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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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이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멀지 않은곳에 어떤 사나이 하나가 서있는것이 보였다. 그 사나이는 자기의 뒤에서 오는 사람을 알지 못하고 밋밋이 뻗어내린 고개아래를 지그시 바라보고있었다. 고개아래에서는 말탄 사람 하나와 그뒤에 창잡이군사들에게 둘러싸인 달구지 한채가 올라오고있었다. 사나이는 그 달구지를 기다리고있는 모양이였다.

머리는 누르끼레한 베수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저고리 허리에는 넓은 홍띠를 두르고 발에는 짚신감발을 든든히 하고 등에는 붉은 술이 달린 긴칼을 지고있었다.

화적인가, 강도인가? 몹시 수상스러웠다. 장영실은 사나이가 미타스러웠지만 내처 뚜걱뚜걱 말을 몰아갔다. 사나이는 홱― 머리를 돌려 번뜩이는 눈길로 장영실을 바라보더니 한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으로 떠밀어보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난데없이 땅에서 불쑥 솟아난것처럼 억대우같은 사나이 하나가 번쩍 나타나 장영실이 타고있는 말굴레를 갈퀴같은 손으로 덥석 잡아쥐였다. 행길에 서있는 사나이와 숲속에서 뛰여나온 사나이사이에 이미 짜놓은 약속이 있는것 같았다.

《보아하니 착한 선비같사온데 놀라지 마시오다. 우리 잠간 숲에 들어가 기다려야 하오리다. 그대로 가오면 위험하니깐.》

사나이는 벙긋 웃어보이고는 무작정 숲으로 끌고들어갔다. 장영실은 말할 짬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사나이는 행길에서 가까운 숲속에 말을 멈춰세웠다.

《나리님은 꼼짝하지 말고 여기에 있소이다. 우리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가만히 쉬기나 하다가 갈길을 가면 되오이다.》

사나이는 다시한번 벙글거리고 몇발자국 나아가 나무가지사이로 행길 좌우를 두릿두릿 살피였다. 보매 장영실과 같은 길손이 있으면 숲속으로 잡아들이려는것 같았다.

장영실은 이 사나이들이 대체 어떤 일을 벌리려는지 짐작되여 긴장해졌다. 나라일에 좋은것이라면 어찌 숨어서 일을 벌리겠는가. 임금의 뜻과 나라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보고도 못본체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는 몇걸음 안쪽에 몸을 숨기고 행길을 바라보고있는 사나이곁으로 다가갔다.

《여보시오, 당신들이 하는 일이 나라법에 합당한 일이요?》

《뭐? 나라법에 합당한가구? 이제 제 눈으로 보면 알수 있을거요. 하오나 다시한번 우리 일에 간참하면 목숨이 위태롭다는것을 아시오.》

사나이는 아까와는 달리 큰 눈을 사납게 부릅뜨고 장영실을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리였다. 그리고 번뜩이는 눈길로 행길우에 우뚝 서있는 사나이와 고개아래에서 올라오는 달구지를 바라보았다.

장영실은 상호군의 례복을 떨쳐입고 가라던 숙이의 얼굴이 문득 상기되였다. 숙이의 말대로 하였다면 이 사나이를 호령하여 무릎꿇림을 시킬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범같은 사나이가 복종치 않을것이다. 그는 이 사나이들이 하려는 잡도리가 옳은지 그른지 지켜보기로 하였다.

행길우에 서있는 사나이앞으로 달구지를 몰고오는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들었다. 말을 타고오는 군사는 의금부도사의 복색을 하고 달구지를 에워싸고오는 창잡이군사들은 의금부라졸의 복색이다.

(아니 이 사람들이 어쩔려고, 의금부도사를 치고 죄인을 구원하려는것인가? 나라에서 잡아가는 죄인을 빼돌리면 더 큰 죄를 저지르는것이 아닌가. )

달구지는 죄인을 호송하는 함거였다. 함거안에는 목에 칼을 쓴 죄인이 실려있었다.

장영실은 이 사나이들을 말리고싶었다. 그러나 의금부도사의 호령소리가 벼락치듯 그를 눌러놓았다.

《웬 잡놈이 함부로 길을 막고있느냐.》

의금부도사는 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당당히 대답하였다.

《소인은 양지현 백성 김을지라 하옵나이다. 조정에서 마침내 양지현감을 잡아간다 하옵기에 잠간 여쭐 말이 있나이다.》

장영실은 김을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혹시 잘못 들었는가, 아니면 이름이 같은 사람인가. 아니다. 분명히 양지현 김을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보니 몸이 거쿨지고 용력이 넘쳐나는 김을지의 모습이다. 장영실은 온몸이 굳어져 김을지만을 바라보았다.

《음― 마침 잘 만났다. 네놈이 불역지법 임금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더니 이번엔 그 뉘도 못다치는 죄인함거까지 멈출테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잡아 오라를 지워라.》

그러자 우락부락한 라졸들이 달려들어 좌우팔을 비틀어잡는것을 김을지는 어렵지 않게 쳐내깔리였다.

《소인의 말을 들어보고 마음대로 하옵시오.》

김을지는 낯빛을 변치 않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의금부도사는 말안장우에서 크게 웃었다.

《어, 그놈 만만치 않군. 얘들아, 잠간 그대로 두어라. 저놈의 말을 들어본들 무엇이 급하겠느냐. 그래 네놈이 할 말은 도대체 무어냐? 어서 아뢰여라.》

《양지백성 김을지는 양지현감을 내 손으로 죽여서 부모님들의 원쑤를 갚아드리려 하나이다.》

함거에 실려가던 양지현감은 갑자기 풍을 만난 병자처럼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자기를 압송해가는 의금부도사와 라졸들이 수두룩한데 저놈하나를 못당해내랴 하는 배심이 들었는지 칼을 쓴채로 벌떡 일어나 《이 불학무도한 놈, 네놈의 손에 참을 당할 내가 아니다.》 하고 살기를 내뿜었다. 현감은 상기도 동헌마루에 높이 앉아서 호령하던 버릇이 그대로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양지현감은 듣거라. 네놈은 양지현 경내를 행차하시던 임금께서 당장 굶어죽어가고있는 우리 부모님들의 정상을 아시고 고을원으로 하여금 쌀과 약을 가지고 의원과 함께 반드시 살려내라고 하신 어지를 직접 받았지만 끝내 우리 부모님들을 굶어죽게 만들었다. 네놈은 임금이 주신 벼슬자리에 앉고서도 이렇듯 임금앞에 무도하니 그 죄 천추에 씻지 못할지라 반드시 내 칼에 죽어야 한다.》

김을지는 어깨너머로 칼자루를 거머쥐고 보기에도 서슬푸른 장칼을 쑥― 뽑아들었다.

《이놈 봐라, 참형은 임금의 권한인데 네 감히 임금의 권력을 도적질할셈이냐. 저놈을 쳐죽이든 찔러죽이든 마음대로 하라.》

라졸들이 창을 꼬나들고 김을지에게 앞뒤로 달려들었다. 김을지는 칼을 휘둘러 막아내며 소리쳤다.

《만약에 소인을 이처럼 해치려 든다면 도사님은 목숨을 건사할 가망이 없을줄로 아시오. 당장 칼부림을 거두기를 바라나이다.》

《머리털이 돋은 뒤로 이같은 놈을 처음 보느니… 에끼 이놈, 내 당장 발검참두하리라.》

의금부도사는 분격하여 말허벅에 박차를 가하면서 칼을 높이 들고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였다. 세개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와 련이어 말의 멱줄에 박혀들었다.

말은 《오호옹―》소리를 내지르며 앞발을 들고 솟구쳤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하건만 의금부도사는 어느 틈에 비호처럼 뛰여내렸다.

《의금부도사는 꼼짝 말아라.》

좌우길섶에서 활을 뻗쳐든 사나이들이 풍우같이 뛰쳐나와 우뢰와 같이 소리쳤다.

의금부도사와 라졸들은 화들짝 놀라 눈망울을 흡떴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사나이들이 한껏 뒤로 잡아제낀 시위를 놓으면 화살이 영낙없이 앞가슴을 뚫고 뒤가슴으로 꿰질러나갈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김을지는 한손을 들어 활패들을 제지시키고 의금부도사에게 말하였다.

《의금부도사는 양지현감을 소인의 처분에 맡기고 돌아가옵시오. 상감마마께서 우리 부모님들을 살려내라고 하신 어지를 위반한 죄목으로 잡혀가는 저놈을 처단할바에는 소인이 처단하겠소이다.》

숲속에서 김을지의 말을 듣고있던 장영실은 전후사연을 깨닫고 끓어오르는 의분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김을지의 거사가 못내 장하게 여겨지고 백성들을 굶어죽게 만든 고을원을 잡아들이라는 임금이 고맙고 감사하였다.

의금부도사는 어쩔수 없는 형세에 빠졌으나 김을지의 요구대로는 결코 할수 없었다. 어명으로 죄인을 잡아가다가 김을지에게 봉변을 당하고 돌아가는것은 무관으로서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다.

빈손으로 임금을 뵈옵고 구구히 자초지종을 어떻게 아뢰인단 말인가. 임금의 뜻을 어기는것은 천륜을 어긴것으로서 참형을 당하여야 한다. 사세부득하여 참형을 받아야 한다 해도 저 하나 목숨이야 무엇이 아까우랴. 두려운것은 죽어도 수치는 세상에 남아있는것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과 록봉으로 명예를 이어온 삼한갑족(대대로 문벌이좋은 집)은 졸지에 무너지고 부모처자는 련루되여 뿔뿔이 흩어져 산지사방으로 귀양가거나 노비로 팔려가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도적의 무리와 싸우다가 죽는다면 아니, 어명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다면 죽어도 명예는 살아남을것이며 부모처자는 나라가 돌봐줄것이다.

의금부도사는 새로운 용기와 담력이 솟구쳐올랐다.

《이놈이 제법이다. 네놈의 말은 네놈대로 가당할지 모르되 나에게는 천만부당하다. 죄인은 응당 국법으로 다스려 정정당당하게 처단해야 한다. 네놈은 그것도 모르는 무지한 도적이 분명하다. 상감마마께서는 너의 부모를 죽게 만든 양지현감을 잡아들이라고 하시고 너의 원한을 친히 풀어드리려고 하옵신데 네놈이 사람이거든 오히려 제편에서 무분별히 죄상첨죄(죄우에 또 죄를 짓는다는 말) 하겠느냐?》

《그 말씀도 옳소이다. 하오나 상감께서는 내가 내 손으로 부모님의 원쑤를 갚았다고 하면 장히 여기실터이니 어찌 죄상첨죄라 하리까.》

《무엇이? 그렇다면 너는 내 칼을 받아라.》

의금부도사는 눈깜박할 사이에 김을지의 목을 번개처럼 내리쳤다.

강궁을 뻗쳐들고 의금부도사를 겨누고있던 활패들은 화살 한대 날려보낼 짬을 얻지 못하였다. 다만 허공중에서 《챙강》하는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만 들었다.

김을지가 어떻게 몸을 피하면서 의금부도사의 칼을 막아냈는지 귀신도 모를 일이였다.

의금부도사의 라졸들도 어쩌지 못하고 두사람의 칼싸움을 황황히 바라볼뿐이다. 결국 김을지와 의금부도사가 죽고 사는것으로 일은 끝날것이였다.

행길우에 돌개바람이 일고 허공에서는 두사람의 칼날이 울었다.

별안간 김을지의 칼이 왼쪽으로 향방을 잡는듯 하더니 뜻밖에 오른쪽으로 비껴내리며 도사의 목을 향해 날았다.

량쪽의 구경군들이 처참하게 굴러떨어질 의금부도사의 머리를 상상하며 눈을 감는 순간 어느 사이 의금부도사가 몸을 빼면서 오히려 반대로 김을지의 목을 칼로 곧추 내찌른다. 이번에는 량쪽의 구경군들이 떨어져내리는 김을지의 목을 볼것 같아 눈을 감는 순간 《챙강―》 하는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였다. 김을지가 의금부도사의 칼을 비껴친것이다.

잠간 사이 두 적수는 칼을 가로세로 맞대이고 서로 견제하면서 힘내기를 하였다. 칼싸움의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누가 먼저 상대방의 힘을 리용하여 칼을 떼내는것과 함께 적수를 어떻게 날랜 동작으로 찌르는가, 여기에 승패가 달려있다. 이런 때는 두 적수가 다 함께 칼에 찔리워 죽을수 있다.

두사람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상대방의 부릅뜬 눈과 눈의 맞부딪침, 실로 호랑이와 호랑이의 싸움이다.

《네놈이 칼쓰기가 무쌍쿠나!》

의금부도사가 이발사이로 내뱉는 소리이다.

《도사님도 칼쓰는 법이 용하시오.》

김을지가 침착하게 말을 받아넘긴다.

《얏―》

의금부도사는 김을지가 대답하는 틈을 노렸다가 칼을 옆으로 비껴치우면서 오른쪽다리로 김을지의 배허벅을 정통으로 찼다. 어찌나 세차게 찼던지 김을지는 당장 《헉―》 소리를 내뿜으며 뒤로 동그라져 두어바퀴 굴러갔다.

허나 웬일인지 의금부도사의 칼이 도리깨자루에서 빠져나온 도리깨팔처럼 반공중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떨어지듯이 휘뿌려져서 바로 김을지앞에 내려와 꽂혔다.

김을지는 벌떡 일어나 그 칼을 뽑아쥐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흔히 볼수 있는 례사로운 일처럼 빙긋이 웃었다.

《도사님, 인젠 어쩔셈이시오?》

《너 이놈, 네놈이 대장부라면 칼을 되돌려주고 다시 결판을 낼것이고 네놈이 졸장부라면 그 칼로 방비없는 상대를 찔러죽이면 될것인데 야료는 무슨 야료냐?》

의금부도사는 오히려 제편에서 노성을 터뜨렸다.

그의 칼이 김을지의 수중에 들어간것은 두 적수만이 알 일이였다. 도사의 발길에 채워 뒤로 동그라지는 순간에 김을지는 도사의 칼을 맹렬하게 차버리면서 재주넘는 광대처럼 새우등모양으로 허리를 꼬부리고 굴러갔던것이요, 도사의 칼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김을지를 따라온것이다.

너무도 창졸간에 벌어진 광경이여서 의금부도사의 라졸들과 김을지의 동료들도 어떻게 되여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졌는지 놀라와 《아니, 저런, 저런…》 하고 외마디소리만 내였다.

숲속에서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내다보고있는 장영실은 두 적수의 출중한 무예에도 탄복했고 두사람사이에 오가는 말에도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김을지가 의금부도사를 죽이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어졌다. 이러나저러나 의금부도사는 임금의 어명을 실행코저 양지현감을 잡아가는 신하가 아닌가. 그를 죽이면 임금을 얕보는짓이다.

장영실의 믿음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을지가 그것을 보여준것이다.

《옳소이다. 방비없는 상대를 해치는것은 졸장부의 비렬한 행위오이다. 또 임금의 어명을 목숨걸고 지켜나선 도사님을 어찌 죽이리오. 소인도 상감마마의 하해같은 은덕을 받은 사람으로서 상감마마의 뜻을 그르칠수 없소이다. 자, 칼을 받도록 하옵시오.》

김을지는 칼을 던져주었다.

칼을 넘겨받은 수치와 분기를 참을래야 참을수 없어 의금부도사는 김을지를 노려보았다. 썩돌에서 불이 인다지만 저런 젖비린내나는 베잠뱅이에게 놀랍게도 뛰여난 도법이 있을줄 몰랐다. 내 저놈을 한칼에 두동강내고 수치를 씻으리라 하고 칼자루를 으스러지게 잡았다.

《이놈, 다시한번 해보자.》

《하오나 소인은 순전히 무술겨루기라면 하겠나이다. 무술을 겨루다가 승패가 나서 만약 도사님이 죽어도 임금께 죄될 일은 아니기때문이오이다.》

《네놈이 끝까지 나를 조롱할테냐? 네놈이 내 칼에 목이 잘린 뒤에 조롱해보아라.》

잠시후에 두 적수는 서로 상대를 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각일각 생사운명을 내맡긴 치렬한 칼싸움이 벌어질것이였다.

허나 이때 두사람을 멈춰세우는 웨침이 들려왔다.

《양지현감이 도망친다―》

김을지는 번개처럼 눈길을 돌려 달구지를 바라보았다. 목에 칼을 쓴채로 양지현감이 잽싸게 숲속으로 달아나고있었다.

의금부도사도 다급히 《저놈 잡아라.》 하고 소리쳤다. 양지현감이 도망친다면 일은 랑패다. 죽은 놈이라도 싣고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본의아니게 도적무리와 결탁했다는 죄를 받을것이였다.

《어서 화살을 먹여라―》

김을지는 양지현감을 쫓아 내달리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김을지의 동료들이 양지현감을 겨냥하여 화살을 핑, 핑― 날리는데 그 모두가 하나같이 양지현감의 잔등을 꿰뚫었다. 양지현감은 《어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며 목에 쓴 칼을 안고 그자리에 꺼꾸러졌다.

김을지는 한가슴에 서리고 엉키였던 시름을 다 가신듯 긴숨을 몰아쉬였다.

부모의 원쑤를 갚아드린것은 예로부터 효도중의 효도라고 했으니 얼마만큼이라도 부모의 혼백을 위로해드린것 같았다.

해는 서산너머 지고 길섶의 깊은 숲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사님, 이 사람은 오늘 부모님과 녀동생의 원쑤를 갚았소이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김을지는 이렇게 하직을 고하였지만 가슴속에 끓는 원한은 수그러들줄 몰랐다. 양지현감을 처단하였다 해도 부모님과 누이동생은 살아서 돌아올수 없지 않는가.

《김을지 너 이놈, 네놈과의 결판은 끝나지 않았다.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 두고보자.》

의금부도사는 이처럼 분격을 쏟았으나 그것은 행차뒤 나발과 같은 소리였다.

김을지네들은 의금부도사일행이 죽은 양지현감을 함거에 싣고 고개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행길우에 우뚝우뚝 서있었다.

장영실은 김을지를 만나보게 된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그가 부모들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임금을 공경하는 의리심을 떳떳하게 떨친 언행에 크게 감복하였다.

그는 급히 숲에서 나와 행길에 나섰다. 날은 벌써 땅거미가 내려서 열댓보안팎의 사람은 누가 누군지 모르게 어두워졌다.

《을지형님, 저 갓쓰고 말탄 량반을 어떻게 할갑쇼?》

아까 장영실을 숲속으로 끌고갔던 사나이가 하는 말이였다.

《그냥 돌려보내게.》

김을지의 대답소리다.

《그래도 말안장엔 무엇인지 두어개 얹혀있고 등에는 어떤 보물꾸레민지 지고있수다.》

《억쇠, 자네 무슨 소린가. 죄없는 길손을 털어내자는건가? 날은 어두워오는데 길손이 우리때문에 갈길이 지체되지 않았나.》

《하긴 형님이 옳수다. 여보시오 량반님, 어서 갈길을 가시오.》

억쇠라는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니 장영실이 껄껄 웃었다.

《자네 이름이 억쇠라지. 자, 그럼 억쇠! 이 말고삐나 잡고있게. 나는 우리 을지동생을 만나보아야겠네.》

《아니, 이 량반자 보게. 저를 곱게 보내주겠다니까 한수 더 뜨는군. 물에 빠진 사람 살려주면 내 보짐 내놓아라 한다더니… 차라리 잘되였다. 내 이 말을 아주 빼앗겠다.》

억쇠가 이러며 말잔등에 훌쩍 뛰여올랐다.

《허, 잘한다. 내 김을지에게 임자를 고해바쳐야겠네. 하하하, 여보게― 을지동생, 이리 좀 오게.》

김을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영실은 자기보다 목과 머리가 하나 더 큰 김을지를 올려다보며 《옳구만, 옳아. … 날세, 나야.》 하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김을지는 키작은 량반이 장영실임을 제꺽 알아보고 《아니 형님이시구려. 이 어찌된 일이시오?》 하고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엉킨 목소리를 터치였다. 그는 불시에 장영실의 무릎아래 땅바닥에 두손을 짚고 앉으며 《형님, 용서하오이다. 형님을 이렇게 만나는―》 하고 목메인 소리를 내였다.

《임자 왜 이러나. 어서 일어나게.》

장영실은 얼른 김을지를 일으켜주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네. 이런 곳에서 임자를 만날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장영실은 너무나 반가와 어쩔줄 몰라하였다.

억쇠는 자기가 탄 말을 빼앗지 못하리라는것을 알고 얼른 말잔등에서 내리였다.

김을지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장영실의 옷차림을 살피였다.

《형님은 호군벼슬을 어찌하구 이 모양으로 어디 가시는 길이시오?》

《하하하, 이 옷차림이 어쨌다구. … 자네도 아는것처럼 계묘년(1423년)에 상감마마께서는 이 사람을 상의원별좌(왕의 의복, 일용품들을 만들어 봉정하는 부서의 종5품 벼슬이름)에 임명하시고 그후엔 호군벼슬에 임명하셨지. 그때 한차례 마을돌이를 갔더랬지. 자네도 알지만… 그런데 이번엔 또 상호군으로 벼슬을 올려주시옵고 마을돌이로 고향에 다녀오라고 하셨네.》

《아아― 그러셨군요.》

김을지는 세찬 감격에 솟구치는 눈물을 꾹꾹 눌러 씻었다.

《나에게는 상호군례복이 너무나 과남하여 례사로이 입을수 없어 이렇게 등에 지고 가네.》

장영실은 어깨에 엇걸어진 보따리를 뒤돌아 보여주었다.

《아까 저 억쇠라는이가 말한것처럼 진짜 보물꾸레미라네. 하하하.》

《형님, 하오니 갈데없는 상호군나리님이시군요. 이제라도 대감님께 절을 드리나이다.》

김을지는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큰절을 하는데 곁에 있던 사나이들도 황망히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하였다.

《상호군나리님께 문안드리나이다.》

《미처 알아뵙지 못한 죄 어찌하오리까.》

사나이들이 황송히 절하는것을 보고 장영실은 불에 덴것처럼 어쩔줄 몰라하였다.

상호군이라면 무관품계로 정3품이다. 이 품계면 어엿한 당상관이요 대부벼슬이다.

《이러지들 마시우. 나리는 무엇이고 죄는 무슨 죄란 말이우. 어서 일어들 나시우.》

장영실은 김을지를 먼저 일으켜세우느라고 쩔쩔맸다.

《임자부터 일어나게. 그래야 이 사람들도 일어날게 아닌가.》

《조정의 나리님께 절하는것이니 만류하지 마시오이다.》

절을 받아주기 전에는 조아린 머리들을 끝내 들지 않으리라는것을 알아차린 장영실은 자기도 무릎을 꿇어엎드리면서 맞절을 하였다. 그러자 김을지가 당황하여 일어나 장영실의 두손을 잡아 송구히 일으켜주었다.

《량반과 상놈은 구별이 뚜렷하옵나이다. 어찌 상호군나리님이 백성들앞에 맞절을 하겠소이까. 상감께서 이러하라고 노비신분을 벗겨주시옵고 높은 벼슬을 하사하시였겠나이까. 어서 량반관리의 체면을 세우고 상감마마의 뜻을 받드시옵소.》

김을지는 장영실을 높이 내세우고싶었다. 관노출신이라고 하여 대대로 량반신분을 물려받는 놈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김을지의 동료사나이들도 김을지의 심정과 다를바 없었다. 자기들은 관가에서 《도적》이라고 하지만 량반놈들은 사모쓴 도적놈들이 아니고 별다른 놈들인가. 사람은 누구나 같고같다. 보라, 이 상호군나리님도 전에는 노비가 아니였더냐. 사람은 제 하기탓이다.

사나이들은 장영실이 자기들의 심정을 안고 상호군이 된것처럼 생각되여 더욱 공경스럽게 절을 하였다.

김을지의 손에 이끌려 장영실이 일어나자 사나이들도 일어섰다.

장영실을 숲속에 붙들어놓았던 억쇠는 더더욱 죄송하여 배허벅에 곽지같은 손을 붙이고 또 용서를 빌었다.

《아까는 모르고 불량히 하대하였소이다. 어떻게 사죄할지 난감하오이다.》

《하하하, 사죄는 무슨 사죄인가. … 아참, 거기서 내 말안장에 싣고가는 보꾸레미를 탐냈었지. 내 그걸 보여주리다.》

장영실은 쾌활히 웃으며 말잔등에 비끄러맸던 보꾸레미를 풀어내렸다.

《자, 이걸 보우.》

장영실이 풀어놓은 보꾸레미에는 뜻밖에도 패랭이와 노닥노닥 덧기운 베잠뱅이 한벌이 나왔다. 패랭이는 갈대로 엮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갓인데 노비들이 쓰고 다닌다.

《이것은 지난날 내가 입고 쓰고 다닌것이우.》

김을지와 동료사나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이 옷을 입었던 사람이 상호군으로 오를수 있는가.

《억쇠 이 사람, 자네가 이걸 빼앗아 입고 쓰고 노비가 되자고 그랬나, 응? 말 좀 해보게.》

사나이 하나가 억쇠를 놀려주며 웃었으나 억쇠와 다른 사나이들은 곁따라 웃지들 못하고 묵묵히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것은 이 사람의 생명과 같은 보물이우. 상감마마께옵서 나에게 높은 벼슬을 주실수록 지난날을 잊지 말자고, 잊지 말구 나라에 보답할 마음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다닌다우.》

장영실이 빙긋이 웃었지만 두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였다. 사나이들은 무한히 감복하여 고개들을 끄덕끄덕 하였다.

김을지는 후더워오는 눈시울을 슴벅이며 길 좌우를 돌아보았다. 의금부도사일행이 넘어간 고개길은 벌써 보이지 않게 어둠이 덮이고 나무가지들사이로 하나둘 별들이 보여왔다.

《형님, 고개아래 주막집이 있소이다. 주인은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여서 하루밤 묵어가도 별탈 없소이다.》

《그참 마침이로군. 어서 가세. 그동안 쌓인 회포를 나눌겸 쉬고가자구.》

얼마후에 장영실과 김을지는 탁배기사발을 앞에 놓고 마주앉았다.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한데 그들의 이야기는 그 별보다도 더 많았다.

김을지의 동료들은 탁배기를 동이로 마시고 그자리에 쓰러져서 네활개를 펴고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자 형님, 어서 좀더 드시오이다.》

말끝마다 웃음과 눈물이 따라다니는것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김을지를 바라보는 장영실은 그와 처음으로 만나 인연을 맺던 때가 떠올라 깊은 추억에 잠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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