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6
주막집에서 장영실과 헤여진 김을지는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웅거지로 돌아왔다. 그는 부모의 원쑤를 갚게 해준 두령이 고마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두령은 며칠전에 의금부에서 양지현감을 잡아간다는것을 알고 김을지에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면서 억쇠와 용력있는 사나이들까지 보내주었던것이다.
두령은 양지현감을 처단하던 이야기를 다 듣고 《잘하였네, 잘했소.》 하고 검은 구레나룻을 쭝깃거리며 제일처럼 기뻐하였다.
그러나 의금부도사를 살려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불만히 여겼다.
김을지가 두령막을 나서니 하루해가 저물어가고있었다.
그는 사나이들이 자고깨는 초막집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방안에는 저녁밥을 기다리는 《화적》들이 의금부도사일행을 치고 양지현감을 죽여버린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있다가 《히야!―》 하고 일시에 경탄하기도 하였다.
김을지는 방안에 들어가려다가 몇걸음 더 나아가서 너럭바위우에 벌렁 누웠다. 어쩐지 기운이 빠지고 온몸이 노그라지는것만 같았다. 왜 이리도 마음이 허해지고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을가. 그것은 자기가 《산당》패에 들어와 해야 할 일을 다하였기때문임을
그는 고향에 돌아가 부모들의 묘소앞에 엎드려 원쑤를 갚았다고 알리고싶었으며 벌거벗은것처럼 생흙을 드러내놓고있는 봉분에 떼장을 앉혀주고싶었다. 그리고 임금의 은총을 죽어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산속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어서 세상밖으로 나아가 임금의 은총을 갚으며 사람답게 살고싶었다.
김을지는 팔베개를 하고 번듯이 누워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울창하게 들어찬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바로 자라올라 가지들을 펼쳤다.
나무들도 다른 나무아지에 가리워 해빛을 보지 못하면 말라죽는다는것을 어떻게 아는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저렇듯 키를 뽑아내는것이였다. 말못하는 나무들도 이렇거늘 사람으로서 세상빛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가랴.
해가 서산너머 떨어지자 이내 숲이 어두워졌다.
앞산 어느 숲에선가 외로운 접동새가 슬피 울었다. 접동새도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어서 저리도 애간장을 끓이는가싶다. 나도 차라리 접동새처럼 넋이라도 임금이 있는 대궐가까운 산기슭에 날아가서 실컷 울어봤으면… 상감마마께 모든 사연을 아뢰이면 부모의 원쑤를 갚은 네가 어찌 죄인이겠느냐, 여봐라, 김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3년상을 마치게 하고 편히 살도록 돌봐주어라라고 어지를 다시 내릴것만 같았다. 허지만 임금이 있는 대궐가까이 갈수도 없는 몸이다.
만약 글을 안다면 글로 써서 상주할수도 있으랴만 글을 모른다. 글을 배워야 한다. 장영실형님처럼 글을 알아야 한다.
형님은 지금 어디까지 갔을가. 그 형님과 어제밤에 의논하고 따라가고싶었지만 함께 온 동료들도 있고 또 두령에게 말하지 않고 가버리면 신의가 없는 일이여서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령에게 말하고 웅거지를 떠나갈수 있지 않는가.
김을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장영실형님을 찾아가야 한다. 형님의 마을돌이도 보고싶고 관비의 멍에를 벗어버린 영아도 보고싶다.
그리고 셋이 모여앉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일을 의논하면 헝클어졌던 삶의 실꾸리가 스르르 풀려나올것만 같았다. 그는 움쭉 일어나 두령막을 찾아갔다.
두령은 패장들과 함께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방 한쪽구석에 광솔불이 거불거불 춤추고있었다.
《두령님께 긴한 말을 여쭙자고 왔소이다.》
김을지는 마치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빌러 온것처럼 고개를 숙이였다. 사실 그의 마음은 이 사람들에게 빚을 진것처럼 죄스러웠다.
《아, 어서 오우. 그러지 않아도 임자를 불러 병패장으로 지목되였다는것을 말해주려던 참이였소. 우리 〈산당〉에 병패 하나를 더 내오고… 마침 왔구만. 하하…》
두령이 검은 입수염속에 흰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옆에 앉아있는 갑패장과 을패장도 이미 말들이 오간듯 《김을지라면 병패를 능준히 거느릴수 있지.》 하고 머리들을 끄덕끄덕하였다.
《두령님, 소인을 크게 믿어주니… 고맙소이다.》
김을지는 잠시 머뭇거리였다. 해야 할 말이 목에 걸린듯 송구히 기침을 하고 갑자르며 말을 이었다.
《소인은 지금껏 품어온 말을 여쭙자고 하나이다.》
김을지의 말이 곡진히 들려와서 두령과 패장들은 웃음을 거두고 신중한 낯빛을 지었다.
《소인은 여러분네들을 하직하고 여기를 떠나자고 하나이다.》
《으―응?!》
두령은 너무나 뜻밖이라 신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보다 더 놀란것은 패장들이였다.
《아니, 그게 정말 소리요?》
《여기를 진짜 뜨겠단 말이우?》
패장들이 김을지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김을지는 그들의 놀란 물음에 뜨거운 정이 느껴져 눈물이 쿡 솟았지만 떠나지 않으면 안될 리유를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두령님, 소인은 여기가 싫어서가 아니나이다. 두령님과 패장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양지현감을 죽여버렸소이다. 하지만 소인은 상감마마의 은총을 입은 몸으로서 상감마마를 피해 산속에 숨어살수 없는 사람이옵나이다.》
김을지는 산속에 박혀사는
《임자의 뜻은 장하오만 충청도 각 고을에 임자의 용모파기를 내붙이고 잡아들이라는 방을 냈다는데 임자는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려고 하니 그 장한 뜻이 어찌 되겠소.》
두령은 빈 입맛을 쩝쩝 다시며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상감마마께서 어제는 성은을 베푸시고 오늘은 잡아들이라는 방을 내시겠소이까. 저 악착한 관리들이 중간에서 그런짓을 하였으리다. 소인은 세상밖으로 나아가 임금을 위해 죽고 살겠나이다.》
《한번 여기에 들어왔던 사람은 함부로 떠날수 없다는것을 임자도 알고있지 않소.》
갑패장이 군률이 엄함을 깨우쳐주었다. 김을지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였다. 여기 《산당》패에 들었다가 저마다 제 마음대로 들고나고 하면 비밀이 새고 그로 하여 관군의 《토벌》을 면치 못할것이다.
《소인은 죽는대도 비밀을 안고 죽으리다.》
김을지의 두눈에 숯불같은것이 타올랐다.
《내 임자를 못믿어서가 아니라 임자와 같이 용력과 무술과 의협심을 가진 사람을 죽을 곳으로 가게 내버려둘수 없어서 그러오.》
두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임자가 여기를 떠나 우리를 팔아먹지 않으리라는건 나도 잘 아우.》
을패장이 눈을 지릅뜨고 김을지를 지꿎게 바라보았다.
《만약 누구든지 잡혀서 주리를 틀리우고 무릎마디를 꺾이우고 발뒤축 힘줄을 끊기우고 인두로 단근질을 당하면 안한 일도 했다고 하지 않수. 글쎄 임자라면 끝내 사생결단 의리를 지키고 죽겠다만 그게 무슨 보람이겠수.》
김을지는 자기를 위해주는 이 사람들앞에서 여기에 남아있겠다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는 생각이 샘솟듯 하였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다 옳은 말씀이나이다. 소인은 그 말씀 마디마디를 일천 뼈에 새기고 떠나겠소이다.》
두령은 묵묵히 거닐던 걸음을 뚝 멈추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임자가 여기를 떠난다 해도 숨어살기는 마찬가지요. 양지현감을 압송도중에 죽였으니 임금도 임자를 면죄하여주고싶어도 그렇게 할수 없게 되오. 사헌부와 의금부, 한성부에서 임자를 잡아들여야 한다는 글을 올려 자꾸만 든장질을 하면 임금도 어쩔수 없소. 그래도 떠나고싶으면 생각대로 하오만 후날 임자에게는 아무때고 후회가 반드시 뒤따를것이요. 이 두령도 패장들도 웅거지의 모든 사나이들이 사람답게 살기 싫어서 여기에 모여든줄 아우? 사람답게 살려고 해도 이놈의 세상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돼먹었기때문이요. 임자가 떠나도 이걸 알고 떠나오.》
김을지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대답하였다.
《두령님, 고…맙소이다.》
두령과 패장들은 김을지의 목소리에 피같은 진심이 배여있음을 알고 그를 끝끝내 제지시키지 못하리란것을 깨달았다.
《떠나기는 떠나되 오늘 하루밤만이라도 우리와 함께 자고 떠나도록 하오. 내 그대신 들을만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테니 패장들과 함께 들어보우.》
《예, 어서 이야기하시오이다.》
김을지와 패장들이 자리를 고쳐앉으면서 두령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령은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이야기는 지금 임금(세종)이 젊은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은지 두달이 되나마나한 때에 있은 일이요.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고 자기는 상왕이 되여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기였소. 어느 하루는 깊은 밤에 이생각, 저생각으로 잠도 오지 않고 또 어느 고목에서인지 부엉이가 부엉부엉 청승스럽게 울어서 심사가 고독스럽기 그지없었소. 상왕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침전문밖을 서성이는데 사위는 어둠속에 괴괴하고 단지 담모퉁이에 있는 직소(관리들이 왕궁에 들어와 수직하는 곳)에서 불빛이 새여나오더라오. 상왕이 그곳으로 슬슬 다가갔다오.》
두령막에 달빛이 비껴들었다. 때마침 컴컴한 어느 숲속에서 부엉이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령은 잠간 그 소리를 듣고있다가 《허, 여기서도 부엉이가 우는구만. 저 부엉이가 그때 왕궁에서 울던 부엉인지 모르겠소.》 하고 껄껄 웃었다. 부엉이소리가 두령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는지 패장들은 웃지 않고 머리를 끄덕끄덕 하는것이 두령의 이야기에 깊이 끌려들어가는것 같았다.
김을지는 자기의 가족을 살려내라던 임금의 젊었을 때 이야기이고 또 상왕에 대한 이야기여서 절로 귀기울이게 되였다.
《…상왕이 직소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안에서 두명의 선전관(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무관)이 서로 제말이 옳다고 론쟁하는 말소리가 들려오더라오. 두 선전관이 직품이 서로 같고 깊은 밤에 자기들의 말을 엿들을 사람도 없어서 극히 조심해야 할 말들을 드러내놓고 하는판일세그려. 한사람이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네. 백성들이 우리를 먹여살리는거야. 누가 농사짓고 길쌈을 해서 쌀과 옷감을 마련하는가. 백성들이 우리를 먹여살리는걸세.〉 하고 언성을 높이자 다음 선전관이 〈허, 이 사람 보았나? 자네에게 누가 벼슬을 주고 록봉을 내렸나? 그건 임금이지. 아무리 백성들이 쌀과 옷감을 마련한다 해도 그것을 임금이 우리에게 주거든. 자네는 임금의 은총은 생각지 않고 백성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힌다는건가!〉 하고 제 동료의 말을 눌러버리려들자 먼저 사람이 〈나나 자네도 백성의 덕에 산다네. 임금까지도 마찬가지일세. 백성들이 없으면 임금이나 관리들이 무슨 수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백성의 은혜를 갚아야 하네.〉라고 했지.
〈아니, 이 사람 보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가 그래 임금께 충성할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충성하라는 말인가?〉
상왕이 밖에서 듣는것도 모르고 두 선전관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있었소. 첫 사람의 말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 역적으로 몰리고 임금의 덕에 산다고 임금께 충성을 해야 한다는 사람은 벼슬이 한등급 올라갈 말을 한셈이요.》
두령이 숨을 돌려쉬느라고 잠간 이야기를 멈춘 틈에 갑패장, 을패장들이 한마디씩 하였다.
《아무리 백성의 덕에 산다고 해도 말을 조심치 않구… 원참, 아까운 량반이 죽을고에 들지 않았나.》
김을지도 첫 사람에게 동정이 가고 고지식한 그 사람이 장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백성이 임금에게 드려야 할 충성을 버린다는것은 안될 말이다.
나 하나만 보아도 내 부모를 살려내라 한것도 임금이요, 장영실형님에게 벼슬을 준것도 임금이 아닌가.
갑패장이 두령의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상왕이 문밖에서 듣는 대목까지 이야기하였수. 그래 그다음엔 어떻게 되였수?》
김을지도 주먹에 땀을 쥐고 귀를 기울이였다.
《…상왕이 두 선전관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곧 수강궁으로 돌아가서 자고있는 내시 하나를 깨웠소.
〈너 지금 직소에 곧바로 가서 번을 들고있는 선전관들을 불러오너라.〉
얼마후에 젊은 선전관 두사람이 상왕앞에 급급히 부복했다오.
〈얘들아, 내가 잠은 안오고 하도 심심하여 너희들과 한담이나 나누자고 하니라. 먼저 너희들에게 한가지 묻겠노라. 너희는 누구의 덕에 사느냐? 또 누구를 위해 사느냐? 각각 자기의 속을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보아라.〉
아닌 밤중에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불려온 두사람은 상왕의 물음을 받자 가슴이 한줌만 해졌다오. 지금껏 백성의 덕에 산다거니, 임금의 덕에 산다거니 입심질을 했던지라 등골에 서늘한 땀이 흘러내렸거든. 그들이 어쩔줄 몰라 대답을 갑자르는중에 어서 아뢰라는 독촉이 재차 내렸소.
〈신은 먹고 입고 사는것은 임금의 덕인줄 아나이다. 이 몸이 천쪼각이 난대도 전하를 받들겠나이다.〉
아까 임금의 덕에 산다고 주장하던 사람인 김효성이 출세의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먼저 여쭈어올리였소.
상왕은 김효성에게 머리를 끄덕여 대견히 여겨주었소. 그리고 두번째사람에게 눈길을 돌리였다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두번째 사람은 오늘 내가 죽는대도 내 주장을 굽힐수 없다 하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대답하였소.
〈신의 생각은 김효성과 다르다고 아뢰오. 입고 먹는것은 모두 백성의 피땀으로 되옵는것인즉 우리가 백성의 덕에 사는것이옵니다. 나라일도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이옵고 전하께서 신들에게 내리시는 하교(임금의 지시)도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것이라 신들은 백성들을 위해 살아야 할줄 아나이다.〉
백성들의 덕에 산다고 하던 리호성은 상왕앞에서도 자기의 속을 감추지 않았다오.
상왕은 리호성의 대답이 비위에 거슬렸으나 꾹 눌러 참고 한마디 더 물었다오.
〈그러면 하나 더 대답해보아라. 임금과 백성이 서로 다른 길을 간다면 너희들은 어느 길로 따라가겠느냐?〉
이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물음이였소.
〈신은 임금이 가는 길을 따르겠나이다.〉
이렇게 김효성이 아뢰이고 〈신은 백성이 가는 길을 따르겠나이다.〉이는 리호성의 대답이였소.
〈잘 알았노라.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상왕앞에서 물러나온 젊은 관리들은 자기들의 운명에 어떤 일이 번져질지 몰라 긴긴밤을 뜬눈으로 새웠다오. 상왕도 두사람을 내보낸 후에 마음이 좋지 않아서 잠을 자지 못하였소.
(임금의 권력은 백성우에 있다. 만약 백성이 임금보다 앞서는것이라면 백성이 임금을 위해 죽고 살겠느냐. 임금을 따르지 않겠다는 리호성은 자기가 잘못이라는것을 깨닫도록 교훈해야 한다. 김효성을 높이 등용하고 리호성은 참해야 할것인가. 그러나 임금앞에 솔직한자를 죽일수는 없지 않느냐. 권력으로 억누르지 말고 자기
다음날 아침 젊은 임금이 상왕인 부왕에게 아침문안드리러 왔었는데 상왕이 지난밤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을 처리할 지시를 주었다오.
〈김효성이나 리호성은 모두 종4품 선전관인데 두사람을 다 변장(국경을 지키는 군사지휘관)으로 내보내도록 하시오. 김효성은 한등급 높여서 첨사(병사나 수사 다음가는 지휘관)쯤으로 보내고 리호성은 김효성이 관할하는 만호(첨사밑의 군사지휘관)쯤으로 보내오.〉
지금 임금은 부왕의 뜻대로 다음날 김효성을 부산포 첨사로 제수하고 리호성은 부산포에 속한 두무개 만호로 제수하였소.》
두령이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김을지와 패장들은 리호성이 죽을줄로 알았다가 다행히 살아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 이듬해 5월 왜적이 비인현 도두음곶에 침입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해쳤소. 오참, 그대의 가친께서도 도두음곶에서 왜놈들과 싸우셨다지?》
두령은 이야기중에 김을지를 바라보았다.
《예. 그때 제 나이 열살이였으니 부친의 말씀이 쟁쟁하오이다.》
김을지는 뜻밖에 아버지가 왜놈들을 물리치던 곳의 이름이 나오자 감회가 자못 깊어졌다.
《그럴테지. … 우리 나라에선 왜놈들을 앉아서 막아내기보다 애초에 적의 소굴을 들이쳐서 적들을 눌러놓아야 한다는 결심을 내렸다오. 그때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3도의 수군을 총동원하여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었는데 좌군의 한 부대를 김효성이 이끌고 리호성은 그밑에서 작은 부대를 맡게 되였다오. 나도 그때 열여덟나이로 리호성의 부대에 들어있었다오. 허허…》
《아니, 두령님도 대마도징벌에 갔었더란 말이유?》
갑패장과 을패장이 존경어린 눈길로 자기의 두령을 바라보았다.
《그랬었소. 그때 내 어렸으니 뭘 알았어야 말이지. 그저 따라다니며 왜놈을 몇놈 죽이였을뿐이네. 그래서 그때의 일을 알지 어떻게 알겠소. 좌우간 그때 우리 수군의 싸움배들이 바다를 뒤덮었는데 그 광경이 장엄하고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오. 각 도의 수군절도사의 기발들과 각 포구의 첨사, 만호들의 크고작은 령기들이 바다바람에 펄펄 휘날리고 진군의 북소리는 바다를 들었다놓았소. 수백척의 우리 배가 대마도를 들이치면서 군사들이 륙지에 오르니 왜놈들이 병쟁기들을 내버리고 도망치고 죽고 했었는데 김효성은 전리품만 거두기에 급급하였다오. 자기의 웃사람에게 뢰물을 바치려는것이지. 리호성이 여러번 말렸지만 듣지 않고 싸움준비를 소홀히 하였소.
어느날 밤 끝내 왜놈들의 반격을 받아 김효성의 군졸이 패몰지경에 이르렀소. 리호성은 부대를 이끌고와서 적을 쳐버리였다오.
우리 수군이 놈들의 항복을 받고 바다를 건너 개선하였다오. 온 나라가 기뻐하고 상왕과 임금도 기뻐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잘 싸우지 못한 사람은 엄하게 처벌하기로 했다오. 공과 죄를 매기는 단자에는 리호성의 공이 들어있는 반면에 김효성은 패몰할번한 죄가 들어있었소.
상왕은 단자를 보고 눈살을 찌프리였소. 임금을 위해 살겠다는 김효성이 공을 세울줄 알았는데 오히려 죄를 짓고 임금보다 백성을 위해 살겠다던 리호성이 공을 세웠기때문이라오.
상왕은 판결을 내리기를 〈김효성은 리호성의 상관인즉 리호성이 공을 세우는데서 상관의 몫이 어찌 없겠느냐. 또 리호성이 김효성의 부하인즉 김효성이 패몰하는데 부하의 몫이 어찌 없겠느냐. 이 사람의 공과 저 사람의 죄를 한등급씩 내려야 하니라. 리호성은 한등급만 올리고 김효성은 제 품계를 그대로 두면서 두사람을 이웃한 어느 고을 군수들로 옮겨두도록 하오.〉라고 하였소.
그리하여 임금은 상왕의 분부대로 리호성은 서천군 군수로, 김효성은 면천군 군수로 옮겨놓았다오.
김효성은 자기의 죄는 생각지 않고 자기의 부하였던 리호성이 자기와 동등하게 군수로 올라간것이 몹시 좋지 않아 어느때건 그보다 높은 벼슬에 오르리라고 벼르고있었소.
그 이듬해 경자년(1420년)에 장석(장티브스)이 경기, 충청도 일대를 휩쓸어 백성들이 무리로 죽어나기 시작하였다오. 이때 서천고을 군수 리호성은 륙방아전들에게 구역을 맡겨주고 장석치료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약재를 공급하여주는데 면천군수 김효성은 우에 올리는 공물과 진상봉물을 제때에 바치는데만 정신이 쏠리고 장석을 치료할 대책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는데 서천군에서는 얼마 죽지 않았다오.
그해 겨울 포폄(고을원의 사업평정)에서 백성을 잘 돌봐준 리호성은 상을 받고 품계가 한등급 올랐으나 면천고을 김효성은 겨우 중을 맞아 품계가 오르지 못하였다오.
김효성은 리호성이 자기보다 한계제 더 오른것을 더욱 분히 여겨 진상품을 제때에 더 많이 거두어들일 생각만 하였소. 벼슬품계는 임금이 주는것이라 임금께 잘 보이는것이 출세의 길이였기때문이라오. 그 이듬해 신축년에 장근 가물이 계속되였소. 지난해 장석으로 가뜩이나 민심이 불안한데다가 또 이런 흉년을 당하여 민심이 흉흉해졌다오.
이때에도 서천고을과 면천고을은 뚜렷한 대조를 보였는데 서천고을 백성들은 적게 굶어죽었고 면천고을 백성들은 수많이 굶어죽지 않으면 안되였다오. 면천고을 군수 김효성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진상품만 거두어들인탓이요.
그해 포폄에서 서천군수는 또 상을 받고 면천군수는 중에 하를 맞았소. 이때 상왕은 병을 만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하오. 임금이 이들의 상벌을 제 마음대로 할수 없어서 누워있는 상왕에게 물었다오. 상왕이 긴 한숨만 내쉬다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이 일에 한해서는 임금이 마음대로 하오. 나는 임금이 백성우에 있고 백성은 임금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으나 이번에 두 군수의 일로 하여
그 이튿날 각 고을
그후 일생을 권력을 추구해왔던 태종이 끝내 자기의 확신이 헛된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소. 허허…》
두령은 이렇게 말을 끝맺고 버릇대로 수염을 쭝깃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김을지는 두령이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알게 되여 그가 무척 고맙고 돋우보였다.
《참말 뜻이 깊은 이야기이나이다. 임금의 부왕도 나중엔 임금보다 백성을 먼저 위해주어야 한다는것을 깨닫지 못하고 떠났는데 너는 그래 임금을 위해 살겠느냐 하는 말씀이군요.》
김을지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두령이하 패장들이 껄껄 웃었다.
《그것 보게. 백성을 위해 살아온 리호성은 벼슬이 높이 오르구 임금을 위해 살아온 김효성은 벼슬이 하락되지 않았나.》
갑패장은 김을지가 마음을 고쳐먹을 좋은 기회라 이런 말로 든장질을 하였다.
《백성을 위해 일한 사람은 어진 량반이니 벼슬이 올랐소이다. 그건 옳은 말이오다. 허나 소인은 벼슬을 바라고 여기를 떠나자는게 아니오이다. 그저 임금의 성은을 받았으면 응당 성은을 갚는게 사람구실을 하는거구… 또…》
김을지는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떠나겠다는 말을 또 곱씹고싶었지만 아까 두령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싫어서 여기에 모여든줄 아는가.》 하던 말이 떠올라서 말머리를 돌리였다.
《두령님, 리호성이처럼 어진 량반이 많았으면 오죽 좋으리까. 백성들이 굶어죽는것도 본체 않고 제 벼슬만 올리려고 한 김효성과 같은 놈들은 죽은 양지현감과 다를바 없는 놈들인데 하락은 되였어도 어찌 고을원으로 그냥 두었소이까?》
두령은 느닷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하였지만 세상이 그렇게 돼먹은걸… 을지, 이 사람. 내 년장자로 말하되 그대는 몹쓸 량반 따로 있고 어진 량반이 따로 있는줄로 생각지 마오. 량반과 량반들이 서로 등차는 있겠지만 다 갓쓴 량반족속이요. 이런 량반의 세상이자 임금의 세상임을 모르면 후회가 뒤따르니 어디에 가든 이걸 잊지 말구 조심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