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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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부부가 비새는 방안에서 춤을 추던 그날로부터 꼭 한달이 되는 날은 신유년(1441년) 팔월 열여드레날이였다.

이날 장영실은 드디여 서운관앞에 사람의 한길높이만한 우량기대를 화강석으로 기둥처럼 묵직하게 다듬어세우고 그우에 네모진 화강석반석을 화려하게 앉히였다. 바로 이 반석우에 쇠물을 부어만든 우량기를 설치하였다. 우량기를 받들고있는 이 반석에는 구름무늬가 돋혀있고 《우량기》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우량기는 높이 2자(약 40센치메터) 직경 8치(약 16센치메터)로서 둥근 통모양이였다. 우량기는 그 어떤 세찬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도록 반석에 든든히 고정하였다. 우량기안에는 눈금이 새겨져있어서 비량을 정확히 잴수 있게 하였다. 우량기대의 한쪽면에는 사람이 올라가 볼수 있도록 돌계단과 돌안전란간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품들여 다듬은것들이였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보통 쇠그릇처럼 보여오는 우량기가 신비롭게 안겨왔다.

장영실은 상호군의 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서운관의 관리들과 함께 임금을 기다리고있었다.

장영실곁에는 한인 김새가 흥분을 지그시 누르면서 묵묵히 서있었다. 그는 우량기를 만드는 일을 하늘의 해를 잡아보겠다고 하는것처럼 난감한것으로 여겼는데 장영실이 이렇게도 간단히 만들어낸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이 우량기를 만들었다는 승정원의 보고를 받고 서운관에 나와보겠다는 하교를 내리였다. 세종은 이날 두가지 글을 받았는데 하나는 바로 서운관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지난달 임금의 등극 23주기를 맞이하는 날에 등문고를 치고 잡혀들어와 형장을 맞은자들을 몰래 집에 데려다가 치료해준 장영실의 죄를 용서할수 없다는 사헌부의 글이였다. 사헌부의 상소는 과장되여 임금의 분노를 터뜨릴수 있게 장영실의 행동을 엄중히 분석해놓은것이였다.

《…장영실은 무엇을 좀 만든다고 하여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지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안하무인이 되여 귀천을 문란시키고 세상의 법도를 혼란시키고있사옵나이다. 이번에 등문고를 친자들을 엄히 단속하라는 임금의 지시대로 형벌을 적용받은자들을 극진히 위해준것은 바로 임금의 의사와는 정반대되는 행위로서 죄지은자들을 감싸주고 지지해주고 고무해준것이옵나이다. 등문고를 친자들이 임금을 원망하게 만들고 나라를 소란케 하려는 자기의 본심을 어찌해보자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내나이다. 불안한 의심은 반드시 해명해야 하오니 장영실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그 본심을 밝혀내야 하옵나이다. 지난 봄에 새 화포를 만든다고 하면서 누구도 허가없이 출입하지 못하게 된 군기감 야장간에 궁노비 만복을 들락날락하게 하였으며 이를 단속한 판관 리사균을 궁노비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고 오히려 궁노비를 두둔한 죄를 지었으나 상감마마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큰 은총을 베푸시였나이다.

그러나 장영실은 배은망덕하게도 임금까지도 몰라보는 진속을 또다시 드러냈사옵나이다.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사오니까. …》

세종은 이 글을 보고 한동안 내전을 오락가락 거닐었다. 이 글이 사실이라면 괘씸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지난달에 경상도백성들이 무리지어 올라와 등문고를 친것은 그 어떤 색채가 비낀것 같아서 몹시 불쾌하였었다.

하여 등극주기축하연을 베푸는 날에 소란을 피운다고 엄중히 단속하겠다는 사헌부의 제의를 승인하였었다. 그런데 장영실은…

물론 그가 임금의 뜻을 우정 거슬리고 임금을 원망하도록 백성들을 부추기자고 형장을 맞은 사람들을 몰래 집에 데려다가 극진히 돌봐준것이 아님을 세종은 생각하였다.

장영실은 그들을 몰래 데려갈 사람이 아니다. 장영실이 경분을 인정한다면 과인도 인정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형장맞은 죄인들을 집에 데려갔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못본체 하고 지나갈수 없는 착한 본심에서 우러나온데 지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의금부관리들은 장영실을 시기질투하는 벼슬아치들의 말만을 듣고 귀걸이라면 귀걸이, 코걸이라면 코걸이식으로 장영실을 옭아보자고 하는것이다.

임금이 자기들의 제의를 승낙하고 그를 내쫓는다면 《자 보아라, 임금이 재인재사라고 아끼는 장영실까지도 우리의 손아귀에 쥐여있다.》 하고 위세, 권세를 떨쳐보려는 야심이 깔려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임금이 아끼고 내세우는 장영실을 제거하려는것은 결국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것이 아니냐.

이러나저러나 장영실은 임금의 하늘같은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서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해야 할 남다른 처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장영실은 본심은 아니라 해도 간관들이 걸고들수 있는 여지를 남기군 한다. 어떻게 할고?

장영실을 용서해주면 좋겠지만 신하들속에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 나온다고 장담할수 없다. 기둥을 쳐서 서까래를 흔들어놓듯이 장영실을 쳐서 신하들을 미리 징계해야 하겠는가.

세종이 이런 생각을 매듭짓지 못하고 내전을 거닐고있는데 내시 김연이 서운관의 글을 가져왔었다.

《…만인의 지혜를 합쳐도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고려조에서도 만들수 없었던 우량기를 우리 임금의 시대에 와서 훌륭히 발명하였나이다. 명나라에도 왜나라에도 없는것을 장영실이 만들어 임금께 바치는 경사를 보게 되였나이다. 이로써 우리 임금의 정사를 빛내이고 나라와 백성들에게 덕을 입히는 또 한가지 크고 중대한 일을 이루게 되였사옵나이다.》

글에는 우량기의 모양과 크기, 만든 원리들을 자세히 언급하였고 서운관앞에 설치한것과 임금이 직접 나와 보기를 바라는 청원이 들어있었다.

세종은 방금전까지도 장영실을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를 생각하고있었지만 서운관의 글을 보고는 《장할시구. 장영실이가 장영실이고나!》 하고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즉시 서운관행차준비를 시키였다.

세종은 오래전부터 온 나라에 비가 얼마나 오는가를 잴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혀왔었다. 지금까지 천상렬차분야지도와 같은 천문도를 비롯하여 옥루기륜, 앙부일구, 소간의 등을 만들어 천지조화를 알아내고 나라에 정사를 펴왔지만 우량기는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서운관 지사 리순지는 간의대(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는 대)에 종사하면서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냈고 책력과 산수에 정통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고있었지만 우량기는 끝내 발명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일행에 장영실과 서운관의 관리들을 끼워 혹 명나라에 강우량기구같은것이 있으면 알아오게도 하고 일본에 가는 일행에도 이와 같이 해보았으나 다 알아가지고 오지 못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장영실이 만들어냈던것이다. 세종은 점심수라상도 뒤로 물리고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운관으로 갔다.

한편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는 장영실은 임금에게 수고로움을 끼치게 하여 그지없이 황공스럽기도 하고 또 한쪽으로는 서운관으로 나오는 임금이 고맙기도 하였다.

드디여 세종이 서운관에 나왔다. 군신간에 례의를 갖춘 후에 세종이 빙그레 웃으며 몇발자국 나아가 멈춰서서 위엄있고도 정교하게 다듬어세운 화강석기둥이며 받침대며 그우에 설치한 우량기를 바라보았다. 오래동안 바라면서도 어떻게 만들지 몰라하던 우량기가 불과 두어자 높이의 둥근 그릇에 지나지 않는것을 보고 이렇게도 간단한것을 왜 벌써 만들어내지 못하였던고 하는 생각에 껄껄 웃었다.

그만큼 반갑고 기뻤던것이였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함께 나누고싶은듯 문무대신들을 돌아보았다.

《바다물을 다 기울여 마셔보아야 바다물이 짠줄을 알겠느냐. 한방울을 맛보아도 바다물이 짠줄을 아는도다. 하하하… 비오는 하늘크기만한 그릇을 하늘밑에 놓고 비를 다 받아보아야 비가 얼마나 왔는가를 알겠느냐. 자그마한 그릇 하나를 놓고도 비가 얼마나 왔는가를 능히 알수 있도다. 하하하…》

문무신하들도 임금을 따라웃고 장영실과 서운관관리들도 즐겁게 웃었다. 임금의 비유가 신통하기때문이였다.

김새는 자기도 얼마전에 비오는 하늘만큼 큰 그릇을 어떻게 만들랴 하고 물러났던것이라 조선의 임금이 자기를 빗대고 깨우쳐주는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였다.

세종은 웃음을 머금은 눈길로 신하들속에서 장영실을 일별해보고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앞으로 불러냈다.

《그대는 이번에도 나라에 큰 공을 세웠도다. 그대야말로 과인의 정사를 빛내주는 충신이로다. 자, 그대가 과인을 인도하여 우량기를 보여다오.》

《황공무지로소이다.》

장영실은 너무나 과분한 치하에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따라 우량기로 오르는 층계를 한단한단 딛고올랐다. 우량기는 사람이 잘 볼수 있도록 가슴노리만큼 높이여 설치하였다. 쇠물을 어찌나 잘 부어냈는지 안팎면이 거울처럼 알른거리였다. 물높이를 재는 눈금도 세밀하고 우량기전체가 정교하고 단아하기란 마치 그 어떤 세공품과도 대비가 안될만큼 훌륭하였다. 쓸어만지니 손맛이 흠잡을데없이 매끈스러웠다.

세종은 반석에 새겨놓은 《우량기》―세 글자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장영실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우량기란 이름도 좋지만 〈측우기〉라 이름을 달면 더 좋을듯 싶고나.》

《네, 지당한 가르치심이옵나이다.》

《그대가 좋다면 과인은 더욱 기쁘니라.》

세종이 시종 웃으며 주고받는 말은 문무관리들의 맨 꼬리에 서있는 리사균의 귀에도 들리였다. 그가 사헌부관리들에게 장영실을 고소할 자료들을 주고 사헌부에서는 그에 기초하여 글을 올렸었다.

리사균은 이번에는 장영실이가 무사치 못하리라는것을 깨고소하게 기다리였었다. 헌데 일은 예상밖으로 뒤번져졌다.

장영실은 또 임금이 기뻐하는 측우기를 만들어낸것이다. 《그대야말로 과인의 정사를 빛내주는 충신이로다.》, 《그대가 좋다면 과인은 더욱 기쁘니라.》 하고 높이 내세워주는 임금이 사헌부의 상소를 받아줄수 있겠는가.

만약 측우기를 만들어내기 전에 사헌부의 글이 먼저 들어갔다면 효력이 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측우기를 만들기 전에는 장영실이 한인 김새와 함께 경분을 만들어 임금의 치하를 받았다. 《장영실이 경분의 가치를 인정하였다면 과인도 인정한다.》고 크게 믿어주는 바람에 장영실을 규탄하는 글을 그때에도 올리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얼마동안 미루었다가 이번에 기회를 타서 올리였지만 닭쫓던 개 울바자를 쳐다보는 꼴이 되였다.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전에도 장영실을 규탄하는 글을 올렸지만 임금은 《너희들이 장영실을 대신해 새 화포를 만들어낼수 있다면 장영실을 파직시켜도 아까울것이 없다. …》 하고 도리여 상소자들을 꾹 눌러버리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와 같은 추궁이 뒤따를지 모른다. 글을 직접 올린 사헌부관리들도 리사균과 같은 우려심을 품고 가슴들을 조였다.

장영실은 리사균이나 사헌부관리들의 이같은 속심을 전혀 알수 없었다. 또 자기를 규탄한 글을 올린것도, 임금이 그 글을 본것도 몰랐다. 오로지 그의 마음과 귀에는 《…그대야말로… 충신이로다.》, 《그대가 좋다면 과인은 더욱 기쁘니라.》 라고 한 임금의 목소리가 이산저산 맞받는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사례의 말도 여쭙지 못하였다.

잠시후에 측우기대를 내린 세종은 김새앞에 이르러 《공을 보니 반갑소. 공이 경분을 가르쳐주어서 고맙소.》 하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전하, 그것은 측우기에 비할바가 못되옵나이다. 오늘의 경사를 축하하옵니다. 이 측우기는 우리 나라에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나이다. 소신이 우리 나라에 돌아가면 조선의 측우기와 꼭같이 만들어 바치겠나이다. 전하, 전하께 축하를 드리옵나이다.》

《고맙소. 장영실이 큰 공을 이루니 과인이 다른 나라 명사의 축하를 받을지라 과인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 오늘저녁 장영실과 김새에게 축하연을 차려주도록 하라.》

《예―이―》

관리들이 일제히 길게,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규탄한 사헌부의 글을 일축해버릴 확고한 결심을 가졌다. 장영실의 공로가 임금의 공로로 높이 떠오르고 장영실이 받아야 할 축하가 임금이 받는 축하로 더욱 커지고 그 뜻이 깊어지는것이였다.

인재를 귀히 여기는것은 바로 임금자신을 위한 일이였다.

과인이 동래관청 관노를 불러 벼슬을 주고 일을 시켜온것도 다 그때문이였다. 장영실이 예나제나 훌륭한 기물을 만들어 과인의 정사를 빛내이고 과인의 덕망을 온 나라가 사모하도록 민심을 받들어주었다.

어찌 사헌부의 제의대로 장영실을 벼슬자리에서 쫓아내겠는가. 그것은 누워서 침뱉는 격이다. 그가 더 훌륭한것을 발명하게 하여 과인의 시대를 빛내야 한다. 얼룩소라도 뿔만 좋으면 제상에 쓴다고 하지 않더냐.

세종의 뇌리에 이같은 생각이 꼬리를 이었으나 그것을 알길 없는 장영실은 꿈같은 임금의 은총에 목이 꺽 메여 떠듬떠듬 아뢰였다.

《상감마마, 축하연은 성상께서 받아야 하옵나이다. 상감마마가 아니였다면 측우기가 어찌 되오리까. 모두가 상감마마의 덕택이오니 상감마마께 축하를 드리옵나이다.》

그러자 문무신하들도 세종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드리며 감격을 터뜨리였다.

《상감마마, 축하를 드리나이다!》

그 웨침소리는 측우기를 휩싸안으며 서운관의 지붕너머로 높이높이 울려퍼졌다.

이리하여 장영실이 발명한 측우기는 서울과 각 도, 각 고을에 설치되여 온 나라에 내리는 비량을 정확히 측정하여 가물과 큰물에 대처할수 있게 되였다.

그것은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어서 수확물을 보다 많이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봉건통치배들이 조세를 더 많이 수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어냈다. 경분도 곡식을 해치는 벌레들을 없애버리고 농사에 기여하였지만 측우기와 마찬가지로 통치배들의 배를 불리우는데 리용당하였다. 백성들은 여전히 굶주리였다.

장영실은 이것을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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