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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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을원이 장영실의 집에 병방, 사령들을 보내게 된것은 대궐로부터 파발군이 가져온 공문이 왔기때문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공문이 경상도 한개 고을뿐이 아니라 호서와 호남 즉 경기, 충청, 전라도에도 한날한시에 가닿을줄은 누구도 몰랐다.
온 나라 8도중에 4개 도라면 나라의 반분땅이요, 이 넓으나넓은 땅에 이런 공문을 띄운다는것은 중죄인을 잡는 일이 아니라면 웬간해서 행하지 않았다.
세종은 죽은 양지현감을 싣고온 의금부도사의 실책에 대해서와 양지현 백성의 무법불법행위에 대한 사간원, 사헌부 두 관청에서 련명으로 올린 글을 보고 당일에는 의금부도사에게 파직처분을 내리였지만 양지현 백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도 내리지 않았다.
도승지와 대사헌 등 여러 관리들이 이틀씩이나 이젠가저젠가 기다렸지만 모두 보람이 없었다.
그들은 이상히 여겨 《쉬―》 하기만 할뿐 그 누구도 감히 가타부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세종이 대간들이 상주한 글을 읽고 놀라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처음에는 세종도 너무 크게 놀라 《변괴로다. 일반백성이 상전을 죽이다니… 나라의 기강이 어찌 이 지경에 닿았는고―》 하고 종이를 든 손을 후들후들 떨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왜놈들이 침노해 양지현감이나 어느 도관찰사를 죽였다 해도 이처럼 놀라지 않았을것이다.
자기 백성이 자기 상전을 죽였다는것은 민심을 소요시키고 귀천을 혼란시키며 량반과 상놈의 계선을 흐리게 하는것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엄중한 후과를 낳게 하는것이다.
세종은 기운이 빠진듯 어좌에 몸을 깊숙이 잠그고 잠간 눈을 감았다.
세종의 이런 관습은 예견치 않았던 일이나 뜻밖에 나라의 큰일을 그르친 일에 부닥칠 때 한번 눌러 깊이 숙고해보는 임금다운 기품에서 생긴것이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을 한마디 말로 죽이고 살리는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림에 조폭하거나 기분에 따라 노염을 터뜨리는것은 부디 조심하고 삼가해야 함을 지론으로 여기고있는 세종이였다.
그는 이 시각에도
그러자 뇌리에 먼저 떠오르는것은 지난 5월 온양온천으로 내려갈 때 행차를 멈춰세웠던 양지현 백성 김을지의 모습이였다.
맨 살을 가리우지 못하여 벌겋게 드러난 허리, 홑베적삼이 보여온다.
10년이 넘도록 군역을 졌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온 가족이 당장 굶어죽게 되였다고 아뢰던 처참한 그 눈물이 눈에 삼삼해온다.
그들에게 쌀과 천을 주고 의원을 보내여 살려내라 중히 분부했건만 끝내 살려내지 못하였다.
양지현감을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죄목으로 잡아들이라는 어명을 내리였었다.
그런데 그 양지현감을 호송도중에 빼앗아 죽이였다.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오히려 주장을 세웠다는 그 김을지, 임금이 이 일을 안다면 자기의 죄를 묻지 않을것이며 자식이 부모의 원쑤를 갚는것은 장한 일이라고 임금도 기특히 여겨줄것이라고 말했다는 그 김을지!
세종은 백성 김을지가 제가 말한것처럼 장해보이기도 하였다.
다음순간 대간들이 올린 글귀들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자식들이 부모의 원쑤를 갚는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의리에 합당하오되 그보다 더 크고 중한 군신간의 의리는 저버린줄 아나이다. 전하께서는 양지현감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공정한 법을 세워 만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임금의 지시를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자는것이였지 백성 김을지로 하여금 양지현감을 죽이라고 어명을 내리지는 않았사옵니다.
이런 무법한 살인죄인을 살려두면 너도나도 상전죽이기를 식은죽먹기로 할것이옵니다. …》
세종은 감았던 눈을 떴다. 대간들의 제의도 백번 지당하다.
(어이할고. 임금의 말은 산악같이 흔들림이 없어야 신하들과 백성들이 어명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는 법이다. 임금이 한가지 일을 가지고 이랬다저랬다하면 백성들의 믿음을 구하지 못하리로다. 과인이 도두음곶의 마지막군정으로 왜놈들과 끝까지 싸워 공을 세운 김갑지가 지금껏 살아있었던것을 이때에 와서야 알았거든 어찌 굶어죽게 내버려들수 있었겠는가.
그의 아들 김을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10년간이나 군역을 지면서 섬오랑캐들을 수없이 목베여 나라에 공을 세우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가족을 살려내고 부역까지도 면제하여주라고 하였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를 잡아들여야 하겠는가. )
세종이 대간들이 올린 글을 이윽토록 내려다보며 처결을 내리지 못하고있는데 다음날에 또다시 법을 맡은 관청에서 김을지를 용서할수 없다는 강경한 글을 올렸다.
세종은 쉬임없이 비발치듯 하는 그 제의를 따를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마침내 김을지를 잡아들여 참형하자는 제의를 승인하였다.
지난봄에 직접 면대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주었던 김을지에게도 용서치 않았거늘 다른 죄인들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조선봉건왕조실록》에 의하면 《도적》, 《살인》이라는 죄명을 씌워 매달 30여명이 임금의 승인하에 목을 잘리웠다.
사람이란 한번 죽으면 세상에 다시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일 법조항만을 찾아 적용할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살릴수 있겠는가 하는 법조항을 찾아내라, 응당 죽여야 할 죄인도 세번 조사하여 판결을 심중히 해야 한다는 세종의 《삼복법》은 가혹한 형벌을 정당화하는데 리용되였다.
양지현 백성 김을지를 잡아들이라는 어지는 양지현감이 죽은지 사흘이 지나 내려서 각 도 감영을 거치고 고을에 떨어질 때까지 근 엿새가 넘어서 집행되기 시작하였다.
동래고을원이 병방을 보내여 양지현감을 죽인 김을지란 놈을 보지 못하였는가를 장영실에게 물으며 조심하라던것이 바로 그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