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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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박대산의 귀에 쏙쏙 들어와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새겨지였다.
뼈를 녹이고 살을 깎아내는 노력으로 임금의 성은에 보답하는 그 성정이 한없이 돋보였다. 또 이런 처남을 둔
그러나
밤은 깊어갔다.
영추문 담너머 들려오는 금척무(궁중무용의 한가지, 임금의 성덕을 례찬하는 노래와 춤)의 노래가락에 실려 북두칠성의 꼬리가 서쪽으로 돌아가고 삼태성도 인왕산의 거밋거밋한 봉우리로 기울어졌다.
장영실의 이 자그마한 집에서도 임금의 이야기로 밤가는줄 몰랐다.
《형님, 옥루기륜이 지금도 잘 돌아갈테지요?》
《몇년이 지났지만 시작처럼 잘 돌아가네. 파루도 인경도 옥루기륜에 맞추어 울린다네.》
《그참, 그러니 형님이 온 나라에 자고 깨는 시간을 매일마다 알려주는셈이 아니시오? 하하…》
《그런가, 하하하. 아닐세. 임금이 알려주는걸세.》
장영실의 말 뒤끝이 또 임금의 지덕으로 번져져서 박대산의 가슴을 후덥게 하였다.
《죄다 상감마마의 덕이로소이다. 상감마마께서는 백성을 위해 우리 글까지 만드시는데 백성들은 왜 해마다 굶어죽는지 참말 모를 일이오이다. 오늘만 해도 경상도에서 천여명이나 올라와 등문고를 쳤소이다. 공법이 백성들을 굶기는 법이라는거지요.》
박대산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악덕관리들이 있다 해도 어진 정사를 펴는 임금이 있는 이상 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지 그 까닭을 알고싶은듯 의문짙은 눈길로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허나 오히려 장영실편에서 두눈을 휘둥그레 뜬다.
《공법? 공법이 무엇이길래 백성들을 죽이는 법이란 말인가?》
장영실은 자기의 일에만 파묻혀서 다른 일은 관심밖에 있었기에 공법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는 경상도 동래현 관노로 있을 때는 물론이고 상호군벼슬을 받고 고향에 마을돌이를 다녀올 때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고 그나마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백성들이 류랑걸식하는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임금에게 있는 그대로 아뢰였지만 근래에 와서는 군기감의 야장간, 언문청의 주자소, 선공감의 목기장들을 엇바꾸어가면서 낮이나밤이나 일에만 옴해있었다.
밖에서는 봄과 가을이 바뀌는줄도 모르고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제할 일에만 빠져있던 그가 어찌 공법을 알수 있을텐가.
량반사대부들은 춘하추동 사시절이 바뀔 때마다 기생들을 끼고 경치좋은 곳을 찾아다니였다.
꽃이 피니 춘절이요
잎이 피니 하절이요
단풍 피니 추절이요
눈꽃 피니 동절이라
님과 함께 있고지고
량반들은 이런 노래를 가야금과 장고장단에 태워가며 술에 취해 세월을 보냈지만 장영실은 그런것을 다 몰랐다.
박대산이 공법을 말해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장영실은 그 말을 다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탄식하였다.
《중간에서 고약한 놈들이 그같이 놀아나니 공법이 은을 낼수 없구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을수 없겠지. 흥, 망할 놈의 세상!―》
《형님이 무엇을 만들 때도 시기질투하는것도 그놈들이고… 그저 한몽둥이로 짓쳐버려야 할 놈들은 량반관리들이오이다.》
박대산은 또 언성이 높아졌다.
장영실은 그를 눅잦히듯 가만히 그의 무릎을 흔들었다.
《자, 고정하게. 못된놈들을 몰아내고 어진 량반을 취하는것은 임금의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상감마마의 천은에 보답하는것일세. 그래서 내 상감께 련을 하나 잘 만들어 올리려고 하네. 온 세상 고금의 황제나 임금들이 타는 련보다 더 훌륭히 만들려고 지성을 다하고있는중이라네.》
박대산은 장영실처럼 살고싶었다.
그러나 만사람이면 만사람이 다 장영실처럼 뛰여난 재주를 가질수 있으랴. 사람이 제 능력껏 나라를 위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형님, 나도 상감마마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것 아니오이까. 재주없으니 몸이라도 바쳐야 하오리다. 창과 칼을 들고 변방을 지키다가 한목숨 다해도 여한이 없겠소이다.》
박대산은 늘 품고있던 생각을 내보였다.
그는 임금이 나라의 변방을 중히 여기는것을 알고있었다.
《아니 뭐?! 군역을 다시 지겠다는 말인가?》
《저야 형님이 부러워하는 큰 몸집과 억센 팔다리가 있지 않소이까.》
《품은 뜻도 장하고 황소생뿔도 뽑을것 같은 힘도 있지만 일개군사로는 큰 공적을 떨칠수 없네.》
《나라에 한몸바치면 그만이지 다른것이야 무슨 소용에 닿으리까.》
《그야 그렇지만― 가만 성덕이 아버지, 한가지 좋은 수가 있네. 무과별시(특별히 치르는 무과벼슬을 위한 시험)가 몇달후에 있을 모양인데 거길 한번 나가보지 않겠나. 성덕이 아버지라면 장원은 떼놓은 당상이지. 그러면 어느 변방 만호라든지 천호라든지 작은 벼슬자리라도 받지 않겠나.》
장영실은 눈을 빛내이면서 한무릎 바싹 다가앉았다.
두사람의 앉은키는 엄청나게 차이나서 장영실의 머리가 박대산의 어깨에 닿을가말가 하였다.
《형님두, 내 벼슬재목이 못되거니와 그럴 생각두 없소이다. 하하하…》
《재목감으로 말하면 능준하네. 임자는 양녕대군을 호환에서 구해주고 년부력강(나이젊고 활동력이 강하다는 말)하니 조정에서도 아는지라 응시자격을 불허할 사람은 없네.》
별시를 보건말건 대산이 군역을 다시 지면 영아와 성덕의 곁을 떠나 머나먼 변방으로 갈것이였다.
대산이도 그 하나가 근심스러웠다. 그러나 제 집식구를 다 돌보고야 충효를 어떻게 다 하겠는가. 이런 생각이 두사람의 가슴에 소용돌이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