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6
권봉석은 염소작업반으로 가고있었다.
그는 저녁이 되면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래일의 사업에 대해 생각하거나 사무실에서 그동안 밀린 일감들을 처리하는데 습관이 되였다.
요즘 그의 사색을 지배하고 좀처럼 떠날줄 모르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평양에 다녀온 라순미가 제기한 엄청난 계획이였다.
오늘 저녁도 사무실에 앉아 담배를 피워문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사업일지에 《라순미의 건설적인 제기》라고 써넣고는 밖으로 나오고말았다. 사실 그도 은송목장을 돌아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였다. 어느 구석을 들여다봐도 자그마한 흠도 없이 그쯘하게 꾸려진것이 알렸다. 몹시 부러웠다. 어떻게 하나 농장축산을 은송목장수준으로 끌어올려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그런데 라순미의 착상과 구상은 너무나 아름차고 료원한것이 아닌가.
물론 남보다 앞서겠다는것은 좋다. 하지만 우리 농장 실태를 놓고 볼 때 당장은 은송만 한 수준에 올라서는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불깃을 보고 발을 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권봉석은 라순미가 현실성있는 사고를 하도록 잘 깨우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염소작업반에 가보려고 일어서는데 난데없이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전화는 이미 면식이 있는 라순미의 외삼촌이 걸어온것이였다. 도영농물자공급소 소장인 그는 정초에 조카에게 총각사진을 보내면서 의향을 물었는데 종 무소식이라는것이다.
《위원장아바이도 아시다싶이 나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 누이나 순미 그 애는 더 바쁜 모양이지요?》
《그러니 소장동문 순미를 기어코 도회지에 끌어가야겠다는거지요? 허―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될가요? 모르긴 하겠지만…》
권봉석은 일부러 아리숭하게 말했다.
그는 순미가 평양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한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순미 외삼촌 림송철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쳤다.
《위원장아바이, 제발 부탁인데 철없는 애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고 좀 도와주십시오.》
《글쎄… 내 순미한테 외삼촌의 전화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겠수다.》
허, 그 량반 순미를 도소재지로 빼돌리지 못해 안달이 났는걸… 하지만 그렇게는 안될걸. 하긴 순미 그 애도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됐지. …
권봉석은 염소반으로 올라가면서 저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졌다.
소재지마을을 벗어나 방목등판쪽으로 치우쳐 자리잡고있는 청년염소반까지는 퍼그나 멀었다.
그는 불빛이 환한 염소작업반의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둔덕에 올라섰다. 두줄로 길게 늘어선 염소우리호동들은 마치 부두에 정박해있는 큰 배들처럼 보이고 어둠에 잠긴 방목덕은 그대로 드넓은 밤바다를 련상케 했다.
그 밤바다의 등대처럼 반짝이는 정문외등빛이며 선전실 그리고 작업반앞쪽 야산기슭에 덩실하게 들어앉은 청년반원들의 합숙, 그 모든것이 사판을 들여다보듯 선명하게 안겨온다.
권봉석은 두손을 량쪽허리에 얹고 불빛이 반짝이는 산촌마을을 빙 둘러보았다. 한해치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별로 없는 이 땅! 그래서 고장이름조차 풍덕이라고 부르는 곳.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여 소나 말이 먹을 풀마저 자라지 못해 이 땅을 떠나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처럼 사람 못살 고장이라던 여기에도 은혜로운
오늘날에 와서는 고향의 귀중함을 심장에 새긴 새 세대들의 불타는 열정과 창조적지혜로 끓고있는것이다.
권봉석은 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성장한 그들이 세대의 의무를 자각하고 선렬들의 그 넋을 이어가는것이 무엇보다 대견했다.
순미의 경우만 놓고봐도 그렇다. 몇해전 청년염소반장으로 임명되자 호동들을 대보수하고 염소사양관리에 편리하게 거의 모든 작업공정들을 기계화하였다. 밤낮없이 새로운 일판을 벌린 덕에 염소작업반의 면모는 완전히 달라지고 처녀반장의 그 일솜씨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번에 평양에 다녀와서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솟구칠 욕망에 불타고있다.
콤퓨터조종에 의한 염소방목… 들을수록 희한한 소리다. 따라서 선뜻 믿어지지도 않는다. 전국적으로 소문난 목장이나 축산작업반들도 그가 말하는것처럼 염소방목을 콤퓨터화한 곳은 없다. 공업부문 공장, 기업소나 실내사육을 하는 목장들이라면 그런 말이 통할수 있을테지만 세상에 염소방목을 어떻게?… 산과 골짜기가 많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는 더욱 어려운 문제라고 권봉석은 생각했다. 물론 풍덕땅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초원이라고는 할수 없으나 방목지들이 대체로 넓은 등판들과 구릉지대들로 되여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순미의 착상은 아직 꿈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러나 권봉석은 그의 꿈과 리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
그런데 문제는 리당비서 박성복이 처녀반장의 그 환상적인(권봉석은 그렇게까지 표현하고싶었다.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있는것이였다. 순미가 찾아왔던 그날 저녁 권봉석이 있는 위원장방으로 들어선 그는 라순미반장의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권봉석은 허허 웃었다.
《비서동문 그 애의 환상에 홀딱 넘어갔군요.》
《아니, 환상이 아닙니다. 자기 고향을 열렬히 사랑하고 온 세상이 보란듯이 가꿔가려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높은 리상과 포부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지요.》
언제나 에돌줄 모르고 직판 말하기를 좋아하는 박성복은 자기 견해를 명백히 표시했다.
잠시후 권봉석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준 그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위원장동지네 세대가 한생을 바쳐 가꾸어온 이 땅을 그처럼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새 세대 청년들이 이어받았다는게… 생각을 하나 해도 시대적인 높이에서 혁신적으로 하고 일을 하나 해도 남보다 앞서나가겠다는 그 열의가 얼마나 장한가 말입니다.》
《사실 그 애들이야 어디에 내놓아도 짝지지 않을 보배덩이들이지요. 우리 풍덕땅의 자랑이구요.》
권봉석은 진정을 담아 말했다.
《위원장동지, 순미반장의 제기를 적극 지지해주고 내밀어줍시다. 사람이 맘먹어서 안되는 일이 있습니까? 가다가 쓰러지면 일으켜주고 힘이 모자라면 힘을 주잔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위원장동지나 내가 있는게 아닙니까.》
《알겠수다, 비서동무. 아무래도 해야 할 일인데… 아니, 시대의 요구이지요. …
그리고 일이라는게 단계가 있는것만큼 구체적으로 토의해서 농장적인 사업으로 전환하자는겁니다.》
《위원장동지! 고맙습니다.》
박성복은 흥분하여 권봉석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역시 젊은 일군이 달라. …)
권봉석은 자기의 계획대로 밀고나가느라면 해가 바뀔것이고 순미는 시집을 갈것이고… 설사 그가 풍덕땅에 뿌리를 내린다 해도 염소우리호동들을 개조하고 젖가공실을 건설하고 그 모든것을 콤퓨터화한 위원장에 대한 원망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순미도 이제 해보느라면 염소방목지를 꾸리고 염소방목을 콤퓨터화하겠다는 자기의 주장이 아직은 꿈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것이다.
권봉석은 기왕 리당비서의 충고를 받고 결심을 한 이상 뜨뜨미지근할것이 아니라 일을 적극적으로 내밀어야겠다는 결심이 굴뚝처럼 일어섰다.
(못해도 은송목장만큼은 해놔야 우리 시대 일군의 량심이지. 아마 풍덕땅은 활딱 때벗이를 할게다. )
그는 곧 농장초급일군모임을 열었다.
권봉석은 라순미가 전국축산부문일군열성자회의에 참가하여 받아안은 충격이며 은송목장을 참관하면서 새롭게 결심한 내용들을 말했다.
《모든 작업반들이 염소반장동무의 모범을 따라 분발해야겠소.
관리위원회는 리당위원회와 토론하고 청년염소반을 농장적인 본보기단위로 꾸리고 그 모범과 경험을 다른 작업반들이 따라배우게 하자는것입니다.》
반장, 기술원들이 라순미가 앉은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악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처녀반장에 대한 대견함이 비낀 눈빛들이였다.
《동무들, 우리도 한번 본때있게 내밀어봅시다. 고향땅을 살기 좋은 무릉도원으로 꾸려보잔 말입니다. 소문이 들썩하게 말이요. …》
권봉석은 힘있게 호소했다.
그는 회의가 끝난 다음 순미를 따로 만났다.
그의 얼굴은 꽈리빛으로 상기되여있었다.
《위원장동지, 고맙습니다. 우리의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고 내밀어주시니 막 힘이 솟구치는게 알려요.》
《나도 선군시대의 일군이야. 너희들이 하나 하면 아직은 둘, 셋은 할수 있어, 열은 못해도…》
그는 껄껄 웃었다.
《그러문요. 우리가 어떻게 위원장동지를 당해내겠어요.》
《입에 침바른 소리, 어쨌든 이제부터 너희 염소반이 일을 잘해야 한다. 현실성있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속있게 해나가는게 중요해. 현상모집까지 조직했다니까 좋은 안이 나오면 구체적으로 토론을 하고 군에 보고하자꾸나. 승인이 되면 냅다 밀어보자.》
《알았습니다, 위원장동지!》
라순미는 거수경례까지 척 하고 관리위원회를 나섰다. …
권봉석은 순미네가 작업반을 현대화한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궁리를 하고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염소반 실태를 료해도 할겸 밤길에 나선것이였다.
(홍길동인지 준마처녀인지… 그 애는 신통히 제 아버지를 닮았다니까. …)
권봉석은 생각깊은 걸음을 옮겼다.
지금 순미네 염소작업반이 위치한 터전은 권봉석이네 세대가 한창나이에 면양을 키우던 면양반자리였다. 그곳에는 순미의 아버지 라준의 피타는 탐구와 넋이 깃들어있고 생의 마지막순간도 그곳에서 맞이했었다.
청년염소반이 조직되여 그 터전에 자리를 잡을 때 권봉석은 순미에게 그런 이야기를 자상히 들려주었다. 물론 어머니를 통해 알고도 남음이 있을테지만…
아마 그래서 이 땅에 대한 처녀의 애착과 정열이 남달리 뜨겁고 열렬한 모양이였다. 권봉석이 염소반 정문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누군가 급히 밖으로 뛰여나오는통에 하마트면 부딪칠번 하였다.
《이렇게 덤벼친다구야.》
체육모자를 뒤로 돌려쓴 청년이 깜짝 놀라서 권봉석을 쳐다본다.
《위원장동지, 안녕하십니까?》
《너 경칠이로구나.》
《예, 염소방목을 잘하기로 소문난 리경칠입니다.》
《허허허… 엉큼한 녀석.》
권봉석은 그의 모자창을 바로잡아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꼬리에 불달린 송아지처럼 덤비느냐? 반장이랑 선전실에 있겠지?》
《예, 있습니다.》
리경칠은 묻지도 않은 말을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저녁마다 반원들이 모여앉아 눈이 훌 뒤집혀질 멋들어진 토론을 한다는것, 그러다가 새벽에는 순미반장이 신종선을 비롯한 분조장들과 같이 방목지를 메주밟듯 다니며 토론을 계속한다는것이였다.
《저도 사실은 주토론자인데 오늘 저녁은 운수나쁘게 합숙근무에 걸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요발언만 한마디 하고 이렇게 나오는 길입니다.》
그는 제법 으시대며 몸가짐과 목소리도 틀을 차리느라 애썼다.
권봉석은 속으로 웃었다.
《그럼 빨리 가봐라. 합숙근무가 얼마나 중요하게…》
권봉석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리경칠이 인차 물러갈 차비가 아니였다.
《왜 그러느냐?》
《저 위원장동지, 제가 비밀 하나를 알려달랍니까?》
《비밀? 그게 뭔데?》
경칠은 대답대신 앞섶안주머니를 뒤지느라 부산을 피웠다.
권봉석이 전지불을 비쳐주었다. 마침내 손바닥만 한 사진 한장을 꺼내며 내밀었다. 놀랍게도 사진속에는 두 청춘남녀가 활짝 웃고있었다. 김태식이와 류옥련이였다.
《음… 좋구나. 그 애들이 이런 사이냐?》
권봉석은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태식이 그녀석이 엉큼한걸. …)
그러찮아도 권봉석은 옥련이가 노래경연이요, 뭐요 하면서 군에 자주 오르내리는데 대해 우려감이 없지 않았다.
중앙무대에 나가 노래부르는건 좋지만 그러다 풍덕땅의 재간둥이처녀 하나를 놓칠것만 같았던것이다.
어제도 옥련이를 군문화부에 올려보내라는 전화가 또 왔었다.
권봉석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태식이가 자기의 걱정을 한가지 덜어주었다고 흡족해하였다.
《음… 태식이가 괜찮아. 처녀를 볼줄 알거던. …》
《그렇지 않으문요. 한데 문제는 옥련동무가 인물값, 노래값을 지내한단 말입니다. 태식동무한테 매번 땅벌처럼 톡톡 쏘기만 하면서…》
《허허허… 내가 알기에도 그 애들이 마주 서기만 하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는것 같은데 이렇게 나란히 사진을 찍을 정도면 보통사이가 아니라는 소리가 아니냐?》
《그게 바로 이상하다는겁니다.
아마 사랑은 깊이 묻어두고 겉으로는 싸우는척 하면서 우리를 속이려는 꿍꿍이가 아닐가요?》
리경칠이 두눈을 깜박이며 권봉석을 바라보았다.
《녀석두, 네가 뭘 안다구…》
《야, 관리위원장동진 절 어떻게 보구 그러십니까? 이래뵈두 중학교때 학급의 녀동무들이 절 얼마나 따랐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권봉석은 그의 귀쪽을 잡아당기며 퉁을 놓았다.
《그럼 너 중학교때부터 련애했다는 소리냐?》
《예? 야, 까무라치겠습니다. 아무러면 내가…》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네 손에 있냐?》
《며칠전에 〈흰제비〉를 찾으러 산에 들어갔다가 숲에 떨어진걸 주었습니다. 그런데 돌려주자고 보니 이 사진을 태식동무가 떨군건지 아니면 옥련동무가 떨구었는지 통 알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위원장동지가 좀 도와달라는겁니다.》
권봉석은 껄껄 웃으며 리경칠의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었다. 관리위원장이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자 경칠은 더욱 사기가 났다.
그는 태식이와 옥련이 마주서기만 하면 닭싸움하듯 한다는거며 특히 옥련이가 코대를 얼마나 높이고다니는지 봐주기 힘들다는 등 이 소리, 저 소리 마구 주어섬기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작업반비밀을 너무 루설한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였다.
《제 이야기는 이게 답니다.》
《음, 알겠다. 아직은 이 사진을 네가 건사하고 절대비밀에 붙여라, 내 인츰 알아볼테니. …》
《야, 이거 정말 사기나는데… 관리위원장동지, 고맙습니다.》
리경칠은 꾸벅 인사를 하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합숙쪽으로 껑충껑충 뛰여갔다.
(나이는 어려도 속에는 구렝이가 들어앉았어. 허허, 녀석…)
권봉석은 태식이로 하여금 처녀를 단단히 그러잡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선전실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김희문이 그를 반기며 걸어왔다.
《위원장이 올라왔구려. …》
《희문동무 혼자 젊어지는게 시샘이 나서 왔소.》
《시샘이야 뭘… 위원장이 염소반일에 관심이 높으니까 올라왔겠지.》
김희문은 권봉석이와 동년배였다. 그들은 젊은시절부터 이 풍덕땅에 뿌리를 내리고 피와 땀을 바쳐온 선대였다. 권봉석은 그제야 생각난듯 넌지시 물었다.
《태식이한테 약속한 처녀가 있소?》
《약속한 처녀라니?》
《며느리감이 있는가 말이요.》
김희문은 머리를 저었다.
《그녀석은 하도 덜퉁하고 부잡해놔서 따라오는 처녀도 붙잡지 못할거요. 왜, 위원장이 하나 소개하려우?… 좋수다. 친구인 위원장을 믿어서 랑패야 안 보겠지?…》
《여하튼 술 석잔이나 준비해놓소.》
《왜 석잔뿐이겠나.》
두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선전실에서는 여전히 법석 끓어대고있었다.
《열들이 올랐구만.》
《정말 대단하네. 우리때와는 판판 다르다니까.》
김희문은 순미를 칭찬했다.
《밤이면 밤대로 토론을 하구 낮에는 방목을 하구… 골짜기들을 모두 순환식방목지로 만들어… 거 뭐라드라…》
《콤퓨터화?…》
《옳네, 콤퓨터화해서 현대적인 방목기지로 꾸린다면서 반장이 안 다녀본데가 없다네. 어제는 어데서 굴렀는지 팔이랑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았겠나.》
《많이 다쳤던가?》
《글쎄… 전혀 아픈 내색이 없이 웃으면서 드달려다니니 어디 알겠나?》
권봉석은 입을 다셨다.
그는 슬쩍 김희문의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거 반장이 이곳에 대규모염소목장이라도 꾸리려는 모양이군.》
《풍덕땅을 온통 염소천지로 만들면 얼마나 좋겠소.》
《자네도 반장과 신통히 한본새로구만.》
권봉석은 김희문의 어깨를 치며 웃고나서 작업반실로 다가가 기웃이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순미가 한창 목소리를 높이고있었다.
《내놓은 안들이 모두 불합격이예요. … 제가 이번에 평양에서 가져온 록화테프들과 잡지들을 왜 보여주었는지 그 의도를 모르는것 같아요. 우린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하신
순미는 아직까지 현상모집에 참가하지 않은 반원들이 있다면서 이름을 꼭꼭 찍어대는데 그속에는 안홍진이도 들어있다.
(현실체험을 온 사람까지도 되게 다불어대는 판이군, 아무래도 순미 저 애는 바지를 입을걸 잘못했어. …)
권봉석은 앞마당을 스적스적 거닐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그는 그 귀중한 명언을 조용히 외워보았다.
《반장동무, 한가지 제기합시다.》
김태식의 목소리다.
《어서 이야기하세요.》
《다른게 아니라 제 생각엔 모든 반원들의 지혜를 합치는것도 좋지만 반장동무와 안홍진동무 이렇게 두사람이 합동하면 멋있는 안이 나올것 같은데… 동무들, 안그렇소?》
《태식동문 현상모집을 조직한 의도를 아직 모르는것 같군요.》
라순미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자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태식동무와 옥련동무가 합심하면 더 좋은 안이 나올것 같은데…》
《하하하…》
《호호호…》
《옳소. 우선 깊은 밤 솔골에 나란히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거부터 청취하십시다.》
류옥련이 그렇게 말한 청년의 잔등을 두들겼는지 아부재기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순미가 모임을 끝내자고 했는데도 그들은 계속 목소리를 높이며 흥성댄다.
《빨리 나가기나 하라요. 처녀총각이 속삭인건 모두 비밀이예요. 신성불가침이란 말이예요.》
정윤심이 출입문쪽으로 휘휘 닭쫓는 시늉을 하며 청년들을 몰아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권봉석을 보자 꾸뻑꾸뻑 인사들을 했다.
《수고들 하는구만. 피곤할텐데 빨리 가서 잠들이나 자라구.》
김태식을 띄여본 권봉석은 슬쩍 손짓해불렀다.
《이봐, 장미꽃은 살살 얼려서 꺾어야 하는거야, 가시에 찔리지 않게 말이야. 처녀 하나 쟁취 못하는게 무슨 사내냐?》
《예?…》
《됐다. 어서 가서 잠이나 자거라.》
권봉석은 어리둥절해진 태식이의 등을 떠밀어보내고 선전실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라순미와 정윤심, 류옥련 셋이 모여 무슨 이야긴가 하다가 그를 맞이했다.
권봉석은 먼저 며칠후에 옥련이를 군에 올려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며 그에게 눈길을 보냈다.
《옥련인 역시 우리 풍덕땅의 자랑이야. 하지만 노래 못지 않게 염소방목을 잘하는것도 중요하지.》
옥련은 머리를 수그렸다. 《흰제비》를 잃은 일을 념두에 둔 말임을 알았던것이다.
잠시후 정윤심이와 류옥련이 밖으로 나가자 권봉석은 라순미와 마주앉았다.
《현상모집이랑 조직했으니 좋은 안을 내놓는 사람은 상을 줘야겠구만.》
라순미는 생긋이 웃었다. 이마에 퍼렇게 멍든 상처가 드러났다. 오른쪽팔굽은 붕대로 처매기까지 했다.
《많이 다쳤느냐?》
《아니예요. 능금골에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디는통에 그만 넘어졌댔어요.》
《봐라, 너무 욕심을 부리니 그렇지.》
《위원장동지의 공격이 멋있군요.》
라순미는 상처의 아픔 같은것은 생각지 않는듯 명랑하게 웃었다.
《위원장동지, 인차 꾸리기안을 완성해서 큼직하게 전경도를 그릴 생각이예요.》
《전경도?… 이보라구 반장, 현상모집도 하고 열의들이 대단한건 물론 좋은 일이야. 하지만 우선 대상을 잘 선정하고 하나하나 실속있게 해나갈 생각을 해야 해. 꼭 찍어 말한다면 지금 염소반에 젖가공실이 없으니 그것부터 건설을 하자든가, 이렇게 사고를 해야 한다는거야.》
권봉석은 될수록 온화한 말로 순미를 납득시키려고 했다.
《위원장동지의 의도는 리해돼요.》
《리해된다구?… 정말이냐?》
《정말 아니문요. 작업반구내의 생산건물과 부속건물들을 아담하게 짓고…》
《그렇지. …》
《다음엔 실내작업들을 콤퓨터화하구…》
《그야 물론이지.》
《더 나가서 농장 살림집들을 현대적인 문화주택으로 일떠세우고…》
《그다음은?…》
《그저 그렇지요 뭐.》
순미는 권봉석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위원장동지, 제가 그린 설계안을 한번 봐주세요.》
그는 벽장안에서 종이두루마리를 꺼내여 권봉석의 앞에 드르륵 펴놓았다.
건물들과 방목지, 산골짜기들이 무수히 그려진 종이장은 마치 군사작전지도 같았다. 무슨 표식이 그리도 많은지 권봉석이로서는 아무리 봐도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순미는 작업반 구내를 지금보다 두배로 확장하고 역시 염소우리호동수와 규모도 크게 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처럼 크게 확장한 작업반구내는 후보염소기지라고 한다.
권봉석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미는 계속하여 작업반의 기본중심은 염소방목등판 한가운데에 넓게 터를 잡고 새로 꾸리려 한다는것을 건물들의 이름을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점점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어디 그뿐인가.
방목덕과 골짜기들을 포함한 드넓은 염소방목지는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순환식 방목을 하게 하고 방목지의 도로들도 자동차나 련결차들이 오르내릴만큼 시원하게 뽑으려 한다는것이였다. 무려 수십리구간을 다 포괄한 설계안이였다. 염소호동들이며 젖가공실, 콤퓨터조종실, 먹이가공실 등 수많은 건물들의 형식이 특색있고 내부구조가 현란했다.
권봉석은 너무 엄청난 설계에 입을 벌렸다.
《반장, 이건 뭐 농장 염소작업반이 아니라 특급 염소목장이로구만, 응.》
절로 껄껄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꾸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순미, 이 애는 확실히 공상가야. …
《이렇게만 건설해놓으면 순미는 앞으로 반장이 아니라 목장지배인이 돼야겠어. …》
《목장지배인이야 위원장동지가 되셔야지요 뭐. 난 염소반장이 제일 좋아요.》
(요즘 젊은이들이 확실히 달라. 통이 커도 여간 크지 않다니까. 하지만 한갖 종이장에 그려진 꿈과 공상을 현실화한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
권봉석은 밖으로 나왔다. 정문을 나서던 그는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뚝 서있는 돌배나무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순미의 아버지 라준이 심은 나무였다.
《이제 이 나무가 자라 열매들이 주렁질 때면 풍덕땅도 천지개벽을 할겁니다.》
나무둘레를 발로 밟아주며 그가 하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그때에 비하면 풍덕땅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되였다. 골짜기마다 염소떼, 양떼가 구름처럼 흐르고 아담한 문화주택들에서 행복의 노래소리, 웃음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져나오고있다.
안문찬…
불쑥 떠오른 이름이였다. 아니, 라준을 회상할 때면 의례히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였다.
손탁도 세고 통솔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던 사람, 그래서 욕망도 컸고 리상도 높았던 안문찬이였다. 하지만 그는 일판만 요란스레 벌려놓고는 어느 하나도 끝을 맺지 못한채 다른 초소로 소환되여갔었다.
그 일감들을 붙어안고 권봉석, 라준이세대들이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벌렸던가. 결국 안문찬의 리상은 리상대로 남았고 응당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래, 안문찬의 경우를 봐도 리상과 실천간엔 엄격한 차이가 있는 법이다. 순미가 지금은 목표를 요란히 세우고 무서운것없이 떠들어대지만 중도에서 주저앉으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게 아닌가?…)
권봉석은 담배불을 벙끗거리며 돌배나무주위를 돌고 또 돌았다.
《위원장동지, 웬일이세요?》
뒤에서 순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순미반장, 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판을 너무 크게 벌릴 필요가 없을것 같아. 건설이라는게 떡먹듯 쉽게 되는거야 아니지 않나. 리상이 높다고 그게 다 현실로 되는건 아니거던. 그러니 우선 염소작업반자체의 힘으로 할수 있는것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계획을 세우는것이 좋을것 같애. 너무 붕 뜨지 말고… 알겠냐?》
《예, 알겠어요.》
(흠, 대답은 좋은데…)
권봉석은 순미에게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온 내용을 이야기했다.
《너도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그래서 외삼촌이 걱정을 하는거다.》
《위원장동지, 전 아직 시집가려면 멀었어요.》
라순미의 말이 권봉석의 심금을 울렸다. 허, 이 애는 오직 일생각뿐이라니까. …
《하긴 우리 순미한테야 시집갈 나이가 규정되여있지 않지.》
《그건 무슨 말씀이예요?… 그러니 난 할머니가 돼서 시집가도 된다는건가요?》
《허허허. …》
권봉석은 그만 웃음을 터치고말았다. 순미도 까르륵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