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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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이 말을 타고 올라서 동래고향마을을 내려다보며 잠간 쉬고간 장산봉고개우에 이틀이 지나서 김을지가 올라섰다.
그는 웅거지를 떠나 밤과 낮을 꼬바기 걸어서 닷새만에 여기에 당도한것이다.
장영실형님의 마을돌이를 제 눈으로 보고싶었고 노비에서 벗어난 영아를 보고싶었고 그들과 함께 자기 일을 의논하고싶어서 걸음발에 바람을 일으키며 지름길을 잡아온것이다.
베잠뱅이옷은 땀이 내배여 거무스레해졌다.
그는 누가 보아도 모르게 칼을 베천으로 둘레둘레 감아넣은 보짐을 내려놓고 베수건을 벗어서 얼굴과 목에 흘러내리는 줄땀을 씻었다.
김을지는 장영실이 감회깊이 바라본것처럼 동래고을을 바라보았다.
10년동안이나 고생을 밥먹듯 하며 군역을 지던 곳! 또 이 고개마루는 군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김을지―자기를 영아가 바래주던 곳이다.
어디바루 영아의 초신자욱이 찍혀져있느냐. 여기저기 피여있는 청초한 산국화는 마치 영아가 딛고섰던 그 자욱자욱우에 자라오른것 같고 상긋한 그 향기는 영아의 체취인듯싶어 못내 그리웁고 가슴을 들뛰게 하였다.
아, 영아, 영아! 관비의 몸으로 아전들이 모르게 자기를 바래주며 10리길이나 걸어서 이 고개마루까지 따라왔던 영아.
고향에 돌아가면 부디 나를 생각지 말고 맘씨곱고 인물잘난 처녀를 색시로 맞으라고 섧게도 눈물을 뿌리던 영아.
길섶에 돌아서서 《관비하고야 어찌 혼례를 치르리오. 저야 관비가 아닌가요. 량인백성이 관비하고 살면 그 자식도 또 관비로 되는것은 국법으로 정해졌는데… 어서 떠나셔요. … 떠… 나옵소…》 하고 섧게 울던 영아를 이 고개마루에 세워두고 차마 그대로 떠날수가 없어서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다 말씀드리고 영아를 데리러 오겠소. 그러자면 영아를 찾아올 몸값을 마련해야 할터이니 몇달이 지나야 하겠소. 기다려주오, 내 올 때까지 기다려주오.》 하고 떠났던 몸.
그런데 철석같이 언약하였던 그 몸값은 임금이 다 물어준셈이 되였다.
내가 할 일을 임금이 대신 해준것이다! 하지만 이 김을지는 그 임금을 피해다니는 《도적》으로 숨어사는 사람이 되였으니 이 무슨 꼴인가.
그는 어서 장영실형님과 영아를 만나고싶었다. 그들과 의논하면 좋은 궁냥이 트일것만 같았다.
시원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땀발이 가셔졌다.
그는 온몸에 기운발이 솟는듯 움쭉 일어나 고개를 내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김을지가 동래고을에 들어서니 마침 장영실이 장원급제한 선비처럼 만사람의 부러움속에 마을돌이를 하는 날이였다.
마을돌이란 벼슬을 새로 받은 사람을 천하에 알리고 임금의 은총을 보여주는 일종의 관례행사이다.
관가 앞쪽 려염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앉은 행길에서 《챙강챙강―》, 《챙, 챙강, 챙챙강―》 하는 꽹과리소리가 울려퍼지고 《삘리리 닐닐―》, 《닐닐 삘리리―》 하고 불어대는 새납소리가 들려왔다.
조무래기들이 《야, 저기 온다.》 하면서 뛰여가고 지팡막대기를 짚은 로인들도 허연 수염을 쳐들고 행길쪽을 바라보았다.
이집저집에서 분주히 문이 여닫기였다.
웃도리는 걸친것이 없고 맨 베잠뱅이바람으로 나오는 야장간 심부름군총각, 방금 곡식을 거두어들이다가 나온것같이 손에 낫을 든채 달려나온 상투쟁이중늙은이며 가마에 무엇인가 지지고 볶던 주막집녀인도 행주치마에 손을 문대면서 처마아래 나섰다.
삽시에 좁은 길거리에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어 혹은 속삭이고 혹은 가만히 탄성을 지르며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악곡소리에 흥이 나서 목을 길게 빼들었다.
김을지도 발돋움하고 마을돌이행차를 바라보았다.
살진 백마우에 장영실이 덩실하니 앉아오고있다.
넓은 소매에 홍달이가 달린 옥색관복을 입고 관자를 붙인 관을 쓰고 정3품관리들이 들게 된 남색모시 둥근 부채로 반나마 얼굴을 가리웠다.
관우에는 임금이 하사한 어화를 꽂고 가슴에는 구름무늬를 수놓은 흉배가 유난하였다.
말앞에 뜻밖에 처녀 하나가 말고삐를 잡고 견마한다.
연두색비단치마에 연분홍저고리를 받쳐입은 그 모습은 그지없이 아릿다왔다.
날씬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발끝까지 치렁치렁 흘러내린 치마는 옮겨가는 발걸음마다 행길우에 꽃을 그리며 나아가는듯싶었다.
동그스름한 어깨와 봉긋한 가슴을 살풋이 드러내인 저고리, 백설같이 하얀 동정, 상큼한 목과 눈물을 머금은 진달래처럼 고운 얼굴.
처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는 영아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진 베치마저고리를 입고 관비로 온갖 수모를 받으며 부림을 당하던 그가 이렇듯 화려한 옷차림으로 온 동래고을의 눈길을 끌었다.
이 옷은 다름아닌 장영실이 떠나올 때 숙이가 내준것이다.
영아앞에는 대여섯발자국 앞선 고을원이 어지가 적혀있는 종이두루말이를 받쳐들고 나아가고 또 그앞에는 징군, 새납군, 꽹과리군들이 곡을 울리면서 겅정겅정 발걸음을 옮겨갔다.
문득 행차가 멈춰서더니 고을원이 임금의 어지를 드르륵 펼쳐내리고 청높이 통고하였다.
《동래현 량반선비, 량인백성, 천인노비들은 임금의 특지를 삼가 듣거라.》
하고는 《어험―》 하는 큰 기침소리로 위엄있게 목청을 가다듬은 뒤에 어지를 내려읽었다.
《…세세년년 하늘땅천지에 심한 가물이 들어 농사를 망치였더니 다행히도 동래현 관노 장영실이 아래에 있던 물을 우로 흐르게 하여 물이 가지 못하던 곳에 물을 대여 능히 농사를 짓게 하고 신묘한 병쟁기를 만들어 나라의 변방근심을 덜었노라.
과인이 그를 대견히 여겨 계묘년에 노비신분을 벗겨주고 상의원별좌 5품벼슬을 내리였더니 장영실이 더욱더 슬기롭고 지혜로운 재능을 떨쳤기로 호군벼슬을 주었더니라.
그런데 이번에는 자격루와 옥루기륜을 만들어 과인의 뜻을 세상에 빛내였도다.
이는 명나라와 일본국을 비롯하여 그 어느 나라에서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것이라 나라의 큰 자랑이노라.
어찌 벼슬품계를 높여주지 않으며 노비출신이라 하여 나라의 사대부로 례우해주지 않으리오. 누구나 지인지감(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조금만 있다면 과인의 뜻을 알지라. 과인은 호군 장영실에게 정3품벼슬 상호군의 직첩을 주노라. 아울러 그의 누이동생 장영아를 관비의 신분에서 해방하고 량인신분으로 속량하노라!》
고을원이 읽기를 마치자 기다렸던듯이 꽹과리와 징소리가 울려나고 새납군이 《삘삘―닐닐 삘리리》 하고 어깨춤이 절로 나도록 흥겨운 가락을 뽑아댔다.
행차가 움직여나갔다.
행차 맨 앞장에서 사령들이 《쉬이― 물러가라― 쉬여 저리 가라―》하고 연방 길잡는 소리를 웨치였다.
그럴 때면 영아는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오빠의 름름한 모습을 올려다보군 하였다. 길잡이사령들을 앞세우고 말타고가는 상호군이 정말 오빠가 옳은지 확인이라도 하는것처럼.
장영실은 그런 영아를 볼 때마다 정말 너의 오빠가 옳다고 대답해주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어제 동래에 도착하여 먼저 고향집에 들리였었다.
밤마다 꿈에 보이는 영아가 보고싶어 자나깨나 그려보던 집이였다.
세월의 눈비에 고삭을대로 고삭아서 두엄무지와 같은 새초지붕엔 풀과 버섯들이 자라고 낮은 처마아래엔 반나마 허물어져내린 제비둥지가 보였다.
부모들이 계실 때는 가난한 집에도 제비가 날아들어 알을 낳아 소중히 깨워서 오롱조롱한 새끼들을 키우느라고 즐겁게 지지배배 노래하더니 그 제비조차도 비가 새는 처마아래 깃들수 없어서 둥지를 버리고 어디론지 떠나버린것 같았다.
이 집 주인들도 떠나가고 제비도 떠나갔다.
오로지 불쌍한 영아만이 이 집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왔으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솟았다.
집은 비여있었다. 영아가 있을리 없었다.
오늘도 관가에 나가 이놈저놈 아전들의 불호령에 들볶이고있을것이였다.
장영실은 솟구치는 설음을 삼키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후에 그는 상호군의 관복을 갈아입고 관가를 찾아갔다.
고을원은 갑자기 조정에서 상호군나리님이 래림하였다는 전갈을 받고 삼문밖으로 나와 인사례절을 각근히 차려서 장영실을 맞아들이였다.
장영실은 품에 지니고온 임금의 어지를 고을원에게 주었다.
《소관이 여기에 온 전후사연이 어지에 다 적혀있소이다. 관장은 상감마마의 어지대로 조처해주면 되나이다.》
고을원은 어지라는 말에 금시 사색이 되여 갓쓴 머리를 조아렸다.
어지라니 이 무슨 변고이냐? 혹시 상감께서 동래고을의 페정을 아시고 죄를 묻는것은 아닌지…
그는 백성들에게 갖가지 명분을 내세워 온갖 가렴잡세를 들씌우면서 고혈을 짜내고 제 리속을 채웠다. 또 조세나 군포를 제때에 바치지 못하면 가혹한 형법을 내려서 백성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교활한 왜인장사군들이 우리 나라 법을 위반하고 관내를 마음대로 싸다니면서 못된짓을 하는것은 뢰물을 받아먹고 눈감아주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원성이 높았다.
고을원은 자기가 한짓이 있어서 장영실이 내놓는 어지를 마치 사약을 받는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받아쥐였다.
허나 어지를 내려읽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점차 화색이 비껴들더니 이내 웃음이 피여올랐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자기가 걱정하던 일은 아니고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적혀있는것이 아닌가.
고을원은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 은인을 만난것처럼 반갑고 고마와 장영실의 손을 덥석 잡고 《어지를 삼가 받들겠소이다.》 하고 꾸벅꾸벅 절까지 하였다.
장영실은 오히려 송구해졌다.
《아니, 이러지 마시오이다. 이번에 고을에 수고를 끼치게 되여 미안함이 이를데 없소이다. 마을돌이를 간소하게 하고 빨리 상경하여 상감마마의 뜻을 받들도록 도와주시오이다.》
장영실은 고을원에게 두손을 모아 읍례를 치르었다. 고을원은 장영실이가 모를 사람이였다.
4년전에 호군벼슬을 받고 마을돌이를 왔을 때 보았던 고을원은 교체되여가고 지금은 다른 사람인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을원에게 녀동생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를 이자리에서 만나보게 해달라고 말하려 하던 참에 고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암, 도와주구말구. … 원, 별말씀을 하시는… 우리 고을출신이 이렇듯 큰 벼슬을 받았으니 이 아니 고을의 경사가 아니리오. 흐흐흐…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조정의 귀한 나리님이 오셨으니 먼저 차를 내오도록 해라.》
그리고는 《거기서는 아무 념려마시오. 내 다 어련히 행하지 않으리오.》하고 기분이 매우 흥그러워져서 이같이 호기를 내뿜고 이어서 능글능글 웃었다.
그는 장영실이 노비출신임을 알고 속으로는 하찮게 여겼으나 바로 이 노비출신을 우대하여 마을돌이를 잘해주고 떠나갈 때에는 환송연회도 흐드러지게 차려주면 그가 상경하여 상감마마께 좋은 말을 해주리라고 타산하였다.
영아는 차를 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동헌으로 나오다가 차다반을 든채 그자리에 무춤 서버렸다.
고을사또와 마주앉아있는 조정의 나리라는 사람이 분명히 오빠의 모습이였기때문이였다.
《아니, 발이 붙었느냐? 어서 가져오지 못할가.》
영아는 고을원의 욕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쪽을 돌아보는 조정의 나리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뿐이였다.
오빠다! 오빠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영아의 눈에는 오빠만 보이고 다른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을원이 또 뭐라고 꾸짖었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는 반정신이 나간듯이 밤마다 꿈에 보이던 오빠가 이 대낮에 내가 선채로 꾸는 꿈속에 다시 오셨는가. 처녀는 눈뜬 장님처럼 어데로 갈지 몰라하듯 어쩔줄을 몰라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들고섰던 차다반을 놓쳐버리였다.
두개의 차종지가 마루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허지만 처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아니, 저년이… 여봐라, 저년을 잡아내리고 다른 년을 시켜 차를 대령케 하라. … 허, 이것 참 대접이 공경스럽지 못해 안됐소이다.》
고을원은 황망히 장영실에게 량해를 구하고는 영아를 향해 한손을 내뻗치며 어서 썩 물러가라고 노성을 터뜨렸다.
장영실은 그 순간 우뚝 일어나 두팔을 벌리고 영아를 향해 달려나갔다.
《영아야― 나다! 네 오빠 장영실이다―》
영아는 그때에야 꿈에서 깨여난듯이 《오빠!―》 하고 맞받아나가 장영실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오빠, 오빠!― 왜 인제야… 오빠―》
영아는 지금껏 쌓이고쌓였던 온갖 설음을 이 한마디로 쏟치며 서럽게 울었다.
《다 이 못난 오빠탓이다, 응? 허지만 이제부터 너는 관비가 아니다. 상감마마께서 너를… 너의 노비신분을 벗겨주셨다. 너를 데리러 내가 왔다. 래일 나와 함께 한성으로 가자.》
장영실은 영아를 그러안고 이렇게 부르짖으며 웃고 울었다.
고을원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저년이 상호군의 녀동생이란 말인가. 아뿔싸, 이 일을 어쩐다? 하고 안절부절,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오빠, 이게 정녕 꿈은 아니겠지요? 예? 오빠―》
영아는 가냘픈 소리로 묻고는 장영실의 품에 안겨 까무라쳤다. 충격이 너무나 세차서 견디여내지 못한것이다. …
마을돌이행차는 여전히 새납을 불어대고 꽹과리를 치면서 거리를 누벼나아갔다.
《아이구나! 동래현이 생긴이래 이런 경사가 또 언제 있었노.》
《사람은 한가지 재간은 타고나야 해.》
《저 영아를 좀 보게. 제 오빠를 견마하누만!》
《하, 정말 눈물겹네그려. 인젠 그도 팔자를 고쳤군. 고생끝에 락이라더니…》
《우리 임금과 같은 나리님이 또 어디에 있을고. 우린 언제야 팔자를 고쳐보겠노.》
구경군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마을돌이행차를 연줄연줄 따라갔다.
영아는 오빠의 말고삐를 가슴에 꼭 껴안고 걸었다. 그것을 놓치면 온 세상이 무너지고 끝모를 벼랑끝으로 떨어져내릴것만 같은듯이…
그를 바라보는 남녀로소 누구나 다 눈굽을 적시였다.
구경군들의 틈에 끼워서 장영실과 영아를 바라보는 김을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였다.
지난봄에 지엄한 행차를 멈춰세우고 당장 굶어죽게 된 가족식구를 살려내도록 신하들에게 어명을 내리고 앞으로도 억울한 일이 있거든 등문고를 쳐서 어전에 알리라던 상감마마! 지금은 또 저렇듯 장영실형님을 높이 내세워주고 영아까지도 관비의 멍에를 벗겨준 대왕님! 김을지는 자꾸만 임금의 지덕이 뼈에 사무쳐왔다.
그는 마을돌이행차를 먼발치에서 천천히 따랐다.
장영실의 마을돌이는 고을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관가앞에 오는것으로 끝났다.
고을원은 지금껏 지고오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벗어놓은듯이 몸이 홀가분해져서 두손으로 받들고있던 어지를 품에 넣었다.
그는 안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띄우고 장영실에게 흔연히 한마디 하였다.
《공은 객실에 들어가 푹 쉬고 저녁엔 연회에 참석하여주소이다. 공을 위한 연회이니다.》
《이러지 마시오. 성의는 고맙소만 이 사람은 녀동생과 함께 집에 돌아가 회포도 나누고 래일 떠나갈 준비를 하오리다. 요즘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오죽치 않으니 허례허식이 필요없소이다.》
장영실이 진심으로 사양하였다. 허나 고을원은 《백성은 백성이구 공은 공이오니 오늘은 한껏 놀아보소이다. 여봐라, 라장은 나리님을 집에까지 모셔드렸다가 저녁에 다시 모셔오도록 해라.》 하고는 두말하지 않고 관청으로 들어갔다.
《영아야, 우린 집으로 가자. 말고삐를 이리다오. 네가 대신 말을 타거라. 이제는 내가 너를 견마하겠다.》
장영실이 밝게 웃으며 영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그머니… 오빤 무슨 말씀을…》
영아는 말고삐를 더 바싹 가슴으로 당겨안으며 방긋이 웃었다.
그는 눈물이 찰랑이는 눈으로 오빠를 곱게 흘기였다.
《어서 말고삐를 이리다오. 말을 타거라. 동생 하나 돌보지 못한 잘못을 이제라도 씻고싶구나. 응, 하하…》
이같이 말하며 웃는 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하였다.
《오빠, 난 오빠의 마음을 다… 다― 알아요. …》
영아는 말꼬리에 흐느낌이 젖어드는것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들 오누이는 서로 견마잡이를 하겠다고 하였지만 종내 끝이 나지 않아서 둘이 나란히 집으로 걸어왔다.
집은 새노란 진흙칠을 하였다.
흙이 떨어져나간 바람벽도 매질하고 처마아래 반나마 허물어져있던 제비둥지도 털어내고 진흙칠을 곱게 하니 보기에도 설음이 가뭇없이 사라진것만 같았다.
관가에서 마을돌이를 준비하는 동안에 영아와 장영실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질하였던것이다.
래일은 이 집을 떠난다. 가난과 슬픔이 슴배인 집이였지만 부모들의 넋이 깃들어있고 오누이의 정이 어려있는 옛 보금자리였다.
어찌 깨끗이 거두지 않고 떠나랴.
장영실은 집까지 따라온 라장에게 《수고했느니라. 내 한숨 쉬고 저녁에 내절로 연회장에 갈테니 네가 수고롭게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니라.》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잠시후에 동네아낙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아를 붙들고 너도나도 제일처럼 기뻐들 하였다.
고생끝에 락이 왔다고, 오빠덕에 호강하게 되였다고, 너의 오빠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오빠와 함께 서울로 가면 좋은 랑군을 만나 아들딸 낳고 오래오래 살라고 저마다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영아처럼 관비는 아니였지만 가난에 쪼들린 백성으로서 량반놈들에게 시달리우고 천대를 받기는 영아와 다름없었다.
몽당치마에 노닥노닥 덧기운 베적삼을 입은 나이많은 할머니 한분이 마당가에 들어섰다.
할머니는 다 꿰진 짚신을 끌면서 영아한테로 가더니 그의 두손을 쓸어잡았다.
말린 오가리처럼 쪼글쪼글 졸아든 얼굴을 들고 한동안 영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진물이 내돋힌 눈귀에 눈물이 맺히고 숨이 차서 하 벌린 입은 이발이 홈싹 빠져서 마치 갓난애기 입처럼 이몸이 빨갛게 들여다보였다. 장영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떠나던 날 오빠를 따라가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영아를 데려다가 돌봐주었던 할머니였다.
이웃집 최서방네가 도맡아 돌봐주었지만 이 할머니도 극진하였다.
《할머니 오셨군요. 할머니, 이 영아의 절을 받으시와요.》
영아는 눈물 글썽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였다.
《아서라, 절은 무슨 절… 응? 어서 일어나게.》
할머니는 영아를 일으켜세우고 들숨날숨이 힘겨운듯 가냘픈 어깨를 떨었다.
《영아야, 네 오빠가 높은 벼슬에 올라 벌써 두번째루 마을돌이를 오구 너도 관가에 매인 몸을 풀었으니 내 죽어두 여한이 없다. 없구말구… 허나 우리 동네엔 화가 미쳤꼬마. 관가에서 너의 오빠에게 큰잔치를 차려준다고 글겡이질을 하지 않겠나. 집집마다 쌀 한되박 내라구. 쌀이 없으면 돈이든 무엇이든 그 값만큼 닭도 좋구 닭알도 좋구 소고기, 양고기도 좋구 도미나 잉어같은 어물도 좋구 무명이나 베도 좋다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을세 말이지. …》
할머니는 잠시 숨을 돌리느라고 헐금씨금 숨을 톺더니 말을 이었다.
《글쎄 그 많은것중에 한가지도 못바쳤다고 우리 집에 하나밖에 없는 솥을 뽑아갔꼬마. … 흑흑…》
할머니는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눈물을 씻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영아의 어깨를 자꾸만 흔들었다.
《할머니, 우리 오빠의 잔치를 차려준다고 그리할줄은 몰랐어요.》
영아는 할머니를 붙들고 눈물을 좔좔 쏟았다.
《할머니두 참, 여기서 그 말씀은 웨 하시우. 영아네야 하상 무슨 잘못이 있수. 그거야 영아 오빠를 턱대구 빼앗아가는 못된 놈들탓이지요. 할머니, 인젠 돌아가시와요.》
할머니의 며느리는 저도 누렇게 부황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부축이고 마당굽을 나섰다.
《뉘가 영아네를 탓하냐. 그저 해보는 말이지.
영아 오빠가 임금님께 말씀을 올리면 나라님이 가만있지 않으련만… 어이구, 굶어죽게 된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먹는 놈들이 아닌가베…》
동네아낙네들이 《영아야, 너를 축수해주려고 왔다가 오히려 너를 울려놓았구나. 래일 서울로 떠난다지. 그때 또 오마.》 하고 애써 눈물을 참으면서 할머니를 따라 돌아갔다.
방안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밖에서 하는 말을 다 들은 장영실은 연회에 가지 않았다.
호방이 와서 연회에 참석해주기를 거듭 청하였지만 몸이 편찮아서 못간다고 끝내 거절해버렸다. 백성들의 진혈을 짜낸 음식을 차마 입에 댈수 없었던것이다.
저녁노을이 꺼지고 땅거미가 찾아들었다.
부엌에서 영아가 보리쌀을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