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접동새

3

 

인왕산 남쪽골안은 펑퍼짐한 지세를 안고 이리구불 저리구불 산굽이를 돌아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

이 인왕동은 한성안에서 두번째로 꼽는 풍치좋은 곳이다. 첫째로는 삼척동이고 그다음이 인왕동이요 그다음은 쌍계동, 청학동이 순서이다.

인왕동은 풍치로 치면 두번째이지만 활터로는 첫번째로 꼽았다. 그래서 성안사람들이 활을 쏘러 많이 다니였다.

골짜기를 이룬 나지막한 두 산줄기들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였다.

눈이 오고 눈보라가 일고 강이 얼어붙던 겨울은 어느덧 소리없이 찾아온 립춘절기에 자리를 내여주기 시작하였는데 제일선참으로 이 골안에서 물러간듯 봄빛이 가득하였다.

더구나 이 골안에 봄의 생기와 활력을 더해주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때아니게 덩그렇게 솟아난 천막이였다. 이 천막은 임금이 림시로 드는 어막이였다. 두어칸넓이에 사람의 앉은키만큼 흙을 올려 단을 짓고 네귀에 주홍빛 나무봉을 세워서 기둥으로 삼고 야청색 비단천을 씌워서 지붕을 삼았다. 량쪽면과 뒤면은 누른색 비단천으로 빙 둘러쳤다. 터놓은 앞면으로 호랑이가죽을 씌운 등받이의자가 위엄스럽게 보였다.

어막앞으로부터 웬간히 높은 목청으로 소리쳐도 들을만한 곳에 새로 부어만든 화포 3문이 든든한 받침대들에 놓여있었다. 화포받침대는 화포를 고정시킬뿐만아니라 포신을 상하로 또는 좌우방향으로 각도를 조절할수 있게 만들었다.

이 화포들의 300보앞에 제웅 다섯틀이 세워져있고 또 그앞으로 700보나아가서 말탄 군사 제웅 두틀이, 또 거기서 800보앞에 오랑캐의 장수기발이 꽂혀있는 군막처럼 보이게 만들어놓은 나무단들이 쌓여있었다.

화포에는 매 화포마다 화포장 하나와 화포군 2명이 붙어있었다. 그들은 벌써 화포사격태세를 갖추고 상호군 장영실의 검열을 받고있었다.

전립을 쓰고 람천릭을 입은 장영실은 몸이 체소하여 마치 싸움마당에 나선 소년장수의 모습과 같았다. 그는 영민한 눈길로 화포를 일일이 돌아보고는 만족한듯 씽긋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티없이 맑고 천진스러운 웃음이다. 그 웃음에는 《너무 긴장하면 몸이 풀리지 않아서 어망결에 실수할수 있다. 상감마마께서 화포쏘는것을 구경하실뿐이다. 마음을 놓으라. 그대들은 부모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아이들처럼 아무런 걱정말고 침착하게 제웅들을 잘 겨누어 쏘아야 한다.》라는 말없는 당부가 어려있었다.

사실 장영실도 긴장해지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임금앞에서 제웅들을 단방에 불태워버리지 않으면 임금의 큰 실망을 살것이였다.

그는 지난 겨울에 또 한차례 하늘같은 성은을 입은 몸이다. 그것은 만복의 사건으로 얽혀들어간 《죄》를 임금이 덮어버린것이다. 외인은 출입이 엄금된 군기감 야장간에 드나든 죄를 범한데다가 불온한 말까지 한 만복을 두둔해주고 놓아준 자기가 어찌 무사하기를 바랄수 있었겠는가. 사헌부와 의금부에서는 장영실의 이같은 오만무례한 행위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라의 법이 우습게 된다고 련명으로 글을 올리였다.

그 글에는 장영실이 쟁인바치노비들과 한가마밥을 먹고 함께 자고 깨며 상하의 구별없이 놀아나는것은 량반과 상놈, 주인과 노비 귀천을 뒤섞어놓고 량반없는 세상을 바라는것이니 이를 어찌 용서할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규탄이 들어있었다.

세종은 그 글을 받아보고 비답을 내리기를 《장영실에게는 죄가 없다. 노비들과 한가마밥을 먹고 함께 일한것은 새 화포를 하루빨리 만들려고 집에 들어갈 짬을 내지 못하여 그런것이지 량반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런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장영실의 죄를 얼마든지 꾸며낼수는 있어도 장영실처럼 새 화포는 만들지는 못하리라. 너희들이 장영실을 대신해 새 화포를 만들어낼수 있다면 장영실을 파직시켜도 아까울것이 없다. 근래에 북방에서는 야인들이, 남쪽에서는 왜놈들이 연해변경을 무시로 침노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로략질을 무쌍히 하고있다. 누가 과연 위력한 화포를 만들어 나라와 백성을 위하겠느냐? 너희들인가? 너희들은 그렇게 할수 없다. 누가 장공인노비들과 한가마밥을 먹고 함께 자고깨며 함께 땀흘리며 과인의 뜻을 받들겠는가? 너희들인가?

너희들은 그렇게 할수도 없거니와 장영실과 같은 뛰여난 재능을 지니지 못하여 하려고 해도 할수 없는것이다. 장영실이 새 화포를 만드는데 방해하지 말것이다. 단지 만복이라는 노비 장공인에게는 형장을 쳐서 죄를 징계할것이다.》라고 하였었다.

장영실은 자기를 보호해주고 아껴주는 임금의 은총에 눈물을 삼키면서 그동안 꼭같은 새 화포 3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시험사격을 하게 되였다.

만약 임금이 참석하는 이자리에서 실패하면 배은망덕하다는 탈바가지를 쓴대도 할 말이 없게 되니 어찌 긴장하지 않으랴.

화포군인들도 장영실의 심금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치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웃음으로 고무해주는 상호군 장영실이 매우 돋보였다.

장영실을 위해서라도 목표물들을 반드시 명중시켜야 하리라고 화포군들은 마음을 굳게 다졌다.

화포장 하나가 화포군들의 심정을 모아서 장영실에게 《나리님, 일이 잘되리다. 화포를 보면 알지요. 포신이 종전의 포신보다 한뽐이나 길어서 명중률이 좋고 멀리 쏘게 되였소이다. 여직껏 화포를 많이 다루어보았지만 이렇게 희한스런 화포는 처음 보오이다.》 하고 말하며 싱긋이 웃었다.

골짜기어귀에서 뿔나팔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멀리 산굽이를 돌아나오는 기치창검속에 에워싸인 임금의 련이 보여왔다. 그뒤로 말을 타고 견마를 잡힌 문무관리들이 잇달렸다.

장영실은 임금의 행차를 잠간 바라보다가 화포군들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주의를 주었다.

《여러분들이 신심이 있어하오니 걱정이 없소이다. 다만 상감께서 화포를 다른 곳에 옮겨놓고 쏘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 화포가 가볍게 만들어졌는가, 군사들이 수월히 가지고 다니면서 쏠수 있는가를 친히 알아보기 위해서 그런 지시를 할수 있소이다. 만일 그런 지시가 내리면 우리가 이미 련습한대로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재빨리 북소리에 따라 움직이여야 하오이다.》

《알겠소이다!》

화포군들이 일제히 대답하였다.

임금의 련이 어막가까이 다가왔다. 장영실은 전립을 바로 쓰고 람천릭깃도 바로 여민 다음 임금을 맞으러 달려갔다.

임금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련에서 내려 어막으로 들어갔다. 갑옷투구차림의 내금위군사들이 임금의 좌우에 우뚝우뚝 벌려서고 어막앞에는 문무백관들이 품계별로 등차있게 반렬을 지어섰다. 그중에는 장영실을 고소한 군기감 판관 리사균이 꼬리자리나마 한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또 군기감 판관의 고소에 기초하여 장영실을 규탄한 글을 올리였던 사헌부, 의금부관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임금이 《너희들이 장영실을 대신해 새 화포를 만들수 있느냐?…》 하고 비답을 내리던 때가 생각나서 어막앞으로 다가오는 장영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리사균도 눈꼴이 시여서 고개를 외로틀었다.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안고 벌써부터 마음이 흐뭇하여 장영실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안도절제사의 겸직을 안고 외직에 나가있는 리천이였다.

세종은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대책을 세우는데서 가장 긴요한것중의 하나인 새 화포의 시험사격을 보여주고 새 화포가 그야말로 위력하다는것을 확인하면 그것을 긴급히 북방의 요충지에 가져다놓게 하려고 리천을 부른것이였다.

장영실은 임금의 어막앞에 나아가 황감히 부복하였다.

《상감마마, 상호군 장영실이 문안드리옵나이다.》

그의 쨋쨋하고도 맑은 목소리에 자기 임금을 만나는 감개무량함이 떠실려 멀리 기운차게 울려갔다.

《오, 그대의 목소리가 명랑하니 화포시험사격이 크게 성공할것 같고나. 그래 화포의 무게는 얼마나 줄어들었는고?》

세종은 반갑고 대견한 눈길로 장영실을 굽어보았다.

《종전의 화포보다 절반이나 줄어들어 70근이 되옵나이다.》

《절반이나?! 대단하고나! 70근이면 웬간한 장정이라도 능히 메고 다닐수 있겠다. 훌륭하도다! 화약은 그전 화포에 비해 어떠한고?》

《열에 3할이 줄어들었지만 위력은 두배나 커졌사옵니다.》

《음, 장하도다. 수고했니라―》

세종은 눈길을 들어 멀리, 가까이에 세워놓은 목표물들을 일별하고 거리가 각각 얼마인가를 알아보고 만족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저기 오랑캐장수의 기발이 꽂혀있는 군막까지 1 800보라면 좋다. 화포군들이 거기까지 화포를 메고 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 목표물들을 쏘게 할지어다.》

세종이 장영실이가 이미 예견했던바 그대로 지시하였다.

《예잇!―》

장영실은 부복했던 몸을 힘차게 일으켜 급히 물러나 화포진지가까이 매달아놓은 북앞으로 달려갔다.

세종은 반렬속에서 리천을 불러내여 자기곁에 세웠다.

《경은 장영실이가 성공할것 같으냐?》

《예, 반드시 성공할것이옵나이다. 신이 어제 새 화포를 본즉 이를데없이 정교하고 만들어낸 리치가 흠잡을데없이 훌륭하옵나이다.》

《경이 그렇게 믿는다면 과인도 믿겠노라. 하하―》

장영실이 북채를 높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세종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장영실과 화포군들을 바라보았다.

드디여 장영실이 처음엔 잦은 가락으로 북을 울리더니 나중엔 세번을 련거퍼 힘있게 북을 울렸다. 그러자 화포군 하나가 화포를 성큼 둘러메고 다른 화포군 하나가 화포받침대를 메고 화포장은 화약주머니와 철알주머니를 지고 다짐봉을 든 다음 씨엉씨엉 발걸음을 떼여나갔다. 이렇게 세문의 화포들을 메고 화포군들이 거의나 달리다싶이 기운차게 나가는것을 본 문무관리들은 놀라와하였다. 화포라면 말잔등이나 달구지에 싣고다니는줄만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냐? 사람이 저렇게 메고 다닐수 있는 화포도 있느냐? 그런데도 그전의 화포보다 위력이 두곱이나 크다니 장영실이야말로 나라의 보배로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화포군들이 어느 사이 오랑캐장수막까지 닿았다.

장영실은 잦은 가락으로 길게 세번 징을 울리였다. 그러자 화포군들은 몸을 획 돌려가지고 다시 본래위치를 향해 철수해왔다. 역시 걸음발이 처음과 다를바없었다.

잠시후에 화포군들은 제자리에 화포를 번개처럼 걸어놓고 사격준비를 끝냈다.

장영실은 또다시 북채를 높이 들었다가 세번을 힘있게 쳐서 북소리를 높이높이 울리였다.

《둥―둥―둥―》

북소리가 산천초목을 흔들면서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할 큰 변이 나리라는것을 예고하듯이 하늘땅에 메아리쳤다. 불현듯 세상이 멈춰서는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천지를 가르는 뢰성벽력처럼 화포 세문이 불을 뿜었다. 그와 함께 300보앞의 제웅 다섯틀이 그리고 1 000보앞의 말탄 군사제웅들이 일시에 불타면서 꺼꾸러지고 1 800보앞의 오랑캐장수막이 삼단같은 불길에 휩싸였다. 적장의 기발이 불타면서 꺾어졌다.

문무관리들은 꿈같은 생시에 한동안 넋을 잃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듯이 꼼짝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호위군사들도 자기의 직분을 잊은듯이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불타고있는 제웅들을 정신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세종은 기쁘기가 한량없어 《음!, 음!―》 하고 연해연송 고개를 끄덕이였다.

《경이 옳았소. 장영실이 아니면 만들수 없다던 화포를 과연 장영실이 만들어냈소. 보아하니 화포에 화약과 쇠알갱이들을 함께 다져넣은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야 화포 한발로 동안뜨게 서있는 제웅 다섯틀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릴수 없는것이요.》

세종이 리천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였다.

지금까지는 화포에 화살을 몇대씩 재워서 쏘았거나 완구포같은 화포에 큰 쇠공과 돌공을 날려보내는것으로만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살도 보이지 않고 쇠공과 같은것은 더구나 보이지 않았다.

《성상께서 장영실의 묘안을 꿰뚫어보셨나이다. 장영실은 300보앞의 제웅들을 쏘는 화포에는 콩알같은 연알을 50개를 다져넣었고 1 000보앞의 말탄 군사제웅을 쏘는데는 밤알같은 연알 25알, 오랑캐장수막을 쏘는데는 10알을 화약과 함께 다져넣었나이다. 그 많은 연알들이 휘뿌려져나가니 그중에 어느 한알이라도 목표물을 맞혀내지 않을수 없사옵나이다.》

《음, 그렇겠고나. 비결은 화포도 화포려니와 그에 못지 않게 탄알에 있소. 리치는 간단하나 그것을 누구나 쉽게 기안할수 없지. … 아니 저기 메돼지가 아니요? 화포로 저놈을 쏘아잡게 하오.》

세종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장수막 오른쪽 참나무숲속에서 메돼지 한마리가 나왔다. 그놈은 낮잠을 자다가 화포소리에 놀라서 뛰쳐나온듯 골짜기를 가로질러 마주보이는 왼쪽 산릉선을 바라고 냅다 뛰였다. 하더니 뚝 멈춰섰다. 화약냄새와 연기냄새에 그 어떤 위험한 낌새를 느꼈던 모양이였다. 메돼지는 흰덧이발이 나온 주둥이를 새납아구리같이 쳐들고 이쪽저쪽으로 돌려댔다. 어디서나 풍겨오는 불길한 냄새에 어찌할지 몰라하는것 같았다.

리천이 임금의 뜻을 어떻게나 급히 전했는지 화포군들이 재빨리 화약과 연알들을 다져넣고 부시들을 쳐서 불을 일으키고있었다.

메돼지는 잠시잠간 서있더니 도망칠 길을 찾은듯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뺑소니쳤다. 그러다가 불타고있는 오랑캐장수막과 맞다들었다. 그놈은 화들짝 놀라서 급기야 왼쪽으로 길을 틀어서 아래쪽으로 내뛰였다. 소나무숲이 가까와졌다. 이제 눈깜박할 사이면 메돼지는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아, 놓치겠다. 놓치겠어―》

누군가 이렇게 아쉽게 중얼거리며 손에 땀을 쥐였다.

《꽝!―》

화포 하나가 벼락치듯 불을 토하였다. 그 순간에 메돼지는 껑충 뛰듯 몸을 솟구치더니 그자리에 딩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엇―허―》

문무관리들의 탄성이 터졌다. 세종도 어좌에서 성큼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수염을 내리쓸었다.

《장하도다! 내가 화포쏘는것을 여러번 보아왔건만 이번처럼 희한스러운것은 처음 보았노라. 여봐라, 상호군 장영실을 가까이 불러들이도록 하라.》

잠시후에 장영실은 임금앞에 황공히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다. 세종은 가장 반가운 사람을 맞이하듯 단을 내려 장영실을 손잡아 일으켜주었다.

《그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소! 이런 화포를 더 많이 만들어내면 북방에서나 남쪽에서나 오랑캐들이 함부로 쏠라닥거리지 못하리로다. 하하…》

세종이 호탕히 웃으며 좌우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지당하옵나이다.》

문무관리들도 탄복해마지않았다.

《장영실이야말로 어떤 어려운 일도 맡아서 해내는 가감지인이로다. 예로부터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공을 바치고 임금은 신하들에게 상을 내려 고무하는것이니 과인은 상호군에게 큰 상을 내림이 마땅하도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고? 어서 말해보오.》

장영실은 머리를 깊이 수그리였다.

《황공무지로소이다. 비천한 노비출신에게 성상께옵서 내리신 성은은 산을 이루었는데 이제 무슨 소원이 더 있겠사오니까. 성상께서 이처럼 기뻐하시니 그것이 바로 소신이 받는 큰 상이옵나이다.》

장영실이 목이 꺽 메여 하고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였다. 그는 임금이 만족해할 일을 많이 해놓고 숙이와 혼례를 치르도록 허락을 받아보리라던 약속은 까맣게 잊고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잊었던 생각을 틔워줄줄 어찌 알았던가.

《그대의 대답이 기특하도다. 과인이 듣건대 그대는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지. 어서 가정을 뭇고 그대와 같은 재인재사를 낳아 대를 잇게 하오. 그래 보아둔 처녀는 있소? 허허…》

세종은 마음이 흥그러워져서 이렇듯 사사로운것까지 관심하여주었다.

장영실은 불시에 숙이가 눈앞에 보여오고 그가 웃으며 《나리님은 소녀가 없으면 안되와요. …》 하는 말이 귀에 쟁쟁해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지난해 누이동생 영아를 노비에서 해방시켜준 임금에게 또다시 숙이의 노비신분을 벗겨달라고 아뢰일 때가 온것이다. 허나 임금이 불허하면 여쭙지 않은것보다 못하다. 그렇게 되면 숙이와의 혼사는 영원히 이루어질수 없을것이였다. 숙이는 실련을 이기지 못하고 양녕대군을 사랑하던 어리라는 처녀처럼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 숙이가 이 세상에 없다면 내 살아 무엇하겠는가. 아니다. 상감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자. 그러자 그렇다면 너는 어이하여 박대산이 김을지임을 있는 그대로 말씀을 올리지 않았는가 하는 웨침이 가슴속 어데선가 우뢰처럼 터져나왔다.

장영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또 한쪽가슴속에서는 장영실, 너는 그것을 말씀올릴 날이 있을것이다, 너는 그 사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여쭙지 않았을뿐이다. 자중하라― 하는 또다른 웨침이 우렁차게 울려나왔다. 그러자 가슴이 안정되고 심장이 고르롭게 뛰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상감마마, 소신은 후날 반드시 진실을 아뢰이겠나이다.》 하고 용서를 빌었다.

《대답을 못하는것을 보니 봐둔 처녀가 없는 모양이구만.》

세종이 빙그레 웃으며 장영실을 굽어보았다. 장영실은 그때에야 임금이 무엇을 묻고있었는가를 상기하고 임금의 은총이 여전히 자기 한몸을 감싸고있음을 새삼스럽게 느껴안았다.

장영실의 눈앞에는 숙이의 얼굴이, 그 간절한 눈빛이 방불히 떠올랐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여 숙이와 혼례를 치르게 하여줄것을 청하려다가 또다시 주저하였다. 그는 마침내 자기의 소원을 조금 늦추어 말하였다.

《소신이 지금껏 보잘것없는 재능이나마 바쳐올수 있은것은 소신이 일에 전념할수 있도록 십여년세월 끼니를 지어주고 옷을 빨아주고 앓을 때면 병구완도 해주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심정력을 다 바쳐온 녀자가 있기때문이옵나이다. 봐둔 녀자라면 이 녀자뿐이옵니다.》

《음, 기특한 녀자로다. 그가 누구냐?》

세종이 들을만 하여 귀를 기울이였다.

《소신이 동래현 관노로 상감마마의 부름을 받고 대궐객사에 올라왔을 때 리천대감이 아직 어린 처녀를 불러 소신의 시중을 들라합신데 그때부터 이날이때까지 상기도 저를 도와주고있나이다. 하오나 그가 객사의 녀종이여서 날마다 객사의 일을 끝마친 뒤에 틈을 타서 소신의 끼니도 끓여주고 빨래도 하는 까닭에…》

장영실은 여기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객사의 녀종을 데려다가 저와 혼례를 치르도록 하옵시면 여한이 없겠사오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솟구쳤으나 혀를 깨물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상감마마, 바라건대 객사의 녀종 한숙이를 저의 집 종으로 주었으면 하옵나이다.》

리천이 한걸음 나와 읍례를 하면서 말씀을 올리였다.

《신이 객사의 어린 계집종을 장영실에게 붙여준 일이 어제같사온데 벌써 십여년이 넘었사오니다. 그동안 장영실이 홀몸이지만 큰일을 많이 한것은 그 녀종이 성심성의로 시중을 들어준데도 있사오니 그 녀종을 아주 주었으면 하옵나이다. 그러면 장영실이 생활에 불편없이 더 훌륭한 재능을 떨치게 될것이고 인재를 귀중히 여기는 성상의 본뜻이 더 빛날것이옵나이다.》

《하하하, 귀인이 귀인을 알아보고 소나무는 잣나무의 사정을 알아준다더니 같은 재인재사로서 장영실의 사정을 제일같이 여기는고나, 음? 하하하.》

세종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피워올리면서 문무관리들을 바라보았다.

《제신들은 어느 누구나 노비하인들을 가지고있지 않은 사람들이란 없소. 나라의 노비규정에는 량반관리들에게는 품계에 따라 많은 노비를 거느릴수 있다고 밝혀놓았소. 종9품 말석벼슬자리에 있는 사람까지도 열이 넘는 노비를 가질수 있으며 비록 벼슬이 없다 해도 량반이면 누구나 가세에 따라 많이도 적게도 가지고있소. 그러나 정3품인 상호군 장영실은 한명의 노비도 없소. 이게 공평한 일이겠는가. 장영실은 지난날에도 오늘에도 나라에 공을 세우고도 바라는것은 이처럼 작고도 례사로운것이요. 과인은 본인의 요구에 따라 대궐객사의 관비 한숙이를 상호군 장영실에게 녀종으로 주노라. 사옹원과 궁노비를 맡아보는 관리는 해당 대책을 세워 오늘부터 과인의 어명을 받들도록 하라.》

문무관리들은 임금의 하교가 너무나 지당하여 아무런 이의를 나타낼수 없었다. 이들중에는 50명이 넘어되는 노비들을 소유한 재상들이 수두룩한것이다. 만복이건으로 장영실을 고소한 군기감의 리사균도 종5품인데 노비가 20명이 가깝고 임금에게 장영실을 규탄한 글을 올린 사헌부와 의금부관리들도 30명에 가까운 노비와 하인, 몸종들을 거느리고있다. 이들에게는 노비가 마소와 다를바 없는것이였다. 그까짓 계집종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장영실에게는 숙이가 제 몸의 한부분과 같이 귀중하고 소중한 사람이였다. 천만금을 준대도 바꾸지 아니할 사람이였다.

세종은 리천을 돌아보며 관리들이 다 들으라는듯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경은 과인의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였소?》

《예, 상호군 장영실이 앞으로 더 많은 공을 세우리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경의 생각이 과인의 생각과 꼭 맞아떨어졌소. 여봐라, 장영실은 나라에 더 훌륭한 병쟁기들을 만들어 바치도록 힘써 일해라.》

《상감마마, 깊이 명심하겠나이다.》

세종은 이 새 화포를 만들 때 군기감 야장간에 승인없이 함부로 들어와 불온한 말을 퍼뜨린 노비를 두둔해주었고 노비들앞에서 판관을 망신시켜 반상간의 귀천을 문란시킨 그를 매우 좋지 않게 여겼었다. 그를 규탄한 사헌부와 의금부의 글을 보고 오히려 장영실에게 죄가 없다고 한것은 그를 좀더 두고보자는데 있었다.

이번에 새 화포의 성공은 리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임금에게 아뢰였다.

《상감마마, 새 화포를 신이 평안도로 가지고가겠나이다.》

《허, 욕심도 크고나. 함길도에 나가있는 김종서절제사도 두만강을 자주 침입하는 야인들을 제압하자면 위력한 화포가 있어야 되겠다고 제기해왔다. 그에게도 한문 주어야 하리라.》

《그러면 두문은 신이 가져가겠나이다.》

《그렇게 하오. 장영실이 더 많이 만들어 보내주리라.》

장영실은 임금의 신임에 뜨거운 눈물을 삼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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