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3 장
2
권봉석은 작업반장들의 모임을 앞두고 관리위원회앞마당을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그의 심정은 지금 몹시 착잡했다.
좀전에 그는 순미의 외삼촌 림송철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던것이다. 그는 자기가 정해놓은 총각과 순미의 결혼식을 당장 해야겠다는것이였다.
권봉석은 껄껄 웃었다.
《소장동무, 내가 일전에도 이야기했지요? 그 애가 지금 온 풍덕땅이 들썩하게 일판을 벌려놓았다구. 그 애가 그 소리를 들으면 아마 까무라칠거우다. 글쎄 소장동무가 내려와서 잡아끈다면 어쩔지… 나도 그 애가 지금 일판을 너무 크게 벌려놓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수다.》
권봉석은 순미가 하고있는 일에 대해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림송철은 한숨을 내쉬였다.
《난 솔직히 위원장동지를 크게 믿습니다. 위원장동지도 아시다싶이 난 이미 순미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유복녀를 낳은 우리 누이에게 여기에 와서 함께 살자고 권고했더랬습니다. 하지만 누님이 죽어도 그 땅을 못 뜨겠다기에 이때까지 참아왔는데 이제는 누님도 늙었고 순미만 여기 끌어오면 누님도 자연히 딸을 따라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내게도 하나밖에 없는 누이와 조카인데 이제라도 함께 모여 살고싶은것이 제 심정입니다.》
권봉석은 한동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장동무의 심정을 알만 합니다. 내 순미 어머니한테 그 말을 그대로 전하겠지만 뜻대로 되겠는지…》
《고맙습니다, 위원장동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순미 외삼촌의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가.
권봉석은 푸릿푸릿한 수염터를 슬슬 매만졌다.
그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쫓고있을 때 관리위원회마당으로 순미가 들어섰다.
《위원장동지, 정말 고마워요.》
어느 정도 응석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도대체 뭘 고맙다는거냐?》
권봉석은 영문을 알수 없었다.
《참 귀중한것을 저에게 주셨거던요.》
《귀중한것?… 아, 그 노래수첩말이지?》
《예.》
《그래, 아버지세대의 피와 땀이 깃들어있는 염소작업반터전을 멋들어지게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터전을 말이야.
염소우리호동들도 다름아닌 거기에 현대적으로 짓고 젖가공실도 꾸리고…》
《옳아요, 위원장동지. 아버진 바로 거기뿐아니라 온 풍덕등판을 그렇게 현대적으로 꾸리고 아름답게 가꾸기를 소원하셨던거예요. 전 아버지가 그토록 부르고싶어했던 노래가 무엇이였는지 똑똑히 알았어요.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고향의 노래였어요.》
권봉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위원장동지, 한가지 제기하랍니까?》
《뭐냐?》
《블로크찍는 기계를 하나 해결해주세요. 건설속도가 빨라지면서 블로크가 미처 보장되지 못하고있어요. 석회는 희문아바이가 로를 하나 더 쌓아서 문제없는데…》
《블로크찍는 기계라… 농장엔 없는거구…》
권봉석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순미가 뒤따라 들어왔다. 전화기를 끌어당겨 건설대를 찾느라 한동안 번호판을 눌렀다.
마침내 도시건설대 대장방에 전화가 걸렸다. 권봉석이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니 당신네가 쓰는것외에 예비가 없단 말이지. … 기계수리공장에 수리해달라고 가져다놓은게 한대 있는데 한심하다?… 알겠소.》
송수화기를 놓았다.
《당장은 안되겠구나.》
웬일인지 순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기계수리공장에서 수리하는것이 있다고 했지요? 그걸 달라고 사정해보겠어요.》
《뭐?》
권봉석은 껄껄 웃었다.
《얘, 너무 덤비지 말아. 건설이라는게 질을 보장하며 주근주근 내밀어야지 그렇게 번개불에 콩닦듯 해서야 되겠니? 침착하게 토론을 해보자. 네가 너무 일판을 크게 벌려놓는 바람에 난 걱정이 크다… 참 네 외삼촌한테서 당장 결혼식을 해야겠다는 전화가 왔댔다. 너두 어머니두 다 도시로 데려가겠다는거야. 그러니 생각을 잘해봐라.》
《결혼이요? 아유, 우스워라. 언제 그럴 짬이 있어요?》
《결혼을 뭐 짬이 있어 한다더냐?》
권봉석은 허거프게 웃으며 무슨 말인가 더 하려 했으나 순미가 어느새 밖으로 나간 뒤였다.
(내 생각이 맞았지. 혹시 저 애가 결혼같은건 애당초 생각 안하는건 아닐가?…)
다시금 턱을 어루만지던 그는 밖에서 나는 오토바이소리에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군보안서 교통보안원이였다.
《교통보안원동무가 어떻게?…》
《위원장동지, 배등령지구의 도로상태를 돌아보러 나왔댔습니다.》
《그래 우리 농장이 담당한 구간이 어떻던가?》
《도로관리를 정말 잘했습니다. 특히 청년염소작업반이 맡은 구간은 아스팔트도로 못지 않더군요.》
《그렇소? 저 동무가 바로 청년염소반 반장이요.》
권봉석은 때마침 마당에 서있는 순미를 소개했다.
《아, 그렇습니까?》
보안원은 웃는 얼굴로 순미를 바라보았다.
《보안원동지, 이제 군으로 가시겠지요?》
《왜 그러오?》
《저를 좀 태워줄수 없습니까?》
순미의 청에 보안원은 쾌히 수락했다.
《일 잘하는 청년반장이야 응당 태워야지.》
권봉석이 깜짝 놀랐다.
《너 정말 가려는거냐? 군에 가야 당장은 안돼. 기계수리공장에 간지 반년이 넘었다는데 네가 간다고 될상싶으냐?》
교통보안원이 발동을 걸었다.
권봉석이 만류하려는데 순미는 어느새 오토바이옆자리에 올라앉았다. 오토바이는 마치 그를 태우러 왔던듯이 관리위원회앞마당을 벗어나 마을앞도로로 나섰다.
《원, 저런 홍길동이 한가지로군…》
마당에 앉아있던 반장들속에서 누군가 한마디 했다.
(허, 덤벼치기란…)
권봉석은 혀를 끌끌 차며 반장들에게 회의를 시작하자고 소리쳤다.
군에 나간 순미한테서는 저녁늦도록 아무런 련락도 오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있던 권봉석은 밖으로 나와 순미네 집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창 저녁상을 치우고있던 림송심이 뜨락에 들어서는 권봉석을 반겨맞았다.
《위원장동지가 어떻게?》
《순미 어머니, 도에 있는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왔소.》
권봉석은 사연을 말했다.
《순미 외삼촌은 좋은 대상자가 있다면서 당장 결혼식을 하자고 하는데 순미 어머니 의향은 어떻소?》
림송심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위원장동지도 잘 아시지만 우리 순미야 그런 생각을 꿈에나 하는 앱니까. 그리구 저부터두 여기 풍덕을 떠나고싶지 않군요.》
림송심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웃방에 올라가서 종이 한장을 가지고 내려왔다. 한 처녀가 《풍덕》이라는 땅을 두손으로 정히 떠받들고있는 그림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이요?》
《그게 바로 우리 순미의 대답이예요. 외삼촌이 그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그걸 그렸지요. 회답편지대신 그걸 넣어보내겠다는걸 내가 말렸습니다.》
《그래, 장차 어떻게 할 결심이요? 그 애도 언젠가는 시집을 가야 할테지?…》
《글쎄 나도 어쩔지… 그 애가 일밖에 모르니…》
《그렇단 말이요. 나도 그 애 일을 생각하면 잠이 다 오지 않는단 말이요.》
권봉석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는 림송심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직일근무를 서던 계획부원은 라순미한테서 아직 소식이 없다고 했다.
권봉석은 순미일이 걱정되였다. 군기계공장이며 농촌건설대, 도시건설대에 연방 전화를 걸어보았다. 어디에도 순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턱을 고인채 깜박 잠이 들었던 권봉석은 요란한 전화종소리에 깨여났다.
군도시건설대 대장이 걸어오는 전화였다.
《위원장동지, 풍덕땅의 처녀대장부를 떠나보냅니다.》
《뭐라구요?》 잠결에 소리쳤다.
처녀대장부라는 말은 분명 순미를 두고 하는 소릴것이다. 블로크 찍는 기계를 싣고 순미가 방금 떠났다는것이다.
《고맙소!》
그는 송수화기를 놓았다. 처녀대장부라…
권봉석은 저도 모르게 허허 웃었다. 불가능을 모르는 처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그에게는 그것이 이 땅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다 할수 있고 해야 하는 랑만적이고 흥겨운 일로 되고있다. 그러니 일부 반장들은 라순미에게는 도대체 난관이라는게 없는것 같다는것이다. 도무지 힘겹다고 주저앉거나 그런 표현조차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이 과연 그 애의 천성일가.
아니, 권봉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어찌 힘들지 않으며 남들이 잠자는 밤에 자고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권봉석은 불쑥 눈굽이 뜨끈해올랐다.
그는 순미를 마중하려고 큰길에 나섰다. 그앞에 누군가 그린듯이 서서 배등령쪽을 바라보고있다.
《누구요?》
《저예요.》
조용한 목소리다.
《아니, 순미 어머니가 어떻게?…》
《애가 군에 갔다기에… 왜 그런지 이 밤중으로 꼭 돌아설것만 같은게…》
권봉석은 혀를 찼다.
《이보우 림동무, 순미가 블로크찍는 기계를 싣고 떠났다오. 군도시건설대 대장이 순미한테 어찌나 감동되였는지 자기네가 쓰던 기계를 실어보냈다는구만. 차까지 내서 말이요, 허허허…》
《그게 정말이예요?》
《그래서 나도 이렇게 마중나오는 길이라오.》
앞쪽에서 누군가 또 나타났다. 박성복이였다.
《반장동무 어머니도 나왔구만요. 순미동무가 지금 훨훨 날아오고있을겁니다, 하하하…》
박성복이 역시 순미를 마중하러 나온 길이였다.
권봉석은 가슴이 뭉클하여 선뜻 말을 못하고 큰숨만 내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