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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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거리들이 군인건설자들에 대한 환영의 꽃물결로 설레던 그때 최중권장령은 전선동부의 한 야전지휘소에 있었다.

전선동부를 포괄하여 군사분계선상의 전 전선은 매우 긴장되여있었다. 판문점에서 우리측 대표가 보복선언을 한 후 적들은 군사분계선일대의 모든 무력을 전진배치하고 초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측도 전투진지를 차지했다. 전선의 긴장성은 어제 평양에서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군인건설자들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기 몇시간전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하여 더욱 팽팽해졌다.

전선동부 무명고지정점으로부터 정남쪽 직선 8키로메터 되는 지점에서 수십만의 포위를 뚫고 북상하던 2명의 우리측 경비함성원들이 자폭하였다. 이들은 그때까지 살아남아있던 최후의 두명이였다. 투항하라는 적들의 요구를 들을수 없었던 그들은 50메터의 절벽에서 뛰여내려 자신의 몸을 박산내는것으로써 대답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적들에 의한 타살이였다. 적들은 끝까지 그들을 침투간첩으로 치부하면서 투항을 강요하였던것이다. 간첩도 아니요, 투항도 할수 없었던 우리 군인들이 과연 죽음외에 다른 무슨 길을 택할수 있었겠는가. 이 소식이 적들의 화선방송을 통해 우리 군인들에게 전해지자 전선은 증오와 격분,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올랐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리고 그것이 거대한 폭발로 번져질수 있는 일촉즉발의 정세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최중권장령은 평양의 소식에 귀를 기울일 형편이 못되였다. 전선형편이 그렇지 않다면야 그는 텔레비죤앞에 앉아서 수도의 환영을 받고있는 군인건설자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는 안변청년발전소건설을 심철범장령에게 인계하였으나 하루한시도 그것을 잊은적이 없었다. 그는 그 공사의 전략적의의가 명백해진 때에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넘겨주었다기보다 내놓았다고 해야 할것이였다. 그는 최고사령부에서 보낸 직승기를 타고 오면서 건설지휘에 대한 자신의 무능을 통탄했었다. 자책과 번민은 일흔을 눈앞에 둔 나이때문에 더했다. 그는 소환되는 자기에게 최고사령부가 직승기를 보내준데서 어느 정도의 위안을 받긴 했으나 제대라는 어쩔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최고사령부에서 그를 맞이하신분은 뜻밖에도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최중권에게 전선동부의 대련합부대를 맡겨주시였고 상장으로부터 대장으로 승격시켜주시였다. 이 놀랄만 한 영전속에서도 그는 철령산줄기의 100리물길굴을 잊지 않았다. 자기가 내놓고온 거기서 군인건설자들이 한치한치 조국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고있다는것을 그가 어찌 한시인들 잊을수 있었으랴. 드디여 그 공사가 완공된것이다.

하지만 최중권은 지금 그 기쁨을 누릴 경황이 못되였다. 그는 거의 반세기간 군복을 입고있는 오랜 군사일군의 감각으로 자기의 관할구역에서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리라는것을 느끼고있었다. 만일 그 느낌이 현실로 된다면 운명은 그를 안변땅과 다시 련결시켜놓게 될것이다.

사실 이때 안변땅에서 있은 장엄한 선포의 연장선우에서 미국에서는 모종의 음모, 음모라기보다 빌 클린톤과 보브 돌 두 대통령 경쟁세력 다시말해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합세한 대대적인 국론이 벌어지고있었다.

안변땅의 소식은 일찌기 야조브원수가 자기의 일기에 썼던것처럼 조선에서 핵시험을 한것만치나 큰 충격을 주었다. 적들은 조선의 잠재력, 그들의 말대로 한다면 《파국상》을 다시 검토해보아야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는 나라, 기아에 직면하고있는 나라에 100리물길굴에 쏟아부을만 한 막대한 자금과, 자재가 있었을상싶지 않았다. 그것은 《지하핵의혹》에 못지 않는 《지하경제의혹》이였다.

여기로부터 서로 앙앙불락하던 강경파와 온건파들은 잠시 조선문제에서 의견을 합치기로 하였다. 조선은 미국에 도전하였다. 조선은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자기의 의지를 시위하였다. 판문점에서 울려나오는 보복설이 과연 공담이겠는가. 최후의 시험을 해보자. 결판을 지어보자… 이러한 토의끝에 적들은 극비밀리에 《마운트웨저》를 개방하였다.

미국 버지니아주에는 지도상에서도 찾을수 없는 이름모를 고장이 있다. 수도 워싱톤으로부터 7. 2키로메터 떨어진 이 고장은 지명도 없거니와 정부예산지출대상에도 들어있지 않다. 이 신비로운 고장에 《마운트웨저》(기상산)이라는 이름을 달아놓았는데 이곳은 미국이 일단 전쟁에 들어가는 경우 지하수도의 사명을 수행한다. 아이젠하워집권시기인 1958년에 건설된 이래 한번도 개방한적이 없다는 이곳을 개방했을 때에야 적들도 최후대결을 해볼 심산이 아니겠는가. 분명 모종의 도발, 서로의 생사를 판가름하게 될 그러한 도화선에 불이 달린것이였다.

물론 최중권대장은 극비밀리에 진행되고있는 적들의 음모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하였다. 상급참모부의 통보도 없었다. 적들은 저들 모략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있는 모양이였다. 하지만 최중권장령은 느끼고있었다. 피부로, 육감으로 어떠한 도발이 있으리라는것을 느끼고있었다.

그는 38경비대시기부터 전쟁시기, 전후의 수십년간을 1211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선동부에서 군사복무를 해오고있었다. 100리전선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바위 하나도 그가 모르는것이 없었다. 강과 골짜기, 고지와 비탈, 갱도와 포진지, 화점과 철조망 등 방어시설물들을 그는 손금보듯 하고있었다. 그 모든것은 그의 육체의 한부분, 피부의 한쪼박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자기 전선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예견되는 징후에 대하여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빤히 알고 또 정확하게 느끼고있었다. 뿐아니라 그 모든 정황에 대하여 상급참모부의 지시가 없어도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에 의하여 능숙하게 처리할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있었다. 일찌기 38경비대시절에는 분대장, 전쟁시기에는 중대장, 그후 체계적으로 군단참모장까지 하였으며 1948년도 괴뢰청룡부대의 양양의 설악산도발사건과 1952년 아이젠하워의 《신공세》 등 크고작은 무수한 도발에 맞서온 그의 군사적능력은 거의 본능적인것이였다. 그에게 중요한것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수십년의 기나긴 세월 순간의 해이도 없이 군사임무를 수행해온 로병으로서의 성실성, 불굴의 의지와 완강한 기개가 중요한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바로 그 점을 귀중하게 보시였다. 그를 한 전선의 대련합부대 사령관으로 파견하면서 우리에게는 최중권동무와 같은 전쟁시기 1211고지에서 싸운 로병이 필요하다, 전선동부는 전적으로 믿는다고 하시였다. 그런데 그는 모두가 공인하고 최고사령관동지께서 평가하신 자기의 장점을 별로 크게 여기지 않았고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저 군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것을 갖추고있을뿐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렇지만 전선동부를 믿는다고 하신 최고사령관동지의 말씀만은 깊이 명심하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얼마전까지 락동강전투영웅인 김상오장령이 전선동부를 맡고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말밖에는 듣지 않던 충실한 동무였습니다. 그런 동무가 병으로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동무도 락동강전투에 참가하고 특히 1211고지에서 싸운 로병이 아닙니까. 난 전선동부를 믿겠습니다.》

김상오는 그의 선임자이며 병사시절의 상관이였다. 그는 락동강전투에 참가하여 영웅이 되였으며 1211고지방어전투에서도 영웅대대장으로 명성을 떨치였다. 호랑이와도 같은 싸움군으로서 모든 전투에서 패배를 모르는 승리자였다. 그후 련대, 사단, 군단을 지휘하면서 전쟁세대의 믿음직한 대표자로 되였다. 1211고지가 자리잡고있는 전선은 항일전쟁의 참가자인 최현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과도 련결되여있었다. 그는 김정일동지의 각별한 믿음과 사랑을 받아왔다.

최중권은 자기를 임명하면서 하신 최고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전쟁세대인 로병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였다.

전선동부, 전선의 길이만 해도 수백리, 작전구역도 수천평방키로메터, 거기에 비하면 신장 175센치메터의 자기의 몸은 몇만분의 하나도 되지 않았다. 그러한 자기가 수많은 전쟁영웅들의 이름으로 빛나고있는 방대한 전선을 지켜야 했다.

이 밤도 그는 야전지휘소에서 밝히고있었다. 아직은 아무런 정황도 없었다. 포대경이 설치된 감시창으로 푸름푸름 려명이 흘러들고있었다. 장령은 야전용의자에서 몸을 일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침 5시 10분전이였다. 그는 감시창으로 다가가 포대경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데다가 산골짜기마다 안개가 끼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선은 고요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새벽부터 벅적대던 적들의 확성기조차 잠잠하였다.

이 시각 다섯명의 우리 군인들이 1렬종대로 군사분계선표식물 제1250호 근방에서 정상적인 순찰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들은 소대장과 분대장, 두명의 상등병과 한명의 전사였다.

앞에서 걸어가던 분대장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리였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소대장이 앞에 대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오?》

《표식물이 없어졌습니다!》

《없어지다니?!》

소대장이 다급히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분대장의 말대로 군사분계선표식물 제1250호가 없어졌다는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두명의 상등병과 한명의 전사에게 선 자리에서 적을 감시하게 하고는 분대장과 함께 지뢰원을 주의하면서 없어진 표식물을 찾기 시작했다. 표식물은 없어진 위치에서 5메터가량 떨어진 우리측 지역에 들어와 번호를 써놓은 대밑까지 꽉 박혀있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표식물을 옮겨놓은것이 분명했다. 적들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비무장지대안에 들어와 이러한 엄청난 《장난》을 할 사람이 적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다섯명의 우리 군인들은 바싹 긴장했다. 그들은 메고있던 자동보총을 벗어들고 전투태세를 취하는 한편 사태의 진상을 하나하나 밝혀보기 시작했다. 표식물은 그들이 걸어가던 순찰로의 북쪽 5메터지점에 있었다. 그러니 그 표식물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순찰로는 적측 지역으로 되는것이다. 우리 군인들이 만일 본래의 순찰로를 따라 계속 전진한다면 적들의 지역을 《침범》 하는것으로 되며 표식물이 세워진 북쪽을 우회한다면 5메터의 우리의 땅을 양보한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전진이냐? 우회냐? 지키느냐? 내주느냐? 적들은 바로 우리 군인들의 의지와 결심을 시험해보려는것이였다. 사태의 진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하고 소대장은 마음속으로 뇌이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계속전진! 동무들, 날따랏!》

단호하고 지체없는 명령이였다. 소대장은 손에 무선전화기를 들고있었으나 상급에 전화를 걸어 자기의 결심을 문의할 사이도 없었다. 조국의 촌토가 순간이라도 짓밟히고있는 이상 문의고 뭐고 할것이 없는것이다.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순찰로를 따라 계속 전진해나갔다. 적의 총구가 자기들을 겨누고있으리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우리 군인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군인의 신념과 의지, 의무감만이 그들의 온몸을 활활 불태웠다.

훤히 밝은 덤불속에서 삐죽삐죽 내밀고있는 90미리 무반동포와 12. 7미리 대구경기관총 등 적의 총구가 눈에 띄웠다. 그러나 그들은 그너머에서 이 모략사건을 위해 괴뢰국방부 장관과 괴뢰합동참모본부 의장, 괴뢰륙해공군 참모총장 등 120명의 《전군주요지휘관》들이 다 모여있으며 괴뢰전방부대는 물론 해외에서 날아든 미제의 추격습격기편대들과 남조선강점 미공군, 괴뢰공군소속 800여대이상의 전투폭격기, 습격기. 관측기들이 투입되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지하백악관인 《마운트웨저》에서 미군총사령관 클린톤의 위임을 받은 강경보수세력 두목중의 하나인 합동참모본부 부의장 등 미군수뇌들이 각급 참모부들을 거쳐오는 보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군사분계선상에 떠있는 군사정찰위성을 통해 자기들의 일거일동을 직접 지켜보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다섯명의 우리 군인들은 계속 걸어가고있었다. 열병식을 하듯 보무당당히 조국의 성스런 촌토에 발자국을 찍어가고있었다. 드디여 적의 총포탄이 그들을 쓸어눕히기 시작했다.

불과 1~2분후에 전화보고가 들어왔다. 대련합부대 작전방향에서 직속상관인 작전부장이나 참모장을 거치지 않고 사령관인 최중권에게 직접 전해온 보고는 매우 갑작스럽고 무거운것이였다. 무겁다는것은 정황처리를 하기가 힘들다는것을 의미했다.

이 보고가 있기 방금전에 최중권은 총참모부의 통보를 받았다. 거기에는 분계선일대에서 모종의 도발사건이 예견된다는데 대해서와 그의 군사정치적배경에 대하여 상세히 지적되여있었다. 지어는 예견되는 도발사건에 대한 모의가 미극동군사령부가 있는 하와이나 워싱톤의 펜타곤이 아니라 《마운트웨저》에서 진행되고있는 사실까지 밝혀져있었다. 통보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문구로 끝나고있었다.

《우리가 〈고립〉과 〈봉쇄〉속에서도 안변청년발전소와 같은 사회주의적창조물을 일떠세운데서 공포와 전률을 느낀 적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의지를 다시금 시험해보려 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사회주의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것이며 우리 군대는 그것을 끝까지 지킬것이다. <경비함사건?과 관련한 우리의 보복의지가 그것을 보여주고있다. 각급 참모부들과 지휘관들은 적들의 그 어떠한 도발도 우리의 사회주의운명과 관련되여있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것이다.》

최중권에게는 모든것이 명백했다. 우리의 대응여하에 따라 놈들은 한개 전선에서뿐아니라 분계선상의 전지역에서 우리와의 전면전쟁도 불사하려 하고있었다. 적들이 저들 작전지역의 모든 곳에서 움직이고있으며 미군부의 최고수위들이 《마운트웨저》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있었다. 최중권은 자기의 명령 한마디에 따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를수 있다는것을 의식하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어떻게 … 그에게는 오래 생각할 시간적여유도 없었다.

전사들이 피를 흘리고있었다. 방금 받은 보고에 의하면 다섯명의 우리 군인들중 네명이 희생되고 전사 한명이 살아서 교전하고있었다. 그마저 잃을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조국의 촌토가 잠시라도 적들의 발밑에 짓밟히는것을 허용할수 없었다. 바로 우리 전사들이 그 조국을 위해서, 조국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를 지키기 위해서 군사분계선표식물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걸어나가지 않았던가. 그것이 우리 인민군대의 신념이고 의지이다!

최중권은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은채 짧은 한순간 최고사령관동지를 생각했다.

그이께서는 전선동부를 전적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단호한 결심이 섰다.

(어디 해보자!)

그는 도발을 걸어온 한정된 적이 아니라 그리고 수십년간 벼르고 별러온 자기 전선의 타격대상만이 아니라 미국땅덩어리 전체를 눈앞에 그려보며 아니, 그것을 한줌에 틀어쥐듯 송수화기를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그리고 두눈에 퍼런 불찌를 날리며 뢰성을 터쳤다.

《타격하시오! 백배, 천배로 보복하시오!》

최중권은 전화보고를 해온 일선사단장에게 이렇게 명령하고나서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손등으로 이마의 땀발을 문대며 등뒤에 주런이 서있는 장령들가운데서 한사람에게 갈린 목소리로 지시했다.

《통신부장동무, 총참모부를 찾으시오!》

자기의 정황처리에 대하여 보고하려는것이였다.

타격은 무자비하였다. 보복은 백배, 천배의것이였다. 각종 저격무기와 포들이 울부짖었다. 기상천외한 타격수단에 의하여 적의 콩크리트장벽이 종이장처럼 날아나고 화점과 반땅크차단물, 철조망들이 콩가루가 되였다. 적의 헌병초소는 물론 화선방송과 1선보병병실들이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 타격이 어찌나 불의적이고 맹렬하고 폭발적인것이였던지 군사위성을 통해 현장을 살펴보고있던 《마운트웨저》의 장성들은 입이 얼어붙어서 현지장성들에게 아무러한 지시도 떨굴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모든것은 끝나고말았다. 현장의 적병들이 서둘러 흰기를 들었으며 숨소리 하나 없이 침묵을 지키는것으로써 자기들의 항복을 인정하였기때문이다. 5분동안에 미합중국의 힘과 의지를 걸고 달려들었던 클린톤과 보브 돌 련합세력의 기도는 완전히 꺾어지고말았다.

고령의 최중권장령이 전선동부 대련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였을 때 미군과 남조선군의 모사진은 적지 않은 의혹을 품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있은 다음 그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탄복하였다.

(김정일최고사령관이 부하를 쓰는걸 보면 과시 명장은 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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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의 력사가들은 20세기 마지막년대들에 우리 인민이 진행한 《고난의 행군》을 진두에서 이끄신 김정일동지의 위훈에 대하여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것을 알게 될것이다. 오늘의 신문, 방송들은 그이께서 진행하신 회의와 담화, 현지시찰을 실지보다 적게 보도했기때문이였다. 현재로서는 많은것이 비밀이였다. 지면과 파장에 실린것보다 리면이 더 많았으며 거기에 더 중요한 본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것이 비밀로 되지 않을 때 력사가들은 그토록 간고했던 고난의 년대들에 그이께서 보여주신 무비의 담력과 의지, 천재적인 전략과 전술,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일관된 빛나는 위훈을 사실대로 알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아는것이 전부였다. 그 고난의 년대들에 엮어진 위훈의 리면사에 대하여 아는것보다 모르는것이 더 많았다.

현재 나돌고있는 《쪽잠》이라든가 《줴기밥》에 대한 혁명일화가 어느 정도 그 진면모를 가늠해볼수 있게 했지만 그것으로써는 부족했다.

그때 당시에 이런 시가 창작되였다.

 

            지금은 어데 계실가

            그 어느 북변마을의 동구밖

            밭이랑의 찬눈을 헤집고

            파아란 밀보리를 보살피지 않는지

            천리 먼 전연초소

            병사들의 온실을

            돌아보고계시지나 않는지

 

            자신의 집을 떠나

            풍찬로숙하신 우리 어버이

            인민을 찾고찾으시여

            온 한해 인민의 집에 계신

            아 우리의 김정일동지

 

            예로부터 하루라도 집떠나면

            고생이라 했더라

            한걸음 제 집뜨락을 나서면

            봄바람도 차다 했더라

 

            허나 하루도 한달도 아닌

            긴긴 해와 달

            자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건만

            가고가시는 전선길우에는

            계절이 따로 없었으니

            우리 장군님 고생중의 고생을

            어이 다 헤아리랴

            …

 

시인의 풍부한 환상력이 김정일동지의 위훈의 세계에로 어느정도 육박했다고 할수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의 세계, 사랑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희생의 세계였다. 《쪽잠》과 《줴기밥》, 《불돌》에 대한 일화도 그래서 생겨난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인의 환상력으로써도 미치지 못한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이께서 생명의 위험이 뒤따르는 사선을 넘나드신 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해에 있은 최전연고지들에 대한 시찰은 적의 저격무기의 사격권내에서 진행되였다. 이것은 현지에서 그이를 맞이했던 장령들과 전사들이 손에 땀을 쥐였던 일로서 더러 일부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4일에 진행된 판문점시찰은 안개라는 《보호신》에 의해서 무사했다는 신비로운 이야기로만 전해졌을뿐 그 놀랄만한 리면에 대해서는 알려진것이 거의 없었다. 김정일동지의 판문점시찰은 안변땅에서의 위대한 선포에 이어 《고난의 행군》의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한몸을 내대이신 일대 거사였다.

이 시찰은 분계선상에서의 충돌이 있은 직후에 있었다.

최중권장령으로부터 된타격을 받은 적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들은 안변의 선포가 결코 허장성세이거나 정치적제스츄어가 아니라 조선을 떠받들고있는 제일기둥인 인민군대의 실질적인 의지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조선의 《종말》에 대한 시간표까지 짜놓고있던 적들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인민군이 진실로 강력한가? 그렇다. 강력하다는것을 검증할수 있는 사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바다에서 좌초된 인민군군인들의 집단적인 자폭만도 그렇다.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산다는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어린 철부지들이 아니였다. 그들이 자폭한 위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그들의 가정과 생활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 모든것을 버리였다. 그러니 인민군군인들속에 폭발적으로 일고있는 자폭정신, 육탄정신을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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