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이룰수 없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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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에 라장을 놓아준 최천복두령은 《산당》사람들앞에서 엄숙히 말하였다.
《우리는 량반놈들과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어 의로운 싸움에 나선 사람들이지만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왜놈들을 그대로 둘수 없소. 왜놈들은 배 두척으로 초도 후면에 붙었다가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잠든 틈을 타서 달려들었소. 왜놈들은 100여명이나 된다고 하오. 고을군사는 70여명이 되나마나 했는데 그나마 고을원과 만호를 포함해서 절반이상이 잠자리에서 왜놈의 칼에 맞아 죽었고 나머지군사들이 성에 의지해 싸우고있지만 벌써 태반이 희생되였다고 하오. 형제들, 우리가 관군을 피해 쫓기고있어서 갈길이 급하지만 이 땅의 물과 낟알을 먹고사는 백성이요. 용약 떨쳐일어나 왜놈부터 치고봐야 할것 같소!》
어둠속에서도 두령의 눈에 애국의 의기가 번뜩이였다.
《옳소이다!》
《산당》사람들이 힘차게 호응해나섰다. 김을지는 의분이 끓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치 못하였다.
《두령님, 이 사람에게 물에 익숙한 사람을 몇명만 주면 왜놈의 배에 불을 지르겠소이다. 왜놈들은 저들의 배를 구원하려고 바다가로 되돌아설수밖에 없을거웨다.》
김을지는 경상도 동래의 바다가에서 왜놈들의 도적배를 그렇게 불태워버린 경험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자기의 의견을 내놓을수 있었다.
《옳소. 그럴듯해. 나도 한쪽배를 맡겠네.》
최서방이 팔소매를 쓱쓱 걷어올리며 나섰다.
《그참 신통한 수요. 싸움은 군사수로 하는게 아니라 머리로 하니깐.》
최천복두령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왜놈들이 로략질에만 정신이 팔렸다가 된똥을 싸게 되였꼬마.》
누구인가 사기나서 하는 소리가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각 패장들과 수하부하들이 싸움은 벌써 이긴 싸움이라고 창과 칼을 높이 흔들었다.
잠시 계책을 단단히 짜고 갑패, 을패, 병패들이 각각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영아는 성덕이를 데리고 고개마루 후미진 곳에 몸을 숨기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김을지는 네사람을 이끌고 무성한 갈숲속을 헤치면서 왜선을 향해 갔다. 검은 선체가 눈바투 보여왔다. 배의 갑판우에는 화토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너덧댓놈이 둘러서서 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기도 하고 배주위를 감시하기도 하였다.
김을지는 제옆에 몸을 숨기고 다가온 최서방에게 가만히 일렀다.
《형님네는 저쪽 왜놈배를 불사르시우. 우리 둘은 이쪽을 맡겠소이다. 놈들이 불구경을 하노라고 뒤쪽엔 관심이 덜한것 같지만 교활한 놈들이니 조심해야 하리다.》
최서방은 념려말라는듯이 싱그레 웃으며 물가로 나아갔다. 잠간 사이에 그들의 모습은 가뭇없이 어둠속에 사라졌다.
김을지는 자기와 한조가 된 억쇠가 미더웠다.
《임자와 함께 가니 양지현감을 원쑤갚던 그때가 생각나누만.》
《원참, 신통두 하우.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수.》
《그래?! 그참 신통하군. 그럼 자맥질은 어떤가?》
《헹― 물귀신 한가지유.》
어둠속에서 그의 흰이발이 보였다.
《어이쿠, 나를 찜쪄먹겠네. 자, 그럼…》
두사람은 바다물에 잠겨들었다.
물은 소스라치도록 차거웠다. 허나 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왜놈들에 대한 증오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서인지 몰랐다.
김을지는 마치 자라처럼 자맥질도 잘하고 떠오르기도 물오리처럼 잘하였다. 동래 수영포바다가에서 군역을 지면서 10년간이나 물에 숙달한 그였다. 억쇠도 잉어처럼 소리없이 물속을 누벼나갔다.
그들은 마침내 왜선꽁무니에 닿았다.
바다물결이 배밑에 철썩철썩 조용히 부딪치고있었다.
그들은 배닻줄을 타고 재빨리 올라갔다. 그리고 날래게 배전을 소리없이 넘어갔다.
잠시 그자리에 엎드리고 놈들의 동정을 엿보았다.
왜놈들은 고을이 불타는것을 좋아라 구경하면서도 배주위를 뒤돌아보군 하였다.
한놈은 두목인듯이 틀스럽게 걸상에 앉아서 한손으로 뭍을 가리키면서 무엇이라 지껄이였다.
그러자 졸개 한놈이 갑자기 북을 둥둥 울리였다. 보매 성을 빨리 타고앉으라는 신호같았다.
김을지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것 같은 적의감으로 칼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그는 배의 기물들에 몸을 이리저리 숨겨가며 놈들에게 가까이 접근해갔다.
이지러진 달이 뭍에서 타오르는 불연기에 가리워졌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김을지는 이 틈을 타서 돛대뒤에 몸을 감추었다. 소뿔처럼 량쪽이 삐죽 솟아오른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왜놈두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졸개놈이 《하잇―》, 《하잇―》 하고 또 북을 치려고 했다.
그 순간 김을지는 번개처럼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둘렀다.
첫 칼날에 왜놈두목의 모가지가 떨어져나가고 두번째 일격에 북을 치려던 졸개 왜놈의 대가리가 갑판에 딩굴었다.
억쇠의 칼쓰는 솜씨도 여간이 아니였다. 눈깜박하는 사이에 갑판의 왜놈들을 다 목베였다.
김을지는 왜놈두목을 죽여버린것이 기뻤다.
대가리를 잘린 뱀이 꿈틀거리다가 죽어버리듯이 왜놈들은 패배를 면치 못할것이다.
《을지형님, 장작 저기 있수다. 배를 불사르자구요!》
억쇠가 득의만면하여 김을지를 바라보았다.
《암, 그래야지. 그나 우리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어놓았을지 모르니 배밑창까지 뒤져보아야겠네.》
《아차, 내 그만 그 생각을 못했수다.》
김을지는 억쇠를 파수삼아 갑판에 세워두고 배밑창으로 달려내려갔다.
맨 선참으로 보이는 문을 잡아당기였다.
문이 안으로 걸려있었다.
대신에 안에서 《사람살려요―》 하는 녀인의 피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기무라인가? 아직 네 차례가 안됐어. 요년이 순순히 몸을 줘야 말이지. … 요시…》 하는 왜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녀인의 째지는듯한 비명이 울려나왔다.
김을지는 발길로 문을 세차게 차버리였다.
문이 부서져나갔다.
어둑스레한 등피불에 웃동을 벗어붙인 난쟁이왜놈 하나가 급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가슴이 하얗게 드러난 녀인이 찢어진 옷을 창망히 여미면서 구석쪽으로 달아났다.
김을지는 한칼에 왜놈의 목을 쳤다.
녀인은 《악―》 소리를 지르며 밤송이처럼 몸을 옹송그리였다.
《무서워마우. 난 조선사람이우. 이 왜놈배를 불살라야겠으니 빨리 나갑시다.》
녀자는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꼬박꼬박 절을 하면서 흐느끼였다.
《울고있을 짬이 없소. 서둘러야 하우.》
김을지는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같이 가요. 여기 또 한분이… 나리님이 묶이여계시나이다.》
《뭐 나리님이라니? 그게 누구요?》
김을지는 제꺽 몸을 돌려세웠다.
《조정의 나리님이예요. 안무사로 내려왔던…》
김을지는 녀인이 가리키는 구석을 바라보았다.
입은 걸레짝으로 틀어막히고 몸은 굵은 바줄로 묶이운 사람이 보였다.
안무사라면 조정의 벼슬아치다. 바로 이런 놈들을 쳐없애자고 나선 김을지로서는 그를 구원하는것이 불쾌하였지만 다같은 조선사람이요 왜놈에게 붙잡힌 사람이라 그의 입에서 걸레짝을 뽑아주고 바줄을 끊어주었다.
안무사는 그제야 막혔던 숨줄이 열린듯이 숨을 헐떡이였다.
《일이 급하오.》
김을지는 안무사와 녀인을 닁큼닁큼 들어서 갑판우에 올려놓아주었다.
안무사는 세차게 타번지는 고을을 보더니 사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때에야 알아차린듯 제 가슴을 두드리였다.
《아이고… 왜놈들이 온 성안을… 이를 어쩔고, 아이고…》
사실 안무사라는 이놈은 리사균이였다. 전라도 바다가고을들의 방비상태를 알아보고 대책할 임무를 맡았었다.
그래서 먼저 들린 곳이 여기 이 고을이였다.
초가을까지는 대궐의 등문고지기장을 하다가 관리들의 정기조동때 병조의 당하관이 되였었다.
리사균은 여기에 내려온 그날부터 술과 계집에 파묻혀있었다. 허나 혼례날에 등창이 난다고 이날도 기생을 불러앉히고 밤늦게 재미를 보다가 봉변을 당했다. 요행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는 했으나 참혹한 왜변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이 두려웠다.
《아이구… 이놈의 왜놈들아… 천하에 몹쓸 원쑤놈들아―》
김을지는 리사균의 넉두리가 저주스러웠다.
잡아먹을건 돼지라고 백성들앞에서는 행패질이 극심하던 놈들이 왜놈한테 붙잡힌 짐승꼴이 되지 않았는가.
저 안무사라는 놈도 승교바탕에 떠받들려 《에라, 쉬― 물러까라. …》 길을 잡으면서 이 바다가고을에 내려왔을것이요, 기생을 끼고 흥야라 어흥야라 놀아나다가 붙잡혔을것이다.
김을지는 일이 급한중에도 저절로 떠오르는 이같은 생각을 눌러버리며 억쇠에게 소리쳤다.
《불을 지르게!―》
억쇠는 이미 돛대를 중심으로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아니… 이눔, 불을 지르면 어쩔테냐? 그래두 명색이 안무사인 내가 있거늘 어찌 의논두 않구 방자스럽게 노느냐?》
리사균이 어느 사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제 본색이 살아나서 억쇠를 꾸짖는다.
《흥참, 별놈 다 보겠군. 왜놈한테 붙잡혔던 놈이 알기는 뭐가 안다구 큰소리냐?》
억쇠가 주먹을 둘러메는것을 김을지가 막아섰다.
《그깐놈 내버려두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네. 왜놈우두머리를 쳐죽였으니 저놈들이 맥을 추지 못할거요. 어서 내리세.》
김을지는 리사균을 본체도 않고 선수배전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거기에 왜놈들이 뭍으로 타고내린 건늠널판자가 있었다.
《뭐라고? 그렇다면 적장의 목을 따가지고 가야겠다.》
리사균은 억쇠한테 당한 모욕도 잊은채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배복판에 질러놓은 불은 세찬 화염을 타래쳐올리면서 하늘높이 번져갔다. 출렁이는 파도에 배가 이리저리 기울거리면서 흥떡일 때마다 충천하는 불길도 그에 따라 이리저리 꼬리치며 치솟아오르는것이 마치 하늘을 쓰는 거대한 불비자루같았다.
불빛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왜장의 몸뚱이가 보였다. 그옆에 뿔투구를 쓴 대가리가 호박처럼 굴러다녔다.
리사균이 그것을 덮치듯 주어들고서 무슨 보자기같은 헝겊으로 뭉그려쌌다. 그리고 그것을 기생에게 내밀었다.
《이걸 네가 들고 가자.》
기생이 손을 움츠리면서 《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듯 김을지를 바싹 따라섰다.
김을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리사균이 눈알을 번들거리며 엉금엉금 걸어왔다. 군살이 처져내려서 마치 턱이 두개처럼 보이는 그의 상판이 씰룩이였다.
순간 김을지의 뇌리속에 기억의 불꽃이 펑끗 살아올랐다.
저놈이로구나! 우리 상소를 받아주지 않던 등문고지기장!… 그때 상소사연을 상감마마께 전해드렸다면 나와 내 안해, 내 자식의 일이 이렇게는 되지 않았으리라. 상감마마께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지 않을리 없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네놈을 여기서 만났구나!
김을지는 리사균의 멱살을 불시에 거머쥐였다.
《에라, 이놈, 더러운자야, 네놈이 등문고지기장을 해먹던 놈이로구나!…》
리사균은 당장 숨이 끊어질듯이 《아그그―》 하면서 두손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에서 왜장의 대가리를 싼 보자기가 뚝 떨어져내렸다.
《이놈, 네놈이 임금께 올리는 상소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런 놈을 내 왜놈의 손에서 구원해주다니…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어라. 죽되 내가 누군줄 알고 죽어라. 내가 박대산이다.》
《아그… 아그… 그건 내 잘못은 없소. … 상감마마께서 불… 불허하…옵…구… 받지 않으신데… 난들… 어쩌겠…소.》
리사균이 뒤날이 어떻든 오늘 당장 살고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 거짓말인지 정말인지 모를 말을 주저없이 하였다.
《이놈봐라, 감히 네놈이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팔아먹고 무사할것 같으냐?》
김을지는 더 큰 분노를 터뜨리며 리사균의 멱살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리사균의 눈알이 달아맨 개의 눈깔처럼 금시라도 튀여나올것 같았다.
《아그… 그… 사람살리우. … 정말이요. 정말 불허하셨… 소. …》
《그러하실리 없다. 상감마마께서 불허하실리 없다. 이놈아, 죽지 않겠거든 바른대로 토설해라.》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 살려주오. 정말이요.》
김을지는 이따위 비겁한 놈들을 믿고 임금이 어찌 발편잠을 자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녕 임금이 그랬다해도 신하라고 자처하는자로서는 임금의 체면을 지켜 죽음으로 맞받아나가야 하는것이다.
김을지는 갑자기 손맥이 풀렸다.
때려잡아야 할 놈을 삭갈린듯 초점없는 눈으로 리사균을 보면서 저도모르게 그의 멱살을 스르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그는 다시 꽉 그러쥐였다.
《아니다. 이놈, 거짓말이다!―》
그는 이같이 울분에 찬 웨침을 내지르면서 리사균을 허공중에 높이 들어 바다에 힘껏 내던졌다.
김을지는 그놈을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총총히 배를 내렸다.
왜놈들과의 싸움이 급했던것이다.
《에― 시원하다. 그놈 잘됐다!》
억쇠가 후련한듯 성큼성큼 김을지를 뒤따랐다.
리사균은 요행 바다물이 깊지 않은 곳에 던져져 살아날수 있었다. 그는 물귀신처럼 뭍으로 간신히 기여나왔다. 삼켰던 바다물을 왝왝―토하면서도 주위를 언뜻언뜻 돌아보았다.
박대산이 다시 달려들가봐 겁이 났던것이다.
왜선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주위가 환해졌다. 리사균은 왜장의 수급을 어떻게 해서라도 가져가야 하였다.
놈은 엉금엉금 기여서 배건너 널판자를 건너갔다. 당시에는 변방장수들이 해적질을 하는 왜놈들의 수급을 따다 바치면 그 공로를 더 크게 인정해주었다.
리사균은 그것을 노렸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왜장의 대가리가 한몫 할것이였다. 제가 왜장의 목을 땄으며 왜변을 평정하였다고 병조에 보고하면 병조에서는 임금에게 보고할것이며 임금은 상을 내리고 벼슬을 올려줄것이였다.
온 성안이 멸살당한 책임도 그것으로 모면할수 있고 부귀영화도 그것으로 누릴수 있다.
리사균에게 있어서 왜장의 대가리는 마치 옛말에 나오는 신기한 보물단지처럼 은덩이 나오라면 은덩이가 나오고 금덩이 나오라면 금덩이가 나오는 보물중의 보물인것이다.
김을지와 억쇠는 뭍에 내려서서 옆의 왜선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도 삼단같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불은 멋지게 번져나갔다. 그들은 나래가 돋힌듯이 고을로 통한 길을 곧추 잡아나갔다.
《거 김을지가 아닌가?》
소나무숲 바위뒤에서 최서방이 나직이 물어왔다.
《예, 저올시다. 형님네가 맡았던 배도 불덩이가 됐구만요. 참 잘하시였소이다.》
《그런데 임자뒤엔 웬 녀자인가?》
김을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생이였다.
《왜놈에게 붙잡혔던 녀인이오이다. … 거기선 우릴 따라오지 말구 빨리 피하우. 우린 왜놈과 싸우러 가는 길이우.》
《저도 싸움을 돕겠어요.》
《안되우.》
김을지는 엄히 이르고 최서방네와 함께 싸움이 한창인 성을 향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녀인은 김을지를 더는 따라갈수 없다는것을 알고 이웃고을향방을 어방대고 걸음을 뗐다. 소나무숲이건 가시덤불숲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가 어느 숲속에서 리사균과 만났다.
《향단이로구나. 너도 살았으니 이젠 됐다. 내가 죽은줄로만 알았겠고나. 어림없다. 박대산이 이놈, 어디 두고보자.》
종로에서 뺨맞고 뒤간에 와서 눈흘긴다고 리사균이 이같이 놀아나는것을 보고 향단이는 그가 밉살스러웠다. 그는 왜장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다음에는 김을지의 손에 멱살을 잡혀 살려달라고 빌던 꼴이 떠올라 이처럼 비겁한 놈이 살아난것이 분하였다.
향단이는 어제 저녁에 리사균을 모시라는 고을원의 강박에 못이겨 나왔었지만 술도 애교스럽게 치지 않았다. 가야금도 흥치게 타지 않았으며 고운 웃음도 짓지 않았다.
그는 기생이 되고파 된게 아니라 굶주리는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할수없이 관가의 요구를 마지못해 따랐을뿐이였다.
그때문에 그는 기생놀음이 늘 지긋지긋하였다.
이날도 밤늦도록 치근거리는 리사균을 뿌리치고 문밖을 뛰쳐나오다가 왜변을 당하였다.
《두고보라는건 무슨 소리예요? 그래도 김을지라는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고 왜놈들을 맞받아 싸우러 나갔어요.》
향단이가 이렇게 쏘아주었으나 리사균은 김을지라는 말이 나오자 화들짝 놀라났다.
《뭐 김을지?! 그가 박대산이란 말이냐? 이년, 바른대로 말해라.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몰라요.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그렇게 하더군요.》
《음, 그렇단 말이지. 음음― 그랬댔고나. 맨손으로 범을 잡고 양녕대군의 반당노릇을 하던 박대산이 실지는 김을지라… 양지현감을 죽인 네놈이 음흉하게 변성명을 하고… 장영실이 노비로 굴러난것이 억울하다고 등문고까지 쳐? 뻔뻔스럽기는 발바닥 한가지로다. 내 네놈의 상소를 받아주지 않았기망정이지 어쩔번 했을고. 내 네놈을 산채로 붙잡아 임금에게 바치리라.》
리사균은 벌써 산범을 잡아놓은듯 어둠속에서 쾌재를 불렀다.
향단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자기가 리사균에게 김을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입밖에 낸것이 참말 경솔했다고 뉘우쳐졌다. 사람의 비밀을 루설시킨셈이 되였다.
그는 김을지의 이름도 몰랐었고 보기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충청도의 어느 젊은이 하나가 임금의 행차를 멈춰세우고 굶어죽게 된 부모들을 살려달라고 빌었고 임금은 고을원에게 그의 부모를 꼭 살려내라고 지시했지만 고을원이 실행치 않아서 끝내 그의 부모들이 굶어죽었다는것, 젊은이는 고을원을 죽여 원쑤갚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여기에도 불어와서 향단이도 알고있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방금 왜장의 목을 치고 왜선을 불태워버린 기개장한 사람이 김을지였단 말인가.
그는 장영실에 대한 소문도 많이 들어왔었다. 동래현 관노에게 호군벼슬을 주었다가 또다시 상호군의 높은 벼슬을 내린 임금의 지덕은 그야말로 경탄을 자아내는 이야기거리로 온 나라에 퍼졌던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그토록 총애하던 이 재인명사가 왜 파직되고 본래의 관노로 전락되였고 김을지는 그와 어떤 연고관계가 있어서 상소하려고 등문고를 쳤는가 하는 생각이 이 급난한 창황속에서도 얼핏얼핏 떠올랐다.
한편 최천복두령이 갑패를 거느리고 성안에 슴새여 들어갔을 때에는 풍천고을군사들이 겨우 열댓이 남아서 왜놈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리고있었다.
최천복두령은 한가지 꾀를 써서 갑패를 전부 성벽우에 올려세우고 왜놈들을 향해 갑자기 《와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리게 하였다.
과연 계교가 큰 은을 냈다. 놈들은 때아닌 때에 우뢰와 같은 웃음소리와 박수소리에 깜짝 놀라 성가퀴를 올려다보았다.
이때 최천복두령이 태연히 성루에 올라 호걸스럽게 구레나룻을 점잖게 쓸어내리며 바다가를 가리키였다.
《왜인들아, 너희들의 배가 불타는고나. 물묻은 바가지에 깨 엉겨붙듯이 여기에만 달라붙지 말고 뒤를 돌아보아라.》
왜놈들이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저희네 배가 화산과 같이 타오르고있었다.
귀신이다. 귀신의 작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바다우에 떠있는 배가 갑자기 불타겠는가. 왜놈들은 발목이 붙잡힌듯 그자리에 서서 불타고있는 배와 껄껄 웃고있는 최천복두령을 번갈아보았다.
도깨비다. 도깨비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유작작 웃고있을테냐. 왜놈들은 머리털이 쭈빗쭈빗 솟아올라 얼빠진 눈이 뒤집혀가지고 자기들의 배를 향해 냅다 달아났다.
원래 왜놈의 족속은 미신이 뼈속까지 젖어있는 놈들이라 귀떨어지면 래일 주어간다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미치광이들이였다.
이때를 놓침없이 최천복두령은 성문을 열어제끼고 갑패를 이끌어 왜놈들을 뒤쫓아 질풍처럼 내달았다.
그들은 놈들의 뒤통수를 무수히 찍어넘기며 《악―, 악―》 소리쳐 나아갔다.
그중에서도 최서방의 돌팔매가 큰 위력을 나타냈다.
그의 손에서 날아가는 돌멩이는 눈이 달린듯 왜놈들의 대갈통을 어김없이 박살냈다. 그의 팔매질이야말로 귀신도 놀랄지경이였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왜놈들이 무리지어 도망치였다.
마침내 놈들이 을패와 병패가 매복하고있는 외통길에 들었다.
이때를 기다리였던 복병들이 일시에 일어나 《와야!―》 하고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