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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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산이 영추문을 향해 몇걸음을 떼나마나 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봐라, 너희들은 륜음을 받을지라―》 라고 웨치는 소리가 쨋쨋이 들려왔다.
바로 북각앞에 액정서(임금의 명령전달, 궁궐문을 여닫는 일을 맡은 관청)의 관리와 수문장(문을 지키는 장수)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우뚝우뚝 서있었다.
륜음(임금의 지시)이라니 양녕대군도 마상에서 내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부복해있던 백성들이 술렁거리며 머리를 더 깊이 수그리고 저희들끼리 가만가만 입을 놀렸다.
《여보게, 륜음이래.》
《이제야 기다린 보람이 있군.》
《공법을 고치려면 벌써 그랬어야지, 무릎가죽이 벗겨지도록 해놓구선… 원―》
《쉬― 이 사람 참형을 당하구싶나?》
대산이는 자기 발치앞에 궁둥이를 뻗치고 엎드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못들은척 하고 앞을 내다보았다.
백성들의 땀배인 등허리에 엷은 저녁노을이 비껴흐르고 만장우에 무덤속같은 적막이 깃들었다.
어떤 륜음이 내리겠는지 대산의 마음도 조여들었다. 경상도라면
동래현에서 영아와 처음으로 사귀였던 잊지 못할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그는 경상도 백성들이 남같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이 불원천리 찾아와 하소하는것이 얼음녹듯 풀리기를 바랐다.
마침내 액정서 관리가 《어험―》 하고 큰 기침소리를 한번 내고서 병아리무리속을 걷는 게사니걸음으로 장히 거드름스럽게 몇발자국가까이 백성들앞에 나섰다.
《여봐라, 너희들은 들을지라. 너희들은 어찌하여 언감생심 대궐밖에 무리지어 앉아서 방자스럽게 이 무슨 야료를 부리는가. 공법으로 말하면 피땀흘려 농사짓는 백성들의 수고를 가긍히 여겨 상감마마께옵서 친히 재상들과 의논끝에 공포한 전세법이 아니냐. 온 나라 8도 330여 고을중에 어찌 경상도만이 말썽인고. 이전에 실시한 손실답험법(한해수확이 떨어진 정도를 현지에 나가 논밭을 돌아보면서 판정하여 전세액을 감해주는 법)이 농사짓는 백성들을 괴롭힌다 하여 그것을 페하고 공법을 세우지 않았느냐.
논밭의 기름지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거기에 알맞는 고정된 전세액을 정한것은 백성을 살리는 법이노라.
너희들이 한해농사를 잘 지으면 그만큼 배부르고 농사를 게을리하면 그만큼 배고픈데 어찌 농사에 힘쓰지 않고 천여명이나 작당해서 무엄하게 덤비는고. 토지 1결당 실지 수확고가 400말이요, 그에 해당한 전세액은 도무지 20말밖에 안되는것조차 곱게 받아들이지 않고 언감(어찌 감히) 자행자지(제 마음대로 행동하는것)를 식은죽 먹듯 하느냐.
너희들이 오늘 아침 진시에 정당한 리유도 없이 함부로 등문고를 쳤기로 오시에 북을 울린자들을 잡아들이고 본보기를 보여주었지만 재차 등문고를 쳐서 대궐을 소란케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면서 임금께 불복하느냐. 엄벌을 받을지라.
북을 친자는 스스로 일어나 오라를 져라―》
부복해있던 백성들이 일시에 머리를 쳐들고 술렁이였다. 갓쓴 사람, 탕건을 쓴 사람, 베수건을 동여맨 사람 모두 너도나도 한마디씩 내뱉았다.
《잘두 한다. 오금이 아주 꺾어지도록 엎드려 바란것이 오라줄인가.》
《륜음인지 제 소리인지 알수 있나.》
《여게 최서방, 고향으로 내려가세. 일이 틀렸네.》
《그러기 말이야. 숱한 사람들이 등문고를 치면 수가 날줄 알았더니 죽을수가 났네. 흥…》
《내려가면 뭘하노. 집에 가도 굶어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매한가지 아닌가베…》
이때 전갈하인의 쨋쨋하고 째진 고함소리가 채찍같이 귀청을 때리였다.
《북을 친자는 순순히 일어나 오라를 받으랍신다―아―》
갑자기 주위가 감감 기척이 없었다. 누가 일어나 달갑게 오라를 지고 끌려가서 형장아래 피를 뿌리겠는가.
죽기를 겁내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랴.
허나 맨 앞줄에 앉았던 선비 하나가 일어나지는 않고 엎드린 그대로 전갈하인의 고함소리에 맞받아 웨치였다.
《북은 내가 쳤소이다. 오라를 받는것은 급하지 않사와 할 말은 하겠사오이다. 우리가 북을 치지 않을수 없은것은 저 북각기둥에 써붙인 글처럼 북을 울려 정사를 바로잡기 위함이요, 공법이 부당함을 지재지삼 천언만언으로 알리여 그것을 고쳐주십사 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였기때문이오이다. 공법은 손실답험법과 마찬가지로 피페가 많아 백성들은 만곡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에도 낟알을 다 빼앗기고 굶어죽소이다.》
선비의 목소리는 어느덧 떨리고 원한에 사무쳤다.
《언거언래(서로 말이 오가는것)는 불가하다. 할 말이 있거든 잡혀가 하랍신다―아―》
선비의 말을 칼날처럼 잘라버리는 전갈하인의 고함소리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그러나 선비는 용기를 가다듬고 제 말을 이어나갔다.
《공법에 토지 1결당 수확이 400말, 그 세액을 20말로 정한것은 상전(좋은 밭)을 기준한것이므로 상전을 독차지한 량반부자들에게는 리롭지만 땅이라고 할수 없는 돌밭하전(나쁜 밭)을 가지고있는 가난한 선비들과 백성들은 1결당 수확이 100말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데 어이 상전과 한가지로 20말을 전세로 물리오. 그나마 한재와 수재로 10말도 안되는 해에도 전세액은 전세액대로 20말을 물어야 하옵니다. 또 세줄이 동아줄같은 량반사대부들과 호부자들의 땅은 상전이라도 중등전(중간급의 밭)이나 하전으로 등급을 낮추어 매기고 의지할곳 없는 백성들의 땅은 하전이라도 중등전 혹은 상전으로 매겨서 전세를 받아가옵니다.
또 각종 부역으로 논밭을 묵이지 않으면 안되는 땅에서도 전세를 내야 하고 호조의 서울창고에 전세를 바치고도 고을에 내야 할 몫을 따로 마련해야 하오이다. 뿐만아니라 전세를 납부할 때 벼슬아치들에 대한 접대비도 백성들이 나누어 내야 하고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전세미의 운반비와 입강창가(한강창고에 전세를 바칠 때 무는 세), 입경창가(서울창고에 전세로 바칠 때의 부과세), 모미(자연감소되였다는 리유로 더 받은 부과세)를 바쳐야 하옵니다.
이같이 관리들은 기본 전세액을 정하거나 전세를 거두는 과정에서 협잡롱간을 부리여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기고 부과세로 또 한겹을 벗기는지라 백성들은 제가 지은 곡식을 구경만 할뿐이고 먹는것은 송기, 도토리, 바다나물, 칡뿌리이옵니다.
공법이 실시된이래 굶어죽은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류랑걸식하는 백성들이 수없나이다.
바라건대 공법의 부당성을 똑똑히 알고 소인을 잡아가겠으면 잡아가오―》
이렇게 말을 끝낸 선비는 선뜻 일어나 오라줄을 들고있는 라장앞으로 걸어갔다.
《어찌 진사님만 잡혀가겠소. 잡아갈라면 나도 잡아가오.》
초립을 쓴 농부 하나가 일어나 앞으로 나가자 맨상투바람인 중늙은이가 또 일어났다.
《등문고를 재차 친것으로 하면 우리모두가 저 진사님의 손을 빌려 친것이라 진사님만 잡아갈 까닭이 없소. 나도 잡아가오―》
《그렇소― 공법이 부당하다고 말한것은 우리모두가 저 선비의 입을 빌어 말한것이라 형장을 맞아도 다 함께 맞아야 공평하오. 여러분네들, 내 말이 합당하면 다 매를 함께 당합세다!》
이렇게 낡은 갓을 쓴 어느 한 생원이 의분을 터뜨리며 백성들을 일으켜세웠다.
《옳소이다. 나도 잡혀가겠소이다.》
《나도 오라를 받겠소.》
《나도 형장아래 죽을 각오가 되여있소!―》
저마다 격앙히 웨치며 열사람 백사람이 한꺼번에 액정서관리와 라장, 라졸들에게로 우르르 다가섰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잡혀가겠다는 진사는 사람들의 물결속에 싸여 뒤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겹겹이 앞에 나섰다.
관리들도 어느 누구 하나를 잡아갈수 없게 되였다.
그들은 당황해졌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잡혀가겠다고 일어날줄은 몰랐었다.
드센 라장, 라졸들을 수두룩이 데리고 나섰지만 천여명의 백성들을 당해낼수 없었다.
이 광경을 목격하는 박대산이는 이 사람들과 한동아리가 된듯이 저도 몰래 의분이 끓어오르는것을 느끼였다.
진사가 말한것처럼 터무니없는 조세를 걸머지고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가고있지 않는가. 임금이 아무리 좋은 법을 내놓아도 요리조리틈을 타서 갖은 롱간질을 여반장으로 여기는 관리들이 있는데야 백성들이 어떻게 허리펴랴.
대산이도 이런 놈들탓에 《도적》이 되였고 부모의 원쑤를 갚는것이 《살인죄인》으로 되였었다. 사람답게 살자고 《산당》의 웅거지에서 빠져나왔으나 아직도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을 감추고 살아갔다.
임금의 은총을 김을지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받았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 은총은 죽어서도 갚을길 없건만 그것을 꾸며낸 변성명으로 받고 사는것이 자나깨나 가슴에 걸렸다.
이것은 다 탐학한 량반관리들때문이다. 이런 놈들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백성들도 살수 없고 임금도 마음편할 날이 없다.
등문고를 울려야 한다. 간악한 놈들을 모조리 잡아없애야 한다. 백성들의 쌀독에 거미줄과 한숨이 서리고 도처에서 아사기로에 헤매이는 떼무리일뿐이다.
물고기도 제 놀던 물을 좋아하고 산새도 제 둥지가 있는 숲이 좋아 못 떠나 하거늘 사람으로 생겨나서 제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가련한 신세를 무엇으로 다 토설하랴.
《영추문으로 어서 가도록 하자.》
양녕대군이 대산이를 재촉하였다.
백성 천여명이 등문고를 치러 온것은 전고에 없는 일이여서 그로서도 임금을 만나 품할 생각이 큰것 같았다.
영추문너머 멀리 바라보이는 인왕산하늘가에 진홍색 락조가 비끼였다가 어느덧 엷어지였다.
북각근처에 솟아있는 늙은 느티나무의 무성한 가지우에는 언제 날아왔는지 까치들이 깍깍― 우짖었다.
아마도 잠자리를 보려고 날아들었다가 그전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뒤설레이는지라 저들도 불안초조한것 같았다.
대산이는 양녕대군이 세종에게 백성들의 소원을 알려 공법을 고치였으면 하는 심정으로 말을 서둘러 몰아갔다.
대군이 탄 백마의 금수안장에 고삐를 매인 부담마는 앞선 말을 잘도 따라왔다.
그들이 영추문앞에 이르니 날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대산이는 부담마에 싣고온것들을 사옹방(임금의 음식을 주관하는 부서)에 바치도록 해라. 그뒤에 장영실의 집에 묵으면서 나를 기다리거라. 이제 입궐하면 하루이틀 지나서야 퇴궐하리로다.》
《네, 알았사오니다.》
박대산은 대군마님이 영추문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량수거지로 부동해서 바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