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접동새
7
양녕대군이 리천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과 작별하고 떠나겠다는 전갈을 받은 세종은 편전으로 나가 양녕을 맞아들이였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형님이 밭갈이하려고 먼곳에서 오셔서 수고가 많았습니다.》
《수고야 주상이 하셨지. … 오늘은 참말 경사스런 날이옵니다. 온 나라 신하들과 백성들앞에서 임금이 직접 밭갈이하여 천하지대본이 무엇인가를 실천으로 깨우쳐주셨으니 하늘땅에 신비로운 감응이 있으리다.》
《허허, 그거야 해마다 늘 벌리는 일이지요. 자, 여기에 앉으소이다.》
세종은 양녕을 이끌어 걸상에 앉힌 다음 자기도 옆자리에 앉았다.
《주상이 나를 언제나 하루같이 형님으로 례우해주어서 황송하나이다. 얼굴이 축가고 몸이 허약해지는것 같은데 부디 보양하기를 바라나이다.
주상이 음식가지수를 줄이고 술도 끊으시겠다니 걱정이 크옵니다. 이해의 첫 밭갈이를 한 오늘을 계기로 음식의 가지수도 더 늘이고 술도 몸보신 약주로 적당히 드셔야 하오리다. 선대임금들도 그렇게 하였나이다.》
양녕이 이렇듯 진심으로 되는 근심을 터놓았다.
세종은 근래에 백성들이 류랑걸식하고 수없이 굶어죽는 이런 때에 임금이라 하여 어찌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가고 하면서 음식가지수도 줄이고 술도 끊는다는 지시를 내렸었다. 이런 일은 《어진》임금들이 예로부터 시행해오는 자기 반성의 전례이다.
임금이 술과 음식을 줄인다는것은 아래로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술과 음식을 줄인다는것을 말하며 또 그아래로 모든 지방의 량반관리들이 그와 같이 음식을 소박히 해야 한다는것이다.
임금이 술을 끊고있는 기간에 관리들과 일반백성들이 술놀이를 하는것이 발각되면 영낙없이 볼기를 맞거나 심해서 관리라면 벼슬을 삭탈당하고 백성이라면 신분이 노비로 떨어진다. 이것은 사치와 랑비를 막고 검박한 풍속을 세우는 정사의 한가지 방도였다.
《웃물이 맑으면 아래물이 맑겠지요. 햇곡이 나고 풍년이 들면 형님의 분부를 잊지 않겠나이다. … 오늘 보니 백성들과 신하들이 이번 밭갈이를 매우 좋아하는것 같소이다. 이번 의식을 주관한 례의사와 관리들에게 상을 내리고 더구나 보탑을 잘 만들어낸 장영실에게도 상으로 옷과 어주를 내릴가 하옵니다.
그는 보탑도 보탑이지만 새 화포도 만들어내여 북방오랑캐를 제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소이다.》
양녕은 감탄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장영실에게 상을 내리는것은 응당하옵습니다.》
《장영실은 임금의 정사를 잘 돕고 그 처남인 박대산은 형님의 생명을 보호해주고 또 형님의 사냥동무, 견마잡이로도 충실하니 박대산도 상을 받을만 하옵나이다. 형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박대산에게도 상을?! 그참 좋구말구요!》
양녕은 마치 제가 상을 받는것처럼 매우 만족해하였다.
세종은 양녕을 구원한 박대산의 이야기를 들은 때로부터 언제든지 그에게 상을 내릴 생각을 해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것을 실행하려는것이다.
그것은 박대산이처럼 자기의 상전을 위해서는 자기의 몸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백성들을 깨우쳐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이 박대산이가 김을지임을 알았다면 그가 아무리 양녕을 구원했다 해도 용서하지 않았을것이다.
김을지가 변성명하고 양녕을 속인 죄를 더 첨부하여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을것이다. 허지만 아직은 모르는 까닭에 이처럼 한사람을 놓고 상과 벌을 적용하려는것이다.
양녕도 박대산이가 누구인지 몰라 임금의 말에 매우 흡족해하였다. 그는 대궐밖에서 자기를 기다리고있을 박대산의 듬직한 모습을 그려보았다. 박대산이 자기의 반당이요, 견마군에게 상을 내리는것은 자기 양녕을 높이 례우해주는 뜻이 아니냐!
《주상이 베푸는 성은을 무엇으로 헤아리오. 고마운 이 마음 다 아뢰일길 없나이다.》
《다 제하기탓이옵나이다. 사람은 복이나 화중에서 어느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내오이다. 허허…》
문밖에서 두어번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나고 이내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충청도 양지현에서 급한 장계가 올라왔사옵니다.》 라고 여쭙는 내시 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어서 가져오도록 하오.》
세종과 양녕은 심상치 않은 예감으로 웃음을 거두었다. 세종이 봉인을 뜯고 장계문을 읽으니 글은 아래와 같았다.
《…신축일 청명전날에 의금부라장 하나와 라졸 넷이 충청도 양지현 죄인 김을지 부모의 묘소주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였사옵나이다. 조사해본즉 죽은 라졸들은 묘소를 지키고있다가 묘를 돌보러 오는 김을지를 잡으려 하였던것이옵나이다. 그러나 오히려 모두 죽음을 당했사오니 이는 분명 김을지가 저의 패당을 끌고왔던 모양이옵나이다.》
세종은 장계문을 손에 든채 이 중대사건을 어떻게 대처할가 하고 깊이 숙고해보듯이 편전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하더니 《형님도 한번 보시오이다.》 하고 장계문을 넘겨주었다.
장계문을 읽은 양녕은 대단히 놀라 《허허… 숱한 놈들이 갔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다니…헛깨비같은 놈들… 평시에 무술은 익히지 않구… 그 김을지란 놈도 못잡아…》 하고 분을 이기지 못해하였다.
세종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할수없이 김을지를 잡아죽이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그가 측은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측은스러움마저 씻은듯이 사라져버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형님, 너무 상심마시오다. 어지를 재차 내려 그놈을 기어이 찾아내도록 하리다.》
《아무렴, 꼭 찾아내서 극형을 내려야 하리다.》
양녕은 바로
밭갈이의식을 파한 뒤에 김을지란 놈이 백주에 리창배를 죽이고 《내가 김을지다.》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청명전날에 그 김을지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임금으로서 얼마나 근심이 많을텐가. 한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들이 꼬리를 물었고나. 방금 친경전에서 있은 김을지건은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면 하였다. 오늘의 소요를 알면 괴로와할 임금을 어떻게 볼수 있으랴.
그러나 일은 양녕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았다.
당직 승지가 긴급계문을 또 가져왔던것이다. 세종은 그것을 읽고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쩔수 없는듯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계문에는 양녕이 우려하였던 친경전에서 벌어진 사건이 세세히 적혀있었다. …
이날 저녁 세종은 어수선하고도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시종 온화한 웃음으로 임금다운 침착성을 보여주면서 밭갈이의식을 주관한 례조판서와 수고많은 관리들에게 품계를 올려주었다. 또 임금의 보탑을 훌륭히 만든 장영실과 그의 매부이고 양녕대군을 호환으로부터 구원하여주었을뿐만아니라 이번 양녕대군의 반당으로 수고한 박대산과 그의 안해 영아에게도 각각 옷 한벌씩을 상으로 주었다.
이리하여 조정의 관리들은 장영실의 누이동생과 매부가 양녕대군의 령지에서 산다는것을 다 알게 되였다. 이로써 박대산이 숨어사는 《죄인》이 아니라 임금의 상까지 받은 량인백성이라는것이 조야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것은 박대산이를 그 누구도 함부로 의심치 않게 감싸주었다.
세종은 다음날 밭갈이의식에 관한 반포문을 온 나라에 내려보내면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거의 완성되여가고있는 우리 글을 빨리 매듭지어야 할 리유를 여러가지로 말하였다. 그 한가지 례로 이번 밭갈이반포문도 우리 글로 지어 내려보냈다면 백성들이 그 글을 쉽게 읽고 감동되여 구슬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지을것이 아니냐 하고 그루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