고 물었다.

(흥, 식당책임자?…)

옥련은 우량종염소가 걱정되여 올라왔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다가 식당책임자라는 말에 발끈했다.

《우량종염소들이 한심하게 됐다기에 올라왔어요.》

《뭐요? 그건 반장동무의 지시요, 아니면 동무의 자유주의요?》

《아무렇든 동무에겐 상관없어요.》

《허, 그 말투는 여전하군. 난 방목소대장의 자격으로 묻는거요. 식당을 책임졌으면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켜야지 않는가!》

사뭇 정색한 어조로 훈시하고난 김태식은 《철이 없다니까.》 하며 돌아섰다.

《뭐예요?》

태식은 다시 돌아섰다.

《그럼 그게 철이 있는 행동이요? 두몫, 세몫 하자고 토론할 땐 언젠데…》

옥련은 혀를 깨물며 몸을 돌렸다. 더이상 마주서고싶지 않았다. 병은 왔다가 가도 버릇은 가지 않는다더니 정말 이 사람은 달리될수 없구나. …

그때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발끈해지는 옥련이였다. 주위에서는 염소들이 풀을 뜯는 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왔다. 이제부터는 우량종염소들의 영양을 부쩍 올리면서 노래련습이나 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옥련이가 한껏 감정을 담아 첫 소절을 떼려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울리더니 뜻밖에도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가 웬일이세요?》

옥련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졌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있었다.

《넌 정신을 어따 팔고있는거냐? 아무리 불러도 영 듣지를 못하니. 우량종염소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순미를 만났댔어요?》

정보배는 손에 든 머리수건으로 훌훌 부채질을 했다.

《네가 여기 온줄 알았으면 곧장 올라왔겠는걸… 하긴 순미 어머니도 그래 모두들 염소반을 도와나섰는데…

국수를 한임 가지고와서 식당에 넘겨주었다. 순미 그 애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그건 그거구… 염소들이 그만하면 괜찮아 보이는구나.》

《아니예요. 새끼생산에 참가할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래?… 그럼 노래경연준비는 어떡하고?…》

《염소방목을 하면서 하면 되지요 뭐.》

잠시 숨을 돌리고난 정보배는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옥련의 손을 잡아 풀밭에 눌러앉혔다. 그리고는 저으기 흥분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보배는 요즘 옥련이 일로 하여 속이 편치 않았다. 태식이와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소문이 종시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인물곱고 마음고운 딸한테 이제 또 어떤 소문이 날지 어이 알랴. 이렇든저렇든 처녀에게는 다 손해인셈이다. 그런데 일이 될 때라 젊은 시절 전국농촌부문예술소조경연때 사귄 옛동무가 인편에 편지를 보내여왔다. 풍덕땅 정보배의 딸이 기막히게 고운데다 노래까지 잘 불러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읍에 쫙 퍼졌다는것, 어머니가 보배이니 딸도 보배인 모양이라고 한참 춰올린 편지였다. 그런 끝에 도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까지 나온 자기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금 도예술단에서 배우생활을 하는데 보배동무의 딸소리를 들었다누만. 말하는 투를 보니 처녀를 한번 봤으면 하는 눈치야. 그런 재간둥이처녀를 산골에 두기는 아깝다면서…》

그리고는 시간을 내서 아들과 함께 배등령을 넘어오겠노라는것이였다. 공격자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정보배는 머리가 핑 도는것 같은 현훈증을 느꼈다. 마치 자기의 마음을 알고 하늘에서 사다리라도 내려보내준것 같은 기분이였다.

밤새 잠 못이루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그는 우선 옥련이를 염소반에서 뚝 떼여 집에서 가까운 돼지작업반에 옮겨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총각과 연분이 맞으면 제꺽 결혼식을 해서 딸을 도회지로 보내는 한편 태식이와 어쩌구저쩌구 한다는 소문을 눌러버리고 동네를 깜짝 놀라게 할 작정이였다.

아무리 어머니래도 혼자 결심으로는 안될 일이여서 이렇게 덕으로 올라온것이였다. 그런데 마침 딸이 식당일을 그만두고 능금골 염소방목지로 올라왔은즉 오히려 일이 잘됐다고 그는 생각했다.

옥련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어떻냐? 어머니가 옳게 생각했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에 옥련은 당황해지기만 했다. 낯도 코도 모르는 총각때문에 당장 염소반을 떠나 돼지관리공이 된다는게 말이 되지 않았다. 설사 그 총각을 만나본다고 하자. 일단 선을 본 다음에는 어머니의 성화 또한 보통이 아니겠는데 자기가 그렇게 훌쩍 시집을 가버리면 순미와 경심이앞에는 뭐가 되며 지금 한창 전투를 벌리고있는 동무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처녀가 나이를 먹으면 다 이런 경우에 몰리게 되는것일가.

옥련은 우습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 어쩌겠니?》

《어머니, 그건 안돼요. 갑자기 무슨 선을 본다고 그래요? 동무들모두가 밤낮이 따로없이 전투를 벌리고있는데…》

정보배의 언성이 높아졌다.

《누가 그걸 모르냐? 허지만 내가 잘되자고 나먹은게 이렇게 헐레벌떡 뛰여다니는줄 아니? 이게 다 누구때문이니? 응, 말좀 해봐라.》

격해지면 목청이 높아지고 한계를 넘어서면 앓아눕기까지 하는 남다른 성격이 있는 정보배였다. 어머니의 그 기질을 잘 알고있는 옥련이로서는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의 심정을 왜 모르겠어요. 이 딸이 귀해서 그러신다는걸…》

《그래 저녁에 내려오겠느냐?》

《내려가겠어요.》

우선 대답을 해놓고보자.

옥련은 이런 생각으로 어머니를 내려보냈다. 그다음에도 한동안이나 멍청히 서있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선을 보고 그다음은 시집을 가고… 어마나!

가슴이 이상해졌다. 아직은 멀리에 있다고만 생각했던 그 세계가 딸에 대해 지나치게 극성인 어머니때문에 급기야 코앞에 닥쳐온것이다.

어머니는 학력도 그래 가정환경도 그쯘한 대상을 놓칠가봐 조바심을 치고있었다.

순간 옥련의 눈앞에는 얄궂게도 김태식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어마나, 내가 왜 이러니?…)

옥련은 눈을 꼭 감으며 어마지두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사를 거스르고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 소스라쳐 놀랐다.

그래, 그래. 꿈에도 있을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지꿎게만 떠오르는 그의 얼굴이다. 평시에 옥련이가 그토록 질시하고 타매하던 익살궂은 그 얼굴이 아니라 흰제비를 찾아 함께 산속을 헤매던 그때의 정색하고 진지한 표정이였다. 아니, 그것은 또 옥련이가 방목지에 올라왔을 때 철이 없다고 충고할 때의 그 모습같기도 했다. 갑자기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다잡고싶어 그는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는 고르롭지 못했고 불안정음까지 튀여나왔다. 그래도 불렀다. 부르면서 침착하게 생각해보았다. 순미라도 만나 툭 털어놓고 토론해보고싶었으나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에게 도예술단에 있다는 총각소리를 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 총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옥련이 역시 고향땅을 떠난 자기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본적은 꿈에도 없었다. 노래를 사랑하는것만큼 산좋고 물맑은 풍덕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였다.

고향을 떠나 한시도 살수 없을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어쨌든 집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설복해봐야겠어. …)

그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저녁무렵 그는 김태식을 만나 집에 일이 생겨 내려갔다가 아침일찍 올라오겠다는 말을 했다. 왜서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태식의 눈길이 지꿎게 얼굴에 와닿았던것이다.

옥련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가만, 옥련동무!》

갑자기 무슨 눈치라도 챘는지 태식이 다시 불러세운다. 옥련은 심장이 활랑거려 차마 돌아설수 없었다. 태식이 다가왔다.

《동문 앞뒤가 꼭같이 생겼소? 돌아서야 말을 하지 않소. … 집에 생겼다는 일이 도대체 뭐요? 비밀이 아니라면 좀 알고싶구만. 아무래도 반장동무한테 보고해야겠기에…》

옥련의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태식이의 끈질긴 성미를 잘 알고있는 그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수는 없었다. 일부러 성난체 하고 한마디 내쏘았다.

《녀자들에겐 자기식의 비밀이 있는 법이예요. 그것까지 알고싶은가요?》

옥련은 그가 다시 따라설가봐 두려워 황황히 뛰여갔다. 그의 뒤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태식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허구프게 웃었다.

(처녀들의 비밀?… 원, 별난 비밀도 다 있군. )

건설장에서 그 보고를 받은 순미는 그저 생긋이 웃기만 했다.

《아침에 일찍 올라오겠다고 했다니 다행이예요. 우량종염소들이 걱정돼서 밤중에 올라올수도 있구요.》

《그렇게 생각되오?》

《태식동문 혹시 옥련이를 믿지 않는게 아니예요?》

《글쎄…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가지고 머밋머밋하는게 대체 무슨 쪼간인지…》

《호호호… 옥련이가 달아날가봐 무서운게지요?》

순미의 말에 태식은 벙싯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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