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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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사람같지 않게 복색을 한 사람은 명나라의 한인이였다. 이름은 김새라고 하는데 키는 장영실보다 훤칠하게 컸지만 몸은 가늘고 여위였다.

그러나 흰 얼굴에 눈섭이 시꺼멓고 그아래 두눈이 시원하게 빛나는것이 보통사람같지 않았다.

리천은 한인 김새와 장영실이 서로 친근히 사귀도록 인사를 시키고 김새에게 장영실의 이름과 벼슬, 직품을 말해주었다.

물론 필담이였다.

리천이 흰종이에 일필휘지로 써서 김새에게 주었다. 그 글을 읽은 김새는 놀라듯이 그리고 매우 반가운듯이 싱그레 웃으며 두손을 가슴노리에 모아잡고 장영실에게 읍례를 하였다.

리천은 장영실에게도 김새를 소개하였다.

《김공은 명나라황제의 총애를 받아오던 재인재사인데 이름은 김새라고 하오. 명나라사신들이 우리 나라에 오가면서 보고간 자격루와 옥루기륜, 간의대, 앙부일구 등 여러가지 천문관측기물들을 소문내서 김새도 그대의 이름을 알게 되고 만나보기를 소원하여 지난해 우리 나라에 오는 명나라사신일행에 끼웠었다고 하오. 그러나 오던중에 야인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있었다더군. 다행히도 야인들의 소굴에서 벗어나 압록강을 건너 우리 진영으로 도망해왔소. 김새는 금과 은을 제련할줄도 알고 경분, 하엽록, 주홍과 같은것을 만들줄 안다고 하오. 또 여러가지 천문기구도 만들고…》

리천은 이 대목에서 잠간 사이를 두었다가 낯빛을 엄숙히 하고 뒤말을 그루박듯이 한마디한마디 심중히 하였다.

《상감마마께옵서는 김새의 기술을 장영실이가 배우도록 하라고 어지를 내렸소.》

장영실은 황공스럽게 머리를 숙이였다.

《상감마마의 뜻을 삼가 받들겠소이다.》

그리고는 김새에게로 몸을 돌려 또 고개를 숙이였다.

《소신은 공이 지니고있는 재능과 기술을 힘껏 따라배우겠소이다. 공이 우리 나라로 온것은 저에게 더없이 귀중한 기회로 되나이다. 많이 가르쳐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장영실은 오래동안 기다려온 스승을 만난듯이 존경스러운 눈길로 김새를 바라보았다.

통사가 장영실의 말을 전해주자 김새는 당혹히 얼굴을 붉히며 거듭거듭 읍례를 하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조선의 상호군 장공의 뛰여난 재능을 깊이 사모하여왔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면대하니 구면친구를 만난것처럼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배우기는 소신이 배워야 하리다.》

이윽하여 리천은 돌아가고 두사람은 오래도록 마주앉아 여러가지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장영실은 김새를 데리고다니면서 옥루기륜과 대간의, 소간의, 간의대를 보여주었다. 김새의 요청에 따른것이였다.

《참으로 훌륭한 기물을 보여주어 고맙소이다. 옥루기륜은 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하오이다. 우리 나라에도 해시계가 있고 물시계도 있지만 옥루기륜처럼 시간에 맞추어 해와 달이 뜨고지고 날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것을 앉아서 볼수 있게 하는 물시계는 없소이다. 매일, 매 시각 변하는 해뜨는 시각과 위치, 운동속도, 해지는 시각과 위치, 해가 떠서가는 자리길을 정확히 표시하며 돌아가는 물시계는 우리 나라에도 없고 온 세상에도 없소이다.

그것은 세상에 이런것을 만들어낼 사람이 없기때문이오이다. 그런데 조선에 있나이다. 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로소이다!》

장영실은 김새의 아낌없는 찬사에 겸양히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명나라는 큰 나라인데 어찌 사람이 없으리오. 너무 과찬하지 마소이다. 소인에게 금과 은을 뽑아내는 묘리와 경분, 주홍, 하엽록 같은 귀한 물건을 만들어내는것을 가르쳐주기를 바라오이다.》

김새는 겸허히 웃으면서 서로 알고있는것을 배워주고 배우자고 쾌히 응해나섰다.

며칠이 지나 장영실은 금과 은이 들어있는 돌을 한달구지 실어다 김새에게 주었다.

장영실은 금과 은을 뽑아내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품이 많이 들고 참숯이 어방없이 소비되므로 김새가 다른 방법으로 간단히 금과 은을 얻어낼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진것이였다.

그가 김새와 함께 자고깨면서 여겨보니 자기가 하던 방법그대로였다.

장영실은 배운것은 없지만 그가 게면쩍어할것 같아서 잘 배웠다고, 이제는 경분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주기를 요청하였다.

경분이란 의약품으로서 매독과 피부병에 즉효가 있고 또 살충제로도 쓰이도록 만들수 있는 귀한 약재였다.

김새는 조선의 이 유명한 재인명사가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어도 교만방자스럽지 않고 겸손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 자기가 알고있는것을 성심성의로 배워주려고 심뇌하였다.

당시에는 논밭에 늦벌레며 메뚜기며 여러가지 해충들이 성하는 해가 많았다. 비가 적당히 내리면서 낟가리를 잘해주는 해에는 백성들이 풍년을 내다보며 입이 벙글써해졌다가도 예상밖에 늦벌레들이 달려들어 농사를 망치고 굶주려 쓰러졌다.

산과 들에도 송충이가 무수히 생겨나서 솔잎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까닭에 푸르러 설레던 소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말라죽게 되였다.

지난해에는 대궐후원의 산기슭에 풍치수려하게 솟아서 경복궁의 운치를 한껏 돋구어주던 락락장송까지도 결단을 내였었다.

장영실은 어떻게 하면 해충들을 말끔히 없애버릴수 있겠는가를 늘 남모르게 속썩여왔었는데 뜻밖에 김새가 경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더 보태여 살충제로도 훌륭히 쓸수 있도록 완성해내였다.

장영실은 하얗고도 파르스름한 경분가루를 물에 타서 벌레들이 붙어있는 곡식포기에 뿌려보았다. 처음에는 벌레들이 대가리를 움츠리고 잠간 있더니 다시 곡식잎들을 먹어대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보니 벌레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죽어있었다.

그는 너무 좋아서 김새를 불러 보였다.

김새도 경탄해마지않았다. 이렇게 살충제로도 쓰이게 만들어낼줄은 그도 몰랐던것이다.

장영실의 기쁨은 무한하였다. 원쑤같은 벌레들을 깡그리 박멸할수 있는 약재를 얻어낸것이다.

이제는 중앙과 각 도, 각 고을에 경분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것을 각 처에서 만들어쓰게 하면 벌레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일이 없을것이였다.

장영실은 김새의 두손을 모두어잡고 흔들면서 영특하게 빛나는 눈에 한가득 웃음을 띠우며 말하였다.

《고맙소이다. 공은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는 방도중의 한가지를 가르쳐주었소이다. 내 이제 상감마마께 이 경사를 상주하겠소이다.》

김새는 자기의 공로는 덮어두고 전수이 자기 김새의 공로로 돌려주는 그를 경의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근심하고 또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주고싶었으면 저렇듯 순진한 아이들처럼 웃으랴.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지혜와 슬기를 가진 사람! 키는 작아도 진정으로 큰사람은 이 장영실이로다. 대체로 남보다 무엇이든 우월하면 자만하고 자만하면 교만해지고 교만하면 남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가 모르는것이 있어도 아는체 하면서 남이 공을 이루면 시기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높이 우대해주기를 바라면서 안하무인격으로 거드름을 피우기십상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서는 티끌만한 사심을 찾아볼수 없다.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고 백성들의 일을 자기의 일로 아는 사람만이 이런 마음을 지닐수 있다.

김새는 저으기 감동되여 장영실에게 물었다.

《공은 이제 또 무엇을 만들려고 하오이까?》

장영실은 밝게 웃으며 천진스럽게 《소인이 반드시 만들어야 할것이 꼭 하나 있는데…》 하고 하늘을 더듬더니 말을 이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저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얼마나 내리는가를 재는 기물이니다. 하오나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갑자르고있소이다. 명나라는 큰 나라인데 이런 기구가 없나이까? 있다면 또 가르쳐주시오이다. 그러면 백골이 진토된들 그 은혜를 잊으리까.》

김새는 한동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듯이 어리둥절하여 장영실을 마주보았다.

비오는 량을 재서는 무얼 하겠는가. 비가 적게 오고 많이 오는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비가 많이 오면 산곡간에 물이 중중첩첩할것이요, 적게 오면 강바닥이 마를것이였다.

김새는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공은 그것을 만들어 무엇에 쓰려고 하오이까. 우리 나라에는 그런 기물이 없고 소인도 그런것을 모르나이다.》

《비오는 량을 재는 기물이 있어야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도록 도움을 줄수 있을것 같소이다.》

장영실은 비오는 량을 재는 기물의 필요성을 실례를 들어가면서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장영실이 하는 말을 다 들은 김새는 그때에야 깨도가 되여 또 한번 감탄하였다. 이 사람은 과연 궁냥이 넓게 트이여서 남이 생각 못하는것까지 안고 그것을 이루어보자고 심혼을 바칠 용단을 품었고나. 그러나 그렇다고 비를 다 받아볼수야 없지 않는가. 비오는 하늘만큼이나 큰 그릇을 만들어 하늘밑에 놓는다면 되겠지만 그렇게는 할수 없는것이다.

이야말로 하늘의 해를 잡아보겠다고 따라다녔다는 옛사람의 일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노릇이다.

김새는 허허 웃었다.

《공이 백성들을 근심하는 그 마음에는 끝이 없지만 그것은 실로 가망이 없는 일이니다. 경은 출중한 재능과 아까운 시간을 거기에 썩이지 말고 무엇인가 다른 훌륭한 기물을 만들어내는것이 좋을듯 하오이다.》

김새는 진심으로 권유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의 장영실이 그것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영실은 옥루기륜을 만들어 여기에 날마다 뜨고지는 해까지 붙들어 길들인 사람임을 상기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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