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제 1 장

3

 

《후여! 후여!》

류옥련은 염소무리를 몰고 방목지에 들어섰다. 여느때같으면 그 새초롬한 입술사이로 의례히 노래가 흘러나왔으련만 오늘은 아무런 흥취도 나지 않았다.

(뭐, 내가 배등령을 아주 넘어가려 한다고?…)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노래경연준비때문에 군에 좀 다녀왔기로서니 어쩌면 그렇게 단정할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류옥련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는 얼마전 군인민위원회 문화부의 통지를 받고 문화회관무대에서 노래를 잘 불러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 도예선경연대상자로 추천되였다. 문화부의 녀성부원은 그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며 노래를 좀더 세련시키면 도선발경연에서도 능히 당선될수 있다고 고무까지 해주었다.

그는 한없이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발걸음도 가벼이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앞으로 전국노래경연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면 풍덕사람들모두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풍덕땅의 영원한 딸이 되자고 함께 맹세한 라순미와 리경심이는 옥련이를 꽃수레에 태워 고향을 한바퀴 돌지도 모른다. 과연 김태식이나 리경칠이들이 이 류옥련의 마음을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망탕 한단 말인가.

그의 눈앞에는 불쑥 김태식을 처음 만나던 두해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마침 휴식일이여서 옥련은 군에 나가 새로 나온 노래들을 배워가지고 돌아오고있었다. 노래를 채보한 수첩을 들여다보며 시창을 해보기도 하고 박자를 쳐가며 한껏 감정을 잡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자기가 제일 사랑하고 즐겨부르는 노래 《내 고향》을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고즈넉한 산천에 처녀의 청고운 노래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무대에 나선 심정으로 한껏 감정을 터치려던찰나에 문득 뒤쪽에서 남자의 노래소리가 울렸다. 연회색돌격대제복을 입고 배낭을 멘 한 청년이 뒤따르고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뜻밖에도 옥련이가 부르고있는 《내 고향》노래였다. 어마나… 옥련은 놀랍고 당황하여 얼른 노래를 그치고 걸음을 다그쳤다.

《처녀동무, 같이 갑시다.》

청년은 어느새 처녀의 곁에 다가섰다. 옥련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동문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구만. 내 보기엔 조금만 더 노력하면 꼭 성공할수 있겠소.》

《예?…》

옥련은 어이가 없었다. 초면에 대뜸 전문가흉내를 내려드는 청년의 비위좋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에 대단히 밝은것 같은데 좀 가르쳐줄수 없어요? 저의 노래가 어느 수준인지…》

옥련은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직방 말한다면 동무의 노래는…》

《어서 말씀하세요.》

《물론 동무의 노래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동무의 노래에서는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랑, 고향을 빛내려는 감정보다도 어덴가 자기 목소리에 대한 우월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이를테면 전문가흉내를 내려는…》

《예?!…》

류옥련은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모욕감에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동문 초면에 무례하군요.》

《아, 미안하오. 그렇다고 나삐 생각진 마오. 난 지내 솔직한 사람이 돼놔서 속생각을 숨길줄 모르오. 내 말이 감정을 거슬렸다면 용서하오.》

류옥련은 두서없이 변명을 해대는 청년을 떨궈두고 뛰다싶이 걸었다. 하지만 청년은 검질기기 이를데 없었다.

《처녀동무, 량해하오. 난 돌격대생활을 해서 그런지 혼자 걷는게 딱 질색이요. … 동무 혹시 풍덕처녀가 아니요? 이름이 뭐요?》

류옥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 옹친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동무 오빠가 있지 않소?》

청년이 다시 물었으나 옥련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채 걷기만 했다. 군대에서 대대장을 하는 오빠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싱거운 청년한테 그 말까지 하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류옥철이라는 오빠의 이름이 튀여나올줄이야…

《동무가 신통히 류옥철이와 비슷해서 그러는거요. 그는 지금 군대에서 대대장을 하는데 우리 동창생들중에서는 그가 최고요. 별이 최고라는게 아니라…》

청년은 류옥철이 군사훈련도중 뜻밖에 조성된 위급한 순간에 한몸을 내대여 수많은 동지들을 구원했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친군 그러고도 머리칼 한오리 다치지 않았다오. 영웅감이지…》

그러니 오빠와 동창생인 모양이였다. 하지만 낯은 설었다. 하긴 운덕, 명덕 등 여러 마을로 이루어진 풍덕땅 청년들을 다 알아볼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끝내 청년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그런 싱검둥이청년과 다시 마주서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생활은 그의 생각대로만 흐르지 않았다.

며칠후 그 청년이 염소작업반에 나타났던것이다. 그가 바로 김태식이였다. 그는 염소방목공이 되자 옥련이에게 필요이상으로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오빠에게서 편지가 자주 오는가, 집에는 누구누구 있는가 등 이것저것 묻고나서 방목공년한이 적지 않은데 앞으로 많이 배워달라는 부탁까지 하는것이였다. 류옥련은 달갑지 않게 대꾸했다.

《남동무들속엔 저보다 방목공년한이 오랜 동무들이 많답니다.》

김태식은 처녀를 탓할 대신 싱글벙글 웃기만 할뿐이였다. 첫인상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옥련은 그가 싫었다. 어느때 보나 데설궂기 짝이 없고 싱겁고 분수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김태식에 대한 옥련의 평가는 결코 무리한것이 아니였다.

지난해 초여름 김태식은 큰 사고를 저질렀던것이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다른 방목공들과 휩쓸리지 않고 염소무리를 제멋대로 끌고다니다가 여러마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렸다. 온 작업반에 복새통이 일었다. 그 염소들을 살려보려고 라순미와 정윤심이 몇밤을 지새우고 지어 관리위원장, 리당비서까지 작업반에 올라와 살다싶이 하였다. 하지만 끝내 두마리의 염소는 죽어버리고말았다.

그런 김태식이 과연 누구보고 이러쿵저러쿵 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고까운 감정이 옹쳐질수록 옥련은 어떻게 하나 자기가 맡은 우량종염소들의 영양도 부쩍 올리고 노래경연에서도 꼭 당선돼야겠다고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쫓느라 그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렸다. 점심식사시간이 지난지도 퍼그나 오랬다. 여느때는 식사시간이 되면 방목지에 꾸려놓은 방목쉼터들에 염소들을 몰아넣고 여러명씩 모여앉아 식사를 하군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방목공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옥련은 몇몇 등성이를 넘고 몇몇 골바닥을 오르내렸는지 전혀 기억되지 않았다. 배고픔도 의식하지 못했다.

솔골골짜기까지 염소들을 몰아왔다는것을 알고 깜짝 놀란것은 해질무렵이였다. 다른 방목공들도 염소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옥련은 황급히 회초리를 휘둘러댔다. 뿔뿔이 흩어져 풀을 뜯던 염소들이 갑작스레 휘둘러대는 회초리바람에 메―에, 메―에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였다. 서둘러 염소마리수를 확인하기 위해 출석을 불러보았다. 《백학이》, 《막둥이》, 《날새》, 《춘향이》, 《꾀바리》, 《흰제비》…

처녀의 맑고 청아한 부름에 염소들은 제나름의 울음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흰제비》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경쾌하게 울리던 방울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흰제비》― 《흰제비》―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마나, 이걸 어쩌니? 류옥련의 얼굴은 까맣게 질렸다. 감빛저녁노을이 산촌을 물들이며 타오르고있었다. 옥련은 정신없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염소들을 몰아갔다. 내려가는 길에 누구든 만나면 염소무리를 넘겨주고 다시 올라와 《흰제비》를 찾아볼 생각이였다.

그의 두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마구 떨어졌다. 염소무리를 몰고 한동안 정신없이 달렸다. 목에서 겨불내가 났다. 때마침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러나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망막이 흐려와 누군지 인차 알수 없었다.

그 사람이 《옥련동무, 웬일이요? 귀가 잘못됐소?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하오?》 하고 소리쳐서야 그가 다름아닌 김태식임을 알아보았다.

《왜 그러오, 옥련동무?》

류옥련은 그만에야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울음섞인 목소리가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흰제비〉…〈흰제비〉가… 없어… 졌어요.》

《뭐요?》

김태식의 작은 두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방울소리가 울렸겠는데 정신을 어디다 팔았댔소?》

그 말에 류옥련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획 쳐들었다.

뭐, 정신을 어디 팔았댔느냐고?… 이 동문 제가 한짓은 생각 안하고 어쩌면 나한테 따지려든단 말인가…

《동문 그렇게 말할 체면이나 있어요?》

야멸찬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오르는것을 겨우 참았다.

《빨리 찾아보기요.》

김태식이 헤덤비기 시작했다.

그때 송순애가 달려올라왔다. 그는 그들 두사람앞에 이르러 한동안 말을 못하고 숨이 차 할딱거렸다. 한참만에야 리경칠을 만나 그가 태식이의 염소무리까지 몰고 내려오는것을 보고 사연을 알았다는 소리를 했다.

《경칠동문 자기가 내 염소무리까지 몰고 내려가겠으니 빨리 가서 옥련동무를 도우라고 했어요.》

사태를 짐작한 김태식이 명령조로 말했다.

《순애동문 빨리 옥련동무의 염소무리를 몰고 내려가오. 가서 기술원동무와 신종선분조장한테 보고하오. 옥련동무와 내가 〈흰제비〉를 무조건 찾아가지고 내려가겠다고…》

송순애가 내려간 뒤 태식은 《자 옥련동무, 우린 빨리 〈흰제비〉들을 찾아보기요.》 하며 솔골골짜기를 향해 씨엉씨엉 걸어갔다.

옥련은 한동안 덤덤히 서있기만 했다. 김태식이 《흰제비》를 부르는 웨침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옥련은 등성이를 향해 허둥지둥 달리기 시작했다. 앞쪽에서 여전히 《흰제비》― 《흰제비》 하고 김태식이 목청을 돋구고있었다.

류옥련은 왈칵 솟구치는 설음에 목메인 소리로 《흰제비》를 부르고 또 불렀다. 《흰제비》를 찾는 그들의 목소리가 골짜기의 숲을 흔들었다. 소나무가 많아 솔골이라 불렀다지만 참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층층나무들이 빼곡하게 뒤섞인 숲은 머루다래덩굴, 오미자덩굴로 사방 막혀있었다. 아무리 목터지게 불러도 《흰제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옥련은 온몸의 기운이 쑥 빠지는듯 했다.

경황없이 숲을 헤치던 그는 그만 나무그루터기에 걸려 어푸러지고말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올해 정초에 있은 작업반모임이 떠올랐다.

그날 라순미는 염소무리의 구성을 백프로 우량종으로 바꾸자고 열렬히 호소했었다.

반장은 우량종염소 한마리라도 더 늘구려고 아득바득 애쓰고있는데 난 무슨 일을 저질렀담, 정신을 어데다 팔고…

김태식이의 비뚤어진 말 한마디에 온 하루 허튼데 정신을 팔았던 자신에 대한 원망감으로 가슴이 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앞쪽에서 옥련을 찾는 김태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후 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코앞에서 《옥련동무.》 하는 김태식의 부름소리가 다시 울렸다. 몇번 더 불러보더니 마침내 두덜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이거 김태식이가 〈흰제비〉를 찾는거야, 아니면 류옥련이라는 처녀를 찾는거야. 〈흰제비〉도 그렇고 처녀를 잃는 날엔 정말 큰일이다, 정보배로친이 딸을 내놓으라고 야단을 치겠는데…》

옥련은 자기 어머니까지 꺼들이는 태식이의 설레발에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실컷 찾아보라지, 오늘일은 다 저 동무탓이지 뭐야…

별안간 노래소리가 울렸다.

 

          풍년새가 노래하는 곳

          사랑하는 내 고향일세

          …

 

태식은 불을 피우려는지 삭정이를 주어모으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노래는 그칠줄 모른다. 별로 아름답지도 못한 목소리는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협동마을 전야마다

          오곡백과 무르익는 곳

          …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옥련은 종시 참지 못하고 발딱 일어났다. 그 서슬에 태식은 푸들쩍 놀랐다.

《코앞에 있으면서도 왜 대답을 안하오? 그런줄 모르고 난 풍덕땅의 꾀꼴새를 잃어버렸는가 해서 간이 콩알만 해졌댔구만.》

옥련은 대꾸하지 않았다. 김태식은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모닥불을 지폈다.

《옥련동무,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날이 밝은 다음 더 찾아봐야 할것 같소. 〈흰제비〉를 찾지 못했으니 작업반엔 내려갈 체면도 없거니와 너무 어두워 사위를 분간 못하겠거던…》

모닥불이 확 피여오르자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옥련은 자기의 상심한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아 어둠쪽으로 돌아앉았다. 불무지를 돋구느라 이쪽저쪽 오가는 태식의 그림자가 숲을 배경으로 춤추듯 얼른거렸다. 한동안 불을 피우고는 옥련의 곁으로 스적스적 다가왔다.

《옥련동무, 너무 상심하지 마오. 이 김태식이와 함께 있는 한 〈흰제비〉는 꼭 찾게 될거요, 아무렴…》

옥련은 고개를 숙인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끝저끝 할 말은 많았으나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김태식은 옥련의 심정을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불무지쪽으로 걸어갔다.

옥련은 두무릎우에 턱을 고이고 눈을 꼭 감았다. 정말 《흰제비》를 찾을수 있을가. … 기술원동무랑 얼마나 걱정할가… 그리고 순미가 돌아오면 도대체 뭐라고 한담…

살그머니 모닥불쪽을 바라보던 옥련은 내심 놀랐다.

마치 파고 세운 말뚝처럼 웅크리고앉은 태식이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며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던것이다.

저 동문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혹시 오늘 아침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는건 아닐가, 아니.

옥련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후회할 사람이라면 애당초 그런짓을 하지부터 않았을것이다. 갑자기 순미가 그리워졌다. 작업반장이기 전에 가슴속 비밀까지 숨김없이 터놓는 소꿉시절부터 한시도 떨어져본적 없는 귀중한 동무였다.

순미야, 너라도 좀 빨리 와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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