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7

 

언제부터 한번 다녀온다 별러온 송도길을 떠나자고 결심한 백씨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운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발목을 붙잡는것 같은 예감까지 들었다.

엊저녁 도원국을 꾸짖어보낸 뒤부터 속이 편안하지 못했다. 아무리 밉살스러운 사람이래도 제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저녁 한끼라도 대접해보내는것이 옳은 처사였다. 찾아온 사람에게 왜 왔느냐 한마디 묻지조차 않았으니 행실머리 바른 년이 못되고 치마두른 내인이란게 하두 딱해서 찾아든 외간사내를 대바람에 쫓아내듯 했으니 이게 무례한짓이 아니고 뭔가. 그래서 과부년이라는 말이 나왔을테지, 드살이 센 과부년… 백씨는 자못 후회되였다.

어찌되여 그 사내만 마주하면 얄밉다는 생각부터 앞세우게 되는걸가. 이젠 나한테 빚을 지고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해되는 일을 크게 한것도 없지 않은가. 도매점에 잠상품을 좀 들이밀었기로서니 그쯤 여겨도 될 일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걸 받아준 송월이한테 있고 송월이 허물이자 내 잘못이 아닌가.

사람은 한저울에 올려놓지 못한다. 세상에 저같은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 제 모양, 제 생각, 제 성미를 가지고 내키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큰집이 지금의 인간세상이 아닌가.

백씨로서는 한편 자기 마음을 붙드는 도원국이 이상하게도 생각됐다. 수십년의 행상길은 한푼이라도 놓칠가봐 이악을 부리는 실랑이질로 이어져있었다. 마주선 사람이 사내든 내인이든 상관이 없었다. 장사판에 늘쌍 있던 일 같은것이였는데 의주잠상사이에 오간 언짢은 말 몇마디가 마음에 걸리니 별난 일이다.

《나리야, 차비를 다했냐?》

《예, 다돼갑니다.》

이번 길엔 나리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세상구경도 시키고 장사물계도 제 눈으로 보며 배우게 하자고 해서였다.

웃방에서는 송월이가 말없이 나리와 함께 길 떠날 준비를 갖춰주고있다.

백씨는 송월에게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 갔다와서는 불러앉히고 단단히 오금을 박아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물건을 점포나 가게들에 넘길 때 정해준 값이상은 받으면 안된다, 어미승인 없이는 색다른 물건을 끌어들이거나 팔아서도 안된다, … 알아들으리만큼 말해줬는데도 앙큼한 년이 제 밸 내키는대로 하지 말라는짓은 다했다. 설마 저애가 제 주머니를 따로 두고 돈을 채울가. 그것만은 믿어지지 않는다.

요즘은 정주놋그릇이 이름이 나서 잘 팔린다. 옛날량반들이 많이 사는 송도니 놋그릇개비들을 찾을수 있다고 생각한 백씨는 좋은것들로 준비했다.

《어머니, 다됐어요.》

봄철 새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나리가 팔랑거리며 말했다.

《오냐, 떠나보자.》

백씨가 나리와 함께 가지고 갈 짐을 지게에 진 경림이가 마당에서 기다린다.

《어머니, 저 무거운 짐을 꼭 지고가셔야 해요?》

송월이가 걱정해주는 말에 백씨가 돌아보았다. 윤기돌던 얼굴이 왜 저리 꺼칠해졌는가. 뒤가 켕기는 일을 했으니 그럴수밖에…

《송월아, 넌 나오지 말아. 내 이번 걸음을 하고 와서 너하구 좀 할 말이 있다.》

뚝뚝하게 꾹 눌러놓는 백씨의 말에 송월은 고개를 푹 수그리였다.

《나리야, 우린 가자.》 하는 쌀쌀한 목소리를 들으며 송월의 볼로는 두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루배가 강건너쪽에서 오고있다. 강을 건너야 황주쪽으로 길을 잡아 송도에 갈수 있다.

《경림아, 짐을 내려놓으려무나.》

말수더구가 적은 경림은 시키는대로 지게를 벗어놓고 지게다리를 뻗친 다음 백씨의 얼굴을 주저주저하며 바라봤다.

《어머니…》

《왜?》

《저…》

《말하려무나. 낑낑 갑자르면서…》

《저… 그…》

경림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던 백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니? 말을 해야 알지.》

《그 사람이… 어제 밤에 또 왔댔답니다.》

《어느 사람?》

《의주… 의주에서 산다는 사람말입니다.》

《우리 도매점에?》

《예,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길 떠나는 어머니에게 차마 자기는 말 못하시겠다면서 내게…》

《송월일 만났겠지.》

《사람이 꼭 미친것 같이 보이더랍니다. 송월이한테 몇마디밖에 안하고는 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가버렸답니다.》

백씨는 속으로 웃어넘겼다. 바빠맞았겠지. 송월이하구 짜고 잠상물건 몰래 팔아먹은것을 제 입으로 게웠으니 급해서 알려주느라고 그랬을게다. 송월이년 얼굴이 컴컴해진것도 그 일때문일게구. 한매 톡톡히 맞았으니 둘 다 정신이 들겠지.

백씨는 별일 아닌것으로 여기며 말했다.

《경림인 내 없는 사이 도매점을 잘 지켜야 한다. 덕동이가 자기를 실어오면 창고에 넣어두거라. 내 올 때까지 팔지 말구.》

《네.》

《어머니, 배가 왔어요. 빨리…》

나리는 처음 먼길을 가는게 너무 좋아서 두손을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오냐, 간다.》

경림이가 배에 짐을 올려주고나서 백씨에게 말했다.

《어머니, 전… 어머니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가봐 걱정입니다.》

《일은 무슨 일… 너무 근심말구 어서 들어가봐라.》

나루터에 선 경림이가 나리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나리야… 어머니를 잘 모시고 갔다와야 해.》

《오빠, 걱정말아요.》

나루배가 강대안에 닿았는데도 경림은 한자리에 서있었다.

백씨와 나리는 짐을 나누어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송도 자하동은 개경8경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송악산골짜기로 따라들어가느라면 마을 웃쪽 푸른 절벽우에 솟은듯 한 안화사가 바라보인다. 아침저녁 골짜기에서 피여오르는 안개발은 해빛을 받아 비단필을 펼치며 송악산을 감돌아 푸른 하늘과 다리를 놓는다.

자하동에 이른 백씨는 의원 오생원의 집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여서 생원부부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둘 다 녀인이라 방 한칸을 내주었다.

《백씨를 본지도 퍼그나 오랬네.》

오생원은 약초를 썰며 말했다.

《3년전에 두번 오고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게 됐겠군. 그새 왜 송도엔 꿈쩍 안했나?》

《평양 륙로리에 자그마한 도매점을 차렸습니다. 여기저기 돌아치다나니…》

《허허, 벌이가 잘된 모양이군. 하기야 무슨 일인들 안하며 고생인들 오죽하나.》

백씨의 곁에 붙어앉은 나리가 입을 나불거렸다.

《우리 어머닌 걷는게 아니라 펄펄 납니다. 난 겨우 따라왔는데…》

《원, 입이 빠르기란…》

백씨가 나리의 머리를 쓸며 혀를 차자 오생원이 물었다.

《이 처년 누군가? 참 곱게 생겼네.》

《내가 수양딸로 삼았는데 배운게 없다보니 변변히 가르치지 못해서 이렇게 어른들 말짬에까지 끼여듭니다.》

《뭐라나, 근면한 수양어머니를 닮기만 하면 되는거지.》

백씨는 오생원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그의 이번 걸음은 장사줄을 마련하자기보다 진주의 다리를 고쳐줄 비방이 없을가 해서였다.

《다섯살때 다치고 스무살을 넘겼다니 너무 기른 병이여서 내 침대만으로는 안되겠네.》

머리를 흔들던 오생원이 장문을 열고 의서들을 꺼내여 뒤적이면서 물었다.

《걷기는 한단 말인가?》

《예, 살룩거리기는 하지만…》

《기맥이 잘 통하지 않아 그리됐구만. 일찌기 손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건데…》

《낫겠거니 하구 의원에게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여하튼 하루이틀 묵겠다니 내 그새 약방문을 만들어주겠네.》

《고맙습니다.》

백씨는 날 밝기 전에 일어나는것이 습관이 되여 나리가 깨여날세라 조용히 자리를 거두고 밖으로 나왔다.

송악산의 청신한 솔숲이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밤도와 울어댄 접동새의 간단없는 흐느낌이 산중에서 울려나온다.

백씨는 어두운 속에서도 비자루를 찾아들고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오생원의 집은 자하동골짜기 막바지에 자리잡고있었다. 송악산 안화사와 이웃한셈이였다.

《왜 이리 일찍… 놔두게. 손님을 마당 쓸게 해서야 되겠나.》

오생원이 어느새 뒤따라나와 비자루를 빼앗았다.

《전, 한뉘 이렇게 사는게 버릇이 돼서…》

《차라리 잘됐네. 안화사의 아침례경소리를 듣게 되였으니…》

그 말이 끝나자 새벽안개속으로 목탁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세번, 짧게 세번 울리더니 동일한 간격으로 계속된다.

《지전이 승려들에게 깨여나라고 알리는 소리네. 지전은 의식을 맡아보는 승려인데… 진언을 읊는 소리가 들리는군. 이때쯤엔 다른 법당의 승려들도 세면을 하고 가사를 입은 다음 향과 초불 같은것을 갖추어놓고 아침례경 준비를 한다네.》

백씨는 자기가 딴세상에서 사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오생원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잘 알수 없는데다 산중에서 념불 외우는 소리가 더욱 신비스러웠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저건 정구업진언이네.》

념불이 세번 반복될 때마다 경쇠소리가 울린다. 진언이 엇갈리며 몇번 계속되다 들어도 알수 없는 불교세계 석가의 말이 담긴 념불소리가 한층높이 울린다.

《나모라다나 다라 야아 나말알략 바로기제 세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 나라야…》

백씨는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알지도 못할 념불소리에 저도 모르게 기가 막혀 말을 했다.

《저리도 긴걸 하루종일 외우다니, 일은 안하구.》

《백씨도 수도를 해보지 않으려나?》

《아이구, 말씀마십시오. 난 싫습니다.》

《저렇게 가부좌를 하고 념불을 하느라면 열반에 들어서는데 그것이 일체 욕망을 버린 해탈이라는걸세. 사람이란 먹어야만 살수 있는게 아니여서 마음과 정신이 의지할데를 찾아 그러는걸세.》

오생원은 자못 정중하게 말했다.

《생원님도 시주를 하십니까?》

《하네. 안화사 주지는 고명한 의생이라 친분이 있다나니…》

《주지님두 참, 그 좋은 의술을 가지고 속세에 나와 사람들 병 고쳐주면 고맙다는 인사래두 받을텐데…》

백씨의 절벽같은 생각에 오생원은 어이없는지 웃기만 했다.

자하동골안이 밝아오면서 수려한 산발들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생원님, 송도에 제약소가 나와 좋은 약들을 지어낸다던데 그게 어디바루쯤 있습니까?》

《백씨는 그 일도 겸해서 왔구만. 내가 차린 제약솔세. 자그마한…》

백씨는 업은 애를 찾은셈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리내여 웃었다.

《원, 생원님두. 말씀이라도 하실게지…》

《어떤 약들이 필요한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약이면 됩니다.》

《그럼 나하구 아침이나 먹구나서 우리가 차린 제약소에 가보세. 초라하지만…》

오생원이 차린 제약소는 삼간짜리 기와집이였다. 송도에 흔한 청기와 올린 집의 마당에 들어서니 초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약제조는 전부 손으로 하는 로동이라 갖가지 약재들을 배합하는 방에만 신식저울이 몇개 놓여있을뿐이였다.

《여기서 약을 가루로 만들기도 하고 알약으로 빚기도 하며 탕을 해서 작은 단지에 넣어 밀봉도 한다네.》

《잘 팔립니까?》

사고파는게 업이라 백씨는 그것부터 물었다.

《시작치고는 그만하면 괜찮네.》

오생원은 알약으로 빚은 약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체증을 떼는데 쓰는 령신알약이고 기침을 멎게 하고 가래를 삭이는데 좋은 오미자알약, 각종 약재를 섞어서 만든 보약들일세. 몸보신에 특효가 있어 사가는 사람이 많지.》

백씨는 값이 눅은 약들과 함께 제 눈에도 좋아보이는 보약을 골라냈다.

《이번에는 마수걸이를 하고 다음에는 수레로 실어나를테니 그때는 달라는대로 줘야 합니다.》

《그러세.》

제약소를 나선 백씨와 오생원이 《송도3절》로 불리우는 황진이의 전설이 깃든 마을앞을 지날 때였다.

돌다리를 건느며 개울물을 내려다보던 백씨는 문득 일개 기생으로 이름을 남긴 황진이를 생각했다. 그도 기생이였으니 인생고초를 겪었으리라. 량반사대부들의 노리개였을것은 뻔하다. 노래와 춤을 팔며 산 황진이가 세상이 전하는 녀자로 되였으니 놀랍기만 하다.

세상풍문에는 거짓말도 많이 섞여있는가보다. 황진이의 어머니인 진현금이 이 개울가에서 만난 신령소년과 하루밤을 즐기고 딸을 보았다니 황당한 소리다. 신령의 딸인 황진이도 기생팔자를 면하지 못했다니 누군들 곧이들으랴.

《무엇을 생각하나?》

오생원의 물음에 백씨는 생각한 그대로 물었다.

《황진이라는 기생이 그리도 대단했습니까?》

《이를데없지. 후손들에게 오래오래 전해질거네. 그의 문장은 당대 명사들을 놀래웠고 으뜸가는 명창에 기상 또한 도도해서 한다하는 량반들도 감히 내려다보지 못했다네.》

《비천한 기생의 글재주가 뛰여났다니 믿기 어려워 그럽니다.》

《그의 시문장이 남아있다네.》

백씨는 글을 모르는지라 고개가 숙어졌다. 녀자의 몸으로 그리도 당당했다면 참으로 장하다. 녀자라고 나서부터 구박속에 산 나다. 지금도 등뒤에서 백과부라고 손가락질들을 할 때면 나에겐 왜 이름조차 없나 하고 통탄하군 한다.

송도에 사흘동안 머무르며 진주의 약을 마련한 백씨는 길 떠날 차비를 했다.

《그 약을 반년가량 장복하면 기와 혈이 통하여 다리힘이 생길거네. 그다음 처방은 와서 가져가게.》

《고맙습니다, 생원님.》

오생원은 다 꾸린 백씨의 짐을 보고 놀랐다.

《이 요란한걸 이고 지고 평양까지 가려나?》

《그러문요. 이쯤한거야 뭐겠나요. 약들이 태반이여서 무겁지 않습니다.》

《백씨는 평생 짐에 눌려사는가보이.》

오생원의 걱정스레 하는 말이였다.

《팔자도망은 못한다지 않나요. 그저 제 육신 놀려서 사니 세상 대하기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짐을 이고 진 백씨와 나리를 오생원은 멀리까지 따라나와서 바래주었다.

대동강나루터에 석양이 비꼈다. 선창에 짐을 다 부리워 거뿐해진 돛배들이 물결장단에 맞춰 흥떡인다. 저녁노을빛속에서 강물우에 실실이 드리운 버드나무가지들이 다홍치마자락이 되여 활짝 펼쳐지는가 하면 연분홍빛 고운 부채를 펴들고 슬렁슬렁 바람도 일구고 초록색댕기인양 하늘하늘 춤추다 청비단필을 늘어뜨리기도 한다.

송월은 나루터주변의 바위우에 쪼그리고 앉아 석양빛을 타고 재롱을 부리는 버들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요 며칠동안 저녁무렵이면 도매점문을 닫고 지금같이 강기슭에 나오는 그다.

어머니를 기다리는가. … 이번 길에 돌아와서 할 말이 있다고 칼끝같은 말을 던지고 간 어머니… 내쫓기여도 할 말 없는 몸이 어머니를 기다린단 말인가. 아니면 낳아준 어머니의 수중고혼이 불러서 나왔는가. 불행한 운명을 준 그 어머니뒤를 따르지는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내가 아닌가. 기다려서도 불러서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그린듯이 나와앉아있는건지 알수 없는 마음이다.

마음속을 휩쓰는것은 가슴아픈 후회이지만 용서를 받아줄 품은 없었다. 제일 불안하게 생각되는것은 도원국이다. 제가 어머니를 꼬여 서울량반에게 꾸어주게 한 빚문서가 과연 어디에 소용되기에 정신없이 묻고 사라졌는가. 아비벌 되는 그 사람의 간계로 잠상물건을 받았고 쥐여주는 돈에 눈이 어두워 내가 은인을, 어머니를 배신했다.

《송월아, 넌 나오지 말아. 내 이번 걸음을 하고나서 너하구 좀 할 말이 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귀전을 때리자 송월은 무릎우에 고개를 박으며 어깨를 세차게 떨었다.

《게 송월이 아니냐?》

누군가의 부름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던 송월은 한손으로 다급히 입을 막았다. 석양을 등진 도원국이 누런 이발을 가득 드러내고 웃고있는게 아닌가. 곱사등이같이 잔뜩 구부리고 서있는 모습이 도무지 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를 찾아 예까지 왔다.》

《나를요? … 무슨 일로? …》

두어깨를 옹송그린 송월은 가냘프게 떨어댔다.

《하하하, 하하하.》

두눈을 흡뜬 도원국은 수만장졸을 거느린 장수런듯 우쭐하여 턱을 제끼고 너털웃음을 치더니 송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기다리는 그 에미는 죽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나요?!》

《죽게 될게다.》

겁이 더럭 난 송월은 정신없이 되물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어떻게 된다구요?》

《헤헤헤, 감영에서 기다린다! 대역죄로 목을 치자고 칼을 갈며 기다린다는데…》

송월은 비명같은 소리를 내며 허둥거렸다.

《무슨… 무슨 죄를 졌다고… 우리 어머니가…》

《네 어민 개화당에 돈을 대줬다. 빚문서가 그걸 말해주지. 헤헤헤, 내가 감영에 오늘 고해바쳤다. 괘씸한 과부년! 양점이녀석과 함께 콱 뒈져라! 아하하.》

앙심을 품은 도원국이가 허튼수작을 하는게 아니라는걸 깨달은 송월은 정신이 아뜩해났다. 문서가 어머니의 장농안에 있다는걸 루설한게 자기였다. 송월은 온몸을 그냥 덜덜 떨어댔다. 장명학과 그의 아버지가 개화파로 몰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는걸 눈뜨고 봐서 아는 그였다.

이제 어머니가 감영에 끌려가면 누가 도와나서겠는가. 아, 내가 눈이 멀었댔구나! 이따위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 속히워 은인을 물어먹는짓을 했으니 벼락맞아 죽어싼 큰죄를 졌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눈물만 솟구쳐 흘러내렸다.

《송월아, 내 말을 듣거라. 오늘 밤중으로 자취를 감춰라. 그냥 있다간 무사치 못할게다. 내 이미 감영의 어른과 약조가 있었으니 백과부년을 잡아메친 다음 우리 둘이 도매점을 타고앉자꾸나. 백씨가 개화당과 연줄을 가진걸 밝혀내기만 하면 우리한테 주겠다고 했다.》

혼이 빠져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송월은 도가의 뻔뻔스러운 수작에 펀뜻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차며 일어섰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펄펄 날렸다. 송월은 이글이글 불이 일어번지는 눈으로 도원국을 노려보며 소름이 오싹하리만치 매몰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씹어말했다.

《내가 바보고 악한 년이였어요. 당신은 개,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예요! … 외사촌동생을 찾는다구 했지요? 장연에서 온 그 동생은 리문리려인숙에서 주인놈에게 겁탈당하고 죽었어요. … 서슬을 먹고… 순애는 그렇게 죽었어요! …》

백씨를 송사하여 죽게 만들었다고 기광이 뻗쳐 좋아라 지껄여대던 도원국의 얼굴이 순간에 시퍼렇게 얼어들었다.

《그, 그게 사실이냐?!》

《…》

송월은 순애의 죽음이 이 순간 어떻게 떠올랐는지 알수 없었다. 너절하고 악귀같은 이놈에게 어떤 고통이든 안겨주자고 독이 올라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 그 주인놈이 어데 있냐? … 술집이 됐던데 아직… 게 있느냐?》

《뒈졌어요.》

《어떻게? …》

《어머닌 그 일을 알고 치를 떨었어요. 돈을 써서 려인숙을 망하게 했죠. 숱한 빚을 졌던 그놈은 도망치다 저희네 놈팽이들에게 맞아죽구…》

《뭐라구?! …》

도원국은 간신히 온몸을 지탱하고 얼나간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제 동생을 죽인 그놈과 뭐가 달라요? 하늘같은 은혜두 모르구 은인을 죽을 고비에 처넣었으니 사람탈을 쓴 짐승이 아니구 뭐예요? 이년도 같구요! …》

두손을 허공에 쳐든 도원국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내가 짐승이 옳다. … 난 개보다 못한 놈이다. …》

그 울부짖음을 들으며 송월은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우에 올라섰다. 치마자락을 올려쓰던 그는 송월아, 죽어선 안된다. 너를 품어준 고마운 어머니를 구해내야 한다. 불쌍하게 죽은 이 어미의 한은 또 누가 풀어준단 말이냐 하는 친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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