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1
무오년(1438년) 가을.
새벽빛이 푸르스름히 서울장안에 찾아들었다. 사위에 가득찼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북악산줄기의 들쑹날쑹한 산봉우리들이 어슴푸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의 영추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계천기슭의 나지막한 초가집에도 새벽빛은 반갑게 비껴왔다.
키낮은 삽짝문가에 매여있는 가라말은 새벽빛을 기다려왔는지 푸르릉 코투레질을 내불면서 이발저발 옮겨짚는다. 말잔등에는 안장이 갖추어져있었다.
불그스레한 방등불빛이 창호지에 어려있는 방안에는 자그마한 키에 눈빛이 영채로운 사나이 하나가 방금 차려입은 무관의 례복을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면서 내려다보고있었다.
둥근 목깃과 가슴부위에 구름무늬를 수놓은 은빛흉배며 은고리가 달린 허리띠를 보면서도 빙그레 웃고 홍달이 넓은 소매를 날개처럼 펼쳐들고 살피면서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빙긋빙긋 웃는다.
《어- 이건 너무 으자자하거든. 나에게는 너무 과남해. 내가 이걸 입고 나서면 우쭐해한다고 남들이 웃을거야. 벼슬이 올랐다고 이러쿵저러쿵 뒤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오죽 많을가. 숙이가 밤새껏 손질해주느라고 수고하였지만 이런 사모관대를 수월히 할수 없군. 허, 그참…》
그는 자기옆에 숙이가 있는듯 이렇게 혼자소리를 하면서 례복을 벗고 례사 흰도포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외자상투를 쓰다듬어올린 다음 망건을 쓰고 그우에 검은 통영갓을 가볍게 눌러썼다.
《에라- 우선 간편해 좋군.》
그는 어떤 구속감에서 벗어난듯이 《후-》 하고 즐겁게 긴숨을 내쉬고 벗어놓은 례복을 또 개여 흰무명보자기에 정히 쌌다.
《이 례복을 가져가기는 해야지. 다른 때는 몰라도 동래현에 가서 마을돌이를 할 때는 반드시 입어야 하렷다. 천한 이 몸을 또다시 높은 벼슬에 올려주신 상감마마의 하해지덕을 만사람앞에 보여주어야 하니깐. 이것은 우리 상감마마께옵서 계시는 이 나라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귀한 몸으로 되는가를 보여주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고무해주는 중대한 정사의 하나렷다. 암, 그렇구말구. …》
그는 또 빙그레 웃으면서 혼자 소리를 하였다. 누가 옆에서 본다면 그의 천진스럽고 명랑쾌활한 성미를 제꺽 알수 있을것이였다.
그는 재빠른 솜씨로 례복을 싼 무명보자기를 어깨에 엇걸어지고 자그마한 함같은것을 싼 보자기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그리고 방등불을 가만히 입김으로 불어 껐다.
(잘 있거라. 방등아, 내 보름후에 너를 다시 켜리라. )
그는 마음속으로 애틋이 말하면서 문밖을 나섰다. 때마침 경복궁 북쪽에 있는 종루각에서 파루소리가 장중히 울려퍼졌다.
《떼엥-》
웅글고도 맑고 부드러운 종소리! 북악산이 받아외우고 하늘땅이 받아외우는것 같은 긴 떨림소리가 서울장안을 쓰다듬듯 하면서 멀리멀리 이 나라 거리와 마을을 찾아 사라져갈 때 뒤이어 또다시 《떼엥-》 하는 두번째 종소리가 처음과 같이 신비로운 여운을 남기면서 산천초목을 깨우고 사람들을 깨웠다. 그 유정한 메아리는 《새날이 밝았도다! 어서 일어나거라. 부지런한 백성들아-》 하고 부르는 그 뉘의
문밖을 나선 자그마한 사나이는 토방우에 그린듯이 서서 서른세번째의 마지막파루소리가 끝날 때까지 귀기울여 들었다. 그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히 피여나고 두눈에는 깊은 감회가 젖어들었다.
이 파루소리에 맞추어 임금과 신하들이 그리고 온 나라 백성들이 또 하루 새날을 맞이하고 굳게 닫겼던 성문이 열린다.
이 파루는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루각을 짓고 그안에 설치해놓은 《옥루기륜》이라는 자동물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따라 울려퍼진다. 바로 그 옥루기륜을 이 자그마한 사나이가 만든것이다. 그는 한없는 긍지와 보람을 안고 밝아오는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장영실이다. 과학자, 발명가이고 기술자로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는 뛰여난 재인재사 장영실!
세종은 명나라에도 없고 왜나라에도 없으며 이 세상 고금동서에도 없었던 기기묘묘한 물시계를 만들어낸 장영실에게 상호군의 높은 벼슬을 제수하고 마을돌이차로 고향에 다녀오도록 특지를 내리였었다. 하여 장영실은 이렇게 새벽길차비를 하고 나선것이다.
《아이, 나리님. 관복은 어찌하고 례사차림을 하셨나이까?》
머리우에 무엇인가 한임 이고 삽짝문안에 들어서는 처녀가 그자리에 무춤 섰다.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에 눈매가 시원하고 몸매가 실한 이 처녀는 대궐객사의 관비 숙이다.
장영실은 숙이와 비해보면 몸이 체소하고 키도 작아보였다.
장영실은 《음, 내가 못입을 옷을 입었더냐. … 보아하니 너는 내가 객사로 돌아간 뒤에도 꼬바기 밤을 새운 모양이구나. 내 걱정은 그만하고 눈을 좀 붙이라 했었는데 왜 이리도 일찌기 또 왔느냐? 객사일도 많겠는데…》 하고 빙긋이 웃었다.
숙이는 지난밤에 장영실의 례복을 품이 맞게 뜯어고치고 다림질까지 지성껏 하느라고 자정이 넘어서 객사로 돌아갔던것이다. 상의원에서 내준 례복이 키작은 장영실에게는 너무 컸었다.
《아이참, 이 천비가 자고깨고 하는것이 중한것이 아니라 나리님이 관복을 입는가 안입는가가 더 중한 일이나이다.》
숙이는 머리에 이고있던 광주리를 내려놓고 눈을 곱게 흘기였다.
《나리님, 어서 관복을 입으셔야 하겠나이다.》
《그걸 입어보니 아무래도 거북스럽더라. 그렇다고 너의 진정을 잊기야 하겠느냐. 내 고향에 가서 마을돌이를 할 때에는 반드시 입으리라. 자, 보게. 이렇게 지고 가지 않느냐.》
장영실이 뒤돌아 어깨에 엇걸어진 례복보자기를 보여주었다.
《아이 망측해라. 상호군나리님이 시골나무군이 길떠나는것처럼 하고서야 높은 벼슬에 어찌 어울리겠나이까. 이 천비가 관복을 등에 지고 가라고 하였나이까. 처음부터 떨쳐입고 먼길을 떠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가는 행인들이 나리님을 몰라보고 숙보지 않으리까. 더구나 량반행차들이 견마를 잡히고 앞뒤에 전배, 후배사령들을 달고 이리까라저리까라 하오면 나리님은 길을 비켜야 하고 하대를 받기가 쉬우니 그 수모를 어찌 참겠나이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껏 받은 수모가 오죽하오이까.》
처녀는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활달하여 제가 생각하는바를 숨김없이 말하군 하였지만 마음은 처녀다운 여린데가 있어서 눈물을 보일 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의 눈굽에는 어느 사이 맑은것이 가랑가랑 맺혀돌았다.
《하하… 이러지 말게. 나야 노비출신이니 높은 벼슬을 받았기로 그 본색이야 어디 갈텐가. 량반관리들이 벼슬품계가 이 사람보다 낮아도 그래, 높아도 그래 다같이 나를 렬등히 여겨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낼뿐이네. 나에게는 상감마마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고 그 뜻을 받들어나갈수만 있다면 그까짓 수모쯤이야 무엇이겠느냐. 이 몸엔 한생토록 수모를 받아온 버릇이 굳은살처럼 배겼으니 아프지 않네.》
장영실은 대범히 웃으며 숙이가 내려놓은 광주리를 이윽히 내려다보았다.
《숙이는 나에게 길량식을 가져온 모양이구나. 네가 없으면 이 늙은 총각이 장가들 가망이 없으렷다. 안그래?》
그는 쾌활히 껄껄 웃었다.
《아이참, 나리님의 그 말씀은 잘하신 말씀이와요. 천비라도 소녀가 없어보면 나리님은 한지에 나앉게 되시나이다.》
숙이는 얼굴을 활딱 붉히면서도 제 심중을 다 말하였다.
《여기에 길가시다가 배고프면 잡수실 밥과 떡이 두그릇 있고 나리님이 좋아하시는 반찬거리가 있나이다. 그리구 갈아입으실 속옷은 이쪽 꾸레미에 들었어요. 그리구 거기에 제가 두어번 입다가 간수해두었던 치마저고리가 한벌 있어요. 새옷이나 다름없나이다. 동래에 가시면 누이동생에게 입히시고… 제가 보냈다는 말은 그만두셔요. 나리님이 관복을 떨쳐입으시고 고향에 가옵신데 그 누이동생 되는 사람이 람루한 옷차림이면 보기에 딱한 일이 아니오이까. 호호…》
숙이는 명랑히 웃었지만 장영실은 코마루가 시큰해왔다. 그것은 영아를 한식솔로 여기는 숙이의 애틋한 정이였다. 숙이의 고운 마음이 장영실의 가슴에 따스히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치 않고 웃음으로 받아넘기였다.
《앞으로 제 시누이가 될 사람이니깐 제 옷도 벗어주누만. 안그래? 응, 하하하-》
《네, 그렇사오이다. 호호…》
숙이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반짝이였다.
《알겠네!》
장영실은 숙이가 주는 보꾸레미를 말잔등에 실었다.
어느덧 아침해가 락타산너머에서 그들을 남몰래 훔쳐보듯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후에 새날의 첫 해빛이 북악산봉우리들을 붉게 물들이고 그들이 서있는 마당가에도 살그니 찾아들었다.
두사람은 서로서로 열렬히 사랑하였다. 나란히 서있는 두그루 나무가 세월이 흐를수록 푸르게 자라서 가지들이 하늘가에 엉키고 땅밑에서 눈뿌리들이 더 깊이 엉키는것처럼 뗄래야 뗄수 없는 정으로 얽혀들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혼례를 치를수 없었다. 장영실은 상호군벼슬량반이고 숙이는 천한 관비이다. 만약 그들이 가정을 이룬다면 조정관리의 체면을 어지럽혔다고 장영실의 시비질을 무쌍히 할것이요, 노비본색은 아무때고 해괴한짓을 이같이 거침없이 할것이므로 본래의 관노로 떨구어 내쫓아야 한다고 조정이 팥죽끓듯 할것이였다.
장영실이 그런것은 두려울것이 없었다. 설사 관노로 쫓겨난다 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쓸모있는 문물을 만들어내면 그것으로 보람있게 살수 있는것이다. 무서운것은 가정을 무은 후에 그들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노비인 어머니를 따라 그 어린것이 노비로 되는것이다. 그들은 다 관노, 관비의 쓰라린 피눈물을 맛볼대로 맛본것이다.
어찌 자식을 낳아 노예의 멍에를 메워주랴.
그들은 그 한가지가 두려워서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로총각, 로처녀로 늙어온다.
장영실이 동래현 관노로 서울에 불리워와서 임금을 만날 때는 스무살 갓 넘기였고 숙이는 열여섯살 애어린 관비였었다.
공조참판 리천대감이 장영실을 처음으로 객사에 데리고와서 관노들의 어느 한 방을 내게 하고 거기에 그를 들도록 하였었다. 그리고 숙이를 불러 《오늘 이후로 네가 이 사람을 각근히 시중해주어라. 끼식도 날라주고 세면물도 떠오고 여러가지 일을 맡아해라. 내가 너의 상전에게 방금 일러두었으니 그리 알고 채심히 행하여라.》 하고 엄히 뒤끝을 다지였었다.
《예, 알겠사오이다.》
숙이는 두손을 모아잡고 공손히 대답을 올리면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리천대감이 돌아가자 자기가 모셔야 할 어른이 어떤 분부를 내릴지 몰라 처녀애는 머리를 숙인채 그대로 서있었다. 잠시 기다리였다. 숙이는 황송하였지만 용기를 내여 가만히 고개를 반쯤 들고 그 어른을 살그미 바라보았다. 하더니 예상밖인듯 사뭇 놀라 두눈을 깜박이다가 비로소 깨도가 되여 도담하게 고개를 높이 들고 《흥-》 하고 코방귀를 내불었다. 자기가 모셔야 할 사람이 량반인줄 알았더니 이게 뭔가. 머리에는 갈대로 엮은 패랭이를 쓰고 몸에는 때국이 흐르는 베잠뱅이, 여불없는 관노총각이다.
가뜩이나 뻔질나게 객사에 드나드는 량반관리들을 시중드느라고 팽이처럼 뺑뺑 돌아치는 판인데 참말로 촌닭 관청에 온듯한 시골뜨기 관노를 모셔야 한다니 될번한 일인가. 난 관비는 관비여도 대궐 궁노비다. 어찌 흔하디흔한 시골노비에 비기겠는가.
장영실은 처녀관비가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행동거지를 이윽히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얘, 이 계집애야,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 꼴이구나. 쬐꼬만 계집이 벌써 사람을 가려보는 미운눈이 박혔고나. 생겨먹기는 눈이랑 입이랑 다 곱게 붙어있는데 코방귀는 무슨 코방귀냐? 하하… 겉볼안이라고 겉이 고우면 마음도 고와야지 그게 뭐냐? 하, 그참 고운 계집애가 할망구처럼 쇠여서 어디에 쓰겠니, 응? 대답 좀 해봐-》
장영실은 손우 오빠처럼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을 타이르듯 또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이 애어린 처녀가 저 멀리 떠나온 고향-동래에 떨구고 온 하나밖에 없는 녀동생 영아처럼 생각되여 정이 갔다.
처녀애는 갑자기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였다.
아이구나, 시골촌뜨기인줄로 여겼더니 남의 속을 뜬금처럼 알아맞추고 하는 말도 어른같고 웃기도 잘하누나. 옷은 꾀죄죄하지만 얼굴 생김은 영특해보이고 성미도 시원시원한게 그 총각 안팎으로 잘났구나. 내가 새빠지게 놀았구나. 허지만 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어찌 용서를 빌가.
숙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류다른 관노가 어쩌나 보자고 한번 더 엇서고싶었다. 그래서 《흥, 잘나기도 했네. 나를 할망구라구 해놓구 할망구에게 훈시질이구나. 량반님네처럼.》 하고 따벌처럼 쏘아주었다. 총각은 타내지 않고 벙글거리였다.
《이애야, 내 이름은 장영실이라고 한단다. 그래 네 이름은 뭐냐?》
숙이는 또 한번 놀랐다. 혈육처럼 따스한 정을 부어주는 그 목소리에 웬일인지 눈물이 나왔다.
《천비의 이름은 알아서 무얼한담. … 할망구지, 호호…》
《그럼 이 똘똘이할망구야, 너 리천대감님의 분부거행을 착실히 해야겠다. 먼저 내가 입고있는 이 잠뱅이를 깨끗이 빨고 다듬이질을 잘해서 래일 어뜩새벽까지 가져와야 한다. 네가 꽤 해낼가?》
《흥, 그것두 못할가. 그렇지만 베잠뱅이같은건 빨기두 싫어요.》
처녀애는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어쩐지 장영실의 옷을 빨아주고싶었다. 베잠뱅이까지 빨아달라는것은 아무에게나 쉽게 부탁할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상대를 믿고 자기 마음을 다 주는 사람이 아니면 말할수 없다.
《그래그래, 네 말도 옳다. 허지만 너는 나를 잘 몰라서 그런 소릴 하겠지만… 허 어쩐다? 가만, 내 너한테는 조용히 말해줄테니 어디 가서 발설치 말아라.》
장영실은 한번 주위를 살핀 뒤에 입가에 두손을 오그려붙이고 귀속말로 소곤거리였다. 그런 다음 한발자국 물러나서 싱긋 웃었다.
《내가 너를 이만큼 믿으니 그 보답을 해야 한다.》
《피, 거짓부리야. 하늘의 별을 따온다는 소리와 같은 거짓말이야.》
《너는 아직 철부지구나. 그런것두 거짓말할가. 그런 사실이 없는데 짜장 생소릴 지어내면 목이 잘리우는줄 모르누나. 래일 지내보고 내말이 거짓말이라면 고소하려무나. 그러면 너는 상을 받구 나는 목이 잘리우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말이 정말이라면 너는 그래 어쩔테냐?》
장영실이 이렇게 말해서야 처녀애는 별빛같은 눈을 빛내이며 생긋이 웃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내 죽을 때까지 오빠옷을 빨아줄게. 호호… 내 이름은 숙이야.》
숙이는 어느 사이 장영실에게 정이 들어 오빠라는 말을 저도모르게 하고 제 이름도 대주었다.
《숙이라고? 이름이 참 좋구나. 맑을 숙자라… 사람은 맑아야지.》
장영실은 머리를 끄덕이며 숙이를 정겹게 바라보았다.
《맑을 숙? 그건 무슨 소리나?》
《네 이름을 글자로 쓰면 맑을 숙자를 쓰리라고 생각되여 말하였다.》
《어마나, 그럼 오빠는 글도 아나?》
숙이는 신기한듯이 장영실을 마주보았다.
《하하하, 너는 나를 까막눈으로 알았더냐.》
《그렇지 않구요. 시골관노가 아닌가요.》
숙이는 감탄어린 눈길로 장영실을 마주보면서 갑자기 말투를 고쳤다.
그 이튿날 장영실이 참말로 입궐하여 임금을 만나고 객사로 나왔다. 어떻게 되여 동래현 관노가 세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볼수 있었고 그후에 세종이 장영실을 발탁하여 우대하여주었는가에 대하여서는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 이야기를 계속하자.
장영실이 임금을 만나고 객사로 나온 날 숙이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놀라와 새로 사귄 관노 장영실이 옳기는 옳은가 하고 그를 보고 또 보았다. 그가 입고있는 옷도 지난밤 자지 않고 제가 빨아서 다듬이질을 해주었던 그 베잠뱅이가 분명하다. 무릎아래 해졌던 자리를 덧기워주었던 그 잠뱅이가 아닌가.
《숙이, 고맙네. 네가 빨아준 이 옷을 입고 내 상감마마님을 뵈왔구나. 너는 나와 약속한대로 죽을 때까지 내 옷을 빨아주어야 해. 응? 하하…》
장영실이 명랑히 웃으며 숙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예, 약속했으니깐요. 호호…》
숙이는 임금까지 만나고 글까지도 아는 장영실을 알게 된것이 자랑스러웠다. 한해두해 나이를 먹으면서 처녀는 장영실을 사랑하게 되였다. 10년이 넘어흐르는동안 그들의 사랑은 끝없이 깊어갔다. …
해는 벌써 락타산봉우리에 올라왔다. 장영실이 떠날 때가 왔다.
《내가 보름을 말미로 허락을 받았으니 이달 그믐께는 돌아와야 하네. 그간 집을 잘 돌봐주게. 짬이 나는대로 마당두 쓸구… 내가 돌아오면 숙이의 정다운 손길이 닿아있는 집이라는것이 따스히 느껴지도록… 하하.》
《온참, 걱정마시오이다. 소비는 먼길을 떠나는 나리님이 더 걱정스럽소이다.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시기를 바라나이다.》
숙이는 정식으로 땅에 두손을 내짚으면서 큰절을 하였다.
《걱정말게, 그대의 당부를 내 어이 잊을고.》
장영실이 밝게 웃으면서 얼른 숙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숙이는 말고삐를 풀어서 두손으로 받쳐주었다. 그리고 생끗이 웃으며 활달한 성미그대로 한마디 하였다.
《나리님, 이 소비는 이 말고삐를 잡고 마음속으로 나리님의 견마잡이로 함께 가나이다.》
《그러면야 먼길이 지척인듯 가깝지 하하하… 고맙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겠네.》
장영실이 즐겁게 웃으며 삽짝문으로 말을 끌고 나갔다.
《나리님-》
개울건너편에서 만복이 벙글벙글 웃으며 껑충껑충 뛰여왔다.
그는 장영실이가 사랑하는 주자소의 장공인 총각이다. 올해 스물을 갓 넘기였는데 웃기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마음도 착하다. 그의 집은 성밖 목멱산줄기의 남쪽 어딘가에 있다. 집이 멀어서 쟁인바치들이 먹고 자고 깨는 방에서 함께 자고 함께 깨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러 나간다. 때때로 늙은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집에 다녀오며말며 하였다.
만복이는 장영실나리님이 마을돌이를 간다는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집에 갔다가 지금 오는 길이다.
그는 장영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임금의 어지를 받고 장영실이 무엇을 만들면 그곁에서 도맡아 조력하면서 일을 착실히 배웠다. 장영실이 무거운것을 다루거나 힘으로 하는 일이 생기면 《나리님, 그런것은 제가 하오리다.》 하고 씩- 웃으며 나서군 하였다. 장영실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힘껏 도왔다. 오늘 장영실이 타고갈 말도 만복이 자기 집에서 가져온것이다.
장영실은 역참마필로 마을돌이를 가게 되였지만 찰방이 《서울역참의 말들이 더러는 조정관리들의 공무로 리용되였고 더러는 먼길을 다녀온 말들이여서 쉬여야 한다.》고 핑게 하였다.
노비출신이 상호군으로 높이 오른데다가 마을돌이까지 하게 된지라 심술이 뻗쳐서 역마를 내주지 않으려는 잡도리였다. 이런 내막을 알고 만복은 《우리 나리님이 역참마필이 아니면 마을돌이를 못하실것 같은가봐.》 하고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고 어제 저녁에 말을 가져왔던것이였다.
평만복은 개울의 징검다리를 신바람나게 훌쩍훌쩍 뛰여넘어 장영실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공겸스럽게 량수거지를 하고 너푼 절을 하였다.
《나리님, 밤새 편히 주무셨소이까.》
《허, 잘 자기는 했는데 만복이네 명줄같은 말을 내가 타고가자니 참말 송구스러워 죽을 지경이야.》
장영실은 참말로 미안스러워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나리님, 우리 아버님은 나리님이 마을돌이를 가시는데 오룡차는 못드려도 말이야 왜 못드리겠느냐 하면서 내주었소이다. 그리고 나에게 〈너는 나리님께 이렇게 여쭈어라. 소인 만복이 견마잡이로 써주시기를 청하오이다- 하고 말이다. 〉라고 하셨소이다.》
만복이 제 아버지 말과 행동을 시늉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장영실과 숙이는 만복이를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만복이 아버지가 마을돌이가는 장영실에게 하나밖에 없는 말을 선뜻 내주고 만복이를 견마까지 잡혀보내고싶어 하는것은 아들 만복이가 장영실밑에서 착하고도 올곧게 성장해가고있기때문이였다.
집이 가난하여 배울수 없었던 글도 익혔다. 장영실이 주자소에서 만복이를 데리고 일할 때면 글을 알아야 글자들을 주자할수 있다고 친절하게 한자한자 가르치였다.
만복이는 머리가 좋아서 글을 가르쳐주는대로 받아들이는데 한번 배운것은 잊어먹는 법을 몰랐다.
다른 장공일을 할 때에도 장영실은 그를 데리고다니면서 일을 배워주었다. 옥루기륜을 만들 때에도 만복이는 장영실이 가르치는 기름의 작용원리와 리치를 쉽게 깨닫고 맡겨주는 기묘하고도 정교한 부분품들을 장영실의 마음에 꼭 들게 만들어내군 하였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간도 여간이 아니였다.
장영실은 날이 갈수록 만복이를 사랑하고 더 많은것을 배워주었다. 그는 앞으로 만복이를 자기의 뒤를 잇게 하여 나라의 보배로 키우려고 하였다.
만복이도 장영실의 마음을 알고 열성껏 배워갔다.
만복이는 장영실을 만난 덕에 장하게 번져갔다. 근간에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날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을 대견히 바라보며 로인이 물었다.
《이애 만복아,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그러자 만복이는 벙글거리며 《예, 그렇소이다. 우리 호군나리님이 저를 데리고 일을 배워주오이다. 참말 모르는것 없는 팔방미인이신데 마음은 또 얼마나 고운지 모르오이다.》 하고 장영실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임금님이 노비신분을 벗겨주고 벼슬을 주었답니다.》
령감, 로친이 너무 기뻐서 만복의 손을 잡기도 하고 쓸어주기도 하였다.
온 나라에 명인재인으로 소문난 사람이 제 아들을 끼고 사람을 만들어주는것이다. 옛날부터 좋은 사람을 사귀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두어달이 지나서 만복이 집에 들어와 벙글벙글 웃으며 아버지앞에 꿇어앉아 절을 하였다.
《아버님, 한가지 말씀드릴것이 있소이다.》
《뭐냐? 어서 말하려무나.》
로인은 의젓하게 번져가는 아들을 흐뭇이 바라보았다.
《글쎄 우리 장영실호군님이 상호군벼슬에 높이 올랐소이다.》
《어이쿠나!- 상호군이라니… 희한도 할시구. 허허…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상호군님곁에 얼씬도 못하겠구나.》
로인은 그것이 서운한듯이 허전하게 말꼬리를 낮추었다.
《아니오이다. 나리님은 상호군이래도 우리 막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땀도 함께 흘리시구 밥도 함께 잡숫구 격차를 두지 않으시는데 얼씬 못한다니 무슨 말씀이오이까.》
《그참 세상에 다시없는 량반이로다. 너는 상호군나리님을 더 잘 모셔야 하겠다. 암, 그렇구말구.》
《그래서 아버님께 한가지 청을 드리려고 하오이다. 나리님이 상호군벼슬을 받으시고 경상도 동래고을로 마을돌이를 가옵신데 제가 우리 집 말을 가지고 견마잡이로 다녀올가 하나이다.》
《어서 그래라.》
로인은 제꺽 허락하였다. 사실 만복이네는 그 말 하나를 가지고 그날그날 벌어먹고 산다. 삯짐도 실어주고 삯밭갈이도 삯연자방아도 돌려주고…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러나 만복이 아버지는 대번에 말을 내주었다.
이렇게 되여 장영실은 만복이네 말을 타고 경상도 동래로 마을돌이를 가게 되였다.
만복이는 장영실이 자기 집 말을 타고 가는것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하온데 나리님은 상호군관복은 어찌하시고 평복차림을 하셨나이까?》
장영실이 상호군벼슬을 받았을 때 제일 좋아하고 감탄하며 마치 제가 받은듯이 기뻐한 만복이로서는 서운해할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모관대하고 행차하면 백성들이 엎드려 지나가기를 기다릴텐데 이 사람이 무엇이 잘나서 장히 거드름을 피우겠나. 나는 상호군이라도 그저 그런 사람이네. 만복이는 그리알구 견마군이 되겠다고 하지도 말게.》
《나리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상감마마께서 주신 위엄을 떨치지 않으시고 그걸 버리시면 그건 바로 상감마마께 교만하고 불경하는 행실이 되는줄 모르시오이까? 누나, 그렇지 않수?》
만복이 옆에 있는 숙이를 바라보며 왼눈을 찌긋해보였다. 그는 숙이를 언제나 누나라고 불렀다. 숙이가 자기를 누나의 심정으로 따뜻이 대해주는탓인지 모른다.
《호호… 참말 그 말을 듣고보니 그것도 그렇구나.》
숙이가 이렇게 맞장구쳤다.
《어- 이런 변봤나. 숙이도 나에게 불경죄를 씌우는구나. 그건 너무 과하도다! 하하하!》
장영실은 쾌활하게 웃었다.
《아니오이다. 소인이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것은 나리님이 관복을 입으시게 하려는것뿐이오이다.》
《옳소이다. 쇤네도 마찬가지이나이다.》
《하하하, 두사람이 나를 몰아주자고 미리 짜놓았는가부다. 어디에 숨어야 할가보다.》
《나리님이 불경죄를 벗으려면 소인을 견마잡이로 데려가면 되옵니다.》
만복이는 이 짬을 타서 자기의 소원풀이를 하려들었다.
《만복이, 나는 네 이름이 마음에 든다. 만복- 참 좋다. 일만 만자, 복 복자를 썼으니 네가 장차 만복을 누린다는 뜻이여서 좋다는걸세. 만복을 누리려면 누구의 시중군이 되여서는 안돼. 그런데 네가 견마군이 되겠다니, 하하하. 한사람은 말을 타고 다른 사람은 말을 끌면서 걷고… 그래서야 어떻게 만백성이 골고루 복을 누리겠나. 리치는 이러한즉 아예 견마잡을 생각을 말구 내가 없는 동안에 주자소일을 더 잘하게.》
장영실은 말잔등에 오르면서 한마디 더 하였다.
《내가 견마를 잡히지 않는 리유가 또 한가지 있으니 그건 먼길을 빨리 다녀오려는데 있어. 때에 따라 말을 구보로 몰아갈 때도 있고 또 능히 화살처럼 달릴 때도 있는데 견마군이 어떻게 따라오겠느냐. 그러니 만복인 섭섭해말라구.》
《나리님, 잘 알겠소이다. 그런데 장공인들이 나리님의 로자로 쓰라고 상목 서너필을 마련해 보냈소이다. 자, 이것이나이다.》
만복은 장영실이 등에 지고있던 보짐을 벗겨 말안장에 비끄러매주었다.
당시에는 엽전도 있고 베돈도 있었지만 상목도 돈처럼 류통되였다. 상목을 두어자 끊어주면 주막집에서 국밥에 탁배기까지 한사발 받쳐서 배부르게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허, 자꾸만 이러면 내가 송구해 어이 할고… 만복이가 장공인들에게 정말 고맙게 쓰겠다고 말해주어라.》
《알았소이다.》
장영실은 숙이와 만복의 바래움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숙이와 만복은 멀리 사라져가는 장영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서있었다. 숙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반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