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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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즉위년 축하연을 지낸지 이틀이 지나 양녕대군은 리천으로 돌아갔다.

장영실은 아침 일찌기 광화문까지 따라나가 바래주면서 박대산을 가족과 함께 서울도 구경시킬겸 꼭 한번만이라도 보내주어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도록 해달라고 양녕대군에게 긴히 여쭈었다.

그는 참으로 누이동생 영아가 그리웠고 어린 성덕이가 보고싶었다.

영아는 또 한번도 보지 못한 형님이 보고싶어서 이번에 따라오겠다고 하다가 오지 못하여 안타까이 가슴을 태운다고 하였다.

양녕은 장영실의 간절한 소원을 듣고는 《그거야 어려울것이 무어냐. 나에게 벌써 그런 말을 했더라면 어찌 한번만이겠느냐.》 하고 쾌히 승낙하고 떠났다.

장영실은 양녕과 말을 견마한 박대산이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래워주다가 아쉬운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그는 양녕대군에게 차마 입을 열어 물어보지 못한것이 두가지나 있었다.

그 하나는 등문고를 치러 왔던 경상도백성들의 하정을 임금에게 품달하였는가, 품달하였다면 임금이 어떤 어지를 내렸는가 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영실 자기와 숙이가 한가정으로 되였는데 숙이의 노비신분을 벗겨주도록 양녕대군이 임금에게 말 여쭐수 없겠는가를 물어보는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급하지는 않았다.

노비라 해도 한마음한몸이 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누가 량반대가집 딸이나 혹은 부자집처녀를 안해로 삼으라고 떼주고 집을 준다 해도 숙이와는 아니 바꿀 장영실이였다.

숙이가 한생을 마칠 때까지 노비로 있다 해도 그는 끝까지 그와 함께 살다가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것이였다.

장영실은 숙이의 노비신분을 벗겨주는 일보다 더 무겁게 돌멩이처럼 가슴에 매달리는것은 멀고먼 길을 걸어와 등문고를 치고 하얗게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던 자기의 고향땅 경상도백성들의 일이였다.

임금이 그들의 곡진한 하소를 다 들어주었다면 양녕대군은 임금의 성덕을 칭찬하고 백성들은 그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을것이다.

그러나 대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연회에서 술을 지나치게 하여 정신없이 지내다가 경상도백성들의 정상을 품해달라던 청탁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도 있었다.

늘쌍 술에 취해있는 때가 많으니깐. 만약 양녕대군은 그랬다치고라도 등문고지기장이나 승정원관리들, 임금을 받드는 여러 신하들은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 일이 그냥 스쳐보낼 일인가. 어떻게 보고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장영실은 이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혹 신하들은 임금의 즉위년 축하연을 벌리는 날에 이런 불미스런 일을 여쭈어올리면 임금의 기분이 어떨가 하여 보고를 늦잡은것은 아닌가. 그래서 임금이 모를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겠지, 아무려면 상감께서 아시고야 모른체 하고 내버려둘수 없으시겠지― 하고 장영실은 가볍게 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불쌍한것은 백성들이였다. 먹을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거머쥐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이런 비참한 현실이 빚어지는 리유중의 첫번째는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먹는 관리들의 토색질에 있고 두번째는 심한 한재와 수재에 있다.

농사만 잘되고 풍년이 든다면 그래도 빼앗길것은 다 빼앗긴다 해도 그런대로 입에 풀칠이라도 할만한 쭉정이낟알이라도 남아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동래고을 관노로 있을 때 수차를 만들어 아래에 있는 물을 우로 흐르게 하고 물둥지를 만들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잡아다가 물이 못가는 밭으로 흐르게 하여 논밭을 적시지 않았던가.

그것이 농사에 크게 도움이 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요긴한것은 온 나라에 비가 얼마나 왔는가를 알고 제때에 대책을 해야 농사도 더 잘 짓고 또 여러가지 나라일을 방비할수 있는것이였다.

그러면 온 나라에 내리는 비량을 어떻게 재겠는가. 어떤 기물이 있어야 하겠는가.

그는 고개를 짓수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나니 자기앞에 웬 사람하나가 서서 공손히 절하는것도 미처 알아볼수 없었다. 또 그뒤로 두사람이 들것우에 사람을 눕혀가지고 오는것도 보지 못하였다.

주자를 빨리 끝내고 온 나라에 비오는 량을 알아낼수 있는 그 어떤 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장영실은 이 일도 급하고 저 일도 다 급하였다. 백성들을 위한 일은 어느 일이나, 어느때나 다 급한 일이였다.

《저어… 나리님, 황송하지만 말씀을 좀 묻자고 하옵니다.》

앞에 선 사람이 이렇게 말해서야 그는 고개를 들고 웬일이냐 하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을 물은 사람은 해진 베잠뱅이에 때묻은 베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중년배였다.

그는 배허벅에 마디불거진 큰 손을 포개고 주눅이 든 눈빛으로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상대가 키는 작고 체소하지만 전립에 전복차림을 한것을 보고 높은 량반관리로 여겼던지 대단히 송구스러워하였다.

《예, 무슨 말을…》

장영실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들것에 누워있는 사람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소인네는 경상도백성들이옵나이다.》

베잠뱅이중년배는 들것에 누워있는 사람을 소심히 가리켜보이였다.

《이 사람이 위태롭소이다. 이대로 고향으로 내려가다가는 로상에서 잘못될것 같아서 의원을 찾아뵈오고 급히 손을 써야 하겠는데 의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사옵고 또 의원을 뵈왔다 해도 우리같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겠는지 모르겠사와… 이 최서방은 죽지 말아야 할…》

베잠뱅이중년배는 당장에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인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였다.

이 키작은 량반이 《그런데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 별난 놈들을 다 보겠고나. 이놈들, 어서 썩 길을 비키지 못할가.》 하고 꽥소리를 지르지나 않을가 하는 예감이 들었던지 급히 말을 이었다.

《나리님, 사람 하나 살려주소이다. 그러면 눈에 흙이 들어간들 그 은혜 잊으리까.》

중년배는 애걸복걸 절을 하며 빌었다.

장영실은 얼른 들것곁으로 바투 다가서서 다급하게 최서방이라는 사람의 얼굴이며 어깨며 가슴을 더듬었다.

상투가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은 피자욱이 랑자한 얼굴을 어지럽게 가리웠다. 피멍이 든 눈두덩은 혹처럼 부어올랐다.

몸은 대틀인데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 가려볼수가 없었다. 입고있는 무명바지저고리도 여러군데가 찢어져 검푸른 상처자국이 험상궂게 드러났다. 숨결은 있는지 없는지 기맥이 통하지 않았다. 실오리같은 명줄이 금시라도 끊어질것 같았다.

지나가던 어떤 량반자 하나가 들것을 기웃이 들여다보고는 못볼것을 본듯이 이마살을 찡그리며 제갈길을 갔다.

또 하인을 동반한 부자집사내는 하인이 들것을 보며 주춤거리자 《무엇이 볼것 있다고 꾸물거리느냐. 어서 따라서지 못할가.》 하고 되게 욕설을 퍼부어대며 지나갔다.

장영실은 들것에 누워있는 사람이 가엾어졌다.

《어서 나를 따라오시우.》

장영실은 다른 말은 없이 《어서, 어서…》 하고 경상도사람들을 서둘러 독촉하며 제잡담 걸음발을 급히 떼였다.

경상도사람들은 너무나 반갑고 감동되여 《네, 네―》 하고 셋이 한꺼번에 다 함께 대답하며 장영실의 뒤를 따랐다.

장영실은 반주검이 된 사람이 등문고를 치고 잡혀가서 형장을 지독스럽게 맞고 궁성밖으로 내쳐졌던것임을 알수 있었다.

임금이 있는 궁성안에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대궐밖으로 내친단 말인가.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이라 해도 형장을 이리도 모질게 치려면 임금의 승낙이 있어야 하거늘 이 어찌된 일이냐. 임금이 이렇게 하라고 내버려두었단 말인가.

몇해전에는 행차를 멈춰세우고 김을지의 억울한 사정을 끝까지 들으며 가엾이 여겨주던 임금이 오늘은 등문고를 치고 살길을 열어달라는 청원을 받아줄 대신에 이렇게 죽도록 형벌을 가하라고 하였을가.

장영실 나에게는 날이 갈수록 은총을 베풀면서 영아의 노비신분도 벗겨주고 숙이도 내 집으로 보내준 성상이 불쌍한 백성들을 무지하게 처벌하겠는가.

방금 양녕대군이 함구무언으로 떠난것은 임금의 어지로 이런 참변이 일어난 까닭일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일가.

이렇게 생각해도 모를 일이고 저렇게 생각해보아도 의심스러워졌다.

아침해는 어느덧 락타산 두 봉우리에 높이 올랐다.

장영실은 마침내 청계천기슭의 자그마한 자기 집앞에 이르렀다.

그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들것을 맞들고 따라온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여보―, 여보!―》 하고 숙이를 급히 찾았다.

《나리님이셔요?》

숙이는 하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반갑게 부엌문을 나서다가 남편이 데려온 사람들을 보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하고는 다음순간 소스라치듯 놀랐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사람이 들것에 누워있는것을 본것이다.

《여보, 어서 아래방을 내우. 사람을 살려야겠네. 따스한 아래목에 이불을 펴고 상한 사람을 눕혀야겠네.》

남편의 목소리에 동정이 깊이 내보이고 서두르는 동작이 급해하는것을 본 숙이는 별안간 가슴이 널뛰듯 하였다.

이 웬일일가? 남편이 아침일찌기 리천으로 돌아가는 양녕대군을 바래워주러 나가더니 혹… 양녕대군마님이?… 하는 생각이 번개쳤다.

《네네, 알았어요.》

숙이는 허둥지둥 방안으로 들어갔다. …

하루가 지나서 병자의 의식이 돌아서고 또 하루가 지나서 눈까풀이 움직이더니 실눈이 떠지고 또 하루가 지나서는 신음소리도 가늘게 흘러나왔다.

의원을 불러 좋다는 약은 다 구해먹이고 상처에 좋다는 약은 다 얻어붙이면서 장영실과 숙이는 지성을 다하였다.

경상도사람들은 집주인내외가 손을 맞잡고 제 혈붙이처럼 최서방을 위해주는데 너무나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였다.

이들은 이 키작은 량반이 정말 량반은 량반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인정사정 많은 량반을 이때까지 본 일이 없었던것이다.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것 없는 방안, 다만 낡은 궤짝 하나와 그우에 포개얹은 이부자리 한채뿐이였다.

경상도사람들은 이 집 주인이 비록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째지게 가난하다는것을 알고는 감동이 컸다.

그들은 날마다 서울장안을 누비면서 삯일을 해주고 쌀되박과 병자의 입맛을 돋구는 고기반찬과 같은것을 부지런히 사오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씨고운 숙이는 미안스러워 어쩔줄 몰라하였다.

《자꾸만 이러시면 송구해 어떻게 하겠나이까.》

《우리가 댁에 페를 끼쳐 송구해 죽을 지경인데… 오히려 마님이 이같이 말씀하오니 이 은혜를 살아서는 다 갚을길 없소이다. 마님…》

경상도사람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고개를 숙이였다.

《아이참, 소비가 마님이라니요. 호호호… 어서 들어가 저녁진지를 드셔요.》

숙이는 늘 밝은 얼굴과 명랑하고 활달한 목소리로 죄송해 어쩔줄 모르는 경상도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군 하였다.

장영실은 병자가 살아날 가망이 보이자 숙이에게 맡겨두고 주자소에 나갔다.

그는 비오는 량을 재는 기물도 연구할래, 군기감 야장간에서 한창 만들어내고있는 새 화포가 제대로 부어지는지 일일이 돌봐주기도 할래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수 없는 일이 많았다.

날과 날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어느날 저녁 장영실은 오래간만에 일찌기 집에 들어왔다. 때마침 토방에 나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던 경상도사람들이 반갑게 일어나 꾸벅꾸벅 절을 하였다.

최서방도 곁따라 일어섰지만 웬놈의 량반관리가 시끄럽게 왔냐하듯이 자세히 보지도 않고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는 이때껏 정신없이 앓고있은탓에 이 집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나리님, 지금에야 들어오시나이까.》

나이지숙한 베잠뱅이가 송구히 량수거지를 하고서 례절을 차리였다.

《예, 내 일만 내 일이라고 해서 참말 안되였소이다. 앓는분은 좀 어떻소이까?》

장영실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잰걸음으로 토방가까이 다가갔다.

최서방은 명랑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언뜻 눈을 들어 량반을 바라보았다.

《예, 퍽 나았소이다. 나리님덕분에 이제는 사람이 바깥출입을 하게 되였소이다.》

베잠뱅이중년배가 최서방의 손을 잡아쥐고 말하였다.

《여보게 최서방, 이 댁 나리님일세. 큰절을 드리게. 다 죽게 되였던 임자를 댁에 데려다가 살려낸 나리님이란 말일세.》

하지만 최서방은 박힌 말뚝처럼 그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두눈을 슴벅이였다.

피에 젖고 찢어졌던 그의 무명바지저고리는 숙이가 빨아 기워서 깨끗하였다. 그러나 상처입은 얼굴은 부종이 내리지 않아서 본래의 모상은 가려보기 어려웠다.

《저… 소인이 꿈을 꾸는지 모르겠소이다만 혹 장영실호군님이 아니시오? 응?!… 아니, 나리님이 분명하오이다. 아― 나리…님… 소인이 동래현 최팔매… 최오석이올시다!》

최서방이 새의 날개처럼 두팔을 활짝 펼치며 나오는데 부어오른 얼굴은 웃는지 우는지 모르게 찡그려졌다.

《으응?! 최팔매라니…》

최서방을 바라보는 장영실의 눈에는 섬광처럼 기억의 빛발이 확― 살아올랐다.

《정말 최팔매, 최오석이군! 갈데없는 최서방이우! 아이구, 이런 변이라구야… 형님―》

그는 두팔을 앞으로 내뻗치며 마주나가 최서방을 덥석 그러안았다. 두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였다.

《아, 이게 몇해만이우.》

《사람이 죽지 않고 살면 아무때나 만난다더니… 이렇게 만날줄이야… 나리님, 큰절 받으시오이다.》

최서방은 큰몸을 엎드리려 하나 상처입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이러지 마우. 절은 무슨 절… 절이라면 이 사람이 먼저 형님앞에 해얄텐데.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장영실은 최서방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참말 꿈같소이다. 원참, 이렇게 만나다니…》

물동이를 이고 숙이가 마당굽에 들어섰다. 그는 최서방을 부축해 방안으로 이끄는 남편을 보자 반가운 웃음을 곱게 피워올렸다.

《지금 들어오셨나이까?》

《당신이요, 빨리 오우. 이 형님이 바로 내가 말하던 최서방이요. 그 최오석형님이라니깐. 어서 인사를 드리우. 내가 고을관노로 있을적에 나를 대신해 형장을 맞겠다고 나섰던 동래군기소 그 장공인형님―》

《네?! 그렇소이까, … 아이구나!》

숙이는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최서방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그의 두눈에 점차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장영실의 지난날 이야기를 눈물속에 듣고는 세상에 고마운분도 있었구나 하고 늘 생각케 하던 사람을 집에 두고서도 몰라보았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는 얼른 물동이를 내려놓고 최서방앞으로 나아가 두손을 땅에 짚으면서 큰절을 하였다.

《아주버님… 우리 나리님은 손우형님처럼 자기를 돌봐준 아주버님을 어느때나 잊지 못하고있사오이다. 쇤네도 마찬가지루… 언제면 보답할가 했더니 이렇게 뵙게 되여…》

그리고는 목이 메여 뒤말을 잇지 못해하였다. 참말 장영실이 최서방의 후더운 정을 얼마나 많이 받아왔던가.

장영실이 노비로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떠나갈 때 아직 어린 영아를 옆집 할머니와 함께 돌봐준 일, 그후에는 또 호군벼슬을 받고 첫번째로 마을돌이차로 동래에 와서 고을의 화포를 수리해줄 때 쌍메질군으로 장영실의 손발이 되여주던 일, 상호군의 높은 벼슬을 받고 두번째로 마을돌이를 갔다가 노비의 멍에를 벗은 영아를 데리고 갈 때 영아가 타고갈 자기 집 말을 아낌없이 내준 일…

숙이는 만약 남편이 무슨 일로 형장을 맞아야 한다면 이제는 내가 대신 맞으리라는 생각을 굳혀준 이 최서방앞에 두번다시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최서방은 당혹히 두손을 가로저으면서 숙이를 말리였다.

《아니웨다. 이러면 안되오이다. 소인이 상호군나리님댁에 렴치없이 머물러 오래동안 병구완을 받으면서도 뉘집인지도 알지 못했으니 죄송하오이다.》

《하하… 형님을 데려왔지만 형님이 누구인줄을 몰랐으니 죄송하기로 말하면 이 사람이 더하오이다.》

경상도사람들은 그들사이에 오가는 말을 들으면서 이들의 만남을 눈물겨워하였다. 마치 저희들도 장영실과 오래동안 헤여졌다가 뜻밖에 만난것처럼 무한히 기쁘고 반가왔다.

그들은 장영실을 처음 보지만 관노로부터 높은 벼슬에 오른 소문은 크게 나서 장영실의 이름만은 오래전에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온 나라에 이름난 사람의 집에서 갚을길 없는 신세를 지고있을줄을 몰랐다.

《형님,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상처랑 좀 봐야겠소이다. 여보, 얼른 밥을 지어야지.》

《네에― 아주버님,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오이다.》

숙이는 장영실과 함께 최서방을 부축해주었다.

최서방은 착하고 어질었지만 대가 발랐다. 무슨 일에서나 옳고그름을 갈라보고 옳은 편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제 몸을 내대고 도와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견디는 사람이였다. 이런 최서방이기에 이번에도 등문고를 친 사람을 대신해 매를 도맡아 맞은것이 분명하였다. 어떻게 되여 그 많은 사람중에 최서방만이 유독 형장을 맞았는가를 장영실이 물으니 그는 순박하게 허허 웃었다.

《소인만이 아니구 몇명이 다같이 맞았소이다. 처음에 등문고지기장이 등문고를 친 선비를 묶어가려고 하자 선비는 〈오냐, 내 한몸이 형장을 맞아서 죽는다 해도 백성들의 살길이 열린다면 이 몸이 백인들 내대지 못하겠느냐. 〉 하고 나섰소이다. 얼마나 장한 선비리까. 하지만 선비의 몸이 어찌 백이 되오리까. 그래서 백성들이 〈나도 잡아가라. 우리 모두 묶어가라. 〉 하고들 말렸소이다. 소인도 내 몸을 바쳐서 보태리라 하였소이다. 허허…》

최서방은 허리가 아파서 한동안 주무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놈들이 나를 떡치듯이 되게 치더니 〈너 이놈, 이실직고아뢰여라. 너희 놈들이 날을 골라 부디 오늘에 등문고를 친 리유가 무엇이냐?〉 하고 물었소이다. 소인이 〈오늘은 대체 어떤 날이기에 오늘, 오늘 곱씹느냐. 내사 모르니 알거든 대달라. 〉 했더니 〈야, 이놈 봐라. 제편에서 야료를 부리는고나. 〉 하고는 도끼로 생나무를 패듯하고는 〈상기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단 말이냐. 한번 더 야료를 부려보아라. 모가지 없는 귀신으로 만들어줄테다. 〉 하면서 개치듯 하는데 그때는 몸이 아프지는 않고 다만 눈앞이 어두워오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더이다. 소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대답하였소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내사 알겠다. 오늘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날이 아니고 무어냐. 〉 하고는 그다음엔 무엇이 어떻게 되였는지 몰랐소이다.

허허… 그참… 나리님, 정말 우리가 등문고를 친 날이 무슨 날이오이까. 소인은 지금도 모르겠소이다.》

최서방은 눈두덩이 부어올라서 실오리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장영실은 그날이 바로 임금의 즉위년 축하연을 벌리는 날이라고 대답해줄수 없었다. 이날은 임금이 즉위하여 스물세해동안 하루같이 선정을 베풀어 나라가 태평해지고 물산이 풍부해진 덕분에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였다고 큰 잔치를 차린 날이다. 이런 날에 그와는 반대로 백성들이 하얗게 모여와 정사를 바로잡아달라고 등문고를 쳤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는가.

장영실은 대답이 궁해서 공연히 《어험, 어험.》 밭은 기침을 하다가 말머리를 슬그머니 돌리였다.

《형님은 저 하나보다 여럿을 위하는 마음은 예나제나 여전하오다. 영아는 형님이 타고가라고 준 새매를 지금껏 애지중지 돌보면서 요긴하게 부리고있소이다. 어느때건 돌려준다고 벼르고있지만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최서방은 영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방금 자기가 묻던 말도 다 잊어버리고 성급히 장영실의 말을 도중에 끊어놓았다.

《영아가 어디에 살고있소이까? 노비신분을 벗고 나리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던 모습이 생생하오이다. 이제는 시집을 갔소이까?》

《그랬수, 리천에 사는 끌끌한 사내대장부와 혼례를 치르었소이다. 서로 뜻이 맞구 금슬이 좋아서 행복하게 살고있소이다. 하하…》

《아, 그렇소이까. 그참 잘되였소이다.》

최서방도 기뻐서 껄껄 웃었다.

장영실은 최서방에게 좀더 자상히 말해주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 없어서 몹시 죄송하였다.

영아의 남편이 다름아닌 그 김을지라고,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양녕대군의 령지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못하는것이 괴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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