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5
작업반구내는 염소울음소리로 가득찼다. 방목공들이 저마다 방목지로 나가느라 떠들썩하다. 매 호동들에서는 가벼운 비명소리, 웃음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도무지 한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같지 않게 명랑하고 활기로왔다.
라순미는 후문으로 나가는 염소들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며 정윤심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뜩이나 경칠동무가 기분을 거슬린데다가 태식동무까지 그럴건 뭐나 말이예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옥련이가 오죽 속이 상했으면 《흰제비》가 없어지는것도 몰랐을가?…
라순미는 신중해졌다.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였다. 그런 사소한 현상들이 차츰 작업반이라는 집단의 단합에 영향을 미칠수 있었다.
벌써 《흰제비》를 잃는것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있지 않는가. 고향을 꾸리고 작업반을 현대화하는 일도 다 집단의 마음과 뜻이 하나로 합쳐질 때에만 가능한것이다.
《다 내 잘못이예요.》
정윤심이 얼굴을 붉혔다.
《기술원동무,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이번일을 교훈으로 삼으면 되지요 뭐. 이제부터 우리 동무들 호상간의 관계와 생활에 대해 더 관심을 돌려야겠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름찬데…》
《오늘 아침 종선동무한테서 다 들었어. 현상모집을 조직했다지요?… 동무들의 열의가 대단해요. 나도 있는 힘껏 해보겠어요. 이런 때 기술원이 뒤지면 안되지요.
오늘 아침 합숙호실에서 얼마나 열이 올라 론쟁을 하는지 우리 집 용마루가 다 들썩거리더라니까. 난 아무 영문도 모르고 무슨 싸움이 일었나 했군요.》
정윤심은 호호 웃었다. 순미도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출장에서 돌아오는길로 밤을 새웠건만 전혀 피곤한감을 느낄수 없었다.
《난 이제 마을로 내려가야겠어요. 리당이랑 관리위원회에랑 도착보고를 하고 인차 올라오겠어요.》
《아유, 그러지 말라니까. 오늘은 올라오지 말고 하루 푹 휴식을 해야겠어요. 피로도 풀고 어머니를 만나 할 이야기가 오죽 많겠어. … 참, 어제 경심이가 찾아왔댔어요.》
《그러찮아도 경심일 만날 생각이였어요. 이번회의에서 토끼기르기와 토끼작업반운영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어요. 정말 배울것이 많더군요.》
《그래요? 경심이가 좋아하겠군요. 워낙 이악스러운 애니까.》
라순미의 가슴은 마냥 설레였다.
그래, 무척 기뻐할거야. … 경심아, 우리 서로 힘을 합쳐 본때있게 일해보자.
순미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덕을 내린 순미가 리당에 들렸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리위원회도 역시 조용하였다. 모두 발전소건설장에 나간 모양이였다. 마을앞을 흐르는 풍덕천에는 벌써 1호, 2호중소형발전소가 일떠서고 지금은 3호발전소건설이 한창 진행중에 있었다. 3년전 군청년동맹회의에 참가했던 라순미는 군안의 공장, 기업소들이 읍거리를 꿰질러흐르는 삼포천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대뜸 풍덕천을 생각했었다.
그는 회의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는길로 리당과 관리위원회에 우리 풍덕에서도 자체의 힘으로 발전소를 건설하자는것을 제기했었다. 농장에서는 그 제의를 놓고 진지한 론의를 벌렸고 마침내 건설에 착수하여 이제는 전기덕을 보고있는것이다. 1호와 2호소형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만으로도 집집의 조명은 물론 농장정미소며 수리기지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있었다.
이제 3호발전소까지 완공되면 풍덕농장은 전력소비기준을 낮추는 사업이 군적으로도 제일 앞선 농장으로 될것이였다.
마을앞 길가에 나온 순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고향을 둘러보았다. 집담벽들은 봄철을 맞으며 하얗게 회칠을 하여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터밭들에서는 감자며 갖가지 남새들이 어깨를 다투고있다.
산과 들은 나날이 푸른빛 단장을 하기에 바빴다. 실실 늘어진 버드나무가지들에도 연연한 잎사귀들이 촘촘하다. 마을 한가운데 덩실하게 들어앉은 탁아소, 유치원 창가들에서는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랑랑했다. 짐작대로 발전소건설장에서는 관리위원회와 리당일군들이 모두 떨쳐나 3호발전소 발전기실 마감공사를 다그치고있었다.
맞들이로 세멘트혼합물을 나르는 사람들속에 권봉석관리위원장과 리당비서 박성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미가 나타나자 떠들썩 반갑게 맞아주었다. 전이 넓은 왕골초물모자를 쓰고 타올수건을 목에 두른 권봉석은 수더분한 얼굴에 늘 웃음이 떠날줄 모른다. 반면에 보통키에 회색작업복을 걸치고 삽을 들고있는 박성복은 어느 건설사업소의 한다 하는 기능공을 련상시켰다.
《어찌된 일인가, 순미반장? 이렇게 아침일찍 나타난걸 보니 배등령을 넘어오는 차라도 있은 모양이지?》
권봉석이 놀라와했다. 박성복 역시 사연을 묻는듯 한 눈길이다.
《사실은 지난밤에…》
자초지종을 그대로 이야기할수밖에 없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만. … 글쎄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난 순미반장이 이번 열성자회의에 참가하더니 무슨 날개라도 하나 달고 왔는가 했구만, 허허허.》
《날개요?》
순미는 관리위원장이 아무런 설명없이도 자기 심정을 알아준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 정말 하늘을 날수 있는 날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훨훨 날아왔지요 뭐.》
《허, 그것참 반가운 소리다. 순미반장한테 날개가 달렸단 말이지…》
권봉석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순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복은 도착보고는 차차 듣기로 하고 우선 휴식부터 하라고 순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그러라구. 지난밤도 염소를 잃은것때문에 산속에서 꼬박 새웠다는데… 어머니가 얼마나 반가와하겠나.》
《아닙니다, 전 조금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도 그렇고 은송목장을 참관하면서 느낀 소감이랑 위원장동지와 비서동지앞에 터놓아야겠습니다.》
《그러니 은송목장도 참관했다는거요?》
박성복이 물었다.
《예, 회의를 끝내고 그곳을 참관한 다음 거기서 경험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은송목장을 돌아본건 참 잘했소. 나도 관리위원장동지와 함께 그곳에 갔댔소. 참 굉장하더군.》
《야, 그렇습니까?》
《음, 참 배울것이 많았소. 자, 우리 좀 앉자구. 반장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어떻습니까, 관리위원장동지?》
《암, 들어야지요.》
그들은 강가에 삐죽이 내민 너럭바위우에 둘러앉았다.
《그래 은송목장을 돌아보니 어떻던가? 희한하지?… 작업반을 그렇게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일었을거야. 난 은송목장을 돌아보면서 반장동무를 생각했소.》
권봉석의 말이였다.
《위원장동지, 비서동지, 전 정말 이번에 많은것을 느꼈습니다. 키도 한뽐이나 더 큰것 같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권봉석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담고 순미를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라순미는 침착한 목소리로 평양에서 진행된 회의에 대하여, 은송목장을 참관했을 때의 심정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흥분되여 말하는지 미처 의식하지 못하였다. 어제 밤 산속에서 반원들에게 터놓던 격정의 소용돌이가 다시 일어번지고있었다.
《음… 송상카메라를 설치하고 콤퓨터화면앞에 앉아서 방목을 한단 말이지?… 좋구만…》
《위원장동지, 전 우리 청년염소반을 은송목장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꾸릴 결심입니다.》
박성복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라순미를 바라보았다. 권봉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라구 순미반장, 은송목장처럼만 꾸리자고 해도 아마 한 5년은 잘 걸릴거야. 헌데 한두해사이에 그곳을 릉가하겠다는게 말이 되나? 순미반장이 그동안 구름밭에라도 다녀온게 아닌가? 허허허…》
박성복이도 무척 놀라와하는 표정이였다.
《위원장동지, 반장동무가 반원들한테 현상모집까지 선포했다는데 잡도리가 이만저만이 아닌것 같습니다.》
《글쎄 현상모집을 하든 그보다 더한걸 한대두 좋아. 우리두 남들처럼 멋있게 꾸려놓고 잘살아보자는데 무슨 의견이 있겠나. 하지만 순미반장의 생각은 너무 현실성이 없거던. 아마 순미반장 자식대쯤 가면 그렇게 될수 있겠는지.》
《하하하…》
박성복이 어이없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순미는 그 말에 입술을 꼭 감쳐물었다. 아들대쯤 가서나 된다구?… 위원장동진 어쩌면…
《이보라구 반장, 너무 붕 떠서 목표만 요란하게 세우지 말고 우리 현실성있게 사고하자구. 우리도 한번 해보잔 말이야. 은송목장만 한 수준에 오르는것도 사실은 힘에 부쳐.》
권봉석은 막내딸의 투정을 달래이듯 순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닌게아니라 순미에게 있어서 그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믿고 진정을 터놓았는데 구름밭이라니…
《반장동무, 위원장동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동무의 심장이 무엇을 웨치고있는가를 잘 알고있소.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마음껏 착상도 하고 설계도 해보오. 하지만 중요한것은 실천이야.》
박성복이 순미의 결심을 지지하듯 힘주어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비서동지.》
《위원장동지, 어떻습니까? 반장동무의 결심이 결코 허황하거나 현실성이 없는것이 아니라 매우 귀중하고 진취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난날 사람 못살 고장으로 소문났던 고향땅을 부모들의 대를 이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락원으로 꾸리겠다는 그 결심이 얼마나 장합니까. …》
박성복은 크게 소리내여 웃었다.
《어쨌든 고향을 꾸리는 문제는 너나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이니까 차차 토론을 해보자꾸나. 그러니 집에 가서 어머니도 만나보구 휴식도 해라.》
권봉석은 라순미의 등을 떠밀었다.
라순미는 그들과 헤여져 뒤마을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위원장아바인 어쩌면 그렇게 말씀하실가, 내 자식대쯤에나 가서 될거라구?… 세상에… 자식대라니? 그럼 내가 어머니가 된 다음에? 어마나, 망측해라, 아바인 은송목장처럼만 꾸려도 대단한거라고 하셨지. 한 5년동안을 목표로 하자고?… 그때 가면 또 뒤떨어지고 낡은것이 된다는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실가. 그럼 우리 고향은 남들이 해놓은것을 보고 흉내만 내야 한단 말인가. 전국의 이름난 단위들을 따라앞서지 못하면 영원히 뒤떨어지게 된다는것을 관리위원장동진 왜 모르실가.
온몸이 달아오르고 심장의 박동이 세차졌다. 어머니가 내 결심을 들으시면 뭐라고 하실가. 물론 이 딸의 생각을 무조건 찬성하고 지지해주실거야.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군 하였다.
《아버지는 네가 세상에 태여나기 한달전에 작업현장에서 돌아가셨다. 불치의 병이였지. 아버지는 자기가 창안한 만능분쇄기조립을 끝내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한테 애가 태여나면 이 풍덕땅을 뜨겁게 사랑할줄 아는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요. 〉… 순미야, 하지만 아버지는 너를 보지 못한채… 끝내… 아버지는 네가 고향의 사랑을 받는 그런 딸이 되기를 바라셨다. 공부 잘하고 앞으로 커서 이 땅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진짜배기주인이 되라는 뜻이였단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어린 딸은 그 뜻과 의미를 다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알겠어요.》 하고 챙챙한 목소리로 대답하군 하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를 꼭 품어안아주며 《우리 순미가 용쿠나.》 하시며 눈굽을 찍군 했었다.
그는 어머니의 당부를 잊지 않고 중학교와 전문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오늘은 고향을 가꾸는 주인이 된것이다. …
집 앞뜰에서 감자밭김을 매고있던 림송심은 딸을 보자 호미자루를 쥔채 마주 달려나왔다.
《어머니―》
순미는 무작정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어머니, 그간… 앓지 않으셨어요?》
《성한 사람이 앓기는 왜 앓겠냐?》
림송심은 떨리는 손으로 그냥 딸의 등을 어루쓸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침일찍 나타났냐? 차가 있었니?》
《아니요, 막 날아서왔지요 뭐.》
《원 애두,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순미는 어머니의 이마에 난 땀을 씻어주며 자초지종 사연을 이야기했다.
림송심은 혀를 끌끌 찼다.
《얼마나 힘들고 배는 오죽 고팠겠냐? 아침밥은 먹었니?》
《예, 작업반에서 하고 관리위원장동지와 비서동질 만나러 내려왔어요.》
순미는 지난밤부터 오늘 아침사이에 있은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고향마을을 훌륭하게 꾸리겠다는 그 심정은 훌륭한데 그렇게 엄청난 일을 너네 염소반자체의 힘으로 해낼수 있겠니? 위원장동지 말마따나 네 자식대에나 가서 될 일이 아닌지…》
《아이참,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위원장동진 우리 풍덕을 멋있게 꾸리려는 열의는 좋다고 하셨는데요 뭐. 비서동지도 적극 찬성했구요.》
《어쨌든 어른들과 무작정 엇서지 말고 교양있게 처신하거라. 무슨 일이나 제 주장만 고집할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믿을수 있게 잘 납득시켜야 하는거다. 그런데 내가 듣기에도 네가 붕 뜬것만 같은게 마음놓이지 않는구나.》
《어머니, 이건 제 혼자 생각이 아니예요. 우리 작업반전체의 결심이란 말이예요.
우리 작업반에서 현실체험을 하는 안홍진동무까지도 적극 찬성했는데요 뭐. 그 동무의 방조까지 받으면 능히 해낼것 같아요. 글쎄 내가 없는 동안 농장알깨우기실콤퓨터화에 한몫 단단히 했다지 않아요.》
《나도 들었다. 언젠가 그 총각을 한번 봤는데 인물이 환한게 아는것도 많겠더라.》
순미는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두 참, 아무러면 인물이 환하다고 아는것이 많겠어요?》
《겉보기가 속보기란 말이 있지 않냐. 어쨌든 난 첫눈에 맘에 들더라.》
림송심이 딸을 쳐다보며 의미있게 웃었다.
《맘에 들다니요?》
《그런 청년을 사위 삼으면 원이 없겠더라.》
《어마나? 어머닌 정말 한심하네. 딸 하나를 길러서 열두총각곁에 다 세워보고싶은게지요?》
순미는 어머니의 심정을 제꺽 건너짚었다.
올해 정초에 도소재지에서 사는 외삼촌이 새해축하장과 함께 총각의 사진을 보내온적이 있었다.
도농촌경리위원회 축산처 부원인데 대학을 졸업한데다 잘생기고 똑똑하니 마음에 들면 인차 짝을 무어주자고 했었다.
림송심은 청년의 사진을 보고 은근히 마음에 있어하였다.
하지만 순미는 《어머니, 전 항상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고있어요.》 하는 말만 곱씹을뿐이였다. 림송심이 역시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중요한건 그 동무가 우리 풍덕땅에 현실체험을 온 이상 우리 풍덕리를 위해 얼마나 성실히 일하는가 하는거예요. 난 앞으로 그 동무한테서 더 많이 배우고 또 도움도 받자는거예요.》
《그거야 좋은 일이지. 난 어쩐지 그 총각을 보느라니 문득 네 아버지 생각이 나더구나.》
《어머니!》
순미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세월의 락엽밑에 깃들어있는것인가.
순미의 아버지 라준은 원래 ㅊ연구소 연구사였다.
순미는 아버지를 사진으로만 알고있었다. 강기있어보이는 철색얼굴에 크고 시원하면서도 리지적인 눈빛… 사람들은 신통히도 순미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라준은 지금으로부터 스물다섯해전 고산대에서의 면양사양방법과 우량품종들의 풍토순화를 연구하기 위해 풍덕에 왔다가 여기서 생을 마쳤다. 산골사람들의 생활을 하루빨리 향상시키기 위해 연구는 연구대로 하면서도 면양반을 새로 꾸리는 일에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다가 현장에서 순직한 풍덕이 잊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라순미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때없이 들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혼자 운적도 많았다.
어머니 역시 그랬다. 오늘도 며칠만에 만난 딸을 위해 특식을 한다고 서두르면서도 갈래많은 추억을 계속 퍼냈다.
순미는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아궁에 불을 지피고 나무를 넣으면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너의 아버지도 그렇고, 이번에 현실체험을 왔다는 총각도 그렇고, 이 생소한 산골에 선뜻 발을 들여놓는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지. …》
순미는 어머니의 심정이 리해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머니 역시 처녀시절 애인을 따라 여기 풍덕땅에 와서 영원히 뿌리를 내린 흔치 않은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영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더러 있지. … 언젠가 너한테 얘기한적이 있지?… 우리가 젊었을 때 면양반 반장을 했다는…》
라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사인 아버지가 풍덕땅에 나타나자 그렇게도 기뻐했다는 사람, 연구사업이 진척되고 양마리수가 계속 늘어나자 그는 면양반을 대담하게 확장하고 새롭게 일떠세우자는 의견을 제기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적극 지지해나섰다. 하여 낡은 양우리들을 헐어버린 터전에 맵시있게 설계된 새 호동들이 자리잡을 기초구뎅이들이 파졌다.
방목공들은 낮에는 방목을 하고 밤에는 밤대로 건설전투를 벌리느라 잠 한번 변변히 자보지 못했다. 그무렵 누구보다 앞장에 서서 건설전투를 지휘하던 반장이 갑자기 소환장을 받게 되였다. 도에 새로 건설한 목장에 경험있는 일군이 필요했던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벌려놓은 일이나 마무리하고 떠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떠나갔고 작업반건설은 그만큼 진통을 겪게 되였다. 뒤에서 말들이 많았다, 그렇게 훌 가버릴걸 일판만 잔뜩 벌려놓았다고. …
《물론 그쪽 일이 바빠서 짬을 못 냈을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야속한 생각만은 지금껏 버릴수가 없구나. 마치 네 아버지가 그 사람 몫까지 걸머지고 무리하게 일하다 그렇게 일찍 돌아간것 같은게 아직도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구나. … 그 사람 역시 지금의 너처럼 일욕심도 있고 리상도 높았단다. 하지만 실천은 못했지. 그래서 너더러 잘 생각해보라는거다. 그 사람처럼 목표만 높이 세우고 실천을 못할바엔 차라리 시작 안하는것만 못하느니라.》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복잡다단한것인가. 수십년세월이 흘렀건만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있었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봐도 현실체험을 왔다는 그 청년이 얼마나 대견하고 장하냐. 농장 알깨우기실 일만 해도 그렇지. 벌써 큰일을 해제끼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있지 않니. 반장인 네가 생활에서 불편이 없도록 잘 돌봐주어라.》
《알겠어요, 어머니.》
점심식사를 마친 라순미는 경심이를 찾아 토끼반에 가보려고 인츰 집을 나섰다.
《눈을 좀 붙이지 않구…》
《일없어요, 어머니. 경심이를 꼭 만나볼 일이 있어요.》
《원 분주하기란… 참 순미야, 그새 외삼촌한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재봉기빼람에서 편지를 꺼내였다.
《외삼촌은 그저 편지마다 네소리뿐이구나. 맞춤한 대상자를 골라 너를 시집보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더라.》
순미는 웃었다.
《어머니, 내가 기회를 봐서 한번 전화를 하겠어요.》
《그래라.》
순미는 은송목장 토끼분장을 돌아볼 때 토끼우리구조며 먹이가공법, 사양관리에서의 새기술도입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어넣은 수첩을 들고 토끼반으로 향했다. 염소작업반과 꼭같이 풀먹는 집짐승을 많이 기를데 대한 글발이 높이 걸린 정문에 들어서던 순미는 곤색제낀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 급히 나오는 바람에 한옆으로 비켜섰다.
처음 보는 사람이였다.
그는 무뚝뚝한 인상을 짓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청년의 뒤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정문에 들어섰다. 정방형으로 된 토끼우리호동앞마당에 리경심이 그린듯 서있었다. 그는 정문쪽으로 눈길을 보내며 서있다가 불쑥 나타난 라순미를 보자 환성을 질렀다.
《순미야, 언제 왔니?》
《어제 밤에…》
그들은 두손을 맞잡고 반가움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몰라 콩당콩당 뛰기만 했다. 호동안에 있던 사양공처녀들이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다.
《순미야, 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니 기분전환이 되는구나. 뚱딴지같은 총각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어.》
리경심은 입을 가리우며 까르륵 웃음을 터쳤다.
《총각?》
《응, 읍에 사는 고모가 소개편지와 함께 보내지 않았겠니. 어느 공장 자재인수원이라는지… 자기와 결혼하면 뭐 읍에 나가 살수 있다나. …》
경심은 별안간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어댔다.
《왜 그러니?》
《글쎄 그 알량한 총각이 날 떠보려 하지 않겠니.》
《어떻게?…》
순미는 호기심이 동했다. 경심은 남자가 담배불을 붙여 입에 물고 연기를 후― 내뿜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에… 경심동무, 물론 당생활도 하겠지만… 아니, 저… 청년동맹원일수도 있지요. 전문학교는 나왔다니 축산기수일게고… 뭐 이러며 끙끙 갑자르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래서?》
《〈도대체 이건 뭐 심문인가요? 선보기인가요? 난 동무가 바라는 처녀가 못되니 다른 곳에 가보는게 어때요?〉 하고 콱 쏴주었지 뭐.》
《어마나,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았니?》
《글쎄, 하지만 아무리 맘에 있어도 우리한텐 어길수 없는 약속이 있지 않니. 옥련이와 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고향을 꽃피우자고 한… 시집을 가도 풍덕땅 총각한테 가고…》
라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약속을 귀중히 여기는 경심이가 무척 돋보였다.
《경심아, 내 너한테 귀가 번쩍 열릴 좋은것을 가져왔다.》
순미는 전국축산부문일군열성자회의에서 진행한 경험토론들에 대해 그리고 은송목장의 현대화수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경심아, 우리도 다시한번 분발해서 청년염소반과 너희네 토끼반을 은송목장보다 더 훌륭하게 꾸려보자.》
오목눈을 깜박이며 순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경심은 별안간 까르르 웃었다.
《어마나, 순미 넌 지금 공상을 하고있구나.》
《뭐, 공상?》
《너 혹시 우리 나이를 잊은게 아니니?》
경심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옳은 말이였다. 그들의 처녀시절도 어느덧 막을 내릴 때가 된것이다.
《순미야, 우리도 이젠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됐다고 봐. 아무리 리상이 높고 욕망이 크다 한들 영원히 처녀로 살수야 없지 않니, 작업반을 현대화하는 일이 한두해에 끝날 일도 아닌데. …》
너무나 빨리 흘러가버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때문인지 경심의 얼굴은 시무룩해졌다. 순미는 그의 어깨를 살뜰히 끌어안았다.
《경심아, 우리가 마음만 먹고 달라붙으면 한두해안으로 얼마든지 목표를 달성할수 있다고 본다. 그게 다 우리의 고향땅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꾸리는 일인데 뭘 마다하겠니.》
그제야 경심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순미의 손을 꼭 잡고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소꿉동무의 뜨거운 진정이 그의 심장을 크게 울려주었던것이다. 순미는 경심에게 가지고온 수첩을 보여주었다.
《은송목장 토끼분장에 대해 기록해놓은건데 한번 참고해보렴. 굴식우리인데 비육토끼들을 대량적으로 기르고있지 않겠니. 그들의 경험을 참작해서 더 좋은 사양관리방법과 토끼우리형식을 탐구해봐. 너야 한번 한다면 하는 애가 아니니.》
《고마워.》
경심이도 몹시 흥분해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꼬리가 우로 약간 치켜올라간 매력있는 오목눈이 반짝반짝 빛을 뿜었다.
일단 결심만 하면 열두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내는 그의 성미를 순미는 잘 알고있었다.
《난 어제 밤 우리 반원들에게 각자가 제나름으로 착상을 해보라는 과업을 주었어. 말하자면 현상모집이지.》
《그것 참 좋은 생각을 했구나.》
경심이가 손벽을 딱 쳤다.
두 처녀는 그외에도 작업반을 새롭게 꾸리는데 필요한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헤여진것은 서산에 해가 기울무렵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